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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3일 11시 37분 등록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10년마다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자아경영 프로젝트


구본형, 휴머니티스, 2007


1. 저자에 대하여 


구 본 형(具本亨, Bon-Hyung Goo)

출생/사

1954.1.15. 충남 공주 / 2013. 4.13

활동분야

변화경영사상가. 변화경영연구소장. 강연, 칼럼, 저술 활동

 

• 발 자 취 •  

• 저 서 •

서강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역사학, 경영학 공부

1980년~2000년 한국 IBM 근무(경영혁신 기획과 실무 총괄)

1991년~1996년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

2000. 1인 기업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 설립

2005.~ 연구원 제도 운영

EBS 라디오 <고전읽기>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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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yes24.com, 예스인터뷰>

1998. 익숙한 것과의 결별

1999. 낯선 곳에서의 아침

2000.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 떠남과 만남

2001.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2002. 사자 같이 젊은 놈들(미치지 못해 미칠 것 같은 젊음)

2003. 내가 직업이다

2004.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일상의 황홀

2005. 코리아니티 경영

2006. 공익을 경영하라

2007. 아름다운 혁명, 공익 비즈니스 / 사람에게서 구하라

2008. 세월이 젊음에게

2009. 더 보스 : 쿨한 동행

2010. 구본형의 필살기

2011. 깊은 인생

2012. 신화읽는 시간

2013. 그리스인이야기 

*유고집*    

2013.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

2013.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2014.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

……


■ 삐딱한 사진


 연구원 첫 수업이자 총회 때 미스테리 선배는 구본형 선생님의 사진으로 타일 액자를 만들어 나눠주셨다.그때 이후로 내 방엔 그 액자가 놓여 있다. 처음 이 액자를 집으로 데리고 온 날부터 나의 행동방식은 좀 조심스러워졌다. 책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조금 옆길로 샐려고 하면 선생님 사진을 조금씩 돌려놓게 되는 것이다.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지만 마치 나를 내려다보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선생님 사진은 더러 삐딱하게 놓여진 날이 많았다. 오프수업에서 교감샘이 내게 사부님이 계셨다면 엄청 혼났을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그동안 선생님은 거의 삐딱하게 나를 내려다 보셨겠다.




 해언이 집에 갔을 때 밖이 훤히 보이는 큰 유리창을 한 서재가 인상적이었다. 서재에 대한 꿈 중에 까페식 서재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밖이 훤히 보이는 공간에서 나만의 글쓰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책에서 쓰고 있듯이 그 집의 “서재는 유리를 많이 써서 햇빛이 듬뿍 들어오는, 좀 큰 서재”였다. 당연 그 서재에 머물렀을 때는 그 공간에 대한 부러움이 일었다. 진담 섞인 농담으로 이런 곳에서 글쓰면 정말 잘 써지겠다라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공간의 문제가 아님을 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의 구본형 선생님의 글쓰기 방식들이 눈에 띈다.


     나는 어떠한 줄거리도 없이 쓰기 시작한다. 그저 방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책을 구성하는 지도 같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좀더 확고한 글쓰기 방식이나 주제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뭘 제대로 써봤어야 나의 방식이라 불릴 것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원 과정에서는 구본형 선생님의 책 북리뷰가 많다. 그래서 제법 저자에 대한 조사를 여러 번 한 듯하다. 처음에 비해 구본형 선생님에 대한 조사가 좀더 짧아지고 감성적으로 되는 듯하다. 지난 여러 번의 조사를 통해 저자에 대한 객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서일까. 비교해 보니...



알지도 못하는 이의 글을 읽고 그의 생각을 읽고 그의 삶을 읽었다. 아직,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완전하게 안다고 말하진 못한다. 역시 사부님이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문득 그가 나에게 미친 영향이 뭐가 있지라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까지 흘러 왔다는 것이 그가 준 영향이다. 이것만큼 그가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 그의 저서를 다 읽었다는 것만큼 뚜렷한 증거가 또 있을까.

 구본형을 아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으면 그는 그들에게 신화가 되어 있다. 그의 모험과 변신은 그들에게 자극이 되었고 그들에게 ‘엑셀시어’의 정신을 북돋웠다. 그들을 선동하게 했고 그들에게 방향을 일러주었으며 그들에게 영원한 그리움이 되었다.

 이제 내게도 되뇌면 애틋하고 그리워지는 이름이다. 책상 위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문득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볼 때면 이 인연에 놀라게 된다. 의지를 불태우다가도 서글퍼지기도 하는 시간이지만, 마음이 순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의 여정은 굵직한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무게감이 느껴진다. 나는 아직 나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못했고 늘 나를 부르는데 주저하지만, 내 삶도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이름을 부여하는 날이 오리라.

 

“자기 경영은 자신의 미움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격앙되어 싸울 때는 진흙탕의 개처럼 싸우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적의와 증오를 갈무리하여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짐과 결별하고 피와 화해하는 신성한 의식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순간은 다 마지막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그 단명함으로 처연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는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인생이니 내 품아 안아 들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편지>를 다시 들춰보다가 한 페이지에 시선이 갔다. 변화경영사상가로 소개된 저자의 명함이었다. 그때 내게 묘한 충동이 일었다.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려고 한 것이다. 친한 이들에게도 전화를 잘 하지 않는 나였다. 아무도 받지 않을 테니 걸어보겠다는 심사였을까. 그를 만난 일도, 이전에도 그에게 전화나 편지를 전한 일도 없다. 나의 이 충동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1년 사이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많이 접한다. 마지막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저자에 대해서 좀더 담담하게 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와 아무런 인연이 없기에 그의 책에서, 여러 자료들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격앙되어 비평하진 않더라도 객관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와 마주친 일이 없으니 그렇다. 동시대를 겹쳐 살았지만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살다가 한 꼭지점을 마주하고선 더듬더듬 걸어 갔을 땐 늦었다. 여전히 그는 어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다. 하나의 에피소드라도 있다면 풀어내고 싶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해줄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 말고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나는 그저 주워들은 이야기, 곁가지로 들은 이야기들로 그의 생을 꿰맨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모르고 그렇게 또 그를 안다.

 나는 그를 조각조각 만났다. 글을 보았고, 그리하여 그의 생각을 보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뒤에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고, 또 그보다 뒤에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면대면으로의 마주함이 아니라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와 나 사이엔 거리가, 전파가 존재했다. 처음 목소리를 듣고 나서 며칠 동안, 사진에서 보았던 얼굴과 매치가 되지 않아 나홀로 애를 먹었다. 그 목소리는 그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나 혼자서 퍼즐을 맞추듯 그의 목소리로 온전히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내가 그에게 어떤 이미지를 품고 있었기에 그러했을까.

 내가 책으로만 그를 접했을 때만 해도 그는 충분히 나에게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책에 대해서 평하고 거기서 새어 나오는 그의 인생을 조금 살펴본 것으로도 그를 평가하였다. 그리고 저자로서 그가 얘기한 삶과 구본형으로서의 삶이 같을까?에 대한 물음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에 좋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인의 입을 통해서 그는 충분을 넘어서 다시 기대하게 해 주었다. 예비 연구원 설명회장에서였다. ‘구본형 중독주의자’들로부터 진심의 존경과 애정을 받는 모습에 활자로 엿본 그의 인생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가 떠난 후 추모회장 한켠에서 그를 추모하고자 했는데, 그때에도 ‘구본형 중독주의자’들로부터 그의 생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듣게 되었다. 에피소드들이니까, 기억이니까 하더라도 그의 생이 단순히 글로만 떠들었던 삶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연구원과 꿈벗, 그리고 그에게 애정을 갖는 많은 독자들에게 그가 그 자체로 정말로 축복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도 그의 연구원과 꿈벗, 그에게 애정을 갖는 많은 독자들, 구본형 중독주의자들이 축복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 구본형의 명명(命名)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에 이름에 관한 언급이 있다.

 “그들의 이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라티노스라고도 하고 나우시토스와 나우시노오스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모르면 어떤가? 그들은 그 후 한번도 자신을 세상에 알릴만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 그 이름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p314~315)

 이름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름을 통해 한 사람의 생애를 인지하고 기억한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뛰어넘어서도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거침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몰라도 상관없다고 외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관계하며 많은 이름을 얻게 된다. 그 속에 그들의 역할과, 행적과, 이상이 담겨 있다. '기억‘의 주체를 나로 볼 것인가, 타인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누군가에게 기억하게 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결국 이 모두가 나의 ’알릴만한 일'에 따르는 귀결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제 이름으로 기억되려면 우리는 ‘세상에 알릴만한 일’ 하나쯤은 해야 한다.

 자, 그럼 우리도 잠시 비판적이 되어 보자. 당신은 이 작가를 아는가? 당신은 그를 어떻게 부르는가? 왜 그렇게 부르는가? 그가 행한 어떤 알릴만한 일로 그를 기억하는가? 그를 부르는 명명에 따라 그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구본형


 그는 1954년에 태어났고 2013년 4월 어느 날, 59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결별했다. 그가 익숙한 이 곳과 결별하게 된 것은 폐암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마지막까지 아픈 몸을 숨기고 EBS 라디오에서 『고전읽기』를 통해 ‘변화경영’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온전히 그의 생을 ‘축제’로 승화시켰다.

 그는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이후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좋은 역사학자이자 대학교수를 꿈꾸었으나 1980년이라는 한국의 시대적 현실 속에서 파생된 몇 가지 이유로 그 꿈을 포기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그는 회사원으로서 평범하고 지루한 삶을 살았다며 ‘가끔 내가 가보지 못하고 끝나버린 역사학자의 길을 한숨 쉬며 되돌아보곤 했다(그리스인이야기, p450)’고 술회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지나간 삶에 대해 한번쯤은 회한을 갖기 마련이고, 그가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알만한 글로벌 기업의 간부를 지냈다는 점, IMF의 고비 속에서도 한 직장에서 20년을 근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평범함을 넘어선, 안정적인 성공적 삶을 살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인간이 겪게 되는 자연스런 삶의 고민들을 겪고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40대란, 이른바 중년의 사춘기이다. 또한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이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욕구 5단계를 설명하며 마지막 단계를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이야기하였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키워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고픈 욕구라고 할 수 있는데, 욕구는 인간의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요인이 된다. 이와 같이 흔들리는 40대에 그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자아실현의 욕구를 이루어나가고 있으니, 실로 인간의 욕구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이자, 또한 강한 행동력으로 변화를 이루어가는 평범치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는 40대에 그가 늘 다루던 직장의 ‘변화경영’의 개념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이루며 작가로서 내딛는다. 세 번째 책이 출판된 해, 마흔 여섯에 20년간 몸담았던 직장과 이별하며 1인 기업가로서 지금까지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매일 하루 두시간을 자기를 위해 쓰기를 강조하며 자신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두 시간씩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꾸준한 글쓰기는 매년 한권씩의 책을 출간한 결과로 나타난다(혹여, ‘안 보는데 어찌 알리오?’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를 가보면 안다. 홈페이지 칼럼이나 댓글 등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글의 업로드 시간이 새벽시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은 IBM에서 20년간 근무하였다. 그가 맡은 역할은 ‘변화경영’의 기획과 실무를 총괄하는 것이었고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으로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조직들의 경영혁신과 성과를 컨설팅했다. 그의 업무와 연관된 대표적인 저서가 『월드클래스를 향하여』(2000)이다. 이 책에서 그는 경영품질모델인 ‘말콤 볼드리지 모델’을 경영자와 직장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공익을 경영하라』, 『아름다운 혁명, 공익 비즈니스』를 통해 변화에 무관한 듯 보였던 공공기관과 비영리조직의 변화와 혁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변화와 혁신이라는 업무 영역에서의 활동은 1992년 한국능률협회로부터 제1회 '경영혁신대상' 개인 공로자상이라는 영광을 주었다. 직장을 나와서는 방송에 소개되기도 하고 현재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여러 기업체 및 학교 등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강연을 통해 2005년에는 삼성 SDS E캠퍼스 강사 3,000명 중 최고의 강사, 기업 CEO들이 뽑은 최고 변화경영 이론가, 직장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강연자 1순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활동이,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직장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는 점이, 그가 ‘변화경영’ 분야에서 오래 일하고 그를 바탕으로 저서를 집필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저서를 직장인들의 업무 관련서로서의 실용서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은 그가 공부한 역사학과 경영학이 조화롭게 ‘변화’라는 주제와 만나 그만의 특징을 나타내며 인간의 근원적인 사색의 힘을 일깨우며 자아성찰과 함께 행동력을 일깨우고 있다. 아마도 책 속에 묻어 있는 치열한 자기 고민과 사색의 힘, 그가 겪은 경험들에서 우러나는 통찰력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처음 집필한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부터 『낯선 곳에서의 아침』, 『사자같이 젊은 놈들』, 『깊은 인생』등 그의 저서들은 변화를 하게끔 해주는 매뉴얼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실용서가 아니라 그 변화의 욕구를 관찰하고 자신의 내적인 동기를 탐험하게 하도록 해주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그가 말하는 변화의 개념을 보자. 그는 『낯선 곳에서의 아침』에서 변화란 살아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변화하며 변화하지 않는 것들은 죽은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1년 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1년 동안 죽은 있었던 것이며, 어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난 24시간 동안 죽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 있다. 매일 글을 쓰고 매년 책을 내고 있는 그는 어제와 같지 않고 1년 전과도 같지 않다.

 어쨌든 그는 ‘변화’라는 것을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자기 삶에서 쉽게 적용하지 못하고 어렵게 느끼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변화경영’이라는 개념으로서 인문학적인 성찰과 경영학적인 마인드로 개인의 자기 혁명을 이끌어내도록 하고 있는 오래도록 이 분야를 다루고 익혀온 ‘변화경영의 전문가’이다.


3) 부지깽이 - 사부님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다 보면 ‘부지깽이’라는 닉네임이 눈에 띈다. 부지깽이는 불을 지필 때 나무가 잘 탈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이다. 닉네임의 주인은 저자 본인이다.『더 보스:쿨한동행』(2009)에서 그는 이상적인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는 좋은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상사는 부지깽이, 부하는 땔감’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보다 앞서서 이미 스스로를 부지깽이라 칭하고 있다.


 “종종 나는 나를 ‘부지깽이’ 라고 부르곤 합니다. 어떤 감흥으로 그저 그렇게 불러 보았지요. 불이 꺼지려 하면 불씨를 뒤적여 불을 살려내고, 불이 너무 기세를 돋아 몽땅 태우려들면 누르고 벌려 불길을 가라앉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부지깽이지요. 그러다 종종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어 제 몸을 태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를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라고 부를까 생각 중입니다1)”.


 이와 같이 스스로를 부지깽이라고 부르려면 땔감이 있어야 한다. 그에게 땔감이란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들과 꿈벗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그는 ‘창조적 부적응자’라고 칭한다. 이들은 자기 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공허함을 느끼며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길을 찾고자 하는 모색이 절망이 아니라 창조이기 때문이다2).

 그가 운영하고 있는 연구원 제도에서 연구원들은 매주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칼럼을 쓴다. 이러한 과정을 1년 동안 진행하여 50권의 독서와 50개의 칼럼을 쓰고 이후 자신이 쓰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들을 그가 이끌어 주고 있다. 또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운영하며 이른바 꿈벗을 양성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평범한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와 소망을 찾아 위대한 삶의 전환을 모색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서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이 있다. 이것은 저자 자신이 날마다 새벽기상을 실천하며 꾸준한 글쓰기를 해 온 것과 같이 많은 이들에게 하루 2시간의 자기 혁명을 이루도록 새벽기상과 새벽활동을 습관화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그는 많은 땔감을 모아두었고 이들 땔감은 부지깽이의 손놀림 아래 열심히 불을 피우고 있다. 그리하여 이처럼 많은 땔감들을 통해 그는 ‘사부님’ 또는 ‘스승님’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땔감과 함께 그 또한 성장한다. 연구원 제도를 진행하면서는 그 또한 함께 읽고 쓰는 과정을 하는 것이다. 또한 땔감의 습도와 종류에 맞추어 적절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그가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반응하고 있는 모습은 역시 홈페이지의 무수한 댓글과 땔감에 대한 글들, 땔감들이 만들어낸 서문 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부지깽이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직화된 학교라는 정형화된 틀 속에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이러한 연구소를 설립하여 땔감을 부지런히 만들어 나가고 있는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 그 자신의 끝없는 변화와 자기혁명의 자세를 볼 수 있다.


