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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11시 56분 등록

백범일지

10기 김정은

 

 

백범일지, 백범 김구 자서전, 도진순 주해, 돌베개

 

1. 저자에 대하여

 

백범 김구 (18761949)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 ),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로 고쳤다. 자는 연상(蓮上),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순영(淳永)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 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 곳으로 옮겨갔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으로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서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치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 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고,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宋式)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尹奉吉)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 실패의 시련을 맛보고 그 해 5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 15일과 9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자택 경교장(京橋莊지금의 삼성강북의료원 건물)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출처: 네이버 캐스트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13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낸 것은 내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나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하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편이다.

백범일지는 백범의 두 아들에게 남기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14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뢰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을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한 인간도 그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나의 철학은 무엇일까.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일제 시대의 철학과 대한민국의 철학이 차이가 있을까. 대한민국도 일제 시대와 별 차이가 없다라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개인의 철학과 국가적인 차원의 철학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교육이 답인가.

 

15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의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의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나는 민족에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감사 드립니다.

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고 있다. 방법은?

 

19

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만 너희들은 겨우 열 살, 일곱 살의 어린아이니...

 

지금 일지를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나를 본받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너희들 또한 대한민국의 한 사람이니,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가장 숭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 나를 본받을 필요는 없지만, 너희들이 성장하여 아비의 일생경력을 알 곳이 없기 때문에 이 일지를 쓰는 것이다.

 

22

우리 조상은 지금까지 텃골 주위에서 살고 있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 등 토착양반들에게 천대와 압제를 대대로 받았다.

자신이 상놈이라 공개하는 책은 거의 못 본 것 같다. 주변 어르신들 중에 상놈 자손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뵌 적이 없다. 양반보다 상놈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인데도 말이다.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도 양반과 상놈의 구분은 분명 있을 것이다. 명칭만 바뀌었을 뿐. 천대와 압제를 받으면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또는 그것을 당연시하며 자신도 기득권 세력의 일부라 생각하며 더 오르려 더 가지려 하는 것이 문제이다.

 

24

나는 병자년(1876), 할머니의 기일인 7 11일 자시에 할아버지와 큰 아버님이 사시는 텃골 웅덩이 큰집에서 태어났다. 앞으로 내 일생이 기구할 조짐이었는지 나의 탄생은 유례없는 난산이었다.

 

나는 서너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어머님께서 보통 종기를 치료할 때와 같이 대나무 침으로 따고 고름을 파내어서 내 얼굴에 마마자국이 많다.

자신의 출생을 미화하지 않은 표현이 신선하다.

 

27

아버님의 학식은 겨우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정도였지만, 기골은 준수하고 성격이 호방하셨다. 음주는 한량이 없고 취하시면 양반 강, 이씨를 만나는 대로 때려 1년에도 여러 번 해주 관아에 구속되는 소동을 일으키셨다.

이렇게 솔직하게 아버지를 묘사하다니. 객관성을 확보했다고 해야 하나. 내면아이가 말끔히 치유된 상태라고 해야 하나.

 

30

“그 사람들은 어찌하여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은 어찌하여 상놈이 되었습니까?

 

“진사는 어찌하여 되는가요?” “진사 급제는 학문을 연마하여 큰 선비가 되면 과거 보아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은 후부터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하여 아버님께 어서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아버님은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주더라도 양반 자제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 며 주저 하신다. 결국 아버님은 문중과 인근 상놈 친구의 아동을 몇 명 모아 서당을 새로 하나 만드셨다.

예나 지금이나

 

31

나는 아침이면 밥구럭을 메고 산 고개를 넘어 집에서 서당까지, 서당에서 집까지 오고 가며 끊임없이 글을 외웠다.

