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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8일 13시 00분 등록

자식이 끈이더라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요.

남편과 자신을 이어주는 끈일 뿐 아니라 세상과 이어주는 끈이 되더라는 말을요

그러고 보니 국숫발이 모양으로만 보면 끈 같기도 하네요.

가늘고 기다란 게 하얀 운동화끈 같기도

혹 당신이 뽑아낸 국숫발들은 끈이 아니었을까요.

 

-김숨, <국수>

 

엄마의 나들이, 명동 칼국수

 

엄마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가친척이 많진 않았어도 나름 종가의 며느리였던 엄마는 어떤 시각에 어떤 손님이 오든, 냉장고에 뭐가 남아 있든지 간에 순식간에 한 상을 차려내는 재주가 있었는데, 남도 출신답게 특히 바닷것들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반달 모양 두툼한 무 조각을 깔고 또 덮어 간간하게 조려내는 갈치조림, 집에서 담근 된장과 고춧가루를 풀어 넣고 쑥갓을 올려 끓여낸 감칠맛의 폭탄 꽃게탕, 달고 부드러운 생선살과 칼칼한 국물의 조화가 압권인 대구탕, 그리고 입안을 짜르르 타고 넘어가 목구멍에서 위를 정복하고 다시 호흡기를 장악하는 핵폭탄급 위력의 홍어찌개. 그 비리고 싱싱한 것들의 향연은 엄마의 자랑이자 탐닉이었다.       

 

나는 생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선은 낯설고 무섭고 냄새 나는 것들이었다. 나무도마에 축축한 비린내가 진동하는 물고기를 올리고 엄마가 거대한 식칼을 나무도마에 탕, 내리치면 눈을 부릅 뜬 머리가 뎅겅 잘려나갔다. 그리고 흐물한 속살을 비집어 주룩! 내장을 단번에 훑어내는 그 가차없는 손길. 식탁에 오른 생선요리의 전제조건인 손질 과정은 어린 내게 언제나 경악이었고, 제 아무리 싱싱하다 해도 바다를 떠나는 동시에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하는 그것들은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존재였다. 언젠가는 할머니가 냉장고에서 썩은 내가 나는 생선을 발견하고 기겁을 해서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는데, 그게 알고 보니 엄마가 신주단지 모시듯 아껴둔 삭힌 홍어였다! 아이고, 그게 어떻게 구한 건데얼마나 귀한 건데 그걸 버렸냐며 법석을 피우던 엄마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나는 목격하고 말았다.

 

사실 나는 그 홍어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우리 집 식구의 아직 덜 발달한 미각 유전자는 죄다 이북 출신인 할머니의 그것에 쏠려 있던 까닭에, 육고기가 아니면 건건이[1]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삼겹살을 소금도 안 찍어먹는 고기 매니아들일 뿐 홍어의 강력한 한 방을 별미로 인식할 혀를 가진 이가 없었다. 그저 한 명이 귀한 생선이라며 놔둔 것을 또 한 명은 썩은 생선이라며 내다 버린 두 여인의 해프닝이 우습다며 온 식구가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댔을 뿐이다. 저 머나먼 북녘의 내지 출신인 할머니와 아버지의 입맛을 맞추느라, 어렵게 구한 홍어를 저녁상에 한번 내지도 못하고 모셔둔 엄마의 마음 따위 알 리가 없었다.