4) 변화경영사상가


 그는 스스로를 변화경영사상가라고 칭한다. 이는 ‘변화경영전문가’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변화경영전문가라는 그의 역할을 충실히 해온 그 자신에 대한 또다른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매년 발간되는 그의 저서 속의 저자 소개에서도 나타난다. 그동안 변화경영전문가로서 소개되던 책에서 어느 날부터 ‘변화경영사상가’라고 소개되고 있었다(2008년 출간된 『세월이 젊음에게』에서는 여전히 변화경영전문가로 소개되고 있는데 2009년 『더 보스:쿨한 동행』에서부터는 변화경영사상가로 소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전환은 어떤 인식에서 이루어졌을까.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전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기술적인 컨설턴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제 그것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공부하여 알게 된 것과 체득한 깨달음을 마음대로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생각을 다루고, 태도를 다루고, 가치를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전환했다(깊은 인생, p98).”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명명에 주저함이 없는 그의 면면이 드러난다. 실제 그의 저서는 동서양의 철학이 넘나들고 특히 그가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화’에서 ‘변화’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미 그는 모든 저서에서 사상가로 스스로를 명명하기 위한 생각들을 실천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화를 전면에 내세운 『신화읽는 시간』,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책이 발간된다.


5) 변화경영시인


 그는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스스로를 명명하면서 언젠가는 ‘변화경영시인‘이라 부르고 싶다고 한다. 그것이 작가 인생 후반기의 진화 여정이라고 얘기한다. 그는 삶을 시처럼 살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가 말하는 시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시처럼 살고 싶다. 나고 깊은 인생을 살고 싶다. 무겁고 진지한 삶이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고, 그 바람길 위의 새처럼 가벼운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내면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깊은 기쁨, 그것으로 충만한 자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지. 어느 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사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문득 의미를 발견하여 말할 수 없는 헌신으로 열중하고, 평범한 한 여인이 문득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내면의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는 느닷없는 전환은 아름답다. 그것이 삶을 시처럼 사는 것이다(깊은 인생, p11)”


“나는 삶을 시처럼 살다 가고 싶다. 책을 보고 싶으면 책을 즐기고, 비가 내리면 비를 즐기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걷고,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낳아 그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 내 세계 하나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사람들과 삶의 기쁨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에게는 살아 있음의 흥분과 떨림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는 특별한 장점은 이렇게 감흥이 도도하게 일어나는 삶의 체험들을 책 속의 지식들과 뒤섞어 그 속에서 무엇인가 진득한 수프를 끓여내는 것이다(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p451)”


 삶을 시처럼 살고 싶은 열망은 2002년에도 보인다. 『사자같이 젊은 놈들』 속에 ‘시처럼 살고 싶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미 작가는 오래 전부터 그가 살아가고픈 인생을 그리며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던 듯하다. 시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듯 깊은 인생을 진득한 수프로 끓여내는 일이라면 그는 그가 좋아하는 신화이야기를 가지고 『그리스인이야기』라는 진뜩한 수프를 마지막으로 끓여 내었다. 여기에서 그는 신화 속 영웅들의 삶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면서 또한 시로서 풀어내고 있다. 그가 신화 속 이들의 삶을 들려주며 종국에는 그들의 삶을 서사시처럼 읊어 내는 것처럼 그의 삶도 누군가에게, 또 그 자신에게 시로서 읊어 지리라. 그리고 그가 바랐듯이 ‘시처럼 살고 싶은 인생’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있어 그의 인생 또한 한 편의 시처럼 기억되리라.

 그가 떠난 후 그가 남긴 글들과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전한 내용을 토대로 세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 그가 남긴 글들에서 선별한 60편을 묶은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디오 고전읽기를 통해 남긴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이다. 그가 사랑한 시, 그가 쓴 시들 역시도 한편으로 묶여졌으면 하며 ‘변화경영시인’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고 한, 그에게 변화경영시인이라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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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http://www.bhgoo.com)

•‘태몽 혹은 인디언식 이름’,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마음을 나누는 편지」 중, 2008.2.15일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어떻게 발견할까-『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구본형, 채널예스인터뷰. 2012.9.25.

•각 저서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개정판 서문


p5~6 과거를 기록하면서 미래를 얻었다는 점이 이 책을 쓰면서 얻어낸 최고의 수확이다. 마흔 살 10년을 쓰면서 나는 내가 앞으로 10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냈다. 이것이 역사의 위대한 점이다. 미래는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를 딛고 이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충분히 썩어 비옥해진 과거가 미래의 수확량을 결정한다는 것은 농사를 한 번이라도 지어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다. 과거를 충분히 썩혀 소화해내지 못하면 과거가 살아서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 즉 과거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관성, 과거의 습관, 과거의 자취와 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과거의 온갖 흔적, 그 영욕을 묻어 깊이 썩혀두면 우리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것이 앞길을 밝히는 불빛이 된다.


책을 펴내며


p8 이 책은 나에 대한 기록에 기초한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이다. 그러니까 유명한 인물들이나 쓰는 자서전 시장에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끼어든 것이다. 그들에게는 불쾌한 일이고 나에게는 특별한 일이다. 이 책의 부제는 그래서 평범한 인간의 결코 평범치 않은 이야기라 불러 마땅하다.

⇒ 평범한 인간, 되돌아보면 구본형은 정말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p9 이 책을 쓰다가 쓰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덤을 얻었다. ‘자서전’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임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내가 살았던 삶이며 동시에 내 속에 있는 그들의 삶이었다. 나는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인간에 대한 성찰의 확대라고 믿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밑으로부터의 이야기’, 이것이 위대한 인물과 힘있는 자들의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역사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 가장자리에 존재했던 무수히 작고 개별적인 인간들이 증발해서 사라져버린 역사학, ‘인간이 없는 인간에 대한 기술’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역사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으면 잊혀진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평범한 개인에게 있어 개인사의 편찬은 본인의 과제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그 프로젝트다.

⇒ 기록의 힘을 알지만, 기록하지 못하는 것은 습관이기도 하고. 기록에‘특별한’수식을 붙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한 주제와 내용에 대한 기록을 먼저 인식하고 소소한 것에 대한 등한시가 이유가 될 것이다.


p10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은 바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자신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p11 사라진 문명이 되지 않는 것, 나아가 남은 시간을 찬란한 문명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 프로젝트(Me-story Project)'가 절실한 이유이다.


프롤로그


p15 시간이 다 되어 그 많던 모래알들이 다 떨어지고 마지막 촛농이 숨을 다할 때…… 이때 인생을 돌아본들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후회 속에서 긴 한숨을 지어본들 갈 길을 재촉 받을 뿐이다.


p16 이야기를 기술하는 방식은 역사와 소설의 중간 형태를 취하기로 했다. ‘무릇 심오함을 가장하는 자들은 가면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비밀로 남고 싶어하는 과거도 있었고, 이미 지나갔지만 여전히 모호하고 불명확한 감정과 느낌으로 남아 있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떼어내면 40대 10년간의 내 진짜 모습이 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털어내되 그 이야기에 책임지지 않는 방법, 즉 화자와 이야기를 분리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의 도움을 받았다. 그것이 소설이다. 소설은 거짓과 농담을 가장한 진실과 진담임을 알게 되었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실제와 가상이 어울리며, 미래와 과거가 전도되고, 욕망과 성취가 혼동되는, 그래서 더욱 나다운 그림을 그려보려 했다.

⇒ 나 또한 이러한 점에서 소설이 좋다. 적당의 구라와 진실이 공존하는 이야기방식.


p17 이 책은 놀이며 유희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고 욕망에 대한 절제다. 못 가본 삶에 대한 질투이다. 그동안 배운 학습의 노트이며, 읽었던 책들의 주석이다. 자전적 소설이고, 소설적 자전이다. 지나간 삶에 대한 파괴고, 앞으로 살 삶에 대한 창조이다. 나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보려는 실험이다.

     과거는 늘 엄격하고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 감옥이기도 했다. 과거가 날 만들었으니, 과거를 버리고 벗어나는 것이 또한 내 미래의 과제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였다, 살면서 나는 여러번 죽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 인용구가 많은 것도 이러한 전제가 있는 듯.


1장 지난 10년


p21~22 마흔 살은 오래 끓어 걸쭉해지기 시작한 매운탕이다. 바야흐로 인생의 뼛속 진국이 우러나오는 시기이다. 마지막 젊음이 펄펄 끓어오르고, 온갖 양념과 채소들의 진수가 고기 맛에 배고 어울리는 먹기 딱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절정을 살짝 지나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마흔은 한 움큼 잡히는 옆구리 살에서 시작한다. 술 취한 다음 날 아침이 괴로워지고 숙취가 길어지면 마흔도 익어간다. 읽기 위해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고 신문을 점점 멀리 보내면서 마흔의 황혼기로 접어든다. 조금씩 내려앉는 잇몸, 새벽 2시의 불면증, 당혹스러운 건망증, 우두둑거리는 어깨관절뼈 소리를 들으며 어느덧 마흔아홉이 지나간다. 40대의 10년은 이렇게 저문다.

⇒ 마흔이 되리라 생각지 못했던 어린 10대의 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삶의 흔적들이 40에 느껴진다.


p22 육체는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힘줄처럼 질기다. 그러나 육체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안으로부터 비대해지고 느슨해진다. 모든 것의 궤멸은 늘 내부로부터 온다.


p24 마흔은 가끔 불면증과의 동행과 동침을 의미했다. 나는 오히려 불면을 즐겼다. 불면 역시 주어진 것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찾아오면 싸우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 나 또한 불면의 밤엔 주먹을 움켜쥐고 투쟁했다. 끝없는 생각의 싸움으로.


p25 고독은 비 같은 것이다. 식물을 밤 사이에 자라게 하는 그런 것이다.


p27 40대가 천천히 지나가면 청춘도 지나간다. 서서히 육체의 쇠락이 팽팽한 낚시줄처럼 감지되고, 은은한 불안이 검은 동굴처럼 다가오면, 여자와 불처럼 사랑을 하고 싶어진다. 인생을 드라마처럼 전화시키고 싶어하고, 마음을 누르는 이 초라한 공허 속에 긴장과 갈등, 그리고 비극적 사랑을 담고 싶어한다. <설국>의 주인공처럼 눈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불행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마지막으로 소설과 영화처럼 사랑하고 싶어한다. 50대가 되기 전에, 노인의 모든 특성이 나타나는 그 끔찍한 나이가 오기 전에, 아직 젊음이 늦여름처럼 무더운 이 40대에 마지막 폭염 같은 사랑으로 성년의 절정을 매듭짓고 싶어한다. 중년의 금지된 사랑은 평범한 사람들조차 황홀하게 극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떨쳐버리기 어려운 유혹이다.


p30 남자는 ‘여자가 길들인 마지막 가축’이다. 그러나 반밖에 길들여지지 않아 늘 울타리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어한다. 자유는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확실한 것, 굳건히 서 있는 것들의 질서 안에서 자유는 끝나고 만다. 절실하게 바라지만 자유가 주어지면 우리는 자유를 두려워한다. ‘이내 스스로를 함부로 던져 망가뜨리고’ 만다.

⇒ 내가 이러한 문구에 반발해야 되는 것 맞지? 명색이 성별영향을 평가하는 이로써 말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쟁,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인식, 그 인식에 불편한 여성의 시각.


p30 사랑은 다른 애인을 찾아냄으로써 진보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감정으로 위장된 반복 속에서 소모될 뿐이다. 사랑은 늘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증식되는 능력이다. 그것은 영혼의 갈망 같은 것이다.

⇒ 그래, 사랑은 대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아니다.

 

p31 현실은 늘 죽음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오직 삶만이 현실의 위력에 눌려 죽어지낸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현실적으로밖에 살지 못했던 그 초라한 현실을 후회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 왜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모든 시간을 그 욕망에다 다 쓰고 말았을까? 모호하고 불확실함 속에서 그것만은 가능한 성취로 보였기 때문일까? 아, 왜 그를 추월해 승진하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졌을까? 그를 동정하면서 비웃었던 우월감이 얼마나 부질없는 비천함이었던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자제와 절제를 현명함으로 불렀던 그 어리석음은 또 어떻게 하랴.

     현실만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때려주고 싶다. 그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 역시 한때의 꿈보다 더 영속적이지 못하다. 인생은 결국 짧은 꿈이었다는 것을 모든 죽어가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 살아서는 현실적으로 살지 못하는 초라한 현실을 힘들어하고. 삶이란 그런 게지.


p35 오늘 아침에 한 일이 잘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기억으로부터 자유롭다.

⇒ 오늘 아침에 한 일이 잘 생각나지 않은 건, 딱히 뭘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p36~37 나는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곧잘 낙관적인 정신적 전환에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 이것이 나의 강점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문제에 끌려 다니는 것을 더욱 싫어한다. 나는 문제를 일상에 던져진 예기치 않은 모험과 도전으로 인식하곤 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면 새로운 단면과 만날 수 있다. 최선의 해결책에 도달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던져주는 여러 상징을 해석하고 가능한 여러 해결 방법 가운데서 내게 적합한 방법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니까. 물로 모든 문제가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안고 살면 되는 거지.

⇒ 너무나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는 사실, 뜬금없는 낙관적 관점이 견지된다. 아니, 체념인가.


p37~38 40대는 이제 특별한 사회적 상징을 담은 언어가 되었다. 그것은 가장 정력적인 나이에 버려진 나이다. 40대의 10년 가운데 어딘가에 버려진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들은 너무 쉽게 버려졌고, 성장의 문턱에서 거부되었으며, 왕성한 상태에서 퇴출되었다. 마흔은 앞으로 길게 남은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20대 또는 30대에 준비한 인생으로는 마흔 너머의 인생을 꾸려갈 수 없게 되었다. 마흔은 이미 서산에 지는 해가 되었다. 마흔은 사회적으로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던지지 못하는 황혼의 여생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미 마흔을 넘어서고 있었고, 직장 속에서 나는 이미 지나간 세대에 편입되었다. 아무도 내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나의 과거는 거대한 사회적 방망이에 의해 가슴을 강타당했다. 배반같기도 하고, 비애같기도 하며, 무력감 같기도 하고, 허무 같기도 한 통증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뒷방노인이 된 마흔이여.


2장 마흔 살


p43 나는 그를 혐오했다. 그는 늘 과거를 과장했다.

  “바쁘게 지낸 과거가 지금의 나를 만들고 말았지. 지금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해 공허한 한 남자를 말이야.” 

⇒ 바쁘게 지낸 과거, 그러니까 열심히 살았던 과거가 현재도 미래에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때 얼마나 한탄스러운가.


p43 나는 그런 그를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혐오하는 그가 나와 동질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든가, 동질성을 인정하고 적어도 그를 혐오하는 것을 중단해야 했다.


p46 마흔이 되었을 때 내게는 나의 세계가 없었다. 내 삶은 줄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창조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저 짜여진 일과 속에 놓여 있었을 뿐이다. 직업을 통해 이루어야 할 내면적 발전이 없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나는 이미 중년이 되어 있었다. 육체적으로는 아직 활력이 넘쳤지만 인생 깊숙이 자리 잡은 피로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 그런데, 직업을 또 찾으려니 그것두 서글프다.


p47 마흔 살은 늙지도 젊지도 않다. 대부분 결혼을 했으며 살기 위해 일한다. 마흔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지치게 된다.

⇒ 마흔이 아님에도 지친지 오래.


p50 30년 이후 18년은 당나귀에게서 받은 생애다. 쉬지 않고 일하고 채찍질을 당하며 일상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그 다음 12년은 개에게서 받은 생애다. 양지에 엎드려 웅얼거리고 으르렁거리거나 졸며 지낸다. 나머지는 원숭이에게서 받은 생애다. 비로서 이때가 되면 자유로워진다. 제 좋을 대로 행동하지만 이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된다. 모든 관절이 녹슨 문짝처럼 삐걱거리고 겨우 걷고 먹을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비극이다.

⇒ 그것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인지?


p50 마흔 살은 당나귀의 삶이다. 젊은이들의 자유를 포기한 채 두 어깨에 가득 짐을 지고 홀로 사는 짐승이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행을 거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위대한 화가나 음악가가 되고 싶어하기도 하고, 백만장자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아니면 아직 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해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일 뿐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흔 살이 되면 사람들은 밀려드는 피로감 때문에, 자신에 대한 다소의 실망감 때문에, 또는 그동안의 실패의 전력 때문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저만치 물러앉는다. 노력이란 얼마나 지루한 가시발길인가!