 

37

“돈만 많으면 과거도 벼슬도 다 할 수 있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큰 선비 글을 몇 백 냥 명천 냥씩 주고 사서 진사도 하고 그제도 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례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 부를 지어 과문 6체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 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39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 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 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42

설명을 듣고 나는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난 뒤 관상공부에서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나에게 하늘님을 모시고 도를 행한 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또한 상놈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에게 동학에 입도만 하면 차별 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이나 이조의 운수가 다하여 장래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말에서는 작년 과거장에서 품은 비관이 연상되었다.

실패 후 기도를 하는 이유

 

43

“그대가 동학을 해보니 무슨 조화가 생기더냐?”고 물으면,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 하게 되는 것이 동학의 조화이다”라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내가 종교를 못 벗어나는 이유

44

“지기금지원대강”(至氣今至願大降) - 지극한 기운과 원을 내려주소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하늘님을 모시면 조화의 경지가 이루어지고 영원히 잊      혀지지 않고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

 

58

안진사도 종종 나를 청하여 스스로 잘된 작품이라 생각하는 것을 많이 들려 주었다.

 

새벽 굼벵이는 살고자 흔적 없이 가버리니

저녁 모기는 죽기를 무릅쓰고 소리치며 달려든다.

 

죽으려거든 살고, 살려거든 죽는다.

 

58

안진사(안중근의 아버지)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다만 주량이 과하여 코끝이 빨간 것이 흠이었다.

내 아버지 인상도 이러함.

 

60

고선생(고능선)이 거처하는 사랑은 작은 방인데 방안 가득 서적들이 쌓였고, 사면 벽에는 이름난 옛 선비들이 남긴 좌우명들과 선생 자신이 마음 깊이 깨우쳐 얻은 글 등을 붙여 놓았다.

 

61

당시 나의 심리 상태는 매우 절박하였다. 먼저 과거장에서 비관적인 생각을 품었다가 희망을 관상서 공부로 옮겼고, 나 자신의 관상이 너무도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가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는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 또한 묘연하던 차에 동학당의 수양을 받아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으나, 이제 와서 보면 그도 역시 바람 잡듯 헛된 일이었다. 이제 패전한 장수의 신세가 되어 안진사의 후의를 입어 생명만은 안전하게 지키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과연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름이 답답하던 참이었다.

, 나와 같은 심리 상태! 내 관상이 못생긴 것을 슬퍼하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리라 결심했지만 방법은 묘연했고, 신국가 신국민을 꿈꾸었지만 그 또한 바람 잡는 일 같고, 변경연의 후의를 입어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어떤 곳에다 발을 디뎌야 할지 답답하다.

 

62

(고능선 선생이 이르시길) "사람이 자기를 알기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남을 어찌 밝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현을 목표로 하여 발자취를 밟아가도록 하게.지금은 마음에 고통을 가지는 것보다 행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 아닌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고민은 즐거움의 뿌리이니, 자네, 상심 말게 나 같은 늙은이가 자네 앞길에 혹시 보탬이 된다면 그 또한 영광이 아닌가?"

김구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63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94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 “그렇다.

.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96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고,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 호통을 쳤다.

자신의 기록이라 가능한 표현. 실감난다.

 

100

나는 이번에 내가 왜놈을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고 말씀 드렸다. "피신할 마음이 있었다면 애시 당초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실행한 이상 자연히 법사에서 사법적인 조치가 있을 터이니 그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할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집에 앉아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버님도 다시 강권을 아니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집이 흥하든 망하든 네가 알아 하여라."

멋지다. 장부의 경지. 아버지도 아들도 멋지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라 할 수 있다.

 

107

“내가 해주에서 다리뼈가 다 드러나는 악형을 당하고 죽는 데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사실을 부인했던 것은, 내무부에 가서 대관들을 보고 내 뜻을 이야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불행히 병으로 죽게 되었으니, 부득불 이곳에서라도 왜놈 죽인 취지를 분명히 말하고 죽으리라.”

 

115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 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18

교수대에 오를 시간이 반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음식과 독서와 사람 만나는 일을 평상시처럼 하였다.

