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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10시 32분 등록

1.제목: 백범일지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jpg


- 출판사: 돌베개

- 옮긴이: 도진순 주해

 

2.저자 : 김구 (본명:김창수, 18767.11()~1949.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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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과거제도에 실망,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 (),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결심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이에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로 형집행이 정지되다

 

선생은 1897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3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법명: 원종(圓宗)이 되었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진력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과 범부(凡夫)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19111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3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19227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의 알력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횡령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신익희, 차이석 등 여러 지사들과 동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최선의 방책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의 위기를 타개코자 노력하였다. 또한 192210월에는 조상섭, 김인전, 손정도, 양기하 등과 회합하여 조국독립에 필요한 실력준비로 군인양성 및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발기인이 되어 동월 28일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열어 이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235월 국민대표회의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이 대표회의 이름을 팔아 임시의정원의 직권과 체면을 손상케 하니 동년 66일 선생은 내무총장으로부터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내용은 소위 만민대표회에서 6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2, 3차 귀순을 권유하였으나 일향 고집하여 이와 같이 헌법을 제정함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함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인의 집회 등 6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라 하였다.

 

동년 1226일에는 상해교민단 의용대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2449일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다가 동월 24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동년 62일에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6320일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동년 12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자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임시 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 젊은층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의 심취, 자금난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 등을 파견하다

1928325일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조소앙, 엄항섭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으며 192989일 상해교민단장에 피선되었다.

 

그리하여 1932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의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동경 앵전문 밖에서 일왕을 저격하게 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년 429일에는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군 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 등 다수의 장성 및 고관들을 폭살케 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장개석 총통을 만나 한인 무관양성소 특설을 협의하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인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의 저보성 집으로 피신하여 광동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던 중 1933년에 장개석주석의 면회요청을 받고 안공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공관에서 장개석을 면회하였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한국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할 것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의 조약을 맺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여 한인교관으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역전의 명장들을 교관으로 초빙, 한인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 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85월 장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3당 통일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선생은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광복군의 국내정진 작전 중 일왕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8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동년 1123일 선생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1월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 소 공위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4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6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거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주해 : 도진순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창원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현대사 전공의 소장학자로서, 백범 관련 글과 논문이 10여 편이 넘는 이 분야의 권위자로 오랜 기간 동안 백범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진행해왔으며 백범일지출간을 위해 4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작업을 해오면서,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 필사본, 추가본과 수많은 출간본을 검토하고, 옛 문헌과 자료들을 수집·분석하는 등 새로 출간하는 백범일지정본화 작업에 완벽성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저서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 이승만, 김구 시대의 정치사가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해방 직후 김구·김규식의 국가건설론과 정치적 의미, 백범일지의 원본, 필사본, 출간본 비교연구, 백범 김구 시해사건과 관련된 안두희 증언에 대한 분석, 휘호로 본 백범 김구, 그 삶의 궤적과 진수등이 있다.

 

 

 

2) 관련 동영상

1)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백범 김구, 1부 나의 길

http://www.youtube.com/watch?v=xNV4p_nwycw

 

2)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백범 김구, 2부 나의 소원

http://www.youtube.com/watch?v=qJnyqpzYi80

 

3)백범김구 암살범 안두희.avi

http://www.youtube.com/watch?v=Nl2zqqlBwmg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분단 전후 백범이 가장 즐겨쓰던 서산 대산의 선시

 

눈으로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1949년에 즐겨 쓴 시

 

영욕에 초연하여 그윽이 뜰 앞을 보니

꽃은 피었다 지고

가고 머무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가 바라보니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는 구나.

맑은 창공 밝은 달 아래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도

불나비는 유독 촛불만 쫓는다.

맑은 물 푸른 숲에 먹을 것 가득하건만

수리는 유난히도 썩은 쥐를 즐긴다.

! 세상에 불나비와 수리 아닌 자

그 얼마나 될것인고?

 

 

 

<< 백범 출간사 >>

 

 

-15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삼천만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이대로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아니될 수도 없고, 또 좋은 나라 큰 나라로 이 나라를 보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소에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상권] =======================================================

 

 

<< 2. 시련의 사회 진출>>

 

 

-39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 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만 조금씩 노력해가다보면 훨씬 더 마음 좋은 사람이 될 것 이다.

