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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01시 02분 등록

백범일지_구달리뷰#21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돌베개

 

1.저자에 대하여

 

김 구 (金九 1876~1949)

 

백범이 출생한 1876년은 우리나라가 일본과 개항을 하게 된 병자수호 조약이 체결된 해였다. 그의 유년 시절은 조미 수호조약이 조인되고, 대원군의 집권이 시작되었으며, 일본에 신사유람단이 파견되는 등 개화의 움직임과 보수적 압력이 서로 교차되는 격동기였다.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에서 극빈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서당 교육을 받다가 1893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팔봉 접주로 임명된다.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고, 동학농민운동 후 황해도 안태훈의 집에 머물며 유학자 고능선에게 유학을 배우다 만주 지역을 순회 한 후 의병활동에 가담한다.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를 처단한 후 체포되어 인천 감리서에 투옥된다. 옥중에서 독서로 개화사상을 배웠으며 탈옥 후 승려가 되었다. 1899년 환속한 후에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운동에 노력한다. 1907년 국권회복 운동의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 1911년 안악 사건, 105인 사건으로 수감된다. 1915년 출옥한 후 동산평 농장의 온감생활을 하며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한다.

 

1919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일으키게 해 국내외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사건으로 백범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피신생활을 하면서, 한인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한다. 1940년 중경에 정착 후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며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고, 연합국에게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다.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자주 민족의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 소위원회의 결의에 반대한 후, 남북한의 하나 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을 제의하여 평양에서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한다. 1949 6 26일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여 지금의 효창공원에 안치되었다.

 

* 백범선생에 대한 나의 느낌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바친 백범 김구 선생은 당시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백범선생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 평화통일을 위해 온 몸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그가 겨레의 큰 스승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체력과 정신력이었다. 사위를 둘러보아도 절망뿐인 환경에서 조국독립이란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죽음도 불사했다. 8번 까무러치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굳굳이 살아 남았다. 참으로 위대한 인간이다.

 

비록 살얼음판 같은 사선을 밟고 살았지만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첫째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둘째 그것을 이룰만한 배짱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의 큰 뜻이었다.“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그가 호를 백범(백범)으로 정한 것은 ‘백정’,‘범부’라도 애국심이 다 자기와 같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더구나 책 이름을 ‘백범일지白凡逸志’라고 한 것도 ‘세속을 벗어난 희망’이라는, 세상의 영욕에서 벗어나고자 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어느 경우든 개인의 이익이나 주장보다 큰 뜻에 따르고자 했다. 그래서 일을 해 나가는 동안 개인적인 억울함과 손해를 많이 보아도 목표에 어긋남이 없으면 신경쓰지 않았다. 위기에 당면하여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한 사람의 평가가 좌우된다. 숱한 모략과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통사람이라면 불가능해 보이는 절망의 길을 걸어갔다. 오로지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는 강한 목표가 있을 때그런 의연함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평범했던 백범이 비범하게 성장해가는 과정 또한 그가 지닌 큰 뜻(비전)의 힘으로 느껴졌다백범의 민주주의 실천의지나 문화국가 창달론, 자주적 독립국가와 통일국가론은 당시는 물론 아직도 우리들에게 무엇이 소중하고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와 문화가 꽃피는 “아름다운 나라”를 갈망했다. 나는 과연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이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둘째, 배움과 교육에 대한 열정, 그리고 실천

백범 김구는 철이 들고 세상을 알기 시작하면서 불평등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를 자신을 파괴하는데 사용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단련하는 계기로 삼아 배움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청소년기에 읽은 동양의 유명한 책들은 김구가 선택의 길에서 갈등할 때마다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배움에 목마른 이였다. 빨리 서당에 가고 싶어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떠졌고 서당이 이웃 동네로 옮겨간 뒤에도 제일 먼저 등교하는 아이였다. 또한 감옥도 소중한 학교였다. 인천감옥의 직원이 권해 준 신서적을 읽고, 자신이 우물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외사상으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어나야 하고 변해야 하고, 알아야 한다는 충격을 받았다. 배우려는 자라면 누구라도 학생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함께 옥에 갇혀있던 도둑, 강도, 사기꾼, 살인범에게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배움에 목말랐지만, 또한 배움을 실천하면서 배우는 사람이었다.