⇒ 마흔이 되기 전부터의 패배적인 삶. 미래를 꿈꾸지 않기 때문일까. 지나치게 꾸기 때문일까.


p51~52 실제로 마흔 살은 무언가를 해놓은 나이이다. --- 대부분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자라 어엿한 성인이 되고 있다. 작지만 집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 공들인 흔적이 남아 있으며, 큰마음 먹고 장만한 세간들도 있다. 삶은 충분히 의미있는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젊었을 때의 그 휘황한 상상들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 어, 해당되는 게 없다...


p52 위대한 인생이 그림이 마흔이 되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적인 관심이 자신에게서 가족에게로, 자식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어쩌면 마흔 살은 여성적인 특성의 수용이기도 하다. 그동안 자신을 움직였던 힘과 지위와 성취에 대한 경쟁심리를 옆으로 치워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대 신 좀더 감성적이 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여성적인 특성을 받아들인다.

     마흔이 넘으면 사람들은 외부를 변화시키는 것에 무력해진다. 그들은 자신을 믿는 대신 더 힘이 센 다른 사람과 제도의 힘에 의존하게 된다. 타인에게 의존함으로써 노예가 된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는 여성들은 이때 깨어난다. 여성의 마흔 살은 남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남자는 마치 지는 해처럼 시들지만 여자들은 보름달처럼 절정을 향해 달린다.

⇒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들면 남성적 호르몬이 더 발생한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p53 중년의 여성은 ‘남성으로 변한 여성’이다. 성숙한 여성은 남자가 잃어버린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중년이 되면 남자와 여자가 그 성적 역할을 바꾸는 상징적 이미지다. 여성은 현명해지고 다소 교활해지며 강해진다. 그동안 여성은 억압받고 수동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 남자가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여성들은 숨어 있는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의지하여 일어선다. 남자들이 영웅적인 여행을 포기할 때 그리하여 자발적이고 공격적인 경쟁심을 상실해갈 때, 여성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이런 르네상스적 힘과 공격력을 회복하게 된다. 다 큰 자녀를 떠나보내고, 그들은 남성이 벗어놓은 옷을 입고 굉장한 여행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사회화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면 정신적 에너지를 자기 안의 대상을 공격하는 데 쓰게 됨에 따라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p54 마흔이 넘으면 불운과 실수에 대하여 스스로를 용서하게 된다. 실패와 무능력과 비겁함은 비난받아야 할 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비극의 문제로 전환된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강한 자에 대한 비난은 탄식과 슬픔이 된다. 겸손과 동정과 베품은 이런 비극적 통찰에서 나온 변환이다. 이러한 자기수용은 자아통합(ego-integrity)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마흔 살은 융통성이 시작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보는 긍정적 지혜가 위로가 되는 시절이다.

⇒ 마흔이 되면이 아니라 불운과 실수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이 포기임. 수용이 되는 것 같다.


p54~55 젊은이들의 창조성은 발작적인 불꽃같다. 그들의 창조성의 99퍼센트는 영감에 의한 것이다. 모차르트의 창조성과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자유롭고 미친 듯하여 순수하고 유치하고 경박한 뜨거운 창조성이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 나타나는 창조성은 ‘발작적 불꽃’이 진화하고 성숙하여 하나의 습관과 태도로 변한 일종의 믿음직한 기술로 바뀌게 된다. 이때 에디슨의 말이 적용된다.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땀’이란 말은 중년의 창조성에 대한 명언이다. 마흔 살 너머의 창조는 학습과 훈련과 가벼운 정신적 태도의 산물이다.

⇒ 영감을 기다리다 이제까지.


p56~57 마흔이 되면 악에 대해서조차 관용적이 된다. 이것은 중년의 융통성이고 미덕이 된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쉽게 도덕적 모호함에 관대해진다. 선과 악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가지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더 관용적이 되는 반면 덜 도덕적이 된다. 그리하여 도덕적 상대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젊은 시절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용했던 이분법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삶의 전체 모습을 해석할 유연하고 더욱 복잡한 새로운 지혜를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막 부모가 된 젊은 성인들은 모호함과 불안정한 상태를 참기 어렵다. 그들은 전통에 기대고 과거의 지혜, 어쩌면 그동안 거부했던 부모들의 지혜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흔이 되면 단순한 이분법과 전통은 더 이상 등불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해석한 세상을 가지게 된다. 중년의 개인들은 삶을 통해 인간에 대해 더욱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금기와 확신의 딱딱한 껍질을 버리고 각각의 독특한 개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기회를 갖게 된다.


p57~58 융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이 쓰고 있는 사회적 가면, 즉 페르소나는 중년이 되면 붕괴한다. 그리고 내면을 향해 들어가도록 강요한다. 중년의 과제는 각 개인의 내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치료이며 재생을 위한 내적인 힘이다. 대체로 이러한 갱생의 힘은 절망과 고통 속에 감추어져 있다.


p58 마흔이 되면 한계에 대한 자각이 젊은 시절의 끝없는 희망을 대신한다. 두 개의 시선, 자신을 바깥에서 보는 시선과 안에서 보는 시선을 공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쓰임을 받으면 애써 일하고, 버림을 받으면 스스로 즐기면 된다. 부름을 받으면 신명을 다하는 것이고, 그들이 잊으면 일상을 즐기며 스스로 벌어 궁색하지 않게 먹고 살면 되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사이, 제3의 지점,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자리, 스스로를 늘릴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짐만 지고 가는 당나귀의 진지함이 어찌 사람들이 그리는 마흔의 삶이 될 수 있겠는가? 장난도 치고, 흐드러진 메밀밭을 달밤에 지나기도 하며, 물레방아간의 뒤로 숨기도 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제3의 지점이 마흔 살의 자리다. 개혁은 마음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마흔 살의 문제는 결국 가슴과 영혼의 문제다.

⇒ 마흔살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가.


p59~60 마흔 살은 게임의 후반부나 연극의 2막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마흔 살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막연히 한 번 더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의미한다. 똑같은 실력을 가지고 후반전을 뛰어본들 또 한 번의 고배와 비웃음을 자초할 뿐이다. 1막에서 엑스트라였던 사람이 2막에서 돌연 주연으로 바뀌는 연극을 본 적이 있는가? 마흔 살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연극의 지루한 2막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을 끝내고 진짜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파괴와 창조, 죽음과 재생이라는 이미지와 직결되며, 죽어야 살 수 있다. 이 치열한 반전을 사람들은 일부러 잊으려고 하는가?


p61 40대는 사회적 폐기물이 된 자신을 구해내어 빛나는 삶으로 창조하는 시간이다.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이 가능한 시기다. 어쩌면 반전만이 이 시기를 사는 교훈일지 모른다. 전환과 변곡, 이 두 단어야말로 40대를 묘사하는 가장 적합한 언어이다.


p62 마흔 살은 가진 것을 다 걸어서 전환에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 다만 내가 거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나 자신을 건다. 나는 이 길을 택했다. 내가 도박사가 아니라 이 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흔이 익어가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계획했다. 나는 비장했다. 나의 40대는 죽음과 친근해진 10년이었다.


p63 나는 마흔이 넘어서 바쳐야 할 목숨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으며,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푼돈 서푼짜리 인생이었다.

     죽어야 할 자리에는 늘 혁명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어야 하는 자리라는 점이었다. 한 세상이 어둠에 싸이게 될 때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으로 빛난다.


3장 직장생활


p69 변화경영은 직원들에게 인기없는 관심사였다. 그들은 모두 현재의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시간을 현재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바빠서 자신을 돌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한 R&D로서 현재의 일부를 투자할 수 없었다. 변화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진 불행한 자들, 또는 불행을 인식한 자들의 과제였다.

⇒ 불행을 인식할 때 변화와 혁명을 생각했던 것 같긴 하다.


p70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할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가지고 평가하게 마련이다. 그들에게 내 과거는 초라한 것이었다. 나는 나보다 유능한 세일즈맨들 사이에서 주류가 아닌 작은 샛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그 부서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던 이유는 내가 붙잡은 길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p71 나는 혁명사를 전공하고 싶은 역사학도였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내게 감동과 전율을 주었다. 그 말처럼 매력적인 단어는 없었다.


p72 에게 해에는 꽃과 바위만 잇는 섬이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잠깐 피었다 지고 말아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꽃들이 그곳에서는 한 해에 두 번이나 크고 화려하게 만발한다고 한다. 옹색한 땅과 준엄한 바위가 오히려 개화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결핍이 꽃을 아름다운 꿈 안으로 몰아넣어 준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p77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버리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 일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 직장 속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어도 80퍼센트는 되어 보였다.

⇒ 80퍼센트에 속한 나


p78~79 어느 조직도 필요한 사람은 떠나보내지 않는다. 어려울 때일수록 잡아두고 싶은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다. 이것이 ‘필요의 원칙’이다. 필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늘 그 처신에 특별한 공유점이 있다. 온갖 종류의 구조 조정에도 상관없이 한 조직 속에서 오래도록 남아 성장하고 싶다면 알아둘 필요가 있다.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자신의 특별함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고 일을 처리하는 자신만의 좋은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들은 적절한 휴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이 말은 떼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는 매우 다른 개념이다. 적절한 관계라는 것은 본인의 성격에 따라 그 양상이 다르다. 그러나 적절함의 특징은 하나다. 폐쇄회로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누구와도 연결이 가능하다. 특별히 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 폐쇄성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열린 관계가 유지되도록 적과 동지 사이의 제3의 꼭지점을 찾아내어 그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누구의 사람’이라는 폐쇄적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러나 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처럼 빼내기 어려운 자리에 있다. 이것은 소극적이거나 내향적인 사람도 잘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장점을 읽어내는 사람은 이런 휴먼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데 익숙하다.

     셋째, 그들은 늘 학습한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와 경쟁한다. 전문성이 자격증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소질을 이해하고 잠재력을 개발한다. 이들은 대체로 겸손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애정 없이는 자신을 불태울 수가 없다. 어떤 분야든 자신을 불사르지 않고서는 핵심에 다가설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세상의 흐름에 대한 대략을 알고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단추를 끼울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요한 사람들은 떠남을 늘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떠남으로써 남겨진 조직의 힘이 격감되는 사람들..그들이 바로 놓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어느 조직도 필요한 사람은 떠나보내지 않지만 그렇다고 최후까지 필요한 이들을 아끼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알고보면 조직에 필요한 사람은 또 만들어진다.

  

p81 떠남이 모두에게 좋은 해결책은 아니다. 조직과 단체 속에서 더욱 빛나는 사람들도 있다. 혼자 떨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람들 속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휘날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조직에 남아 그 곳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p83 나 역시 앞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굉장한 여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긴 여행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양식을 챙겨 떠난다 하더라도 곧 바닥이 날 것이었다. 결국 나는 여행을 하며 양식을 조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불안은 오히려 나를 흥분시켰다. 이 여행이 나만의 여행이 아니라 가족 모두를 데리고 떠나는 가족여행이라는 것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래서 더 좋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들 역시 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경하게 될 것이므로.

⇒ 내가 지금 여행 중인지 무덤에 있는지를 모르겠다.


p83 변화경영이라는 전문 분야를 IBM 밖으로 끌고 나와 모든 기업과 조직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나의 비즈니스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콘텐츠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들려줄 이야기는 있었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찾아내야 했다.


p84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무척 부끄러워했다. 나는 사람의 관계는 가능하면 순수한 것이 좋다고 신봉하는 축에 속하는 숙맥이다. 나는 이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이 나의 변하지 않는 속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내 비즈니스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을 거리로 몰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세일즈 대신 나를 마케팅할 방법을 모색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찾아내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과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설득했다. 수동성을 능동성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쉽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적인 일이 아니다. 유전자는 바뀌지 않는다.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은 괴로운 과정에 비해 지극히 평범한 성과를 돌려줄 뿐이다.

⇒ 나의 수동성을 인지하지만 언제면 능동적이 될 수 있을지.


p85 적극적 수동성, 즉 유혹은 늘 설득의 강력한 수단이 되어 왔다. 경영학은 ‘유혹’이라는 싱싱한 단어를 죽은 단어, 즉 마케팅이라고 불러왔다.

     마케팅은 유혹이다. 달콤해야 하고, 향기로워야 하며, 엄청난 새로움에 대한 약속을 흘려야 한다. 유혹은 올가미고 덫이다. 사냥은 창을 들고 소리 지르며 짐승에게 덤벼드는 것만이 아니다. 온몸에 쥐가 날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다 덮치는 방법만 있는 것도 아니다. 덫과 올가미를 놓고 펴안한 집에서 술 한잔 하고 푹 쉬고 나서 그 다음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덫과 올가미에 걸려 있는 짐승을 향해 다가가는 것도 사냥의 한 방법이다. 세일즈가 도망치는 고객에게 달려들어 창을 꽂는 것이라면, 마케팅은 짐승이 다니는 길에 온갖 화려한 미끼를 주렁주렁 단 덫과 올가미를 놓아두는 것이다.

⇒ 마케팅에 관한 한 수동적인 소비자의 입장만을 알지만, 이 말은 참 어울리는 표현


p85 유혹은 설득 이전에 이미 설득당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설득이란 언제나 스스로 이미 설득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 이것이 설득의 제1법칙이다. 설득은 늘 미리 이루어진다. 미리 이루어진 설득, 무너진 자기방어를 유혹이라고 부른다.


p86 매력이 없는 리더란 없다. 리더는 반드시 자신의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는다. 유혹은 매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매력은 가장 자기다운 것에서 발산되는 페로몬이다.

     나 역시 스스로를 마케팅하기 위해 강력한 매력이 필요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찾아야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나를 알리는 것이었다. 나의 존재, 나의 콘텐트, 그리고 나의 가능성을 알려야 했다. 어떻게? 이것이 고민의 핵심이었다.

⇒ 내가 나름 리더이던 시절을 돌아보니, 좀 더 잘할 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다시 리더를 하고 싶지 않은 건가.


p87 1997년, 마흔 세 살이 되는 여름 어느 날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한 달 동안 포도 단식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새벽에 깨어 일어나 앉았다. ---- 하루는 아무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나를 찾아왔다.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었다. 부끄럽고 한심한 일이었다. 나는 좌절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 즉 변화경영에 대한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나는 기뻤다. 내게 천둥처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갑자기 나는 내가 기획하는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가 기획하고 연출하며 배역을 맡는 이 훌륭한 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 달쯤 지나 책이 나왔다. 첫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독자에게 가는 선물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주는 메시지였다. 책은 잘 팔렸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잡지들은 세상에 내가 있다는 것을 광고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변화경영 전문가로 데뷔하게 되었다.


p88~89 전문가는 학위와 자격증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다. 전문가는 과거에 의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학습에 의해 날마다 새로워질 뿐이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p89 경영컨설팅 같은 지식산업은 사기와 진실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끝없이 학습하는 사람은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계속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사기꾼들처럼 ‘달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나는 내가 ‘경계선을 걷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배움을 멈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학위와 자격증은 과거의 영광의 흔적일 뿐이다. 미래를 평가의 잣대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확실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물로 된 항아리 속에 물을 담으려는 발상이다. 반대로 미래를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바닷물 속에서 식수를 찾는 것과 같다. 온통 가능성의 물로 채워져 있지만, 아직 한 컵의 마실 물로 되지 못한다. 내가 믿는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하는 사람뿐이다. 무엇을 하든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만이 전문가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 나는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맞는가. 더듬더듬 읽는 책읽기나 배움이 얕아 탄식하면서도 진도가 안 나간다.


p90~91 나는 사는 듯 싶게 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바칠만한 것을 찾고 싶었다. 관성에 따라 굴러가는 하루 말고, 전혀 새로운 뜨거운 하루를 가지고 싶었다.


p91 이유도 없는 우연한 흐름이 곧잘 필연적으로 운명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제 나의 20년 과거는 죽었다. 나는 그 과거를 차디찬 물 속에 버리고 그 과거가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제의 나는 꽃처럼 낙엽처럼 죽어 흘러가고 사라졌다. 나무들은 가장 추울 때 그렇게 서 있다. 죽지 않고 새로워지는 것은 없다.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 필연적 운명을 만들어주는 우연한 흐름을 찾고 싶은데 안보인다. 다시 과거를 회귀하면 그것이 필연적 운영이었던 흐름이라고 느끼는 일이 있을까.


p91 나는 제 2의 인생 속으로 들어갔다. 조직에게 양도했던 힘과 권리를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평범함과 군중이 품을 떠나면서 외로워졌다. 이제 스스로의 작은 나라를 세워야 했다. 내 안에서 군주적 본능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의 나라, 나의 세계, 나의 꽃을 피워야했다. 그것은 겨울 보다 더 추운 봄이었다. 그러나 꽃 터지는 봄은 왔다. 피워야 할 꽃, 만들어야 할 세계가 생긴 것이다.


p91 이제 나의 20년 과거는 죽었다. 나는 그 과거를 차디찬 물속에 버리고 그 과거가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제의 나는 꽃처럼 낙엽처럼 죽어 흘러가고 사라졌다. 나무들은 가장 추울 때 그렇게 서 있다. 죽지 않고 새로워지는 것은 없다. 죽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새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4장 얼굴-페르소나


p98~99 <타임>지의 표지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초상화가 노마 밀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면 몇 가지 공통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우선은 초상화가 실제 인물과 달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쳐 버려야 한다. 실제 인물과 비슷해 보이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생명력이 없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이다. 초상화의 생명은 정밀묘사보다 그 인물이 풍기는 분위기와 느낌을 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초상화의 매력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초상화 그리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이 그리는 선 하나하나가 실물과 닮기를 원한다. 그들은 주로 윤곽부터 그린 다음 그 안을 채운다. 즉, 밖에서부터 안으로 그리려는 경향이 있다. 초상화는 안에서부터 밖으로 그려야 한다. 왜냐하면 안만 제대로 그려지면 밖은 저절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p99 그들도 가끔 나를 만나게 되면 내가 지난번에 만난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까? 아니면 지금 이 사람이 20년, 30년 전부터 알기 시작한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내가 일상의 여울 속에서 그 작고 미세한 감정의 파도들이 쌓아놓은 퇴적물로 화장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p100 눈은 엄밀히 말하면 두뇌가 밖으로 나온 기관이다.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눈에 표현되게 된다. 눈이 인상을 결정하기도 한다.


p102 난 가발은 싫어한다. 가발을 쓰면 처참해질 것 같다. 다른 사람처럼 평균이 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마음이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대머리용 가발이다. 그러나 모자에는 당당함이 있다. 모자라는 액세서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멋을 만들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p103 언젠가 파리에 가면 좋은 모자를 하나 사고 싶다. 아이들에 대한 일상적 책임이 가벼워지면 갈 만한 곳으로 몇 군데를 남겨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파리다.

