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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10시 28분 등록

김구에게 이순신은

 

2014.09.14

10기 찰나 연구원

 

 

誓海魚龍動 (서해어룡동)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盟山艸木知 (맹산초목지)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더라.

 

이순신 장군이 그의 큰 칼에 새겼던 검명으로 '陳中吟(진중음)'의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김구 선생의 환갑을 맞이하여 자신이 쓴 휘호이기도 하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진해에 와서 해안경비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조국해방을 기뻐하며 남긴 친필 시로도 유명하다.

 

   그에게 이순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라의 임금마저 수도를 버리고 떠나는 마당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임진왜란에서 왜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이순신처럼,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노력을 하다가 마지막까지 통일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경교장에서 육군소령 안두희에게 총을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이순신 장군이 심한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을 때도 나라를 생각하였듯이, 그도 일본 간수들에게 밤새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나는 나라에 밤을 세워 본 적이 있는가?’로 자괴감을 가지고 반성을 하게 되면서 조국을 위해서 한걸음 나아갈 것을 명심한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듯이, 김구도 임시정부 활동으로 인해 자신의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개인사로는 너무나 처절하게 결혼하기까지도 약혼 및 파혼을 여러 번 맞이한 후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딸이 세 명이나 태어났지만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일찍 죽었고, 나중에는 아들 둘이 태어났지만 장남마저 자신보다 먼저 보내야 했다. 어머니에게 효도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있었지만 현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장례식마저 제대로 치룰 수가 없었다.

   어미와 아들을 잃은 아비로서의 마음은 처절하게 찢어졌지만 그 아픔을 달랠 시간을 현실은 용납하지 않았다.

언제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과단성을 발휘하여 매 순간을 임했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 김구의 백범일지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자신의 결정에 따라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고, 나라가 위태로운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치밀하게 계획해야 했고 준비되었으면 매달려 잡은 손을 과감히 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과 많은 전투 전략을 구성했듯이, 그도 치밀하게 계획하기 위해서 활빈당 간부 김진사에게 비밀결사의 요령을 철저하게 익히면서 그간 조직 구성의 허점을 철저히 분석해서 고쳐 나갔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왔을 때 신중을 기하면서 그들을 살펴보다가 천황을 시해하는 계획을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 식민지 국가 중에서 최초로 시도한 역사적인 일이었다.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신과 같은 존재이기에, 인간이 감히 신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였기에 천황을 죽이지는 못했어도 시도 자체만으로도 전 세계적으로 뉴스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써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였듯이, 그도 늦었지만 백범일지를 작성하여 그가 살아온 일생을 기록하였다. 53세때 백범일지상권을 작성하였을 때만 해도 자신에게 죽음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고, 가족과 같이하지 못했기에 아들들에게 아비가 살아온 모습과 고민했던 것을 고스란히 글로 남겼는데, 그 이후 20년의 삶을 더 살면서 백범일지하권까지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난중일기가 있어서 성웅 이순신 내면의 인간 이순신으로서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듯이, 백범일지를 통해서 우리는 김구 선생의 평범한 한 인간에서 민족지도자로 거듭나기까지의 히말라야 산맥과 같은 기나긴 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억울한 것은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총을 맞아 죽었지만 그는 같은 조국의 사람의 총을 맞아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조국을 위해 그렇게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의 하수인이 된 조국의 한 사람에 의해서 살해된 것이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1945년 광복한지 70년이 지났지만 김구 선생이 그렇게 꿈꾸던 조국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지금도 분단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고, 독립주권을 쟁취하려 했지만 그것도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인간 이순신 장군을 꿈꾸지 않았지만 그는 근현대에 인간 이순신 장군처럼 삶을 살다가 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일제 강점기가 빨리 올수도 있었다고 하는데, 김구가 없었다면 끝없는 일제 강점기가 이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전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독립주권을 쟁취하여야 될 혁명시기에 있는 것이요, 명이란 약한 힘으로써 강한 힘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이니만큼 난관이 허다하다. 그러나 혁명자란 인류사회의 정의와 철석같은 신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최후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계속 투쟁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혁명자는 언제나 낙관적인 태도와 환경에서 생활할 뿐이다.

- ‘나의 주장은 부동중에서, 1949. 5. 20 -

 

  그가 혁명가로서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조국의 혁명을 꿈꾸었다면, 이제 우리는 자신의 분야에서 삶의 혁명을 꿈꾸면 그것이 조국의 혁명에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문득 생각해본다.

  나도 나라를 위해서 밤을 새워 본적도 없고, 나를 위해서 밤을 새워 본적도 별로 없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밤을 새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난관이 허다하지만 낙관적인 태도와 환경에서 꾸준히 생활해나가다 보면 삶의 혁명을 이룰 수 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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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5 20:58:56 *.218.174.163

언니가 생각하는 삶의 혁명...꼭 할 수 있길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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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01:06:49 *.113.77.122

고마워 


이제는 삶의 혁명을 진짜로 이루면서 살고 싶어 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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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08:50:30 *.50.21.20

두근두근하네요. 나를 위해 꼬박 깨어있는 밤들.

긴긴 어둠 속에서 언니는 무슨 일을 할까요?  궁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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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6 15:51:36 *.252.144.63

이순신 장군과 김구 선생 모두 기록을 남겨 후세 사람들을 도우셨죠.

찰라님의 칼럼들도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 아주 유용한 컨텐츠가 될 겁니다.

그러니 지금 이대로 계속 정진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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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9 12:21:46 *.94.41.89

제 자리가 이 나라가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가끔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이니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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