 

-58 내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동학당이 창궐할 때 지은 시만 생각난다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없이 가버리나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62 고선생은 내 마음에 그러한 고통이 있음을 극히 동정하는 말로 위로해 주셨다.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 예로부터 성현의 지위까지 도달한 자도 있고, 좀 모자라는 자도 있고, 성현이 되는 길이 너무 높고 멀다 하여 중도에 달아나거나 자포자기 하여 금수만도 못한 자리에 몰려 있는 자도 있다네. 자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몇 번 길을 잘 못 들어서서 실패나 곤란을 경험하였더라도, 그 마음 변치말고 끊임없이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63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가만히 보면 언제나 내게 보여주기 위해 책장을 접어두었다가 들쳐보이곤 했는데, 그것만 보아도 선생이 얼마나 열심히 나를 가르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 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구전심수의 교법으로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의 역량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제자의 그림이 너무 아름답다. 인생에서 좋은 스승,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그리고 스승이 얘기한 과단성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머뭇거리고 행하지 않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66 고 선생은 대답하였다.

일반 백성들이 의를 붙잡고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죽는 것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요, 일반 백성과 신하가 적에게 아부하다 꾐에 빠져 항복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일세. 지금 왜놈 세력은 온 나라에 차고 넘쳐 대권 안까지 침입하여 대신들을 마음대로 내치니 우리나라를 제2의 왜국으로 만든 것 아니겠는가? 만고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 없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은 즉. 자네나 나나 죽음으로 충성하는 일사보국(一死報國) 한가지일만 남아 있네. ”

 

<< 3. 질풍노도의 청년기 >>

 

 

-94 ,“네가 어릴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되기가 소원이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100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버님도 다시 강권을 아니 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이 말씀을 하신 부모의 마음도 얼마나 비장했을까. 아버님도 역시나 남다른 분이셨던 것 같다.

 

-103 이창매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 나와 나를 보고, 너는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책망하는 듯 싶었다. 일어나서 출발할 때, 이창매의 무덤을 다시 되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을 하였다.

 

-103 어머님은 뱃사공도 듣지 못할 입안엣말씀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 네가 이제 가서는 왜놈 손에 죽을 터이니, 맑고 맑은 이 물에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 같이 다니자.”

 

어머님은 자식이 이번에 가서 죽는 줄 아십니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자식이 국가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치게 정성을 다하여 원수를 죽였느니, 하늘이 도우실테지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김구 선생 자신의 운명에 대한 당당함이 녹아들어 있다.

 

-105 옛사람들은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시느라 고생하시었다라 하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태어날 적에도 많은 고생을 하셨고, 또 나를 먹여 살리시기 위해 천중만금의 고생을 겪으셨다. 불서佛書에 말하기를 부모와 자녀는 천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108 “지금 소위 만국공법이니,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 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법정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얘기하는 김구 선생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런 용기와 당당함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요즘 우리는 너무 사소한것에 분개하고 자신의 것을 챙기기에 너무 급급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114 감리서 직원 중에서도 나와 이야기해 본 후 신서적들을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자기 것만 지키려는 구지식, 구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가 없소. 세계 각국의 정치, 문화, 경제, 도덕, 교육, 산업 어떠한지를 연구해 보고, 내 것이 남만 못하면 좋은 것을 수입하여 우리것으로 만들어, 이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시대과제를 아는 영웅의 할 일 인것이오. 한갓 배외사상만으로는 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오. 그러니 창수와 같이 의기 있는 남자는 마땅히 신지식을 구하여 장래 국가에 큰 일을 하여야 하오.”

 

-115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8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그것은 고선생 말씀 중에 박태보의 보습 단근질 일화가 있었는데, 그는 보습으로 단근질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너라고 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조금만 아파거나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게 되는데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것을 명확히 하고 이제는 편협한 사고나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야겠다.

 

-121 여하튼 대군주께서 친히 전화하신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때 경성부 안에는 이미 전화가 가설된지 오래였으나, 경성외의 지역에 장거리 전화가 설치된 것은 인천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이다. 인천까지의 전화 가설공사가 완공된지 3일째 되는 병신년(1896) 826일의 일이었다. 만에 하나 그때까지 전화 준공이 못 되었다면, 바로 사형이 집행되었을 거라고들 하였다.

 

천운의 운명이었기에 이런 것이 가능했으리라.