 

백범은 한국근현대정치사, 격동의 현장에 있었다. 민족에게 희망을 주면서 자신을 민족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바쳤다. 그는 우리 민족과 민족사에 대해 깊은 신뢰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가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세상의 제일이 되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사랑할 수 있도록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였다. 또한 자유를 삶의 근본으로 삼되, ‘꽃을 꺽는 자유가 아니라 꽃을 심는 자유’를 추구하라고 하였으며,‘짐승과 같이 저마다 자기 배를 채우는 자유가 아니요. 제 이웃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임을 강조했다.

 

참고서적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인생의 행복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한 가지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김구 그는 어찌보면 행복한 사람이었다.." 개인의 행복이 강조되는 2010, 현재에 그의 원칙중심, 정도를 걸어가는 삶과 철학은 더욱 희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분명한 목표를 지녔던 그는 행복의 첫 번째 구성요소는 있었지만, 암울한 조국의 상황에서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치는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포병 소위 안두희의 암살에 생을 마감하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허리가 끊어진 조국을 볼 수 없다며,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상가!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던 위대한 혁명가! 끊임없이 배우며 배움을 실천하고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교육자 백범선생! 부디, 그 과정의 고난을 즐거움으로 생각했었기를, 그리하여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행복한 한 사나이로 삶을 마감했기를.

 

2. 내가 저자라면

 

백범선생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풍운아의 일생이었다. 범인이라면 수십번도 더 죽었을 위험천만한 사선을 그의 정신력과 체력과 배짱으로 돌파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의 어머니 조차 자네의 생명은 천우신조가 지키고 있다는 걸 내가 안다고 했을까. 하늘이 도와준 측면도 있지만 그의 평생의 모토인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은 그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평생 자신의 철학을 소신 있게 지켜나가며 철저하게 주도적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려 힘썼다.

 

그리고 평생 떠도는 방랑자의 일생을 살았다. 그것도 백 명이 넘는 임정의 대식구를 거느리고 중국 전 국토를 주유하면서도 목표를 잃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안식할 줄 아는 탁월한 영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구한말에서 일제 식민지를 거쳐 해방이 되기까지 백범 김구는 오직‘민족독립’을 위한 외길을 꿋꿋하게 걸어왔다. 선생의 일생은 1870년대~1940년대를 넓게 아우르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는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다.

 

[백범일지]를 쓴 목적은 그의 두 아들 인과 신에게 아버지의 행적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단신으로 상해에 건너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들이 아버지의 행적을 알 길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 자서전을 남긴 것이다. 다행히 해방을 맞을 때까지 목숨을 잃지 않고 귀국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의 주석이 남긴 글인 만큼 자식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읽혀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로 백범이 살아있을 때인 1947년 국사원을 통해 초간본이 빛을 보게 되었다. [백범일지]의 상권은 1928 3월경부터 쓰기 시작하여 1929 5 3일에 탈고하였고, 하권은 1942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임정청사에서 집필되었다. 여기에 8.15 해방 뒤 귀국하여 쓴 유명한 ‘나의 소원’이 덧붙여져 나온 것이다. 

자서전은 형식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중요하다면, 자서전에 실린 그의 사상과 철학이 형식을 통해 잘 표현되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백범 김구는 자신의 호의 유래에 대해“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願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호에 이르기까지 ‘자주독립’을 염원한 이 독립 투사의 한없는 애국심을 ‘범인의 자서전’이라고 스스로 명한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자서전에 드러난 그의 삶은 범인의 삶이 아니었다. 민족적인 운명과 개인적인 운명을 분리시키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한 인간으로서, 한 남자로서 이런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범인의 삶일까? 그의 자서전은 그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그의 사상과 철학이 드러난 어록을 별도로 정리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백범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명성에 걸맞는 철학과 사상의 깊은 내면을 지녔다. [백범일지]와 각종 연설문, 성명서와 어록을 보면 그가 일제에 온 몸으로 맞선 행동주의 혁명가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백범김구 평전]을 쓴 김삼웅 교수는, 백범의 세계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정도론 正道論’이라 한다. 그는 사도邪道를 배격하고 정도를 택한다. 그가 맞은 시대는 고단한 격동의 연속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평탄한 길도 있었고, 안일한 길도 있었다. 현실 노선도 있었고 비현실 노선도 있었다. 타협노선도 있었고 원칙 노선도 있었다. 그때마다 백범은 망설이지 않고 정도를 택하고 그 길을 걸었다. 그 길이 비록 비현실적이고 고난의 길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백범은 환국 후 통일정부 수립 불가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하는 것이다. 외국의 간섭이 없고 분열이 없는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민족의 지상명령이니, 이 지상명령에 순종할 따름이다. 우리가 망명생활을 30여 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명령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이다.