멋지다.

 

126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128

나를 죽이려 애쓰는 놈은 왜구들뿐인데, 내가 그놈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옥에서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심사숙고 하다가 탈옥하기로 결심하였다.

현명한 선택!

 

148

"설사 한 집에 장정이 년 놈 합하여 두 명이라 하면, 매일 한 사람씩이라도 양반집 일을 안 할 때가 없고, 일을 하는 날은 그 놈의 집 식구가 다 같이 와서 밥을 먹소. 그러니 품삯을 많이 지불하여 상놈 집에 의식주가 풍족하게 되면 자연히 양반에게 공손치 못하게 될 것 아니오? 그래서 그같이 품삯을 작정하여 주는 것이오"

월급이 적은 이유, 비정규직을 쓰는 이유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에 난 것을 늘 한탄하였으나, 이 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이다. 그나마 내가 해서 상놈으로 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

 

165

"형님 내외분은 창수 놈, 글공부시킨 죄로 온갖 고생을 하셨으면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시오?"

 

작은 아버지의 관찰이 사실은 바로 본 것이었다. 만일 글을 몰랐다면 동학 두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인천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텃골의 순전한 한 농군으로 땅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을 요란케 할 일은 없었을 것이 명백하다.

글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171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줄 수 있다." (원문 : "君子可欺以方": 맹자에 나온다)

 

173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하더라도 낙심할 것이 아니니, 구하면 얻게 될 날이 있다고 내 전에 말하지 않던가?"

 

179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세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서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그들을 건전한 2세들로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망하는 것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제자는 생각합니다.

 

180

(고선생의 객사 소식을 듣고) , 슬프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까지 30여 년 동안 내 마음을 쓰거나 일을 할 때, 만에 하나라도 아름다이 여기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당시 청계동에서 고선생이 나를 특히 사랑하시고 심혈을 다 기울여 구전심수하시던 훈육의 덕일 것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같이 사랑하시던 위대한 얼굴을 뵙지 못하고, 다시 그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받지 못하겠으니, , 슬프고도 애통하도다!

슬프다!

 

181

그래서 나는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틈타 왼쪽 허벅지에 살 조각 한 점을 떼어내었다. 고기는 불에 구워서 약이라 아뢰고 잡수시게 하고, 흐르는 피는 드시게 하였다. 그래도 양이 적은 듯하여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 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 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 조각은 떨이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

!

 

183

"자네 뜻에 맞는 처녀란 어떤 처녀인가?"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처녀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상면하여 서로 마음이 맞으면 결혼한다. 이렇습니다."

현명한 기준

 

186

평안도는 물론이고 황해도에도 신교육의 풍조는 예수교로부터 계발되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만 지키던 자들이 예수교에 투신함으로써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 사정을 알게 되어 신문화 발전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예수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류 이하로, 실제 학문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선교사의 숙달치 못한 반벙어리 말을 들은 자는 신앙심 이외에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당시 애국사상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교 신봉자임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도 일부 맞는 사실. 어떤 면에서 종교는 사랑을 전파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이기도 하다.  

 

196

아무리 급박하여도 국가흥망에 대한 절실한 각오가 적은 민중과 더불어서는 무슨 일이나 실효 있게 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하면 아직 민중의 애국사상이 박약한 것이다.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격으로 때는 늦었으나마,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국가가 곧 자기 집인 줄을 깨닫고, 왜놈이 곧 자기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자기 자손을 노예로 삼을 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는 수밖에 다른 최선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였던 동지들이 사방으로 헤어져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신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나도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198

나는 종산에서 첫아기로 딸을 낳았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모녀를 가마에 태워 와서 찬 기운을 많이 쐰 탓인지, 딸아이는 안악에 도착한 후 바로 죽고 말았다.

 

204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나도 깨어라. 제발 좀 깨어라.