 

-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128 ‘나를 무한정 놓아주지 않는데도 옥에서 죽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당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이 우리 국법에 범죄행위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왜놈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 힘이 부족해서 였다. 왜놈에게 죽든지, 충의를 몰라주는 조선관리들에게 죄인으로 몰려 죽든지 한이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지금 대 군주가 나를 죽일놈이 아니라고 인정하신 것은 윤 826일 천칙한 사형 정지의 일로 족히 증명할 수 있다. 또한 이때 이후 감리서로부터 경성 각 관아에 소송하여 받아낸 제지들만 보아도 나를 죄인이라고 지시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김경득이 그같이 자기 전재산을 탕진해 가며 내 한 목숨 살리려 했던 것도 그렇고, 인천항에 사는 사람들 중 한 사람도 내가 옥중에서 죽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없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 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

 

자신의 천복을 알았기에 탈옥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감히 자신의 목숨을 걸고 탈옥을 감행 하겠는가

 


  

<< 4. 방랑과 모색 >>

 

 

-139 ‘나는 먼저 탈옥해서 단신으로 쉽게 달아나려다가, 그의 애걸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중의 험지로 다시 들어가 위험지대를 다 면케 해준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빈손으로 자기를 찾을 줄 알고 금전상 해를 입게 될까 봐 거절하는구나. 그 사람의 행실인즉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화장실 들어갈때와 나올 때 다르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말이리라. 하지만 자기가 한것에 대해서 남에게 보상을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이 꼭 뭔가 기대하게 되는데 무상보시를 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줄 수 있는 것이리라.

 

-152 곧 몸을 일으켜서 마곡사를 향해 안개를 헤치고 걸음걸음 들어갔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간다.

 

-156 ‘견월망지(見月忘指)’의 오묘한 이치를 말하고, 칼날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참을 인자의 해석을 하여 주었다.

견월망지: 달을 보되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생각지 말라. 어떤 목적을 세웠으면 그 목적을 이루는 동안 생겨나기 마련인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

 

-172 “남아가 어디에 있든지 만날 수 없으랴는 말이 오늘 창수형에게 비유한 말인가 보오.”

 

-173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니, 구하면 얻게 될 날이 있다고 내 전에 말하지 않던가?”

 

이 세상에 한두번에 되는 것은 없다. 자신이 꾸준히 해가다가보면 그 길이 보이니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173 나는 유완무를 보고 말했다.

강화 김씨 댁에 있으면서, 선생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허다한 노고를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비로소 뵙게 되었으나, 세상에는 아주 조그마한 일도 부풀려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소문과 실물이 용두사미인 때가 많고, 저 역시 소문과 달리 졸렬하기 짝이 없으니 매우 낙심할 것입니다. ”

유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뱀의 꼬리를 붙잡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볼 터이지요.”

 

-174 연산 이천경이나 지례 성태영이 다 내 동지인데, 우리는 새로 동지가 생겼을 적에 반드시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1개월씩 함께 지낸다오. 그리하여 각자 관찰한 바와 시험한 것을 모두 모아서 어떤 사업에 적당한 자질이 있는지를 판정하여, 벼슬살이에 적당한 자는 자리를 주선하고 상업이나 농사에 적당한 인재는 상, 농으로 인도하여 종사케 하는 것이 우리 동지들의 규정이오. 연하는 동지들이 시험한 결과 아직 학식이 얕고 부족하니 공부를 더 하되, 경성 방면의 동지들이 전적으로 맡아 어느 정도 수준을 이루도록 할 것이오. 연하의 출신이 상인 계급이니 불가불신분부터 양반에게 눌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지금 연산 천경이 소유하고 있는 가택과 논밭, 그리고 가구 전부를 그대로 연하의 부모가 생활하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려 하오. 그 고을의 큰 성씨 몇몇만 잘 단속하면 족히 양반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연하는 경성에서 유학하면서 잠깐씩 부모님 얼굴이나 뵙게 할 터이니, 곧 고향으로 가서 오는 2월까지 부모님 몸만 모시고 서울로 오시오. 서울서 연산까지 가는 길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이다.”

 

사람을 판단해서 자질을 판정하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하는 방식이 실로 놀랍다. 그리고 그 사람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것에 대해서 놀라울 뿐이다. 김구가 훌륭한 스승을 만난것도 큰 운이었는데, 이런 동지들을 만나는 것 또한 큰 복이었다.