 

어쨌든 전라도의 손맛을 가지고 평안도 출신의 집안에 시집을 온 며느리는, 짜르르한 간장게장을 담는 솜씨로 쨍한 이북식 동치미를 담게 되고, 싱싱한 겨울 굴 전을 부쳐내던 솜씨로 돼지비계를 지져 녹두전을 부치게 되는 법이다. 생각컨데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에 이 이상의 조합은 없다. 재료와 요리에 따라 엄마는 징하게 맛나는남도의 스타일과 거저 담백한 게 최고인(호방하고 시원한)’ 북녘의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구사했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의 입맛은 기준점이 꽤나 높았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 국수나 만두, 빵 따위를 좋아하는 것은 원래 북쪽 사람들이다. 극동 지방에서 밀이 나는 곳은 아무래도 북부다. 과거 우리나라 최대의 밀 생산지는 함경도의 사리원이었고  질 좋은 메밀이 나는 곳도 대개 추운 지역이었기에, 국수나 냉면 따위를 밥만큼 사랑했던 사람들은 북녘의 사람들이다. 남쪽은 쌀이 풍부했기에, 부러 국수니 빵이니 하는 밥의 대용품을 찾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북부와 남부의 주식은 국수와 빵, 만두 류의 분식 류와 쌀밥으로 완연히 양분된다. 우리 집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유전적 환경을 그대로 반영해 약 6 1의 비중으로 면식인과 비면식인이 나뉘었는데, 엄마는 당연히 후자였다.

 

나의 유구한 면식역사 중 유년기의 첫사랑은 칼국수였다. 냉면은 별로, 국수도 별로, 라면은 절대 싫은 엄마가 집에서 밀가루 반죽을 빚어 칼국수를 해주길 기대하기는 무리였기에, 나는 갖가지로 칼국수를 먹을 방법을 궁리했다. 오죽하면, 초딩 시절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사먹은 간식이 칼국수였다. 그 시절 이미 가족 동반이나 계모임 아줌마들의 아지트인 동네 손칼국수집에서 나 홀로 면식수행을 감행할 정도의 모태 면식인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게 다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동생의 증언은 달랐다. 엄마 외출하면 언니가 맨날 칼국수 만들어 줬잖아, 기억 안 나? , 내가? 동생은 내 덕에 방학 내내 칼국수와 수제비를 먹었다고 했다. 순간 삼십여 년 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여름날 칼국수 제조의 기억이 떠올랐다.

 

콩가루를 섞은 굵직한 면발이 특징인 우리 동네의 유일한 칼국수집 두메 칼국수는 인기가 많았다. , 그러나 용돈은 더디 모이고, 국수는 늘 먹고 싶었다. 그러니 자가제조를 감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명절이면 어른 주먹만한 손만두를 빚기 위해 만두피를 직접 만드는 할머니를 지켜봐 온 덕에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밀대로 반죽을 밀어 썰어내는 손칼국수 제조법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칼국수를 검색하면 레시피가 당장 검색되는 시절이 아니었던 만큼, 나의 첫 면 요리는 오로지 눈썰미와 추리로 재창조될 수 밖에 없었다. 요리라기보다는 발명에 가까웠던 칼국수 제조의 과정 중 가장 힘든 부분은 반죽이었다. 힘이 딸렸다. 초딩 4학년이 되도록 30kg을 넘지 못한 비리비리한 꼬마가, 오늘 점심은 어떻게든 국수를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만으로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이기다 보면 온 몸은 흰 분을 뒤집어 쓰고도 모자라 마루바닥까지 새하얀 몸부림의 흔적이 남곤 했다. 밀대로 미는 것도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온 몸의 무게를 두 팔뚝에 실어야 간신히 밀고 당길 수 있었지만, 힘만 좋았지 요령이 없어 여기 저기 빵꾸만 내는 동생에게 밀대를 맡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의 백미는 칼질이었다. 어렵사리 밀어 낸 반죽에 밀가루를 뿌리고 다시 몇 겹으로 접어 무딘 식칼로 조심조심 썰다 보면, 거짓말처럼 뽀얗고 통통하고 가지런한 면발이 생겨났다.