 

220

나는 깊이 생각했다. 이와 같은 위난한 때를 당하여 응당 지켜갈 신조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다. "드센 바람에 억센 풀을 알고 국가가 혼란할 때 진실한 신하를 안다"는 옛 가르침과, 사육신, 삼학사가 죽어도 꺾이지 않았다는 고후조 선생의 가르침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225

국가는 망해도 인민은 망하지 않는다.

 

226-227

왜놈이 신문하는 방법에는 대략 세가지 수단이 있다.

첫째, 가혹한 고문이다.

둘째, 굶기는 것이다.

그밖에 한 가지가 온화한 수단이다.

 

228

그럴 때(고문을 심하고 받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냄새가 코에 들어와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이해합니다.

 

229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 사식은 방 밖에서 밥을 따로 먹게 했다. 종록이 먹고 싶어하는 형상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방밖에서 밥을 먹다가, 고기 한 덩이와 밥 한덩이를 입에 물고 방안에 들어와 입 안에서 도로 꺼내 먹여, 마치 어미 새가 새끼에게 물어 먹이듯 했다.

실감나는 표현

 

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멋지십니다. 존경합니다.

 

241

감방에 들어가서 차례차례 인사를 하며 물어보니, 혹은 '강원도 의병의 참모장'이니 혹은 '경기도 의병의 중대장'이니 하여. 대부분 의병 두령이고 졸병이라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극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교제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가 순전한 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모장이라 하는 사람이 군대의 규율이나 전략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당시 무기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횡행하면서 만행한 것을 잘한 일처럼 큰소리쳤다.

 

244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는 귀절을 망각하였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늙어서까지 스스로 농사 짓지 않고 스스로 옷을 짜지 않아도 대한의 사회가 너를 입히고 먹였는데, 금일 왜놈이 먹이는 콩밥이나 먹고 붉은 의복이나 입히는데 순종하라고 먹이고 입혔느냐?

 

246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 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 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254

후일 우리나라가 독립한 후 감옥 간수부터 대학 교수의 자격으로 사용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기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서 선을 지도하기에만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 사회에서도 감옥살이 한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감옥 설치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되었다.

 

267

그럭저럭 내가 서대문감옥에서 지낸 것이 3년 여이고, 남은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이때부터는 마음에 확실히 다시 세상에 나가 활동할 신념이 생겼다. 그리하여 세상에 나가서는 무슨 사업을 할까 주야로 생각하였다. 나는 본시 왜놈이 이름 지어준 '뭉우리돌'이다. '뭉우리돌'의 대우를 받은 지사 중에 왜놈의 가마솥인 감옥에서 인간으로 당하지 못할 학대와 욕을 받고도, 세상에 나가서는 오히려 왜놈에게 순종하며 남은 목숨을 이어가는 자도 있으니, 그것은 '뭉우리돌' 중에도 석회질을 함유하였으므로 다시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지면 평소 굳은 의지가 석회같이 풀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세상에 나가는 데 대하여 우려가 적지 않았다. 만일 나도 석회질을 가진 뭉우리돌이면 만기 이전에 성결한 정신을 품은 채로 죽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결심의 표시로 이름을 ''()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쳐서 동지들에게 언포하였다. ()를 구()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복역중에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

그의 이상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눈물이 핑 돈다.

 

280

“어느 날이고 바람 잘 부는 날 두고 보자.

 

282

무오년 (1918 )11월에 인이가 출생했다.

 

289

국가가 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면에 한 치의 땅, 반 칸의 집도 내 소유가 없다. 과거에는 영욕의 심리를 가지고 궁을 면하려고 버둥거려 보기도 하고 독장수셈도 많이 하여 보았다.

 

 “자식들에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므로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주기를 원치 않는다. 너희들은 사회의 은택을 입어 먹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사회를 부모처럼 효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 더 만족이 없을 것이다.

 

291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민국 11 (1929. 54) 5 3일에 종료하였다.

 

하권

295

하권은 중경 화평 오시야항 1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67(1942)때 집필.

