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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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꺼내보던 삼국지연의는 공감이 잘 안 되는 신기한 세상이었다.
나를 가장 황당하게 했던 것은 것은 동료를 모으는 과정이었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1. 주인공이 마을에 들어선다. 시비가 오가는 소리가 들린다.
2. 가까이 가보면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있다.
3. 간신히 말리고 상황을 종료시키면, 갑자기 어깨를 부여잡고 술집으로 끌고가 거나하게 술을 나누고 통성명을 한 뒤, 형, 동생이 된다.
4. 선 굵은 남정네들이 뜬금없이 서로 죽고 못사는 관계가 되어 전장에서 주인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
세상에 정말 터무니 없다. 치밀한 물밑작업도 없고 세심한 배려도 없는데 의형제가 된다. 남자들의 세계란 원래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인가?
우리는 걷기 시작할 때부터 낯선 사람이 사탕을 주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실제로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회사에서도 저런 식으로 사람을 사귀는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본 적이 없다. 상식적인 인간관계의 핵심은 늘 ‘이해관계’다. 저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저 사람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서로 이익이 맞는가? 여기에 엮이지 않는 사람은 배제하는 것이 좋다. 관계를 유지해도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런데 삼국지에나 나올법한 관계맺음을 실제로 실행하며 산 사람이 있다. 백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는 어딘가 강호들의 교류를 닮았다. 그를 ‘나라를 무척 생각하고 사랑하던 옛날 사람’ 정도로 여겼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예전의 당혹감을 떠올렸다. 터무니 없기는 해도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상대를 알아보고 서로 아끼는 관계로 도약하는 것을 실제로 해낼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멋질까?
거기에 생각이 미쳐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로 지내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실마리를 건져보려 했지만, 그렇게 건져낸 것들이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호방함과 기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실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김구 선생의 꺾이지 않는 낙천과 의지를 갈무리해두었다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 약점이 드러날 때마다 후시딘처럼 발라주기로 마음 먹었다.
첫째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쭈구리가 되었을 때 심기일전 하도록 스스로를 두둔해주는 구절을 뽑았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221p.
그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하나의 건강한 자극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경쟁은 결국 치졸한 감정을 소모하게 만든다. 나는 그것보다 나만의 레이스에서 그저 어제의 나, 저번 주의 나보다 조금씩 성심성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음 편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을 먼저 도와주지만, 되갚아 주길 바라지 않는 것을 꼽았다.
나는 먼저 탈옥해서 단신으로 쉽게 달아나려다가, 그의 애걸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이중의 험지로 다시 들어가 위험지대를 다 면케 해준 것이었는데, 지금 내가 빈손으로 자기를 찾았을 줄 알고 금전상 해를 입게 될까 봐 거절하는 구나. 그 사람의 행실인즉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139p.
김구가 인천 감옥에서 탈옥할 때, 먼저 탈옥한 뒤 되돌아가 같이 있던 수감자를 꺼내주었던 일이 있었다. 김구는 나중에 조선 팔도를 방랑하다 그를 찾아갔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원망하고 미련이 남을 때 이처럼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면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떠나는 사람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는 자세다.
과연 질풍에 굳센 풀을 알 수 있겠다. 당초에 명근 형이 한순직을 나에게 소개할 때에는 용감한 청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위난할 때 꺾이는 것이 어찌 한순직 혼자 뿐이랴. 222.p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을 때, 김구는 뜻을 함께 했던 선후배 동지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실토하는 것을 체험했다. 김구 본인도 동료의 자백으로 형이 늘어났다. 일을 도모할 때 함께 시작했던 사람이 떨어져 나가면 솔직히 화가 난다. 특히 내 앞길은 막지 말아주었으면 했는데 장애가 되어 구체적인 피해가 돌아오면 더 그렇다. 그러나 그냥 사람이 다 그런 것이다. 위기를 겪어보아야 사람의 진가를 안다. 이렇게 마음먹을 수 있다면, 그것도 그저 단단해지기 위한 시련으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생각하기 나름인 모양이다.
사고가 트인 사람에게는 온갖 계산들이 참 좀스럽겠다. 지평선이 보이는 몽골의 초원 같은 사람에게는 말을 달려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일 테니까. 나로서는 아직 꿈같은 이야기다. 대신 나는 용기를 내서 무릎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서겠다. 그리고 내가 걸을 수 있는 가장 큰 한 걸음을 내딛겠다. 걷다 보면 말도 만나고, 낙타도 만나고 기차도 만나겠지. 그 때 조금 더 멀리 가볼 수 있게 될 거다. 배낭의 작은 주머니에 후시딘을 챙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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