 

, 사진으로라도 찍어뒀음 좋았을 것을. 칼국수를 만드는 과정이 힘에 부치긴 했어도 어린 나와 동생에게는 소꿉놀이와도 같았다. 그러나 보통의 소꼽놀이와 달리 놀이가 끝나면 먹을 것이 생기는 기특하고 진지한 놀이였다. 나는 너무도 뿌듯하여 썰어낸 면발을 국물에 담그기도 아까울 지경이었지만, 시간이 지체되면 간신히 썰어낸 면발이 다시 덕지덕지 눌러 붙어버릴 터라 최대한 빨리 물을 끓이고 국수를 집어넣었다. 칼국수 국물은 뭘로 만들어야 하는 지, 다시를 낸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도 알지 못했기에, 엄마가 찬장에 꿍쳐둔 다시다를 써서 간을 맞췄다. 지금이라면 쇠고기 다시다로 국물을 낸 칼국수를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을까 싶지만, 나와 동생은 요리사의 자부심을 갖고 별채에 살던 동생 친구 효진이까지 초대해 거나한 국수잔치를 벌이곤 했다. 엄마는 본인이 외출한 동안 알아서 밥을 챙겨 먹은 동생과 나를 칭찬하기도 하고, 난장판이 된 바닥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했을 때는 꾸짖기도 했지만, 국수를 만든다고 법석을 떠는 딸내미를 말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국수는 엄마의 종목이 아니었으니.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좋아한 국수가 있었다. 명동칼국수였다. 수유리 4.19탑 앞에 자리한 우리 집에서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한 시간 반은 걸려야 갈 수 있는 사대문 안의 그 곳. 미도파, 신세계, 롯데, 으리번쩍한 백화점이 무려 세 군데나 있는 동네, 명동에 그 국수집이 있었다. 명동에 가자. 엄마는 늘 하루나 이틀 전쯤 나에게 외출을 통보했다. 혼자만의 외출이 아니라 딸들을 대동하는 외출은 엄마에게 어떤 의미일까? 빠듯한 살림에 대식구를 건사하느라 늘 아둥바둥, 시간에 쫓기는 엄마였다. 뭔지 몰라도 꼭 처리해야 하는 바깥일을 보러 가는 날은 우릴 데려가지 않는다고 어린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엄마가 나에게 외출을 청하는 날은 특별한 날, 엄마도 한숨 돌리고 싶다는 의미로 나는 짐작했다. 덜컹덜컹 멀미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그 화려한 동네에서, 엄마가 사주는 칼국수를 나는 손꼽아 기다렸다. 명동칼국수, 지금은 명동교자로 바뀐 그 가게는 그 때도 어지간히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워낙 후루룩 뚝딱 먹는 음식이다 보니 자리는 금방 났다. 엄마는 우리 몫까지 칼국수를 주문하고 내키면 만두도 한 접시 시켜줬다. 나는 물론, 칼국수에 집중했다. 함께 나오는 조밥은 귀찮았다. 이걸 주느니 국수 사리를 줄 것이지.

 

노란 닭 기름이 동동, 고춧가루가 조금 섞였는지 약간의 붉은 빛이 감도는 누런 육수에 동네 칼국수집과는 차원이 다르게 얇게 빠진 면발, 이 집의 별미인 납작한 만두와 쇠고기 고명이 올려져 있는 모습이 어찌나 맛나게 보이던지, 어린 내 눈에도 이것은 한 차원 높은 국수, 촌티 나는 우리 동네 칼국수와는 격이 다른 음식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매운 김치. 고춧가루가 매운 게 아니라, 마늘을 어찌나 많이 넣었던 지 먹고 나서 숨만 쉬어도 온 방안이 마늘 냄새로 꽉 찰 듯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매운 겉절이는 이 집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이었다. 엄마는 그 매운 김치를 칼국수에 얹어 정신 없이 들이켰다. 나는 김치 한번, 국수 한 젓갈의 순서가 지키며 두 음식이 섞이지 않도록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이며 국수를 먹으려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유난히 까탈한 입버릇 때문에 엄마한테 혼나는 일이 많았는데 일단 밥과 반찬을 한 입에 넣지 않았다. 두 가지 이상의 음식이 입 안에서 섞이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어떤 음식이든 한 입에 넣어 그 맛을 온전히 다 보고, 식도로 넘어가야만 다음 한 입을 대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거다. 깨작대는 듯한 모습이 보기에 답답했을 뿐 아니라, 한 끼에 최소 40분 이상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식습관이었기에 얼른 밥상을 물리고 정리를 해야 하는 엄마에게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 버릇은 무려 이십 대 후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야 고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물도 맛을 보고 먹는 까다로운 입맛이 문제였다. 스뎅 그릇에 담겨 나오는 물은 비린 쇠 맛이 느껴져 먹기 싫었고, 나의 착각일지 모르나 물의 온도가 미지근하면 그릇의 재질에 따른 맛이 더욱 잘 전달되는 듯 해 더더욱 먹기 싫었다. 확실하게 찬 물이거나, 아예 뜨거운 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 칼국수집의 매운 마늘겉절이는 혀를 통째로 마비시키는 강력함으로, 이거 한 숟갈, 저거 한 젓갈의 순서를 망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 이때만은 나도 엄마와 같은 속도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엄마의 확실한 취향과 딸의 까다로운 입맛이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국수, 명동칼국수의 위력은 그런 것이었다.