⇒ 아이들에 대한 일상적 책임이 가벼워지면,,,난 없는데 왜 이럴까. 아이들을 대체할 만한 다른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p103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길들기 마련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서로에게’라는 말이다. ‘나에게 길들게’ 하면, 그것이 목적이 되면, 함께 살 수 없다.


p107 나는 절대로 아부 같은 것은 못한다. 나이 들고 교활해져서 이제는 가끔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건 좋은 말 정도일 뿐이고, 아부라 할 만한 정도는 못된다.

⇒ 나, 아주 조금은 하게 되더라.


p107~108 정신이 육체를 키우는지, 육체가 정신적 특성을 반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것 가운데 이렇게 애착을 가진 부위가 있다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약간 푼수로 보일 뿐이다. 원래 푼수인 걸 푼수처럼 보인다고 나쁠 것이 있겠는가? 쓸데없는 치장은 야심한 밤 피곤에 지쳐 집에 들어온 여자들이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지워내야 하는 화장 같은 것이다.


p113 욕망이 자신을 충족해가는 것이 개인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욕망은 부숴뜨려 땅에 묻어야 하는 것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힘과 에너지다.

     어느 날 나는 내게 날마다 먹이 주는 손을 거부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아파트를 팔고 대중의 선호와 관계없이 내가 좋아하는 동네로 이사왔다. 내 속에는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처음에는 그저 어둠 속에 숨어 있고 싶어했다. 그래서 자신을 가능한 한 작게 만들어 숨기려고 했다. 불꽃은 너무 작아서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어둠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두려움이 결국 불꽃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하게 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불꽃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p114 단식이라는 상상은 내게 참으로 적절한 출발점이었다. 그것은 나를 가볍게 해주었다. 모든 속박은 ‘먹고사는 것’으로부터 왔다. 나는 그때 인형을 움직이는 끈을 보았다. 인형극 속의 인형은 아주 많은 실에 묶여 있다. 실은 팔을 묶고 손가락을 묶고 허벅지와 종아리를 묶고 허리를 묶고 이내 목과 머리를 묶어놓는다. 그리하여 놀이의 인형이 된다. 인형은 실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인다는 것은 자유의 한 표현인데 인형의 자유는 모두 묶어놓은 실에서 온다. 인형의 자유는,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속박으로부터 온다. 실을 끊으면 인형은 움직일 수 없다.


p115 개인은 각자 그 안에 자신의 역사를 안고 산다. 부끄러움도 있고 후회도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도 있고 당당하고 장엄한 순간도 있게 마려이다. 산다는 것은 자신을 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저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애쓰다 아파트 한 채를 남기고 일흔 여섯 살의 나이로 죽었다.’라고 기록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p115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p116 우리의 내면은 늘 신과 만나는 장소이다. 신은 복잡한 곳에 있지 않다.


p117 나는 나답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다운 것에 천착하고 매달렸다. 니체가 말한 ‘거리에 대한 파토스’를 추구했다. 이것은 차이에 대한 열정이었다. 차이는 다름이다. 그것은 다른 것,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과 구별짓는 다름에 대한 열정이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더 다르게 만들려는 열정이다. 더 많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차이를 끊임없이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야 한다. 자기경영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실천의 철학이다. 바로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나다운 것은 뭔가. 나답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려면 나다운 것을 찾아야 한다. 바쁘다.


p117~118 우리는 수없이 많은 남의 얼굴을 그리워하다 여기에 이르렀다. 학교에 가고 규범을 배우고 문화 속에 던져지면서 의도적 왜곡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되어갔다. 내가 마흔이 되어 한 일은 그런 나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오랜 세월과 수많은 공간’을 지나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도 되고 저런 사람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에 왔다.


5장 가족


p123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 하나를 만드는 것, 이것이 몇 년 전부터 내 삶의 의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가 되었다.


p124 아비 역시 스승과 친구의 역할을 모두 해야 하는 것 같았다. 피로 얽혀 있으니 갈라설 수 없으며, 아이의 천성을 만들어낸 유전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일상 속 좁은 공간에서 아무 꾸밈없는 모습으로 아무데서나 늘 부딪히기 때문에 예의라는 옷을 입고 만나기 어렵다는 점에서 부모는 친구나 스승과 다르지만, 이 두 가지 속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매우 유효한 힌트였다. 부모로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 너머 함께 즐기고 어울리며 공유하는 친구로서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내게 ‘적절함’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또 ‘적절한 표현’에 대한 생각도 하게 했다. 

⇒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되어 달라진다 말한다. 뭐, 아닌 사람도 있긴 하지만.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역할이란 것은 다양하다. 그 역할은 주어지면 자연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p125~126 나는 갈등에 대해 늘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갈등은 마음이 스스로의 길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나침반이 북쪽을 찾고, 그곳을 가리키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것, 이것을 나는 갈등이라고 부른다. 갈등 없는 판단이란 반복하여 익숙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것에는 갈등이 따라다닌다.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세상의 기대와 자신의 기대 사이에서, 이익과 마땅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욕망과 절제 사이에서, 편함과 배려 사이에서 우리는 늘 잠시 망설이게 된다.


p128~129 작은 아이는 좀 엉뚱한 면이 있다. 나를 빼닮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다. 약간 느린 것도 그렇고, 시험운이 없는 것까지 닮았다. 지식에 대한 허영이 있는 것도 그렇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민감한 점도 그렇고, 소심하여 마음의 상처를 잘 받는 점도 그렇다. 이 아이는 늘 가슴에 정을 담고 있다.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아이의 가장 큰 특성은 숯불처럼 늘 불씨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아이의 불길은 늘 살아난다. 지치고 처져 있다가도 늘 다시 살아난다. 이 아이는 자신을 그렸다가 지우고 또다시 그리면서 자신을 키워간다. 실수도 많고 실패도 많지만 자신의 길을 찾아 장대한 모험을 온몸을 다해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아이의 운명적인 장점이다. 이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마 나일 것이다. 다행스럽게 우리는 사이가 참 좋다.

     이 아이를 작은 아이는 어쩌면 이미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가 아직 중학생일 때, 나는 회사를 나와서 내 일을 하고 있었고 아내는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오후 서너 시가 되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나는 그 전에 아이가 오면 함께 먹을 수 있는 특별한 것을 장만하기 위해 고민을 해야 했다.

⇒ 작은 아이, 구해언. 과거엔 그냥 지나쳤던 문장이 해언이를 알기 때문에 다르게 다가온다.


p130 함께 먹는다는 것은 아마 그래서 식구라는 단어가 생겼겠지만 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 쉽게 친해지기 위해서는 밥을 같이 먹는 것이 꽤 중요하다. 먹고 산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되고, 먹는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 이완을 위한 휴식이기 때문에 휴식시간에 만난다는 홀가분함이 있다.


p130~131 나는 이 아이와 가진 20~30분 정도의 간식 시간을 일 년 반 정도 즐겼다. 나중에는 아내가 퇴직을 하고 집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주로 아내의 일이 되었다. 그때 오늘은 무엇을 함께 먹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어떤 때는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사오곤 했는데, 신이 나서 그 일을 했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런 일들을 즐겼다.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쁨을 위해서 산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쁨과 나의 기쁨은 늘 섞여 있었다. 작은 수고들은 이런 기쁨을 위해 동반되는 선물의 포장지거나 아름다운 포장 끈이거나 리본 같은 것들이다. 


p134 생각할 시간을 허용받지 못하는 조급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작은딸은 내 뒤를 이어받아 변화경영연구소를 공동 운영할 생각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 그 애도 자기가 만든 세상, 자신의 세계를 좋아하니까 충분히 소질이 있다 할 수 있다. 어쩌면 10년쯤 후에는 지금의 ‘1인 기업’이 부녀가 함께 경영하는 ‘2인 기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 그냥 해언에서, 조금은 무게를 느끼는 해언일 생각하니 안쓰러운 느낌도 잠깐..


p138 노는 것은 내게 힘을 주었다. 적어도 내가 내 인생을 마음대로 즐기고 있다는 자부심을 주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그런 생각이 주는 무기력이 내게 불어넣었던 어두운 불안과 스트레스를 데려가 버리곤 했다.

⇒ 노는 것이 힘을 주었던 일이 있던가. 노는 것은 노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가. 잘 놀라고 말하는데 나는 잘 놀고 있나.


p138 나는 새벽에 일어나 두 시간 정도 글쓰는 일에 몰두하는데 이 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 시간대를 선택했다. 나는 시간의 불모지를 내게 불하했다. 그리고 가장 귀중한 나만의 시간대로 만들었다. 마치 모두가 버린 시간의 밭을 일궈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찾아내지 못했다면 영원히 잠속에 묻혀버릴 뻔한 보물 같은 땅이었다. 하루 시간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두 시간이 거의 변하지 않는 내 작업시간이다. 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늘 가족과 친구들에게 우선적으로 열려있다. 


p139 나는 내 마음속으로 들어가 물었다. 왜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 먼저 아내와 아이들이 떠올랐다. 가장 소중한 그들이 바로 나의 구속이 된 것이다. 그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은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죽어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주어야 할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책임과 의무만이 무성한 잡초처럼 내 마음의 벌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살아나기 위해서는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 나는 내 마음속으로 들어가 늘 묻는다. 이제 새삼 생각해보니 답을 요하는 물음이 아니었던 듯도 하다. 그냥 질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었던가. 답을 내지 않기에 지금 이 자리.


p140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게 되자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 현실이란 그저 ‘지금의 상황에 대한 남들의 생각’, 즉 다른 사람들의 견해일 뿐이다.


p145 가족처럼 매일 삶에서 서로의 인생 속으로 들락거리며 만나지는 않지만 내 일상의 또다른 뼈대를 이루는 친구들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친구들은 외로움을 견디게 해준다. 우린 함께 술을 마시거나 함께 여행하거나 함께 산에 간다.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허전하다. 역시 술을 마셔야 좋다.

⇒ 친구들은 외로움을 견디게 해주기도 하지만, 외롭게도 만들지~


p146 친구는 생활의 일탈을 서로 돕기도 한다. 그래서 좋은 것이다. 혼자 하지 못하는 것을 함께 하게 한다. 삶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친구들이다.

     나는 목적을 가지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 친구는 말 그대로 함께 놀기 위함이다.


p146~147 친구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끼면 안된다. 친구와 비즈니스를 하는 것은 안좋다. 비즈니스는 그저 전문성을 나눌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하면 된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예의를 지킬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비즈니스 파트너이다. 나이가 들어 돈벌이를 하게 되면 친구들에게는 결코 아쉬운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친구들에게는 절대로 잘ㄹ난 척해서도 안 된다. 친구의 성공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다. 순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친구의 성공 속에는 늘 ‘그동안 나는 뭘 했나.’;하는 자신에 대한 문책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어둠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고통 역시 개인의 몫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가 있고 나눌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인생의 길을 가고 있다. 친구들끼리 나눌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혼자 그 긴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짐을 각자 지고 함께 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 있으면 훨씬 낫다.

     즐거움 역시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즐거움은 그래야 커진다. 즐거움에는 무게가 없다. 그것은 깃털 같아서 하늘을 날 수 있다. 즐거움은 우리가 지고 가는 삶의 무게를 덜어 준다.


6장 자연


p157 이 어리석은 것아. 우매한 미망의 어둠에서 나와 가고 싶은 길을 가거라. 숟가락으로 먹은 모든 것은 결국 똥이 아니더냐. 마흔이 넘게 살아 온 긴 세월이 참으로 잠깐이고 꿈이 아니더냐. 다행히 아직 꿈이 끝난 것은 아니니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 죽음이 널 데려갈 때 좋은 꿈이었다고 웃을 수 있도록 하여라. 다행히 아직 꿈이 끝난 것은 아니니 살고 싶은 대로 살아라. 죽음이 널 데려갈 때 좋은 꿈이었다고 웃을 수 있도록 하여라.


p159~160 얼마 전에 작고한 이오덕 선생은 늘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p160 우리가 왜 변화해야 하느냐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작은 세포가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삶이다. 순수한 아이의 생각이 야망으로 가득한 젊은이의 생각이 되고, 이내 세상의 한계에 지쳐버린 장년이 되고, 노회한 노인이 되고, 이윽고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 자체가 우리의 일상이고 삶이다. 생명이 주어진 순간 삶은 시작되고, 삶이 주어진 순간 죽음의 시계도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 변화해야 하는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 아주 기인 도화지에 내 일상을 그려놓고 보면 요즈음의 나에게서 변화가 감지되지 않음을 알 것 같다.


p161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삶이다.

     왜 변해야 하느냐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하늘의 구름에게 물어보라. 왜 변해야 하느냐고? 바다의 물결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p163 곽박의 시에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냇물에는 멈춰선 물결이 없다.”라고 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변화에 대한 묘사는 찾기 어렵다. “밖으로 자연의 조화를 본받고,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체득해야 한다.”는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둘 충고이다.


p163~164 봄에 피어나는 꽃들은 온몸이 다 꽃이지는 못하다. 그러나 단풍은 온몸으로 불탄다. 은행나무, 화살나무 벚나무, 옻나무도 다 아름다운 가을 나무들이다. 단풍의 아름다움은 서산을 넘어가는 해의 아름다움이다. 이윽고 해는 달이 되어 다시 떠오른다. 달은 새로운 인생이다.


p164 때때로 나는 자연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가 가장 마음이 편한 때다.

⇒ 나도. 자연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 안에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한 것 같다. 여행 중에서도 느꼈던 것.


p164 G.K. 채스터턴의 말대로 참으로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감탄이다. 기쁨은 도처에 있고 늘 활동 중이다.

