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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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와 두 권의 책
10기 김정은
영희, 영희가 누구지? 작가를 꿈꾸었던 친구가 있었지. 그 친구가 영희였지.
그래. <달과 6펜스>의 주인공 같았던 영희. 추석 고향집에서 어릴 때 썼던 내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견한 <달과 6펜스>, 내 친구 영희가 고등학교 졸업식 날 내게 준 선물이었다. 영희는 고1과 고3, 2년을 같은 반을 했던 친구였고, 고1때는 꽤 친했지만 고3때는 서먹해졌던 친구였다. 기억은 고1과 고3을 왔다갔다하며 영희를 더듬는다.
고1, 지하철 안, 우리는 부산 지하철 동래에서 서면으로 가던 중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서면 태화쇼핑 옆 동보서적은 부산에서는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쯤 되는 곳이었다. 검은 뿔 테 안경에 교복을 입은 두 소녀는 책을 사러 가곤 했다. 한 소녀의 손에는 <달과 6펜스>, 다른 소녀의 손에는 장정일의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가 있다.
한 소녀가 이야기했다.
“나, 대학 안 갈 거야.
대학 가는 거랑 작가가 되는 거랑은 아무 상관 없는 거 같아. 난 그냥 책만 읽다가 졸업하면 서점에서 일하면서 글 쓰고 싶어.”
그 날, 지하철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던 친구가 영희였다.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영희 말에 공감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내 말을 얹는 대신 시 한편을 내밀었다. 장정일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맨 처음 나오는 시 <삼중당 문고>였다.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 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간 삼중당 문고 방학 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 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 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 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 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 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히 끼고 나온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홍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 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 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배때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 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 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 장정일 <삼중당 문고> - |
장정일 시인과 당시 고1이었던 영희와 나의 공통점은 ‘중졸’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삼중당 문고’를 놓지 않았고, 시인이 되었다. 나는 상상했다. 영희와 나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들을 놓지 않는다면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영희가 대학을 가지 않고 그렇게 작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영희는 <달과 6펜스>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달과 6펜스>는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의 이야기다. 폴 고갱은 <달과 6펜스>에서 소설 속 인물 ’스트릭랜드’로 재탄생했다. 마흔 일곱 살에 증권 중개인의 직업을 버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예술가의 삶을 살기로 한 스트릭랜드는 악령에 사로잡힌 듯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며 그림을 그린다. 자신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더크를 배신하기도 하고, 더크의 아내와 잠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더크의 아내는 그로 인해 자살하게 되지만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마음의 동요는 없다. 그는 오직 ‘그림’만을 사랑할 뿐이다. 자신만의 이데아 타히티 섬에 정착하여 나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수많은 그림을 남긴다. 영희는 이야기했다. 작가라면, 예술가라면 ‘스트릭랜드’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렇다면 애써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삶을 살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출발하는 것보단 처음부터 그렇게 사는 것이 나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자신은 그 순간부터 ‘스트릭랜드’처럼 살 것이라 내 앞에서 선언했다.
물론 나는 내 친구 영희가 예술혼을 불사르는 일에는 동의했지만,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은 하지 않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든, 그녀가 살게 될 그녀 삶에 대한 인정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 영희는 나를 오해했던 것 같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나도 그녀처럼 그 순간 예술혼을 불태우며 메피스토텔레스와의 계약을 불사하며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고1, 영희는 책만 읽었던 것 같다. 나도 시집만 들고 다녔다.
고3이 되기 전에, 우리 집엔 제2의 위기가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퇴직 이후 손대신 외삼촌의 사업이 폭삭 망한 것이었다. 외삼촌은 빚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고 우리도 거리로 나 앉을 지경이었다. 내가 시인 코스프레를 멈춘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냥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전공도 비교적 취업이 잘 된다는 경영학을 골랐다.
시인 코스프레를 그만 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내 친구 영희였다. ‘스트릭랜드’ 영희는 내가 갑자기 공부로 노선을 바꾼 것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그녀 말대로 ‘삐대’해졌고, 나도 그녀의 ‘삐대함’을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그 당시의 난 주변의 감정보다 내 목표가 우선인, 그런 사람이었다. 졸업하기 전에 나는 내가 원했던 대학, 원했던 과에 합격을 했고, 영희는 졸업도 하기 전에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의 한 대형 서점에 취업을 했다. <달과 6펜스>와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를 주고 받은 졸업식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가끔 영희가 떠올랐다. 영희가 부러웠다. 1학년 때부터 취업 준비를 하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동기들과 함께 하면서, 난 참으로 영희가 그리웠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는 것은 고3때나 대학생이 되어서나 마찬가지였다. 시인을 꿈꾸었던 소녀는 온데간데 없고, 연봉과 복리후생을 따져가며 내가 일할 기업들의 순위를 매기고 있는 내 모습만 남아있었다. 내 친구 영희는 이런 나를 알아볼까?
고향집에서 <달과 6펜스>를 들고 앉아 영희를 생각한다.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나란 사람의 삶의 행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시인 코스프레에서 직장인 코스프레, 워킹맘 코스프레에서 환자 코스프레로…. 어정쩡한 코스프레 인생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난 천성적으로도 재능으로도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을 맺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
<달과 6펜스>에서 ‘스트릭랜드’ 영희가 튀어 나와 내게 묻는다.
“그래. 그래서, 잘 살고 있니?”
“………”
난 고1, 소녀 때로 돌아가 그저 멋쩍은 미소만 짓는다. 아무런 대답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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