 

며칠 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원래 국수 안 좋아하잖아요. 명동칼국수는 뭐가 좋았어? 그게 말이지. 국물이 닭육수였거든 / 그거야 알지 / 지금은 좀 국물 맛이 달라진 것도 같은데, 그때만 해도 닭을 한번 볶아서 진하게 국물을 내니까, 어쩌다 닭다리나 날개 같은 게 국물에 들어 있을 때가 있거든. 없이 사는 때니까 딸려 나온 닭고기를 먹으면 운이 좋은 것 같고, 먹는 재미가 있었지 / 그런 거였어? / , 그런 거지 뭐. 국물에 딸려 나온 닭다리의 유혹, 엄마가 유일하게 사랑한 국수의 사연은 허탈하도록 소박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 날의 국수는 엄마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너무 젊은 나이에 세 남매의 엄마가 되고 종가집의 며느리가 된 엄마였다. 칠순이 되도록 장사에서 손을 놓을 수 없었던 할머니는 살림을 하는 분이 아니었기에,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이 낯선 입맛과 무뚝뚝한 성품을 가진 식구들의 뒷바라지를 온전히 떠맡아야 했다. 정말 어쩌다, 늘 입던 몸빼 바지나 아빠의 작업복을 수선한 바지 대신 외출복을 차려 입고 어린 두 딸을 대동하고 명동에 갔던 엄마. 백화점에서 살 물건이 있었을까? 나는 백화점이라는 곳이 물건을 구경할 뿐 아니라, 살 수도 있는 곳이란 사실을 꽤나 자란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가 물건을 사는 곳은 흥정을 할 수 있는 거리의 가게뿐이었다. 우리는 사람들로 복작대는 거리를 좀 돌아 다녔고, 칼국수를 먹고 나면 그 날의 일정은 끝이었다.

 