⇒ 행복도 불행도 늘 소소한 것 하나를 두고 느끼는 것 같다.


p165~166 내가 회사를 나와 새로운 삶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할 때 나를 위로해준 것은 자연이었다. 그것은 예상치 않았던 일이기도 했지만, 이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던 20년을 떠나와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곳은 그곳이었다. 나는 그때 치유가 필요했다. 내가 보낸 20년을 돌아보고 다시 새로운 인생 20년을 기획해야 하는 시기에 들어서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져야 했다. 여기서 새로운 전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나는 근본적인 변화 지점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p166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생을 오래된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초하는 것도 수없이 보아왔다. 나는 자연의 방식을 추구했다. 자연 속으로 숨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방식을 나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데려왔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특히 나무로부터 위대한 교훈을 사사받았다.


p167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아다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나에게는 발이 없다. 나는 한 곳에 서 있다. 나는 나무와 같다. 스스로의 그늘을 만들고 열매를 키워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 찾아오게 하는 것이 훨씬 나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무를 통해 자연 속에서 하나의 자연이 된, 나에 대한 가장 유사한 상징성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나무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땅이지만 가야 할 곳은 하늘이다. 나는 땅에서 하늘로 간다. 몸이 땅에서 나와 영혼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듯, 땅을 움켜쥐고 온몸을 던져 하늘을 향해 자란다. 나의 모든 힘은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온다. 어두운 곳은 언제나 비옥한 토지였다.

⇒ 나무는 나무는 시인이지요. 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지요~ 이런 동요가 생각난다. 나무이야기가 나오니 나무를 쳐다보게 된다. 포근해진다.


p167 나의 모든 힘은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온다. 어두운 곳은 어제나 비옥한 토지였다. 나의 내면은 땅과 같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두렵고 위대한 힘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내 내면을 뒤지고 곳곳에서 흐르는 에너지의 샘들에 깊고 굵으며 튼튼한 뿌리를 견실하게 박아두어야 한다. 이 힘들만이 나를 키울 수 있다. 이것이 첫번째 교훈이다.

⇒ 어떠한 생각이든 내면이 어두워질 때 깊어지고 멀리 가는 것 같다. 밝을 땐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것도. 그저 감탄으로 채워지고 있을 뿐.


p168~169 내가 어떤 나무인지는 잘 모른다. 내가 가장 되고 싶은 나무는 깊은 산속의 아주 높은 곳에 위친한 탁 트인 아름다운 곳에서 오래 자란 줄기 붉은 소나무다. 그 그윽하고 향기로운 모습이라니. 그 밑에서 땀을 닦으면 나도 잠시 그 정정함이 된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사람들이 종종 찾아주는 너무 깊지 않은 산 맑은 계류 옆의 커다란 벚나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봄이 되면 온몸을 열기로 띄워 분홍이 조금 섞인 흰 꽃으로 며칠 피다 바람의 결을 다라 흩뿌리는 그 멋진 벚나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어느 거리의 가로수로 잘 자란 느티나무였으면 좋겠다. 느티나무는 멋이 있다. 섬세한 여인 같은 나무다. 줄기도 잎도 모두 곱다.

⇒ 내가 나무라면, 나는 어떤 나무가 될까. 음, 일단 이 세상에 모든 것에 어떤 나무가 있는지를 먼저 알아보고....


p169~170 나무는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수없이 자신을 탄생시킨다. 사는 법은 죽는 법에 있다. 자라는 방법은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탄생하는 과정이다.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장이다. 이것이 나이테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늘 자신의 시체를 내다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나무는 그 일을 아주 아름답게 해내고 있다.

     낙엽은 나무의 지혜다.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 해결책이 바로 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나무의 멋이다. 가장 장엄한 문명의 단편이 장례이듯이 낙엽은 죽음조차 아름다운 삶의 과정으로 창조해낸다. 나무는 해마다 한 해의 삶을 기록한다. 한 겹의 나이만큼 줄기에 그 흔적을 남기고 두꺼워지며 키가 더 자라게 된다. 나무는 매년 죽는다. 이 상징적 의식이 나무가 자라는 방법이다.

    나도 죽어야 한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나무가 죽을 때 나도 죽어야 한다. 나에게 낙엽은 내 책이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열매는 나무의 일 년의 삶이다. 내 책도 내 일 년의 삶의 기록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내 일 년도 떨어진다. 그리고 열매를 남기듯 나도 내 책을 남긴다. 책 한 권이 쓰여지면 내 일 년도 지난다. 나무가 다음 해에도 똑같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이 혹독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거친 나무는 이미 전 해의 그 나무가 아니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영원히 죽은 것이다. 살아 있으나 이미 죽어버린 정신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 살아 있으나 죽어버린 정신에서, 찔린다.


p172~173. 식물에게서 배운 또 다른 교훈은 바로 번영하는 방법이다. 곳곳에 수없이 많은 자신의 복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번영의 상징성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하나의 씨앗처럼 날려 보내는 것이다.

⇒ 내 생각의 불완전성고, 쓸모없음으로 타인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것에 주저하게 된다.


p173 나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다. 나는 날마다 내게 귀화한 생각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육에 담아 수천 개씩, 수만개씩, 수백만 개씩 퍼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은 그 씨앗을 마음 속에서 키우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귀화한 생각’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도처에서 번영할 수 있는 전략이다.


p174~175 나도 식물처럼 고도의 전략을 강구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전략을 써두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배우게 마련이다.

     “스스로 정정한 나무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쉬고 그 나무를 부러워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나무의 열매를 가져다 심고 싶어할 것이다. 스스로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씨앗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하루를 보내도록 해야 한다. 날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이 쓰일 곳을 마음대로 배분하며, 그 일의 가치가 빛나는 일을 하고, 스스로의 삶을 즐겨라. 삶 자체가 유혹이 되게 하라.

     로댕의 말을 잊지 말아라. ‘사랑하고 감동하고 전율하면’ 그 삶은 매우 매혹적일 것이다. 날마다 그렇게 살아라. 하루하루를 잘 살아야 좋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변화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행해 아주 많은 씨앗을 날려야 한다. 어떤 것은 실종되고, 어떤 것은 시멘트 같은 마음속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결국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자연은 아주 많은 낭비를 즐긴다. 이것이 자연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일 년에 적어도 책 한 권은 써라. 이것이 열심히 일을 한 기준이다. 세상을 향해 많은 시그널을 보내야 누군가 대답하게 된다.

     씨앗이 적절한 곳에서 쉽게 발아할 수 있도록 더 나은 방법을 연구하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싹이 나고 푸른 잎을 단 아름다운 줄기로 자라도록 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라.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을 행동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이 실천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과 색깔과 맛을 담은 향기로운 과육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유행에 따르지 마라. 자연의 맛은 독특하고 차별적이다. 자신만의 맛과 향기를 지닌 품종을 만들어 내라.“


7장 건강


p183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 제자가 스승을 어떻게 빛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영원히 스승의 빛에 가려진 제자는 결국 스승을 욕보이게 한다. 뒷물이 앞물을 뛰어넘으려고 해야 비로소 강물이 힘차게 흐를 수 있다. 제자가 잘나야 스승이 위대해진다.


p187 인류의 흔적들은 100만 년 전가지 올라간다. 대략 초기 97만 5천년 동안 사냥꾼으로 살았고, 겨우 2만 5천년 동안만 농사꾼으로 살았다. 간단히 말하면 살아온 인생 40년 가운데 39년 동안은 사냥꾼으로 살았고 농사꾼이 된 지는 겨우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p187~188 사냥꾼 시절에는 먹을 것과 짝짓기와 목숨을 위해서 살았다. 미래는 두려움이었다. 짐승이 있으면 배를 채울 수 있고 없으면 굶어야 했다. 아무 때나 짝짓기를 할 수 있고 언제든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한 남자들의 특징이었다. 문명을 위한 최초의 토양은 농업이었다. 비로소 미래는 잠시 예측되었다. 씨를 뿌리면 시간이 지난 후 추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정책했고, 문명은 시작되었다.

     문명은 인류가 여성화되는 과정이었다. 문명의 역사 대부분의 주인공은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하고 빛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지면 윌 듀랜트의 지적대로 남성은 ‘자궁, 즉 인간이라는 종족의 주류인 여성에게 조공을 바치는 존재’였다. 여자들은 가축을 길들였고, 마지막으로 남자를 길들였다. 남자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이라는 사회적 틀질을 배우고 익히게 했다.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즉 아무 때나 짝짓기를 하고, 음식을 탐내며, 싸움질을 해서는 안된다. 문명의 본질은 오랫동안 뿌리깊게 자리 잡은 사냥꾼의 습성과 겨우 최근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사회적 본능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 나는 ‘자궁과 같은’이라는 표현에 식상함을 느낀다. 지겨워지는 표현이다.


p189 역사가 일류의 시간적 기록이듯이 개인의 역사 역시 그 삶의 시간적 기록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개인적 역사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은 다양하지만 개인의 역사는 늘 자연과 문명의 갈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때때로 한쪽에 치우치고 때때로 반전하고 이윽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절한 융합과 균형을 잡아가기도 한다. 문명은 욕망이 과도한 탐욕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복제를 시도할 때 제동을 걸어준다. 부모의 이름으로, 학교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법과 여론의 이름으로 말이다.


p191 죽음은 모든 생명이 시작과 더불어 치러야 할 빚이다. 이것은 어떠한 예외도 없다.

     그러므로 여전히 욕심스러운 ‘나이 듦’은 과다한 욕망에 차 여전히 ‘두 개’가 되고 싶은 세포, 즉 암과 같다. 생명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순간 순간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p198 생명을 잃으며 사라져가는 것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미 죽어버린 것들은 그 허망함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죽음은 모멸 속에 그렇게 놓여 있었다.


p199~200 마흔은 죽음이 삶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영적인 나이의 시작이다.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또 다른 방식의 이해력이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게 되는 시기라는 뜻이다.


p200~201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천천히 삶의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이다. 두루마리의 앞부분, 즉 젊은 시절의 그림이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싱싱하고 발랄하며 모험적인 것이라면, 나이가 들면서 짜놓은 인생의 직물은 은은하고 통찰력에 차 있으며 완숙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의 부름에 따라 모두 놓아주고 낡은 껍데기만 남기고 떠날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아름다운 봄날은 빨리 지나간다. 모두 그리워하고 섭섭해 한다. 그러나 가을 또한 곱게 온다. 나이 먹음은 가을을 즐기는 것이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릴케처럼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신이여, 우리 각자에게 합당한 삶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 삶에 걸맞은 ‘합당한 죽음’을 주소서.”


8장 길에서


p205 세상의 아름다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기에.

    비 내리는 오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불멸을 꿈꾸니.

    이 오후 시간을 즐겨라. 어차피 가져갈 수도 없는 시간이니.

    하루의 질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예술.


p207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모든 일 역시 과거만큼 분명한 꿈이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비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나는 꿈을 또 다른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은 꿈꾸었기 때문에 언젠가 그 절실함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낙관은 아니다. 열심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성공학자들의 말을 나는 조롱한다. 그들은 대부분 신통치 않은 예언가들이다. 근거 없는 이야기, 뿌리를 알 수 없는 낙관, 유치한 전개, 더덕더덕 기운 미덕과 잠언의 누더기로 치유가 아닌 잠시의 진통 효과를 과장하는 시시한 돌팔이들의 이야기를 싫어한다. 내 말은 미래의 꿈 그 자체가 믿음을 통해 추억만큼 분명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갇히는 것만큼 미래에 갇힌다. 추억으로서의 역사와 꿈이라는 소설은 둘 다 인생에 중요한 것이다.

⇒ 물론 현재에도!


p208~209 나는 미래에 일어난 일을 과저 시제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일을 과거시제로 쓰는 순간 내게 이미 일어난 일이 된다. 미래를 과거로 인식하는 것은 정신적 작업의 하나이다. 나는 나를 ‘정신적 여행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은 날개 같은 것이다. 시간이라는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활공한다. 모든 것이 꿈으로 판명되는 마지막 날에 느끼는 그 아득한 자유를 지금부터 즐기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했다. 지금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도 과거에 갇혀 있는 나를 미래의 빛을 따라 아름답고 화려하며 자유로운 이야기 속으로 데려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결말, 그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무엇이든 꿈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꿈꾸지 못한 것들만이 내 인생이 아니다. 꿈꾸지 못한 것 가운데 더 으름다운 인생이 있을까봐 걱정이 된다.


p209~210 나는 가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나는 내가 바라는 그 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 때문이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 꿈에 대한 믿음이 있다. 다만 훌륭한 상상과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지금의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종종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을 때가 있다.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을 지금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놓치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강박관념으로 다가오는 두려움이다.

     이런 생각들이 내게 지금 무엇인가를 하게 한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한다.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먹는 양을 줄이고, 더 많은 운동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기도 한다.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자신에게 시간을 쏟고 더 고독해지라고 말한다. 더 많이 아이들과 생활을 나누고 더 많은 시간을 아내와 즐기고, 일 때문에 바쁜 척하지 말라고 말한다.


p210~211 추억과 꿈은 같은 것이다. 하나는 일어났다고 믿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꿈이다. 하나는 이미 깨어난 꿈이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꿀 꿈이다. 둘 다 지금이라는 현실을 속박한다. 때때로 그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p211 꿈은 시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다. 꿈을 만들어내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을 버리는 것이 꿈이기도 하지만 ‘욕망을 버리는 것’ 역시 욕망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욕망의 특별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 프로이트 같으면 ‘성적 리비도가 대상을 바꾸었거나 승화’되었다고 표현할지 모른다. 들뢰즈나 가타리라면 개인적 욕망이란 없고 모두 역사적으로 달리 규정되는 사회적 욕망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돈에 대한 극단적 욕망이 어떤 사람을 수전노로 만들지만, 그 욕망은 개인에 의해 추구된다 해도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은 이미 전체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p211~212 욕망이 꿈을 만들고 꿈은 믿음에 의해 현실적 개념이 된다. 미래를 현실로 인식하는 능력은 정신적 여행자들이 가지는 힘이다. 그들은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상상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산다. 그것이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는 책을 쓴다. 말하자면 나의 이야기를 하며 산다. 글쓰기는 꿈을 현실로 데리고 오는 나의 방식이다. 나에게 책이란 꿈과 현실을 잇는 통로이다. 매일 조금씩 책을 쓰는 것은 나의 일상이며 현실이다. 책을 쓰며 상상하는 모든 것 역시 나의 일상이라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남아 있든, 저술가에게 생각과 상상은 이미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분명한 현실이다.

⇒ 한땐 그래서 내가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당연시와 정당성을 부여했는데.중요한 것은 내용인가?


p213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있는 길을 가게 된다. 갈림길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선택한다. 우리 마음 속에 그 드물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 한 그루를 생각하며 자신의 처음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 시인 백석


p213 내 앞에 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그 대신 내 뒤에서 수많은 길이 닫히는 것을 보았네. 이 역시 삶이 나를 미리 준비된 길로 인도하는 방법이라네. -파커 파머, <루스의 이야기>


p214~215 나는 인생이란 답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인생은 정의될 수 있다.’는 가정이 나에 대한 탐험을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이었다. 따라서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인생은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공하고 싶었다. 내가 계획한 어딘가에 반드시 도착하고 싶었다. 도착하는 것이 곧 성공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도착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정 자체로 훌륭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 위에서 끝나는 여행도 위대한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10년 동안 내 길을 가려는 노력의 결과로 알게 된 평범한 깨달음이었다. 길 위에서 죽는 여행자처럼 완벽한 여행자가 어디 있겠는가!


p216 항해 자체가 인생이다. 그것이야말로 비옥한 정신적 토양이다. 사는 동안 생명을 모두 소진하게 되므로 죽음이 찾아왔을 때 완전히 비어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나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아 갈 수 없으리라.


p217 그러나 정말 내 인생은 그 책들이 아니라 그 책에서 표현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내 하루하루였다. 나의 하루들은 책으로 표현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물처럼 흘러갔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생각하고 낭비되면서 그렇게 지나갔다. 지나간 것들 속에 내 인생이 담겨있다. 나는 그 위대한 순간들의 주인이며, 또한 그 초라한 순간들의 책임자였다. 이것이 정말 하루하루의 진짜 인생이었다.


p219 깨달음의 내용은 없고 그저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정도가 50년을 산 나의 깨달음이다. 참 모자라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p219 여든이 되어 물어보자. ‘삶이 나에게 요구한 것’, 즉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었을까?  망막에서 빛이 사라질 때, 내 삶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넘어갈 때, 나는 그 속에서 사소한 일상을 보게 될 것이다.

⇒ 망막에서 빛이 사라진 지 좀 되었는데...


p220 우리는 불행을 만들며 산다. 누가 불행을 원할까마는 결국 우리의 불행은 우리가 만든 것일 뿐이다.

⇒ 그렇지..


p220~221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건만 행복한 사람이 드문 것은 행복해지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맑은 날 들판을 산책하듯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려운 일을 당하여 그 일의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거 속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늘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일과 채소, 그리고 여러 곡물이 섞인 밥을 먹고 하루에 30분씩 운동하고 한 시간씩 햇빛을 쪼일 수 있다면 행복하다. 무엇인가를 할 때 다른 것을 계획하지 않고 어떤 것을 계획할 때 다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순간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몰입된 순간순간을 살 수 있으면 행복하다.