 

296

지금 내가 하권을 쓰는 목적은 내가 50년 동안 분투한 사적을 기록하여 숱한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298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 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한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자유를 잃으면 자살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302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백범은 여러해 감옥생활을 하여 왜놈 사전을 잘 알고 혁명시기는 인재의 정신을 보아서 등용한다. “이미 임명된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집햏하라.” 고 강권하였다. 결국 나는 경무국장에 취임하였다.

 

307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312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잡종회”라 부를 만한 모임이었다.

 

317

그림자나 짝하며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경청에서 자고 밥은 직업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323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327

나는 정부 국무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 파괴 등의 공작을 실행하게 되었다. 공작에 사용하는 돈과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는 일체의 전권을 위임받았고 다만 성공과 실패의 결과는 보고하라는 특권을 받았다. 그래서 제 1착으로 이봉창의 동경 사건을 주관하였다.

 

328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인 청도 <민국일보>는 큰 활자로,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 라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329

동경의 이봉창의거가 세계에 전파되자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우리 동포들 중 나를 동정하던 동지들은 크게 흥분되어, 나를 애호, 신임하는 서신이 태평양을 건너서 눈송이같이 날아들었다.

 

339

“이번 홍구사변의 주모 책임자는 따로 있으면서, 자기가 사건을 감추고서 관계없는 자들만 잡히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이유필 등 일부 인사들의 말이었다.

 

엄항섭으로 하여금 선언문을 기초하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시켜 로이터 통신사에 투고 하였다.

 

1932 5 10 백범은 한인애국단 영수 명의로 윤봉길 의거의 진상을 밝히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340

그러나 4.29사건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한인에 대한 감정은 놀랄 만큼 호전되었다.

 

4.29 사건 발생 이후 왜는 나의 목에 제1차로 20만원의 현상금을 붙였고, 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 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 3부 합작으로 현상금 60만원을 내 걸었다.(당시 일반 노동자의 급여가 일당 1, 한달 30원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343

나와 공근은 기차역으로 가서 당일로 가흥의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351

농촌을 시찰한 나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한, , , , , , 각 시대에 관개사절이 중국을 왕래하였다. 북쪽지방보다 남쪽지방 명조시대에 사절로 다니던 우리의 선인들은 대부분 눈먼 사람 이었던가. 필시 환상으로 국가의 계책이나 민생이 무엇인지를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352

우리 민족의 비운은 사대사상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학설 같은 것은 원래 주희 이상으로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 백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 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

 

353

정주의 방귀를 '향기롭다'고 하던 자들을 비웃던 그 입과 혀로 레닌의 방귀는 '달다'하니, 청년들이여, 정신을 좀 차릴지어다. 나는 결코 정주학설의 신봉자가 아니고 마르크스와 레닌주의 배척자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과 백성들의 수준에 맞는 주의와 제도를 연구, 실시하려고 머리를 쓰는 자 있는가? 없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으랴.

 

354

여사공과 선상생활

이후 아주 선중생활을 계속하였다.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

 

358

그로부터 소위 5당 통일회의가 개최되니 의열단, 신한독당, 조선혁명단, 한국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단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하였다.

 

이무렵 나는 임시정부가 무정부상태라는 조완구 형의 친서를 받고 심히 분노하여 급히 항주로 달려갔다.

 

360

나는 부득이 가흥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를 매월 15원씩 본가에 주고 데려와, 회청교에 방을 얻어 동거하였다. 나는 직업을 고물상이라 하고 여전히 광동 해남도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경찰이 호구조사를 와도 애보가 먼저 설명하고, 나는 직접 말하는 것을 삼갔다.

 

363

어머님은 세 살인 신을 우유로 길렀는데, 밤에 잘 때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물려 재웠다.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했다.

 

두 손자마저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데기가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365

“어머님께서 아이놈들을 데리고 다시 중국에 오셔도 이전과 같이 굶지는 않을 테니, 나올 수 있으면 오십시오.