 

눈 덮인 벌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예나 지금이나 ‘현실론’은 많은 사람들을 기회주의자로 만들게 한다. 그런 면에서 백범의 길은 원칙주의 노선이었다. 핍박과 멸시를 받은 상민 출신이 나라 사랑의 일념으로 왜놈을 죽이고, 감옥에 갇히고, 탈출하고, 망명하여 적과 싸웠다. 치밀한 현실주의자, 영리한 기회주의자들이 분단정권을 만들 때에, 그는 외롭게 통일 정부수립을 추진하다가 총에 맞아 서거했다. 뒷 사람을 위해서는 눈길도 함부로 걷지 않는 ‘정도의 길’그것이 백범의 길이고 사상이었다.

 

* 가장 감동적인 구절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가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백범출간사

 

14.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백범일지 상권 

 

24. 어머님께서는 ‘푸른 밤송이에서 크고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 둔 것’이 나의 태몽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27. 아버님은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면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관계 없이 참지 못하는 불 같은 성격이셨다. 이로 인해서 인근 상놈들은 다 아버님을 경외하고 양반들은 피하였다.

 

31. 나는 새벽 일찍 일어나 누구보다 먼저 선생님 방에 가서 글을 배우고, 밥구럭을 메고 멀리서 오는 동무들을 내가 가르쳐 주었다.

 

38.“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하여 강가. 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 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 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39.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이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상 좋은 사람[好相人] 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42. 나는 동학에 입도할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51. “군이 나이 어리지만 대담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터이지만, 군이 만일 청계를 침범하다가 패멸당하게 되면 인재가 아깝다“

 

62.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말고 끊임없이 고치고 나아가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네. 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3.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78. 통탄할 바, 저 왜적은 나와 함께 같은 세상을 살 수 없는 원수이다.

 

86. “아드님이 못생겼다고 그다지 근심은 마시오. 내가 보건대 창수는 범상입디다. 인중이 짦은 것이라든지 이마가 두툼한 것이라든지 걸음걸이라든지, 장래 두고 보시오. 범의 냄새도 풍기고 범의 소리도 질러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할는지 알겠소?

 

93. 먼저 주위 환경과 나의 역량을 살펴보았다. ‘나는 혼잣몸에 빈손이 아닌가? 섣불리 손을 썼다가 내 목숨만 저놈의 칼아래 끊어 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내 의지와 목적은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하고, 도리어 도적놈의 시체 하나만 남기고 죽고 말 것이다.

 

94.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조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은 아닌가?

 

104.“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가서 죽는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식이 국가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치게 정성을 다하여 원수를 죽였으니, 하늘이 도우실 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109.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7. 어느날 신문을 보니 나의 사건을 간략히 게재하고, 김창수가 들어간 후로는 인천감옥이 감옥이 아니라 학교라고 쓴 기사를 보았다.

 

119. 이윽고 교수대로 끌려나갈 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성현의 말씀에 마음을 가라앉혔다가 성현과 동행할 생각으로 [대학]만 읽고 앉아 있었다.

 

128. 나를 무한정 놓아주지 않는데도 옥에서  죽는 것이 옮은가? 그른가?

 

137.“남의 사표가 되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이 모양으로 선생을 대하게는 되었으나, 결코 선생에게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148.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151.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하였다.

 

152. “이 자리에서 노형과 결정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소? 일단 절에 들어가 봐서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들 자 사이에 의견이 맞아야 할 것 아니오?

 

162. 시의 처음과 끝은 잊어버렸고, 연구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유가 천년이면 불가도 천년이요

  내가 보통이면 그대들도 보통이다.

 

172. ‘남아가 어디에 있든지 만날 수 없으랴’는 말이 오늘 창수형에게 비유한 말인가 보오.

 

173.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178. 우리나라의 탐관오리들이 비록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이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소행입니다. 또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 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 그것은 오랑캐 임금의 소행입니다.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제 소견에는 오히려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공맹에게서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182. “자네의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의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189. 그대가 본부에서 뽕나무 묘목을 가지고 왔던 사명은 묘목의 생명을 보호하여 나눠주고 심게 하는 것이거늘, 이같이 묘목을 말라 죽게 해 가지고 위협으로 분배하니 그 책임 소재를 알고자 합니다.