     다른 사람에 비추어 자신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행복하다. 다른 사람이란 결국 왜곡된 거울에 불과하다. 늘 자신에게 비추어 자신을 발견하려 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일 년에 한 번쯤 흔들의자에 앉아 마치 다 산 것처럼 인생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이루고 싶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찾아지면 인생은 목표를 가지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길을 갈 것이니 행복해 질 수 밖에 없다.   


p222 사소한 일이 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인생의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 사소한 일이 주는 즐거움으로 행복을 느낀 적도 많다. 그러나, 그래서...행복하다는 것은 아니다.


p222 누구에게나 맞는 객관적인 삶의 의미란 없다. 나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삶, 이 유일무이한 구체성이 바로 내 삶이고, 따라서 그 의미 역시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것이다.


p223 길은 없다. 이것이 길이다. 하루가 길이다. 하루가 늘 새로운 여정이다. 오늘 새롭게 주어진 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 행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변화란 불행한 자의 행복 찾기 아니겠는가.


9장 집, 공간


p227 그 집에는 작은 뜰이 있었으면 좋겠다. 뜰에는 단아한 느티나무 한 그루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밑에 작고 예쁜 평상 하나를 놓아두었으면 한다. 더운 여름날 재미있는 책 한 권 들고 자다 깨다 하며 읽을 수 있는 그런 평상 말이다. 물론 좋은 친구가 찾아오면 작은 소반 위에 안주 겸 반찬 몇 가지 놓고 소주를 마쳐도 좋을 것이다. 그 옆으로 약간 분홍빛이 도는 줄기를 가진 마가목 두 그루를 심어두었으면 좋겠다.

p228 정원의 가운데쯤이면 작약과 모란 몇 그루를 심어두고 꽃을 보고 싶다. 나뭇잎 또한 예쁘니 꽃이 지고 난 후에도 여러 갈래 창날 같은 시원한 푸른 잎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옆으로 약간 치우쳐서 꽃이 작고 진한 벽돌빛 당국화를 두 그루쯤 심어두고 싶다.  

p229 집은 채광이 잘 되는 동남향 집이면 좋겠다. 유리를 많이 써서 햇빛이 듬뿍 들어오게 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창문이 시원한 작은 방을 하나씩 주고 서재를 좀 크게 하고 싶다.

⇒ 해언이의 집은, 유리를 많이 썼고 햇빛이 듬뿍 들어오는 큰 서재가 있었다. 음, 해언이 방에서 큰 창문은 못 본 것 같은데..


p237 어머니 나무에 나와 가지 위에 핀 꽃들은 모두 나무의 자식들이다. 끙하고 힘을 줄 때마다 한 놈씩 나와 가지 끝에 달려있다. 아름다움으로 꽃은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다. 참다참다 참지 못하고 터지는 것이 바로 꽃이다. 민감한 시인들은 그래서 꽃 터지는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p241 아무것이나 자라도록 방치된 밭은 게으른 농부, 더 이상 농부라 불릴 수 없는 사람들의 직무 태만의 결과이다. 이것이 재배의 의미다. 밭을 재배한다는 것은 자신이 심고 싶은 것을 심는 것이다. 심고 싶은 것, 즉 욕망을 따른다는 점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서 자라난 또 다른 욕망들을 뽑아낸다는 점에서 바자연적이다.

     유사한 욕망들로 점령된 밭을 묵정밭이라고 하고, 그 밭의 소유자를 게으른 농부라고 말한다. 키우려고 한 것 외에는 모두 잡초이다. 이것이 기준이다. 나는 왜 하나의 욕망이 그렇게 중요한지, 동시에 왜 다른 욕망들은 절제할 수 있어야 하는지, 뜨거운 날 잡초를 뽑으면서 생각해보았다.

⇒ 내 밭에는 잡초도 없네.


p242 나는 마흔이 넘어 내가 키우려고 마음먹은 작물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전히 다른 작물들에 대해 미련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의 작물을 선택했다. 해야 할 일은 잡초를 뽑고, 자양분을 제공하며, 훌륭한 밭을 제공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욕망이 자랄 수 있도록…하나의 욕망, 가장 나다운 내가 되는 것, 그저 생긴 대로 자라 가장 아름다운 내가 되는 것, 내가 만일 소나무라면 아름다운 소나무로 자라는 것, 만일 느티나무라면 아주 정정한 느티나무가 되는 것, 이것이 내 욕망이었다.


p243 어떤 경우든 식물은 한 번은 전성기에 이르는 것 같다. 일찍 시작한 놈은 봄, 여름에 빛을 내고, 조금 늦게 시작한 놈은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남아 멋을 부린다. 다 제 때가 있다.

     나도 늦게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다. 나는 어디서나 만나는 그저 평범한 남자였다. 특별한 인생을 살고 싶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그러다 우연히 글 쓰고 강연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인지 정체를 잘 모르는 식물이 자라나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처럼 나도 잎만 가지고는 내가 어떤 나무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이때부터 나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도 내가 아니다. 유일함이라니, 얼마나 황홀한 이야기인가!


p246 쉰 살이 되기 전에 이 부담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비로소 벚꽃의 사회적 상징과 의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적어도 벚꽃에 관한 한 비로소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즐길 수 있게 된 셈이다.

⇒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율을 무시하고 도덕을 무시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p246 어쩌면 밝고 화려한 성격을 오래도록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정신적 불활성이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박장대소하게 만들거나, 재치 있고 다소 수다스러운 밝은 벚꽃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나는 조용한 사람이고 무거운 사람이며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민감하고 진지한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세상을 밝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의 무거움의 대칭점에 서 있는 벚꽃의 화사함을 좋아하나 보다.

     그 꽃잎에는 어찌할 수 없이 작고 여리며 앙증맞고 환한 귀여움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이유이다. 


p249 우리는 증거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일을 하면 한 티가 나야 그 기쁨이 배가 된다. 정원 일을 하는 것은 즐거운 노동이다. 지금 막 시작했지만 아주 훌륭한 취미가 될 것 같다. 생명을 만나고, 생명과 이야기할 수 있으며, 생명이 자라는 것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산에 가서 걷는 것도 좋고, 이렇게 작은 정원 하나에 매달려도 좋으며 댓 평쯤 되는 텃밭에 매여 여름을 보내도 좋다. 즐거운 일이다.


p253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놓은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 그 울타리 안이 우리의 세계다. 이제 물리적 거리는 소멸되었다. 아침에 런던의 일을 보고 점심에 뉴욕의 일을 보고 다시 오후에 서울에 산재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우리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지구는 급속하게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루를 지내는 일상의 작은 공간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유목이 세계 속의 고향이고 내가 뿌리 내린 비옥한 공간이다.


p254 명상은 나를 즐기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현실에 갇힌 내가 아니라, 원래 있었던 아름다운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평화를 건져내는 것이다.


10장 학습


p259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시라. 그리하여 ’진리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혜의 친구‘가 되시라. - 니체 


p259 그러나 내가 떠나온 사회에서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확보하는 순간 과거 생활의 장점들이 나를 공격했다. 나는 아무런 소속감이 없었다. 안전을 지켜줄 울타리도 없어졌다. 매일 지겹도록 만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동료들도 사라졌다. 내게 정규적으로 먹이를 주던 손도 사라졌다. 아침이 되면 가야할 곳도 사라졌다. 생명보험도, 자녀교육비 지원도, 의료보험도 다 사라졌다. 모든 것은 내 주머니에서 지출되었다. 돈은 얼마나 빨리 소리없이 사라지는 초조함이던가.


p260 지역의료보험에 가입하면서 완전히 내 손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외로움과 불안과 대면해야 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로움을 선택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p260 책을 읽다가 “두려움은 곧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랴”라는 칼릴 지브란의 글을 발견했다. ‘씨팔.’ 어쩌면 말을 이렇게 잘한단 말인가? 욕! 그거 참 좋은 것이다. 속에 콱 막혀 있다가 가래처럼 올라오는데 뱉고 나면 후련하다.


p261 두려움은 서서히 옥죄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또한 강렬한 힘으로 작동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 열심히 일하도록 했다. 계속 책을 쓰도록 했고, 계속 읽게 했으며 그저 빈둥거리며 사는 것을 불편하게 했다.


p263 학습은 성공을 오랫동안 빛나게 해준다. 나는 학습이 의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의무이다. 이 짐을 견디지 못하면 더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짐을 견딘다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무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의무란 재미없는 것이다. 의무감이란 일상화되는 것이고, 지겨운 것이며, 반복되는 것이고,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는 무덤이기 때문이다.

⇒ 의무만 하고 있으니..


p263~264 나는 읽고 쓰는 것이 의무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으며,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되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취미가 여전히 취미일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취미가 직업으로 바뀌면서 순수한 호기심과 재미를 잃어버린 전문가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경계해야 했다.

     나는 한 가지 책을 읽는 것을 경계했다. 읽기 싫으면 읽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썼다. 매일 쓰는 것은 다행히 아주 즐거운 놀이였다. 나는 어느 책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와 느낌과 생각을 내 일상 속에서 매일 조금씩 찾아내고 표현해보려고 했다. 그것은 늘 살아 있다는 느낌을 선사했다. 나는 놀이가 가진 위대한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논다는 것은 순수하며 아무런 이해를 따지지 않는다. 경제적 계산을 넘어 빠져들게 한다. 

⇒ 쓰는 것은 안하고 읽기만 하고 있으니 써지지 않는 것인가.


p265 심심함이야말로 모든 창조적 발상의 원천이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주었고, 달리 해석하게 해주었으며, 속세에 물들지 않게 해주었고, 다시 나로 돌아보게 해주기도 했다. 심심하면 친구가 그립고, 그래서 그를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문화는 한가한 사람들의 작품이다.

     바쁘다는 것은 지우개와 같다. 모든 기억을 지우고 그리움을 지우며 의미를 지우고 생각을 지운다. 바쁘다는 것은 사람을 그저 움직이게 한다. 먹이를 나르는 개미처럼 한없이 움직이게 한다. 경제라는 본능에 따라 프로그램이 된 것처럼 낮도 밤도 없이 움직이기만 한다. 똑같이, 이 지겨운 반복적 소모를 ‘일한다’라고 부른다.

     니체는 ‘노동은 최고의 경찰’이라고 말했다. 노동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열망을 줄이며, 독립의 욕망을 피하는 현명한 자제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사회는 노동을 통해 안전해지곤 했다. 우리는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다가 죽는다. 한 번도 살기위해 일을 버린 적이 없다. 놀기 위해 산 적도 없다. 그래서 살기 위해 산 적이 없는 것이다.


p267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p268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쓰는지는 알고 있다. 나는 어떠한 줄거리도 없이 쓰기 시작한다. 그저 방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책을 구성하는 지도 같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도가 있으면 좋다. 그러나 내가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은 지도에 없는 곳이다. 대체로 나는 나침반만 가지고 집을 나서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남쪽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이 나침반은 내가 남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일깨워줄 것이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지도에 없다. 지도에 없는 길의 풍광을 즐기고 싶은 나는 그 길을 따라간다. 간혹 지도에 있는 길들과 교차하기도 하고 얼마간 평행이 되어 달리다 이내 산속으로 사라지기도 하는 나만의 길을 따라 줄곧 남쪽으로 간다. 이것이 내가 책을 쓰는 방법이다.

⇒ 글쓰는 방식이..


p 268~269 쓰다보면 묘한 곳에 이르게 된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으로, 예기치 않았던 모습으로 다가든다. 그러면 신이 난다. 글은 글에 연하여 새로운 세계로, 새로운 언어로 파고든다. 나는 이 방법을 즐긴다. 다소 목적지가 불분명한 여행, 가다가 언제고 목적지가 바뀔 수도 있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여행……. 난 이런 여행이 좋다. 여행은 곧 자유인데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에서조차 얽매이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p269 미래는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세계다. 그저 내적으로 감응하는 나침반 하나 달랑 들고 떠난다. 이때는 내 발자국이 곧 지도이다. 완성될 수 없는 지도, 때때로 잘못된 지도, 방황과 위험이 도처에 숨어 있는 지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가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지적 탐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 잘 모르겠다. 이성의 뒤에 숨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나를 나아가게 하고, 어떤 감정이 나를 휩싸기도 한다. 그리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해준다. 학습은 온몸으로 이루어진다.


p270 나는 내가 읽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p270 독자는 작가와 같다. 그들 역시 책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책을 쓴다.


p271 경제적으로 학습은 자신을 ‘자본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교육과 훈련, 그리고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서만 포인트가 누적되는 자본이 바로 ‘인적 자본’이다. 자신을 자본화할 때는 전략적 배려를 해야 한다. 인생을 길지만 또한 짧고 유한하기 때문이다. 전략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학습은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이란 ‘어떻게 배우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지적은 옳다. 학습이란 지식의 습득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습의 하위기능일 뿐이다. 학습의 핵심은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답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답은 이 탐험의 끝에 나타나는 보물이다.

⇒ 인적자본의 힘을 더 높이는 것.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제도적인 것을 통해서도 있고 독서를 통해서도. 현재 독서만 하고 있지만 끈임없는 학습의 필요성을 느낀다. 나의 강점의 하나가 학습으로 나오지 않던가.


p272~273 차례를 보고 몇 장을 넘겨보면 매력을 살살 풍기는 책들도 있다. 나는 그런 책들을 본다. 그러나 그들이 쳐놓은 사유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살금살금 걷듯 본다. 나는 단번에 매혹시키는 도약을 즐긴다. 물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도약을 만들어놓은 책을 애써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의 눈으로 책을 본다. 이미 마흔이 넘은 사람이다. 이미 삶의 웬만한 구석들은 혀로 핥아본 사람이다. 저자의 권위에 눌려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해한 것을 생활 속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도 바쁜 일인데 언제 그들의 중언부언을 들어줄 시간이 있겠는가?

⇒ 아, 저자의 권위에 눌려 살 이유가 어딨는가! 저자의 권위에 눌려 스스로 권위가 없음에 저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p273 단칼에 내 심장을 찌르지 못하는 자들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다시 그들의 책을 펼쳤을 때 운명처럼 심장을 찔리게 되면 그때가 그들과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명성이 자자한 책이라도 그 명성 때문에 보지는 않는다. 흘러간 시대의 흘러간 흔적이 지금 나를 깨우지 못한다면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다.


p273 나는 살고 싶다. 삶만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 역시 내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하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건강한 변모의 예술이다. 학습은 지식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획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늘 버리고 늘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p273~274 나는 배움이란, 그 너머에 있는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우고 또한 익히다가 결국 자신을 그 바람결에 실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하늘을 날 수 있다.

     학습은 어느 순간 이질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배움은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역사든 또는 과학이든, 배움은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아는 것이다. 낯선 소리, 낯선 얼굴, 낯선 삶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학습의 즐거움이다. 나는 모든 배움을 삶의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삶이 아니면 음악이 아니고 소설이 아니고 철학이 아니고 경영도 아니고 이윽고 삶도 아니다. 누구의 이야기가 되었든, '우리가 결국 한 작품 속에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가능성‘이라는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지적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p275 좋아하는 일이 즐거움이 되려면 잘 관리해야 한다. 나는 보기 싫은 책은 보지 않는다. 오직 마음이 가는대로 읽는다.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한 독서 같은 것은 없다. 오직 마음이 가는 대로 읽는다. 글을 쓰는 스타일도 자유롭다. 논문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글쓰기를 싫어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규정한 형식을 준수해야 한다. 지적 훈련의 어느 과정은 그래야 한다고 강변할 수 이 있고 옳을 지도 모른다. 사회적 필요성과 자격의 취득이 목적인 경우는 그들의 위엄과 전통을 따라야 한다. 힘을 그들에게서 오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질문하고 대답하고 싶다. 이때 지적 작업은 즐거운 산책이 된다.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이 된다.


p276~277 스승은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불을 끄고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보게 되길 바란다. 제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별빛을 보게 하는 스승만이 위대한 스승이다. ‘스승을 욕보이는 제자는 바로 영원히 스승을 빛나게 하는 자’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허물을 벗을 줄 모르는 뱀은 죽어버린다. 생각을 바꿀 수 없도록 방해하는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정신들은 이미 정신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는 가장 자유로운 미친놈이었다.


p277 전기작가로 유명한 스테판 츠바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니체는 ‘불꽃처럼 게걸스럽게 스스로를 불사르고 스러지고’ 싶어 했다. 불꽃이야말로 바로 그였다. 그의 본질은 넘실대는 불꽃같은 변화였다. 그에게 있어 완성에 이르는 길은 살인적인 자기파괴와 가지고 있던 믿음의 상실, 자기해체로부터 생겨났다. ‘자기처형’없이는 새로운 자기가 있을 수 없다. 자기처형 없이는 새로운 자기가 있을 수 없다. 단순한 자기변화로부터 스스로에게 반대하고 자신의 적이 되려는 데서 그의 기쁨이 생겨났다.