 

367

9년 만에 모자 상봉하는 첫 말씀

 

 "나는 지금부터 시작하여 ''라는 말을 고쳐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네. 듣건대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다수 청년을 거느리고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나도 체면을 세워주자는 것일세."

 

이로 인해 나는 나이 육십에 어머님이 주시는 큰 은전을 입었다.

 

371

남목청에서 자동차에 실려 상아의원에 도착한 후 의사가 진단해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선언하여, 입원 수속도 필요없이 문간에서 명이 다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두 시간 내지 세 시간 내 목숨이 연장되는 것을 본 의사는 네 시간 동안만 생명이 연장되면 방법이 있을 듯하다고 하다가 ,급기야 우등병실에 입원시켜 치료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1938년 5월 6 남목청에서 이운환이 백범등을 저격한 사건

 

퇴원 후 즉시 걸어서 어머님을 찾아뵈었다.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이 말씀 뿐이셨다.

 

378

“어서 독립이 성공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 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379

어머님은 50여년 고생하다가 자유 독립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극히 원통하게 돌아가셨다. 대한민국 21(1939) 4 26일 손가화원 안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셨다.

 

어머님은 생전에 모든 일을 손수 처리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고,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보지 않으신 것도 특이하다고 하겠다.

 

394

몇 개월 동안은 광복군이 유명무실하여 연합국의 인기를 끌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 우리 임시정부 정청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일제히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서는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이들은 화북 각지의 왜군 부대를 탈주한 한인 학병 청년들인데, 부양으로 탈출하여 오는 것을 제3지대장 김학규의 지령으로 정부에 호송한 것이다.

 

395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 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 차 귀가하였던,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 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말에 한인 동포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국 인사들까지도 감격에 넘쳤던 모양이다.

 

* 장준하 김준엽 등 학병 출신들이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한 것은 1945년 1월 31 하오였다. 일본군 탈출 학병들에 대한 공식 환영식은 1945년 2월 5 임정 청사 1층 식당에서 개최되었고, 이날 학병을 대표하여 답사한 인물은 장준하였다.

 

* “선생님, 호박이 넝쿨째 뚝 떨어졌습니다.” 미군 윔쓰 대위가 백범에게 말했다.

 

400

7년간의 중경생활을 마치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여 무슨 말을 써야할지 말의 조리와 일의 두서를 찾기가 어렵다. 교자를 타고 남안 화성산에 있는 모친 묘소와 망자 인의 묘지를 찾아가 미리 준비해간 꽃을 바치고 축문을 낭독한 후 묘지기를 불러 돈을 후하게 주며 분묘관리를 부탁하고 돌아왔다.

 

401

입국할 행장을 준비할 때 가죽상자 8개를 사서 정부문서를 수습하였다.

 

* 가장 1차 자료인 임시정부 문서 8상자는 한국 전쟁중에 유실되어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로인해 임시정부에 대한 자료는 일본 정부의 사찰기록이거나, 대만 국민당 정부 소장자료가 대부분이다.

 

중경을 떠날 당시에 중국 공산당 본부에서 주은래, 동필무 등이 우리 임시정부 국무원 전체를 초청한 송별연이 있었다.

 

국민당정부에서도 송별연을 열었는데 장개석 선생을 위시하여 중앙정부와 중앙당부 각계 명망가 수 백인이 모였고, 우리 측에서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들이 초청받았다.

 

402

내 일생을 통하여 가족을 모아서 가정생활을 한 적은 시간으로도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생활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남매 일가와 거주하며 2~3년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에서 몇 개월 몇 년간 거주하였으나 역시 유랑생활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머문 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여 년 동안 어머님은 인과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생활을 계속했었다. 어머님이 9년 만에 다시 중국으로 오셨으나,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인과 신을 데리고 따로 생활을 하시고, 나는 나대로 동포들의 집과 혹은 중국 친우들의 집에 더부살이 생활을 계속하였다. 중경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404

오사야힝에 있을 때 폭격이 가장 심하던 4월 어느날, 새벽부터 9시간을 금탕가의 사설 방공호에서 지냈다.