 

-179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 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교육의 목적이 있었다. 건전한 2세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인데 요즘의 교육은 일단 남들보다 앞서기 위한 경쟁수단 밖에는 없으니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이 속에서 좀 더 의미있는 교육이 잘 되게 해야 하리라.

 

-180 ,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아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청출어람 청어랑, 스승이 가르치는 바를 다 배우고, 그 위에 다시 자신이 배운 것을 쌓아나가야 하리라.

 

-181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서 살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효자의 역할이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내 살조각을 벨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 5. 식민의 시련 >>

 

 

-196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 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202 “작은 아버지 보시기에 저의 난봉은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

 

-215 나부터 망국의 치욕을 당하고 나라 없는 아픔을 느끼나 사람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면서도 살아날 것 같은 생각이 나는 것처럼, 나라가 망하였으나 국민이 일치 분발하면 곧 국권이 회복될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후세들의 애국심을 양양하여 장래에 광복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계속하여 양산학교를 확장하고 중소학부에 학생을 늘려 모집하면서 교장의 임무를 다했다.

 

-220 국가가 망하기 전 구국 사업에 성의 십분 발휘하지 못한 죄를 받게 된 것으로 자인했다.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이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대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꺽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시련은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 마지막 순간에 더 명확히 나타나는 것 같다. 시련과 시간이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것 같다.

 

-221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 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2 과연 질풍에 굳센 풀을 알 수 있겠다.

 

-225 나의 생명은 빼앗을 수 있거니와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

 

김구 선생은 이미 육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하였기에 이런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226 나를 논밭의 자갈돌로 알고 파내려는 그대들의 노고보다 파내어지는 나의 고통이 더욱 심하니 내가 자결하는 것을 보라

 

-228 “나의 육체를 욕보일 수 있을지언정 나의 정신은 빼앗을 수 없다.”고 같이 수감된 동지들에게 주창하던 기개와 절개를 생각하면서, 이러다가 인간의 본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짐승의 본능만 남는 것이 아닐까 자책하던 때, 아카시아의 방에서 나를 극진히 우대를 하면서 신문한 것이었다.

 

바람에는 버텨도 햇빛은 버티기 어려운 것 같이, 힘든 고문에서는 버티어도 대우를 잘해주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 인간의 아이러니 같지만 동물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또한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리라.

 

-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군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39 ‘오냐, 나는 죽어도 몽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몽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244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245 “죽이고 살리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부처님이라도, 감옥 안에 들어와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자중하시오.”

식민지배를 받는 다는 것은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것이 죽음까지의 자유도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더 처참해지는 것 같다.

 

-265 내 죄가 없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거든 판결을 취소하고 아주 풀어줄 것이지, 가출옥이란 가()자가 정신에 상쾌치 못하니 기한까지 있다 나간다.“

하니 왜놈도 어찌하지 못하고 기한을 채워서 방면하였다.

도인권의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가지지 못할 것이다. “온 산의 마른나무 가운데 잎사귀 하나만 푸르다.”는 기개를 누가 흠모하고 감탄하지 않으리오. 불서의 홀로 우뚝 솟아 넓은 도량을 펼치고, 천하를 걸어감에 누가 나를 따르랴는 구절을 도군을 위해 암송하였다.

 

-267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의요, 연하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곡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

그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난 이름과 호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처음부터 김구라는 이름을 사용한지 알았는데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 6. 망명의 길 >>

 

 

-273 “너는 오늘 살아오지만, 너를 심히 사랑하고 늘 보고 싶어하던 네 딸 화경이는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 친구들이 네게 알릴 것 없다고 권하기로 기별도 하지 않았다. 7세미만의 어린 것이 죽을 때 나 죽었다고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소하더라.”

 

그 아버지의 그 딸이다. 그런데 진짜 7살 아이가 이런 얘기를 했을까 아니면 어머니가 자식의 아픔을 달래려고 하는 말이었을까?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83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일을 계획,진행하여야 할 터인즉 나의 참, 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

 

독립은 만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좀 더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역사적 의미는 컸다.

 

 

 

[하권] =======================================================

 

<< 하권을 쓰고 나서 >>

 

-296 철혈남아(鐵血男兒): 여기서 철혈은 장광설이나 이론이 아니라 몸을 던져 수행하는 실천적 행위를 말한다.