⇒ 내가 좋아하는 작가! 츠바이크. 어린 시절 그의 책을 즐겨 읽었고 그의 책에 꽂혔다!!

 

p279 삶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접속되고 연결되며 내재화되고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이 학습의 즐거움 아닐까?


p279~280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은 니체를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변신의 힘이며, 가장 극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이곳에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단호한 유혹에 따라 늘 ‘떠나야 할 곳은 알지만 도착할 곳을 모르는 배’를 타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니체로 남은 적이 없다. 처음에는 헤겔과 닮았다. 그러다가 ‘현존에 지독한 부정을 가했던’ 쇼펜하우어가 되었고, 바그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떠났다. 이윽고 자기의 개념을 창조해낸 바로 그 니체가 되었지만, 그는 다시 남들이 알고 있는 ‘니체 씨’를 떠나갔다.


p281 배움은 결국 삶의 실천에 의해 가장 잘 얻어진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 변화를 위해서 할 일이란 게 이 배움이, 먼저 생각나는 것.


p281 삶을 살면서 삶 속에 녹아버렸으면 탐닉하고 오직 삶이 되어 삶 속에서 노닐 수 있었으면 조금씩 조금씩 빠져들어 마침내 삶이 되었으면.


p281 내게 배움이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삶을 변화시키는 예술로서의 철학 또는 자기경영은 가능할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기경영 철학은 가능할까?


p282 혁명은 늘 하루를 바꿔줌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한다.


p283~284 깨달음이 하루의 일상으로 쳐들어와 하루를 바꾸어놓지 못하면 실천되지 않은 것이다.

    하루를 바꾸지 못하면 혁명도 없다.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 만일 하루를 춤추듯 보낼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매일 그럴 수 있으면 자신이 행복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길 위에 있다. 한 곳에 짐을 풀고 편히 쉬더라도 그것은 길 위에서의 숙박이다.

    ‘새로운 장르의 일상적 삶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실천적 개혁이고 혁명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의미있는 신호를 보낼 수 있으려면, 내가 새로운 일상을 하나 만들어 냈다는 사실 때문이어야 한다. 그 새로운 일상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내 삶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사례가 될 수 있다.

⇒ 하루 하루를 매일 바꾸는 삶도 좀 바쁘잖아. 단 하루만 이전과의 삶을 바꾸면 그 이후는.


p285~286 학습의 문화 속으로 자신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좋은 전문가의 필수적인 수련 과정이다. 학습은 종종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다. 냉정하고 감정이 배제될 때 잘 배우는 영역이 있다. 목욕탕의 냉탕과 같다. 그러나 학습의 또 하나의 얼굴은 뜨겁다. 혼이라든가 열정, 몰입, 감성, 직관 같은 단어들이 중요한 개념이 되기도 한다. 학습은 뜨거운 무엇이고,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며, 인문학적인 감수성을 건드려야 하는 것이다. 목욕탕의 온탕이나 열탕과 같다.

     나는 경영학과 인문학을 하나의 공간에 배치시킴으로써 훌륭한 휴식과 에너지를 제공하는 목욕탕을 만들고 싶다. 냉정하고 가혹한 경영 속으로 뜨거운 김이 솟구치는 인문학적 유산을 배치시킴으로써 돈으로 피폐한 영혼과 벌거벗은 몸을 돌아볼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학문적 관심사이다. 그것은 ‘현실세계 속으로 꿈을 침투시키는 작업’이었다.


p286 나는 나에 대해서 꿈을 꾸었다. ‘선비처럼 섬세하고 무사처럼 선이 굵을 것’ 이 표현을 소설가 최인훈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늘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p287 무사처럼 선이 굵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음속에 이는 두려움에 지지 않으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아 관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때때로 무리 속에 있지만 그들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의 물방울이 이내 바다 속으로 합쳐지듯 자연속에서 그대로 바람이 될 수 있다면 가히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선이 굵다 할 수 있다. 그가 묵묵하다면 더욱 그렇다.


p288 자신을 닦는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나를 닦아 나를 닦아 선비와 같고 무사와 같아진다면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수신(修身)의 방법을 찾아내고 싶었다. 자제와 절제라는 방법보다는 내 마음이 흐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Let it go! Let it go! 둑을 세워 마음의 흐름을 모아두지 않고 그것이 흐르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선하고 아직 그 선함을 보조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생겨나는 열정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 커다란 파도 같은 힘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자아경영 철학, 이것이 바로 내 학습의 중요한 테마 가운데 한 줄기를 이룬다. 또 하나의 줄기는 변화의 기술이다. 나는 이 테마 속에 조직의 진단부터 조직의 변화 모델로 이어지는 기술을 담으려고 한다. 변화의 철학과 기술, 이 두 개의 축을 나에게 적용해봄으로써 변화경영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아마 내 50대는 변화경영의 예술가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이 될 것이다.


p288 도전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실패는 딛고 나일 수밖에 없는 길로 운명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 도전은 실패를 이기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은 실패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도전은 매일 실험을 즐기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실패도 성공도 사라진다. 여행을 즐기는 자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세계에 탐닉한다. 그들은 춤추듯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 도전에 대한 새로운 마음이 필요할 때.


11장 일


p294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소명은 나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깨워 스스로 변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자아경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10년마다 기록되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나의 개인적 역사이며, 나를 소재로 한 소설이며, 나에 대한 연구보고서이다.

⇒ 나에 대한 연구가 재미없어지는데 자아경영을 위해서는 그러면 안되겠지.


p295 수없는 반복을 통한 훈련이 아니라 수없는 변화를 통한 훈련이 내 방식이다. 나는 물결에게서 이 방식을 배웠다. 물결은 무수한 반복이 아니라 무수한 변화이다.


p296~297 일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일이 품삯이어서도 안 되고, 삶의 다른 요소들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

     인생을 파괴하지 않는 직업, 삶을 빛내는 직업만이 훌륭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좋은 직업인가는 무의미한 질문이다. 눈부신 삶을 살게 하는 일, 그 일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는 일, 그것이 위대한 직업이다.

⇒ 이 문구가 좋았지. 일은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삶과 분리된 일을 하느라 여기까지 왔다. 인생을 파괴하지 않는 직업이 무얼까, 나에게.


p297 변화경영이라는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먼저 스스로의 변화에 성공해야 한다. 이것이 자격요건이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통렬한 아픔이었다. 변화경영 전문가로서 나에게 적용되는 엄격한 규율을 만들었다.

p298 먼저 나에게 적용할 것, 반드시 성공할 것

     그 다음 상이한 조건에서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활용할 수 있는 지 실험할 것.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걸 나누어주려는 잘못을 범하지 말 것.

     이것이 내가 요구하는 품질기준이다. 지식을 먼저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이것이 내 원칙이다.

     나를 변화시켰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내 하루가 바뀌었는지를 물으면 확실해진다. 오늘을 놓치면 삶을 놓치는 것이다. 하루를 즐길 수 있으면 훌륭한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나의 물결로서,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훌륭하게 사는 것이 내가 나에게 바라는 목적이다.

     하루를 변화시키지 못하면 나의 두 번째 커리어도 없다. 나는 진심으로 나의 르네상스를 바랐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에서 과감한 전환을 하고 싶었다.

⇒ 하루창조 수업을 하고 난 후 이 말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나의 변화가 하루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 나는 내일 달라져 있을까


p299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다른 것들과 원리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사업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글쓰기는 우선 모방이다. 많은 글을 읽는 작업이 선행되지 않고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모방할 때의 요령이 두 가지라는 점에서도 사업과 글쓰기는 일치한다. 얼마나 많이 모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감동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업이든 글쓰기든 가슴이 설득당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철학이나 깨달음으로 전환하기가 어렵다.


p300 설득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설득은 감정의 폭우를 필요로 한다. 감정을 담지 못하면 설득에 성공하기 어렵다. 열정을 가진 사람처럼 믿어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p300 모방의 또 하나의 요령은 ‘한 작품을 모방하면 표절이고, 여러 작품을 모방하면 연구이다.’라는 노회한 충고를 기억하는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감동하는 것은 사업이든 글쓰기든 훌륭한 성과를 내기 위한 근면한 배움의 요결이다.

    글쓰기는 또한 혁명이다. 모방만 가지고는 좋은 글쓰기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연결해야 한다. 창조성이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창의적 발상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p300~301 죽어있는 정신을 깨우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흥미가 살아나고 열정이 살아나며 삶이 살아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실험하게 된다. 실험이 곧 창의성이다. 글쓰기에서의 실험이나 사업에서의 새로운 시도와 모색은 다를 바가 없다. 글쓰기와 사업은 업종은 다르지만 같은 특성을 요구하는 행위라고 말해도 좋다.


p301 세상을 살며 그것이 보내는 신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 사회가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그 안에 키워내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 훌륭한 사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배움과 학습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리고 ‘자아경영’은 터득한 지식과 경험을 나를 위해서 먼저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나아지는 수련이다. 그 다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p302 내가 배우는 방법으로 가장 그럴 듯한 것이 배운 것을 나의 언어로 정리하여 책을 내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책을 읽고 감동적이 곳을 골라내어 내 상식으로 걸러 재편하는 데 꽤 능숙하다. 그리고 관심이 있는 분야에 그것들을 재결합하여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내는 작업 역시 즐긴다. 책을 볼 때 ‘변화’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집중한다. 소설이나 시를 뒤적이거나 역사서를 보거나 전문 서적을 읽을 때 내 주제는 늘 ‘변화’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 구본형식 책보는 법, 글쓰는 법


p303 나의 전문분야는 변화경영이다. 경영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변화라는 주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그리고 기업체에서 전문성을 쌓거나 경영 컨설턴트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 가운데 글로 자신을 표현할 만한 사람들은 더욱 드물다.

     글쓰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변화경영이라는 전문 분야를 대중이 즐겨 읽고 실천할 수 있도록 된장 풀고 고추장 넣어 먹을 만하게 끓여준다는 생각은 시도할 만한 일이다. 처음 해본다는 것은 기회를 선점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선점만큼 강력한 브랜드 전략은 없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글쓰기라는 재능과 변화경영이라는 전문경력을 결합시켜 이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만들어내었다. 

⇒ 나의 경쟁력을 찾아내는 것은 부담이지만 글을 쓴다면 꼭 필요한 일이다. 주어진 글쓰기를 하다 보니 쓰고 싶은 글쓰기를 잊어버렸다.

 

p304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읽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정리해야 한다. 정리된 강력한 핵심 개념들을 연결함으로써 미래를 현실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상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일상의 이야기가 되어야 실천할 수 있다.

⇒ 읽고 생각하고 정리하느라 정작 글 쓸 시간이 없다는 이 아이러니. 이럴 때는 하루종일 책만 읽고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p304 강점은 꿈을 이루는 도구 같은 것이다. 어떤 꿈이든 그것을 현실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적절한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사나운 괴물을 퇴치해야하는 영웅들이 신으로부터 빌린 날개달린 신발이며, 뚫리지 않는 방패이며, 잘 드는 칼과 같은 것이다. 신화 속의 영웅들은 그것의 도움을 받아 결국 꿈을 이루고 죽은 후에 하늘의 별이 되어 빛나게 된다.


p306 나는 개인에게 있어 변화라는 것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본래의 자기란 무엇일까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과 기질을 이해하고 그 강점을 계발하여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자기다움으로 돌아가는 좋은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깨우는 일에 능숙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나를 깨우는 일에 능숙해지면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자기를 깨우고 난 후에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수신(修身)이 이윽고 가정과 공동체로 스스로를 확장하게 된다.


p306~307 우리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We are helping people be a better person than ever before). 이것이 내 비즈니스의 정의이다.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특성을 강점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약점이나 장애로 여기는 것들이 얼마든지 강점으로 활용될 수 있다. 남과 다르다는 차이를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어낸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은 빛이다. 반딧불이든 커다란 등불이든, 그들은 우리에게 늘 빛을 던져준다.


p307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처음에는 규제하고 강압하며 표준을 바라는 세상과의 싸움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원칙이 통용되는 자신의 세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 세계를 침범하려는 ‘일반의 세계, 군주의 세계’와의 오랜 싸움을 전제로 했다. 자신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멋진 싸움꾼이 아니다. 싸움꾼이기에는 상처를 쉽게 받는 선천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쉽게 물러서는 타입은 아니다. 나를 키워준 것은 오히려 약한 마음이 늘 얻어 오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얻은 치유력이었다. 갈등이 나를 키워주었다. 마음속의 싸움을 통해, 비록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내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싸움은 생각보다 나쁜 것이 아니었다.


p310~311 성공에는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받는 쪽지에 적힌 대로 끊임없이 익히는 것일 뿐이다. 손에 익고 머리와 가슴 사이에 어떤 괴리도 없이 자연스러운 강줄기가 흘러갈 때 우리의 것이 된다. 그 때 성공은 우리의 특징이 된다.

    모든 성공한 사람은 성공의 특징을 휘장과 배지처럼 달고 나타난다. 그래서 간혹 우리는 그것들의 화려함에 기가 죽지만, 그것들이 성공의 원인은 아니다. 기름진 얼굴과 거대한 뱃살 뒤에는 거대한 식탁이 있듯이, 성공 뒤에는 성공을 향한 탐욕이 있었다. 경쟁에 대한 에너지, 시기와 질투와 원망이 있었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모방하게 하고 배우게 하며 연습하게 하고 익히게 했다.


p311~312 나는 이미 성공의 비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배우고 익히는 것은 모두 당사자의 몫이다. 내가 신으로부터 받은 쪽지, 그리고 연습하고 훈련하면서 내 언어로 고쳐 쓴 쪽지에는 성공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유일한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최고가 된다는 뜻이다. 유일한 자만이 최고로서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인생을 모두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성공할 수 있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매력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성공은 늘 한 길로 간 사람들의 것이다. 적어도 나는 한 길로 가기에도 숨이 차다. 다른 것들을 넘겨다 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나는 그저 내 일만 해도 저녁에 이미 탈진한다.”


p312 유일한 사람이 되는 길은 신의 쪽지, 즉 ‘자신에 대한 기록’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자신만이 유일함의 원천이다. 자신을 활용하지 않고는 유일함에 도달할 수 없다.

    유일함을 수련하는 방식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깊숙한 곳에서 잠에 취해 있는 자신을 깨워내는 것이다. 그것은 대개 아주 깊은 산중에서 잠에 빠져 있기 십상이다. 게으르고 잠을 즐기며 눈치를 보고 비겁하고 교활하지만 아직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견하지도 못하고 발휘할 줄도 모르는 미숙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이 내면의 영웅이 스스로 일어나 초려에서 나오도록 설득해야 한다.  


p312~313 스스로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내면의 구곡양장의 길을 따라 여러 번 ‘삼고초려’의 극진함을 보여야 한다. 인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 만에 하나 ‘자기 스스로를 얻을 수 있다면’ 천하에 자신을 표현하기가 어렵지 않다.


p313~314 누구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싶은 사람은 인물을 얻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살려내지 않고는 내면에 숨어 있는 영웅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이다.


p314 나는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분노는 억제된 불길이다. 나는 때때로 침울해 보이거나 무거워 보였다. 분노를 적의 없는 상태로 감출 수 있는 방식이 바로 스스로에게 물기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제대로 타오를 수 없었다. 가득한 여기에 시달리다가 결국 불문을 열고 굴뚝을 달아 불길이 훨훨 타오르도록 했다. 이것이 나를 살려 주었다.

     그들의 방식이 아니라 나의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분노를 자극했다. 나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분노를 키웠다. 이것이 내가 내 속의 분노를 길들이는 방식이었다. 내 속의 욕망이라는 불길이 잘 타오르는 동안 나는 마음의 평화를 즐길 수 있다. 그 불길의 주위에 자리를 펴고 누워 타오름을 즐기는 것은 벽난로의 아득함이었다.