 

그날 중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폭사하였다.

 

405

내가 옛 서적을 익힐 때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구절을 문인의 글재주로만 생각하였다. 그랬는데 그날 교장구에 나가 광경을 살펴보니 들것으로 방공호에 산재한 시체를 수집하는데 어린 아이 시체는 들것 하나에 2, 3명씩, 어른은 1명씩 모아서 쌓으니, 과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라는 문구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쓰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10

도착 즉시 윤봉길, 이봉창, 김경듣의 유가족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신문에 보도 하였다.

 

그럭저럭 민국 28(1946)을 맞이하자 나는 38선 이남지방 순회를 시작하였다.

 

412

다음날 아침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포기와 향나무 한그루 심고 떠났다.

 

423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427

자유란 무엇인가? 절대로 각 개인이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 하면 이것은 나라가 생기기 전이나, 저 레닌의 말 모양으로 나라가 소멸된 뒤에나 있는 일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430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반드시 최후적인 완성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이나 다 그러함과 같이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무한한 창조적 진화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와 같이 반만년 이래로 여러 가지 국가 형태를 경험한 나라에는 결점도 많으려니와, 교묘하게 발달된 정치제도도 없지 아니할 것이다.

 

431

가까이 이조시대만 보더라도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같은 것은 국민 중에 현인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제대로 멋있는 제도요, 과거제도와 암행어사 같은 것도 연구할 만한 제도다. 역대 정치제도를 상고하면 반드시 쓸 만한 것도 많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서 우리나라에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세계의 문운(文運)에 보태는 일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을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호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432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이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433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 및 구성

- 교감원칙

- 일러두기

- 백범 출간사

상권

- .신 두 아들에게

1. 황해도 벽촌의 어린 시절

1) 조상과 가정

2) 난산의 개구쟁이

3) 궁핍한 배움길

2. 시련의 사회 진출

1) 과거 낙방

2) 동학의 세계로

3) 팔봉 접주

4) 청계동 안진사

5) 스승 고능선

3. 질풍노도의 청년기

1) 북행 견문과 청국 시찰

2) 김이언 의병

3) 인연 없는 스승의 손자사위

4) 복수 의거,치하포 사건

5) 첫번째 투옥

6) 역사적인 심문

7) 사형수의 옥중생활

8) 파옥

4. 방랑과 모색

1) 서울로 도피

2) 삼남견문록

3) 출세간의 길

4) 장발의 걸시승

5) 동지를 찾아서

6) 스승과의 논쟁

7) 부친상, 미혼처의 죽음

8) 교육자의 길,그리고 결혼

5. 식민의 시련

1) 을사늑약과 구국운동

2) 안악 양산학교와 하기 사범강습

3) 각 군 순회 교육운동

4) 재령지역 교육운동의 추억

5) 신민회의 안악 사건

6) 세번째 투옥과 고문

7) 기약없는 15년형

8) 서대문감옥으로

9) 옥중의 의..