 

-298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타살보다 자살은 결심만 강하면 쉬운 듯 하지만, 자살도 자유가 있는 데서나 가능한 것이다.

 

마지막까지도 국가의 독립을 원하는 그의 삶. 그리고 마지막 죽음에 있어도 잘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그의 자세가 돋보인다.

 

-298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

 

 

-307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데, 그렇게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자세를 고쳐나가야 하리라.

 

-319 나는 최초에는 정부의 문파수를 청원하였으나, 끝내는 노동총판, 내무 총장, 국무령, 국무위원, 주석으로 중임을 거의 역임하였다. 이렇게 된 것은 나의 문파수 자격이 진보된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인재난, 경제난이 극도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명성이 쟁쟁하던 인가가 몰락하여, 그 고대광실이 걸인의 소굴이 된것과 흡사한 형편이었다.

 

 

<<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

 

 

-326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 이봉창

 

영원한 괘락을 향유코자 한다면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이봉창의 대담함과 용기에 박수를 보낼뿐이다.

 

-326 1년 전부터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운동이 매우 침체한 즉, 군사공작을 못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게 되었다.

 

-331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윤봉길

 

이렇게 큰 뜻을 품고 계획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것이리라.

 

-331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

 

-336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대의를 품은 자들의 가벼운 대화들. 죽음조차 가벼울 수 있는 것이리라. 육체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

 

 

-346 “물 한동이를 길어다 땅에 쏟은 후, 다시 주워 담아 한 동이가 되면 같이 살자.”

 

-353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

 

 

-356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소? 장래 독립하려면 군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소? ” - 장개석

 

일시적인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리라. 역시 장개석같은 발상이다.

 

-361 “놀라셨지요?”

하고 묻자, 어머님은 웃으시면서,

놀라기는 무엇을 놀라. 침대가 들썩들썩 하더군. 그래, 사람이 많이 죽었냐?”

 

김구 선생 어머니답게 큰일에 대해서 놀라는 기색없이 얘기하는 것을 보면 역시 대단하신 어머님이시다.

 

-367 9년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청년단에 하사하셨다.

 

김구 선생 어머님의 모습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나또한 아이들의 엄마로서 아들들의 큰 뜻을 키워나갈 수 있게 해야 하리라.

 

 

<<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

 

 

-379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하셨다. 종전에 우리나라는 노복을 사용하였으나 국가가 병탄된 뒤 경향에서 동포들의 양심 발동으로 내가 일본인의 노예가 되어 어찌 차마 동포를 종으로 사용하랴하고 자연히 노복제를 물리치고 고용제를 사용하였다. 어머님은 일찍이 노복은 물론이고, 팔십평생 고용두 글자와도 상관이 없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어머니의 당당하고 의연한 삶의 자세는 젊은이도 따라하기 어렵다. 옛날 어른들은 특히 어머니들의 강인한 모습들은 놀랍기만 하고 나의 삶의 자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 6. 해방 전후의 대륙 >>

 

 

-395 그 중 중요한 일화는 한 청년의 다음과 같은 답변이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까지도 감격에 넘쳤던 모양이다.

 

이런 이름모를 청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데 그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조상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현재에 깨어있으면서 살아가야 하리라.

 

-408 세상만사가 어찌 모두 무심하고 우연이라 하리오.

 

우연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 우연처럼 우리곁을 찾아오는 것이다.

 

 

<< 7. 조국에 돌아와서 >>

 

 

-409 착륙 즉시 눈앞에 보이는 두가지 감격이 있으니, 기쁨이 그 하나요 슬픔도 그 하나이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우리 후손들이 왜적의 악정에 주름을 펴지 못하리라 우려하였던 바와는 딴판으로, 책보를 메고 길에 줄지어 돌아가는 학생의 활발 명랑한 기상을 보니 우리 민족 장래가 유망시 되었다. 이것이 기쁨의 하나이다. 반면 차창으로 내다보이는 동포들의 사는 가옥을 보니, 빈틈없이 이어여 집이 땅같이 낮게 불어 있었다. 동포들의 생활 수준이 저만치 저열하다는 것을 짐작한 것이 유감의 하나였다.

 

광복을 맞이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지만,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점이되는 것이었다.