이 잠깐의 화려한 외출, 정말 어쩌다 내게 약속한 그 외출도 엄마는 종종 빵꾸를 냈다. 잔뜩 피곤한 얼굴로, 명동은 다음에 가자고 말하는 엄마에게 나는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왜 해? 엄마는 딸한테 한 약속도 안 지켜? 삼십여 년의 시간을 건너 뛰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엄마에게 항의하는 어린 내 아들의 눈 속에서 다시 그 날의 나를 본다. , 이런…. 환생의 기억처럼 겹치는 이 익숙한 장면은 내가 엄마에게 해댔던 짓거리이고, 내가 어린 아들에게 추궁 당하는 모습이다. 온갖 잡다한 일상에 치인 엄마의 처진 어깨를, 매몰찬 딸내미는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담에 커서 엄마처럼 식구들 뒷치닥꺼리나 하며 살지는 않으리라. 입을 앙다물고 다짐했을 뿐. 그러나 나도 엄마가 되었다. 엄마의 아이도 결국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된 아이, 그 아이의 아이는 다시 반면교사와 측은한 동정의 대상이며 맹목적인 애정의 주체인 엄마를 본다. 아들에게 어딘가에 가자, 고 말할 때마다 나는 엄마가 하던 푸념을 떠올렸다. 아이고, 내가 너한테는 무서워서 무슨 약속을 못하겠다. 나도 아이와 한 약속들을 때로는 무성의하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어겼다. 쏟아지는 약속들, 출장, 청소와 설겆이, 공과금 납부, 끝도 없는 회의, 산더미 같은 빨래, 야근의 압박, 학부모 회의, 체험 학습,…. 이 모든 의무의 홍수 속에 나는 아이와의 약속을 덜 중요하고 더 피곤한 의무로 제쳐두기 일쑤였다. 약속을 지키라며 따지는 아이. 그 아이는 나이고, 내 아들이고, 추궁 당하는 피곤한 엄마는 나의 엄마이고, 또 나이고…. 

 

생선과 야채를 좋아했던 엄마와 고기와 국수를 사랑했던 딸의 식성은, 이제 나름의 조화를 이룬다. 엄마는 할머니의 전매특허였던 김치말이국수를 달인처럼 말아내는 경지에 이르렀고, 딸은 홍어회와 대구지리를 없어서 못 먹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여전히 해대는 사람은 엄마이고 나는 받아먹는 입이지만, 가끔, 아주 가끔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해물을 사드릴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결혼으로 이룬 가족 안에서, 여전히 비주류인 존재의 서글픈 입맛과 고달픈 일상을 이해하는 동지들이다. 엄마, 엄마의 아이, 아이의 아이, 다시 그 아이의 아이로 이어지는 끈. 국숫발처럼 얇게 끊어질 듯 또 이어지는 인연의 끈으로 묶인, 모녀라는 동지.



[1] 원래 변변치 않은 반찬을 가리키는 말. 하지만 평안북도 출신인 할머니는 이 말을 고기반찬’, 또는 그 날 밥상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반찬의 의미로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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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08:08:53 *.104.9.216
국수집에서 죄송하게도 갈치조림, 대구탕, 홍어찌게...완전 추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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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10:46:21 *.92.211.151

솔직히 나도 이제는 생선들이 좋아여.... 국수만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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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08:51:46 *.223.34.68
명동칼국수의 추억이 이렇게 국수 면발처럼 기나긴 가족 입맛의 역사로 이어졌군요.

국수면발 같은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모녀라는 동지 - 아, 그때 보았던 다소곳하고 이쁘시던 어머니가 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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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10:55:00 *.92.211.151

예, 젊었을 때는 진짜 한 미모하셨답니당. ^^ 김숨의 '국수'라는 책을 읽고 쓴 글이었는데, 책이 진짜 좋아요. 눈물이 찔끔 나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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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30 23:40:22 *.222.10.47

어릴 때 밥상에 올랐던 큰 접시의 전어세꼬시를 보면서 이걸 어떻게 먹나 하던 기억이 납니다. 김해분이신 어머니는 가끔 자식들이 잘 먹지 않는 회를 밥상에 떡하니 올려 놓으시고는 혼자 즐기셨죠. 보란듯이 엄마도 맛난 것 먹는다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와 비슷한 지위를 가진 음식들이 몇몇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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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2 13:17:20 *.92.211.151

엄마의 입맛은 소중한 것... 해드리진 못할망정 사드리긴 해야겠다는 반성을 하는 한주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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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0:33:08 *.223.20.243
언제부턴가 종종의 글에서 감칠맛과 가슴 짠함이 느껴지네 가을같이 깊어지는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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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2 13:18:17 *.92.211.151

엄마도 나이가 들고 나도 나이를 먹으니 나이가 가까워질리 없는데 엄마에게 가까워지는 나이라는 게 있는가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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