⇒ 분노. 회피할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표출할 것


p315 나는 마음이 여리고 소심하다. 늘 쉽게 상처를 입는 편이다. 예민하기 때문에 대상을 잘 골라야 한다. 나는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대신에 책으로부터 배우는 방식을 구했다.


p315 나는 그들을 읽는다기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유를 기초로 내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는 옷을 사서 치장하는 대신 조금 묵직한 정신적 허영을 즐겼다.


p317 나는 글을 쓸 때 나에게 주술을 건다.

    “내가 쓰는 글은 짧고 감동적이어야 한다. 감동이라는 껍질에 싸여 있는 씨앗이다. 그것은 적대감이라는 위액과 소화액에 녹아 없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발아할 수 있는 장소까지 이동해야 한다. 피와 영혼과 정신의 어느 부분을 건드려 그들 역시 알 수 없는 환상과 내면의 열정 속에 빠져들게 해야 한다. 열정이란 심장과 감정과 창자로부터 생겨난다. 참다운 자신이 되는 자유는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켠 허파의 외침’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감동이며 환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서 위대한 힘을 감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 구본형의 글쓰기.


p318 사람들은 이 속에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주는 터무니없는 위로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자신이 희망적 현실주의자로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는 가능한 꿈을 꾸어야 한다. 가능한 꿈을 꾸는 현실주의자, 나는 이것을 희망적 현실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꿈으로 가는 길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내 앞에 놓인 냉혹한 현실을 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글을 통해서 사람들이 지루한 일상을 하염없이 반복하는 무료와 절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인생의 재료로 삼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자신을 반죽하고 주무르며 데어내고 빚어낸 후 색칠하여 자시 세상에 내놓게 도와주어야 한다. 새로 만들어진 그들은 자신에 대한 존중감으로 가득하고, 아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만, 늘 스스로 새롭게 생성되는 사람들이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자신을 탄생시키지 못하는 불임을 극복해낸 사람들이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내 글은 강력한 유혹이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삶에 대한 하나의 사례로서 나는 내 삶 자체가 매혹적이기를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나는 매혹적인 삶이라고 부른다. 나는 나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다. 끝없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여행, 이것이 내가 그리는 삶이다.”


p319 나는 그저 하나의 일만 하면 된다. 오래도록 해온 일이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며, 이 세상에서 그 일만이 내가 살아 있는 목적이 된, 그리하여 내 일상의 하루가 되어버린 그 일 외에 나는 아무런 할 일도 없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생각하고 버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또 모든 생각을 한다.


p325 인기라는 것은 덧없는 것이며 언젠가 떠나는 것이다. 떠나는 것에 의지한 자는 불안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늘 변하고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기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인기를 추구하는 자는 인기를 잃음으로 결국 불행해지거나 스스로의 왜곡에 빠지기 쉽다. 지지자로 둘러싸인다는 것이 위험한 이유이다. 모든 화려한 자들은 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근신할 줄 알아야 한다. 인기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은 것이다.


p331~332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목표여서는 안 된다. 내 목표는 그 이상이다.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모교, 그것은 반드시 청중 속의 누군가를 움직여 스스로 자신의 고뇌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적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강연장을 떠나 그들이 일상 속에서 변화를 실천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하루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잇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강연은 실패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pp 334 불행한 사람들만이 변화에 관심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지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행복을 가장한 사람들 역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도 때때로 변화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뼛속 깊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이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별 의미와 보람도 없는 불안과 무력감에 시달리는 일상이라고 엄살을 떠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인생은 그런 것이려니 하는 사람들이다. 변화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과 당위성을 찾아냄으로써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 된다. 변화를 꿈꾸지만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 나는 그들 속에서 불행을 감지한 치열한 사람들을 찾아내야 했다.

⇒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일까.


p336 ~337 변화는 달콤한 과정만으로는 절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변화 속에는 늘 피의 냄새가 난다. 형태상으로는 아주 부드러운 변화도 있다, 코코샤넬은 화장품의 개념을 바꿈으로써 부드럽고 향기로운 혁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든, 혁명은 언제나 기존의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당황스럽고 길을 잃게 하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과정에서 늘 과거와의 분쟁이 그치지 않는다. 사랑만큼 우리를 달라지게 하는 것도 없다. 사랑에 빠지면 눈조차 멀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많은 흥분과 미움과 증오와 눈물로 짜여진 옷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변화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사랑이다. 치열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다.


p340 정신적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늘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자신의 정신을 새롭게 닦아놓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 인간은 모두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밀리면 정신적 타격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다른 것이 잘하지 못할 때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는다. 못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실수하거나 마음에 차지 않으면 매우 불쾌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이 때 자신의 분야가 나를 찌르는 비수가 된다. 그러므로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어제의 진실은 오늘의 진실이 아니다. 늘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는 정신은 죽은 것이다.


p342 내가 하는 일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아직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때 잠시 ‘우연한 쏘시개 불꽃’이 되는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길을 갈 때는 내면의 등불을 밝히고 가야 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등불이나 등대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가는 여행은 우리 속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수록 오직 자신을 태우는 등불로 길을 밝혀야 한다.

     막막할 때, 주저앉아 있을 때 우연히 자신의 안에서 스스로 불을 켤 수 있도록 잠시 불을 빌려주는 예기치 않은 쏘시개 불꽃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무수한 군중이 있지만 내 말을 듣고 자신의 갈을 가기 위해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속에서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나는 그저 그 속에 불씨 하나를 던져 넣는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타오르는 것을 보며 즐긴다.

     내가 하는 일은 또한 어느 날 문득 누군가의 마음이 자신의 꽃씨를 기억하게 하는 일이다.


p343 자신의 꽃씨를 뿌리게 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나는 조용한 선동가다. 모든 씨앗에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속삭인다. 그 꽃이 무슨 꽃인지는 피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꽃이 다른 꽃들과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 꽃을 피워내 이 세상에 그 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삶이라고 선동한다.

     꽃씨와 불씨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비즈니스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배운 방식이다.


세 개의 에필로그


p348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임무는 ‘나를 탄생시키는 일’이었다. 그것이 물결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창조는 바로 그 물결처럼 내 발로 일어서는 것이었다. 나의 하루, 나의 역사, 이것이 바로 그 물결이었다. 이제 누구도 내게 명령하지 못하게 하리라. 다시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것이다. 이것이 내 첫 번째 계획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계획이었다.


p352 나로부터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나는 삶을 방기한 것이다. 그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나 자신이야말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며 유일한 미래였다.


p357 지는 해는 반드시 져야 한다. 그 대신 다른 곳에서 떠올라야 한다. 나는 해가 떨어지는 오후에 다른 세계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바의 한가운데서 아침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찬란한 아침으로 연결되는 것을 신비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인생이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며, 나에게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내 해가 지는 세계에서 오후에 나왔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내 해가 지금 막 떠오르는 세계로 떠나왔다. 나는 두 개의 하루, 두 개의 태양을 갖게 되었다. 한 곳에서 살던 짐을 꾸리고, 다른 곳에서의 삶을 위해 다시 짐을 푸는 시기가 내겐 마로 마흔이었다. 하나의 세계가 닫히면서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위대한 시기였다. 


p360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든든한 밥그릇 하나 챙겨두는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 쩨쩨함의 끝을 묻고 싶었다. 새로운 인생을 건설해야 하는 시점에서 여전히 망설이기만 하는 나에게 무엇을 더 기다리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p361~362 결과와 목적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그러나 정말 나의 목적은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하루를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각성과 준비의 제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하루답게 사는 것이다. 어떤 하루도 목적-그런 것이 있다면-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하루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희생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루 자체를 빛냄으로써 인생 전체를 빛나게 하고 싶었다. 이것이 목적이다. 내겐 좋은 하루 그 자체가 목적이다.


p363 하루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생활고나 가난 때문이 아니다.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늘 가난과 부유함이 같이 있곤 했다. 가난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그저 누가 부유하고 누가 가난한가의 문제에서 내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가 개인적 관심사였다. 돈을 더 벌기 위해 내 시간을 돈벌이에 더 많이 쏟아붓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p364 내게 마흔은 세상을 즐길 수 있게 해준 나이였다. 인생의 맛이 스며 일상의 뼛속까지 배어든 나이였다. 약간 뻔뻔해진 아줌마들처럼 인생에 대한 헛된 기대 대신, 직접 살아 본 경험의 혓바닥으로 날마다 인생의 삶 맛을 핥아볼 수 있는 나이였다.

     언젠가 한번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스스로 설계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깨끗하고 빛나는 옷을 입고, 햇빛 가득한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아름다운 인생 하나를 건설해야 했다. 아름다운 그날 하루를 내 삶의 국경일로 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경영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주인을 닮게 되어 있다.


평설-한명석


p366 나는 언제나 혼자 놀 줄 아는 사람에게 끌린다. 학벌이나 사회적인 위치에 대한 관념에서 자유로운 대신, 혼자 놀 줄 아느냐의 여부가 내가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1장 지난 10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 유혹의 나이, 마흔 | 결정을 지난 꽃의 아름다움 | 가장 정력적인 나이에 버려지다

 

2장 마흔 살

 마흔에 관한 이야기들 |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나이

 

3장 직장 생활

 홀로그램의 세계 속에서 | 필요한 사람들 | 돌연한 출발 | 나를 마케팅하다 | 새로운 시작

 

4장 얼굴 - 페르소나

 머리카락, 약간의 콤플렉스 | 수염, 자연의 공평함 | 코, 나의 자부심 | 인상, 자랑할 만큼은 아니지만 | 인형에서 자유인으로

 

5장 가족

 부드러움이 돋보이는 아이 | 나를 닮은 아이 | 나의 별명은 '미숙이' | 늘 옆에 있는 그녀

 삶의 우선순위 | 아내와 함께 떠나는 여행 | 늘 반갑고 그리운 친구

 

6장 자연

 산과 가까워지는 공간 | 변화의 이유 | 나는 나무다 | 나만의 씨앗

 

7장 건강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죽음 | 욕심이라는 이름의 암세포 | 이상 신호 |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

 

8장 길에서

 정신적 여행자 | 길을 찾아서 |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깨달음 | 행복해지는 법

 

9장 집, 공간

  내 마음의 집 | 산을 품은 집, 집을 품은 산 | 욕망이 자라는 공간 | 정원손질 | 일상의 작은 쉼터

 

10장 학습

  놀이로서의 학습 | 나침반 하나 들고 떠나는 탐험 | 마음이 가는 대로 | 노마드 | 삶의 방식을 바꾸는 혁명

 

11장 일

  내가 일하는 방법 |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 | 성공의 비결 | 유일한 사람|

  청중이 듣고싶은 강연 | 나의 역할 | 변화의 주체가 되는 길 | 꽃씨와 불씨

 

세 개의 에필로그

평설

 

 저자는 이 책은 자서전이라 말한다. 자서전은 저자의 삶의 현실적인 흔적이 기술되고 그 삶에서의 저자의 생각들이 나타난다. 저자는 자서전의 부제를 ‘10년마다 자신의 삶을 결산하는 자아경영 프로젝트라고’명명했다. 자신의 삶의 결산 방식을 저자의 삶을 구성하는 총 11개의 테마로 구성하여 기술하고 있다.

 먼저 1장에서는 자신의 지난 10년의 삶을 돌아보고 2장에서는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의 나이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3장에 이르러 직장생활을, 4장에서는 얼굴과 외모와 더불어 자신의 내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5장에서는 가족, 6장에서는 자연, 7장에서는 건강, 8장에서는 길, 9장에서는 집과 공간 10장은 학습, 11장은 일이라 주제로 구성되고 있다. 이러한 주제 아래 자신의 삶에서 생각해오고 실천해 오던 것에 대해 저자가 가지는 삶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각각의 주제 아래 소제목을 달아 짧은 이야기 형태로 구성하고 있다.

 흔히 자서전이라 하면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저자의 삶의 외관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른 내면의 이야기가 흐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서사적인 흐름을 따르는가 싶으면서도 삶에서의 사건이나 인생의 흐름보다는 살아온 과정 속에서의 사유를 풀어내는 것을 더 중시한 듯하다. 그래서 어찌 보면 주된 ‘이야기라인’이 없다. 어쩌면 특정한 인물의 인생이야기가 부각된 자서전적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볼 수 있는 인생의 ‘특별한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게 없다. 이렇게 얘기하기엔 그렇지만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막장’, ‘어떻게 그런 일을 겪을 수가’라고 할 만한 이야기가 없기에 이러한 형태의 구성이 나오지 않은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고하고픈 이들에게, 그럼에도 이렇다 할 ‘사건’이 뚜렷하지 않았던 삶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구성과 내용으로 보인다.

 각 장마다 소제목을 달고 이야기하고 있어 소제목에서의 연결고리는 있지만 전체적인 구성에서 보면 큰 이야기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사유의 흐름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사유에 맞게 힘있고 강건한 문체가 아니라 부드럽고 조곤조곤한 문제가 담백하게 이어진 에세이 형태다.

 저자는 구성상에 세 개의 에필로그와 평설을 두고 있다. 특히 평설이라는 것은 글에 대한 해석이자 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이러한 역할은 저자보다 연배가 높거나 네임 밸류를 가진 사람들이 한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제자의 평설을 싣고 있다. 어쩌면 저자는 단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글이 좋다, 나쁘다’의 평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가까이 있는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리하여 그에 대한 평을 받는 것이 더욱 진정성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적중한 듯하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자서전을 읽다 보면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삶이다. 자서전을 쓰는 이들은 우선 많은 굴곡과 사건들을 겪은 삶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아서 그 힘든 일들을 겪은 데 대한 ‘사건’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딱히 사건이라 부를 사건이 없기에 사물이나 일상에 대해 가지는 그의 차별적인 생각, 혹은 공감되는 생각, 아름답게 묘사하고 비유한 문장들에 눈이 간다.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이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인 것처럼 ‘마흔’에 대해 표현한 구절들이 되씹어지는 구절이다. 마흔의 삶에 대한 저자의 단상들, 비유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마흔은 정말로 흔들리는 나이인 것인지, 이와 같이 마흔에 대한 좋은 글귀로 인해 사람들이 감성적이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마흔의 삶에 대한 비유들이 이 책이 나올 수 있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는 듯해서 ‘마흔’에 대한 그의 여러 묘사와 비유를 가진 글귀들을 계속 곱씹어 볼 참이다. 근데, 또 딱히 생각하면 거기에 ‘마흔’ 이 아니라 ‘서른’도 대입해 보고 오십도 육십도 대입해 본다. 딱히 안 어울리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저자의 필력이 워낙 매끄러워 정말 ‘마흔’이 딱이구나 싶게 된다. 마흔은 당나귀의 삶이라는데 어쩌겠는가. 서른도, 오십도, 육십의 당나귀의 삶보다 마흔의 당나귀의 삶이 딱~이다.


■ 보완점


 너무 자서전이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고 책의 흐름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자꾸 ‘자서전’이라고 보니 흔히 하는 자서전의 틀로 책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일단, 자서전의 느낌인데 자서전을 벗어난 형식이란 것이 신선하다. 하지만, 자서전을 내는 이들은 일단 여러 방면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다. 구본형도 마찬가지다. 이미 앞선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렇다는 것은 그의 저서를 통해 그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을 알고, 그의 생각들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사유들은 다른 책들에서의 사유와 어떤 차별이 있다고 봐야 할까?

 그의 삶에 대한 대강의 그림자라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까. 보통의 자서전이 태어난 순간부터의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면‘구본형’의 자서전은 그의 지난 생애를 그저 ‘지난 10년’으로 묶어 간단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감각적, 묘사적, 비유적인 글들로 그의 생을 정리하고 있다. 자서전이 과거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면 이 책은 미래의 이야기인지 ‘하고 싶다’와 ‘되고 싶다’라는 단어가 더욱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이야기의 구성 또한 종횡무진이다. 직장생활을 이야기하다 내 얼굴을 이야기하다가 자연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그 연결고리가 그렇게 어긋나다는 것을 느끼진 않았다. 그저 장마다 다르게 읽히는 이야기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차만 봤을 때는 이것이 자서전의 제목이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저자처럼 여러 책을 통해 반복적인 메시지를 전달한 경우에만 가능한 목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상에 처음부터 자서전을 들이미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메시지들을 다른 글들과 얽어 내어 또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탁월한 힘을 가진 저자임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돌고 돌아 ‘직장생활’이 아닌 개인의 ‘일’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벗어나 나의 ‘일’을 찾는 과정에서 느끼는 인생의 사유를 개인의 내면과 외면을 넘나들며 한 편의 그림같이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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