10) 기인과 영웅

11) 다시 인천감옥으로

6. 망명의 길

1) 출옥,고향으로

2) 농감생활

3) 상해 망명

4) 경무국장에서 국무령까지

5) 내 인생을 돌아보며

하권

- 하권을 쓰고 나서

1. 상해 임시정부 시절

1) 상해에서 첫출발

2) 경무국장 시절

3) 사상 갈등과 국민대표대회

4) 무정부상태의 국무령

2.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1) '일본영감' 이봉창

2) 일본 천황 불행부중

3) 윤봉길과의 짧은 만남

4) 홍구공원의 쾌거

3. 피신과 유랑의 나날

1) 위기일발의 상해 탈출

2) 광동인 장진구

3) 시골 농부의 민족주의

4) 여사공과의 선상생활

4. 다시 민족운동의 전선으로

1) 장개석 면담과 낙양군관학교

2) 5당 통일운동

3) 폭격 속의 남경생활

4) 어머님에 대한 추억

5) 가슴에 박힌 총탄

5. 중경 임시정부와 광복군

1) 전시수도 중경으로

2) 7당 통일회의

3) 광복군 창설

4) 대가족과 대륙에 묻힌 영혼

6. 해방 전후의 대륙

1)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2) OSS국내침투훈련

3) 왜적의 조기항복

4) 중경생활 회고

5) 해방 직후의 상해

7. 조국에 돌아와서

1) 감격의 귀환

2) 지나온 자취를 찾아서

3) 삼남지방 순회

4) 서부지방 순회

- 나의 소원

- 백범 연보

- 인물 찾아보기

 

백범일지는 일지라는 말 그대로 연대기적 순서의 기록이며, 또한 인, 신 두 아들에게 바치는 편지글이기도 하다. 3자의 시선으로 쓰여진 평전이 아니라, 스스로 생애를 쓴 자서전으로 사건에 대한 작자의 주관성 짙은 해석이 특징이다. 이에, 사건의 묘사 또한 실감나게 표현하여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다. 기인이 영웅이 되는 과정, 무지와 무식함이 구국이 되는 과정은 실로 감동적이다. 한 인간의 일생에서 원시에서부터 근현대의 시대 상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감동적인 장절

 

94

나는 곧 자문자답해 보았다.

. “네가 보기에 저 왜인을 죽여 설욕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 “그렇다.

. “네가 어릴 때부터 ‘마음 좋은 사람’ 되기가 소원 아니었더냐?

.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원수 왜놈을 죽이려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면 한낱 도적의 시체로 남겨질까 미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까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은 다 거짓이고, 사실은 ‘몸에 이롭고 이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원만 가졌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끝에 비로소 죽을 작정을 하고 나니,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파도는 어느덧 잔잔해지고 백 가지 계책이 줄지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225

국가는 망해도 인민은 망하지 않는다.

 

238

태산처럼 크게 보이던 왜놈이 그때부터 겨자씨와 같이 작아 보였다. 무릇 일곱 차례나 매달려 질식된 후 냉수를 끼얹어 살아나곤 하였지만, 마음은 점점 강고해져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일시적 국운 쇠퇴요,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불 보듯 확연한 사실로 생각되었다.

 

244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남이 만들어 준 옷을 입거늘

품은 뜻은 평생 어기지 말아야 한다.

 

소감

 

인생이란 무엇일까.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는 충격이었다. 인품과 학식이 고매한 신적인 존재일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김구 선생님은 자연인인 원시인 같기도 하고,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돈키호테를 연상시켰으며, 어떤 면에서는 살아가는 방식이 남다른 조르바가 떠오르기도 했다.   

 

김구 선생님 첫 인상은 참으로 무식하고 과격하였다. 하지만 읽을수록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마음과 몸이 일치한 삶, 머리와 가슴이 일치한 삶, 이상과 현실이 일치한 삶을 사신 분이다. 존경스럽다. 감동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김구 선생님이 남긴 자취는 태산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범일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흐름을 후대에 남긴 점과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 점으로도 그 가치가 뛰어나다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한 무식하고 과격한 인간이 이상과 현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뜨거운 삶을 살아간 이야기로서의 감동이 더 컸다.   

 

주해를 쓰신 도진순 선생님께서 역사적 사실이 기억에 의해 의존하였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주관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자서전의 특징일 것이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 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백범일지> 39)

 

인생이란 허영이나 망상이 아니라 진실일 것이다. 진실이란 속임이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이 행동으로 나올 수 있도록, 내가 끌리는 곳에 내가 있을 수 있도록, 내 글이 삶이 되고 내 삶이 글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진실되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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