 

-412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 나의 소원 >>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독립에 대한 그의 강한 의지가 세 번에 이어지는 질문속에 다 들어 있다.

 

-424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한 것이 그의 진정이었던 것을 나는 안다. 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임을 받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함에서였다.

 

 

-426 삼천만의 우리 민족이 옛날의 그리스 민족이나 로마 민족이 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자.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길래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 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청년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다란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이 정신을 가지고 이 방향으로 힘을 쓸진대 30년이 못하여 우리 민족은 괄목상대 하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이제는 새로운 꿈을 꿔야 하리라. 일찍이 아무도 한 자가 없는 것을 해야 하는 창의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기에 이제는 다른 꿈을 꾸어야 하리라.

 

-429 모든 생물에는 다 환경에 순응하여 저를 보존하는 본능이 있으므로 가장 좋은 길은 가만히 두는 것이다. 작은 꾀로 자주 건드리면 이익보다도 해가 많다.

 

-430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어떠한 철학적 바탕이 있어야 하는데, 철학은 없고, 그위에 필요한 기술만 가르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고민이 있어야 하리라.

 

-431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거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을 만드는데 있다. 대한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봤던 문구이다. 백범일지를 다 읽고 이 문장을 보니 감동이 남다르다. 김구 선생이 꿈꾸던 세상이 이 한반도에 펼쳐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가야 하리라.

 





4. 내가 저자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자를 따서 호를 삼은 백범 김구.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출생부터 안두희에 의해서 피살될때까지의 74세의 일생을 이렇게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어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도 더 진한 감정을 주었다.

예전에 경교장을 가보았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의 역할과 중요성, 상해의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했을 때도 역사의 한 장면으로 스쳐 지나갔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19458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늘 백범 김구가 있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통일이 되지 못한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김구는 70년동안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는데, 70년이 지나도 우리의 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보는 작금의 현실에 안타깝다.

김구는 시대적 영웅이었다. 출생 때부터 그리고 죽을 때까지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총탄을 몸속에 지니면서도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의 가족사는 너무나 비참하였다. 딸 셋을 잃고, 와이프, 어머니, 아들 마저도 자신보다 먼저 보내야 했으니 찢어지는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의 수많은 옥중 생활과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해주던 그의 어머니. 강인한 어머니가 있었기에 백범 김구가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으리라.

이번 책을 보면서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렇게 조상들이 피눈물 흘리면서 맞이한 광복을 우린 너무 쉽게 아무런 노력 없이 인정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런 혜택에 대해서 다시 감사하고, 김구와 같은 위대한 민족영웅의 지도자의 발자취를 하나둘씩 따라 가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1) 전체적인 뼈대와 목차

 

-목차

교감원칙

일러두기

백범 출간사

 

상권

 

.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2. 시련의 사회 진출

3. 질풍노도의 청년기

4. 방랑과 모색

5. 식민의 시련

6. 망명의 길

 

하권

 

하권을 쓰고 나서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6. 해방 전후의 대륙

7. 조국에 돌아와서

 

나의 소원

 

백범 연보

인물 찾아보기

 

 

2) 감동적인 장절

 

-63 선생은 주로 의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무리 발군의 뛰어난 재주와 능력있는 자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재능이 도리어 화근이 된다는 것과,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등,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가만히 보면 언제나 내게 보여주기 위해 책장을 접어두었다가 들쳐보이곤 했는데, 그것만 보아도 선생이 얼마나 열심히 나를 가르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선생은 경서를 차례로 가르쳐주는 것보다 나의 정신과 재질을 보아 떨어진 곳을 기워주고 빈 구석을 채워주는 구전심수의 교법이 가장 빠른 길이라 여기신 듯하였다.

 

고선생이 나를 겪어보시고 가장 결점으로 생각한 점은 과단력이 부족한 점인 듯하였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히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 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 없다는 말을 하시면서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3) 보완점

하권에서는 이동경로가 많이 있었기에 시대별로 이동경로에 대한 그림이나 도표식으로 정리가 한차례 이루어졌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백범 연보에도 시대적 사건들이 같이 기술되어 있기도 하지만 년도별로 한눈에 보기 좋게 표로 정리를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4) 이 책의 키워드는?

마음 좋은 사람, 구전심수의 교법, 일사보국(一死報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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