 

196.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203. 성장한 청년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모양만 상놈이 아니고 정신까지 상놈이 되고 말았다. 그이들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과했다.

 

210. 내가 범인을 직접 심문하니, 그는 그 동네 서당 훈장이었다. 내가 동네 어른들을 초청해 신교육의 필요를 설명하자 자기가 가르치던 아동 4,5명이 전부 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자기는 고역인 농사밖에 생활방도가 없게 된 것을 원망해서 방화하였다고 자백하였다.

214. 나는 깜짝 놀랐다. 이재명의사가 단총을 사용하였다면 국적 이완용의 목숨을 확실히 끊었을 것인데, 눈먼 우리가 간섭하여 무기를 빼앗는 바람에 충분한 성공을 못한 것이다. 한탄과 후회가 그치지 않았다.

 

223. 와타나베 놈이 입을 열면서 이런 말을 한다. “내 가슴에는 X 광선을 대고 있어서 너의 일생 행적과 비밀을 모두 알고 있으니, 터럭만큼이라도 숨기면 이 자리에서 때려죽일 터이다.

 

229. 나는 방 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 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서 도로 꺼내먹여, 마치 어미새가 새끼에거 물어 먹이듯 했다.

 

236.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학생들이 나를 숭배함보다, 내가 학생들에게 천배만배의 숭배와 희망을 두고 있었다.

 

237. 육체로는 복역을 하나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처럼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죽는 날까지 낙천생활을 하기로 했다

 

246.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248. “나에게 전능을 베풀어 동양의 대악괴인 왜황을 내 손에 죽게 합소서”하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254. 구속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할수록 반대로 수인들의 심성도 따라 악화되어서, 횡령이나 사기죄로 들어온 자라도 절도나 강도질을 연구해서 만기 출옥 후에 더 무거운 형을 받아 다시 들어오는 자를 종종 볼 수 있었다.

 

261. 도당은 수효만 많고 정밀치 못한 것보다는 수효가 적어도 정밀한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각 도 지방 책임 유사에게 노사장이 매년 각 분 설에서 자격자 한 명씩을 정밀 조사하여 보고케 합니다. 그 자격자란 것은,

첫째, 눈빛이 굳세고 맑을 것

둘째, 아래가 맑고

셋째, 담력이 강실할 것

넷째, 성품이 침착할 것

 

자격자에게 착수하는 방법은, 먼저 그 자격자가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고, 여색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미색으로, 술을 즐겨 마시는 자에게는 술로, 재물을 좋아하는 자는 제물로 극진히 정을 베풀어 환심을 사서 친형제 이상으로 정의가 밀착케 된 후 훈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264.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지만,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267.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구’()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 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273.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7세 미만의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하더라”

 

279. 나는 소작인 준수규칙 몇 조를 반포했다.

- 도박하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허락하지 않음

- 학령 아동을 입학시키는 자는 소작지 중 가장 좋은 논 두 마지기씩을 더해 줌

- 학령 아동이 있는데 입학시키지 않는 자는 소작지 중 좋은 논 두마지기를 도로 회수함.

- 농업에 근실한 성적이 있는 자는 조사하여 추수시 곡물을 상으로 줌.

 

283.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286. 나의 몸이 본국을 떠나 상해에 도착한 줄 알고나서, 비로소 그 사실이 왜에게 알려졌다 한다. 나는 이것 한 가지 일을 보아도 우리 민족의 애국 정성이 족히 장래에 독립의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

 

289. 자식들에게 대하여도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도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90. 내 일생에서 제일 행복이라 할 것은 기질이 튼튼한 것이다. 거의 5년의 감옥 고역에 하루도 병으로 일 못한 적 없었고, 인천감옥에서 학질에 걸려 반나절 볻안 역을 쉰 적이 있을 뿐이다. / 이 글을 쓰기 시작한지 1년이 넘은 민국 11(1929, 54) 5 3일에 종료하였다.

 

백범일지 하권 

 

298.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302.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 해 감옥생활을 하여 왜놈 사정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며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집행하라”고 강권하였다. 결국 나는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310. “적은이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우리 독립운동이 우리 한민족의 독자성을 떠나서 어느 제 3자의 지도,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옳지 못하니, 제는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으며,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313.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식민지운동은 복국운동이 사회운동보다 우선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말이 한번 떨어지자 어제까지 민족운동 즉 복국운동을 비난,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이 돌변하여 독립, 민족운동을 공산당의 당시로 주창하였다.

 

315. “스스로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도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

 

316. 정부가 아무리 위축되었다고 하더라도 해주 서촌 김존위의 아들인 내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 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319.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적어도 몇백 원어치의 물품을 사서 불란서 영사와 공무국, 그전의 서양인 친구들에게 선물하였다. 어떠한 곤란 중이라도 14년 동안 연중행사로 실행한 것은 우리 임시정부가 존재한다는 흔적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려는 방법이었다...

 

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일본영감 이봉창)

 

326. “내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328.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337. 어제까지 채소바구니를 메고 날마다 홍구로 다니면서 장사하던 윤봉길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나 이외에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몇 명만 이 사실을 짐작하였을 뿐이고, 그날의 거사는 나 혼자만 알고 있었다.

 

340. 이 거사로 인하여 미주.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의 한인 교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성원이 대단하였다. 동경 사건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조금이라도 민족혼을 떨친 터에, 이번 홍구 사건이 절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346. “물 한 동이를 길어다 땅에 쏟은 후, 다시 주워 담아 한 동이가 되면 같이 살자.

 

349. 14년 동안 산수에 주렸는데, 10여 일 사이에 실컷 산수를 즐겼다.

 

352. 명대 시절 우리나라의 의관문물은 모두 중국제도에 따른다 하고서, 실제는 아무 이익도 없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만 한 망건.갓 등 망할 놈의 기구만 들여왔으니, 생각만 하여도 이가 시리다./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3.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없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62.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365. 어머님은 주야로 상해에 있는 자손을 잊지 못하시고 생활비에서 절약하여 약간의 금전도 부쳐 보내셨지만, 그것은 타오르는 화로 속의 한 점 눈송이처럼 별 보탬이 되진 못했다.

 

367.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너’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371.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379.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 평생 ‘고용’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메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386. 봉빈은 비록 여성이나 총명.과감하여 전시공작의 효과와 능률이 중국 방면에까지 널리 알려져 칭찬을 받았으며, 봉빈 자신도 항상 자기가 경이적인 공헌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어 장래가 촉망되는 바이다.

 

395.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 온 것입니다.

 

397. 우리 청년학생들은 훈련시키는 미국 장교들이 각자 맡은 과목을 실습하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첫째로 본 것은 심리학 박사가 각 학생들을 심리학적으로 시험하여 모험성이 풍부한 자는 파괴술을, 지적 능력이 강한 자는 적정 정탐으로, 눈 밝고 손재주 있는 자는 무전기 사용법을 분과 과목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심리학자가 시험 성적의 개요를 보고하였는데, 특히 한국 청년은 앞으로 촉망된다고 하였다.

 

398.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403. 중경에서 폭격을 당할 때에 중국의 국민성이 위대한 것을 깨달았다. 높은 큰 건물이 삽시간에 재가 되는데도, 집주인들은 한편으로 가족 중 피살자를 매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생존자들은 불 붙지 않은 나머지 기둥과 서까래를 모아 임시 가옥을 건설하였다. 그 일을 하는 중에 웃는 얼굴로 비장한 빛을 보이지 아니하므로, 나는 그들을 볼 때 이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409. 고국을 떠난 지 27년 만에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 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414. 과거 임진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격침하였던 한산도 제승상을 방문하고 충무공 영정에 참배하였다.

 

나의 소원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70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하려고 살 것이다.....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에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424.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새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425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사해동포 四海同胞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니,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도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 하여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인류 세계에는 새로운 생활원리의 발견과 실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천직이라고 믿는다.

 

426.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런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426.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427.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범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자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428.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주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서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

 

429.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개인생활에 너무 잘게 간섭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정치가 아니다. 국민은 군대의 병정도 아니요. 감옥의 죄수도 아니다. /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를 알아보는 한 절차 또는 방식이요. 그 내용은 아니다. 즉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 이 세 가지가 곧 민주주의 이다.

 

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나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430.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렇다고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그대로 직역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련의 독재적인 민주주의에 대하여 미국의 언론 자유적인 민주주의를 비교하여서 그 가치를 판단하였을 뿐이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한 자를 취한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431. 가까이 이조시대만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대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가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432.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의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聖人을 만드는데 있다.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우리 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 할 수 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仁厚之德이란 것이다.

 

433.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공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仁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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