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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9일 01시 03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성웅 이순신, 그는 1545 4 28, 서울 중구 건천동에서 4 1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터는 현재의 충무로역과 을지로 3가를 잇는 전철역 근처라고 한다. 그의 고택이 남아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순신은 아산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말이다. 그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고충을 겪는다. 이같이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서 고생하는 모습을 본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벼슬을 외면하고 살기로 결심한다. 이에 아내 변씨의 친정이 있는 아산 백암리, 현재 현충사가 있는 방화산 기슭으로 이사하여 거주하였다. 두 형과 함께 유학을 공부하던 이순신은 22세 겨울부터 무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아마 무술이 그의 적성에 더욱 맞았던 것인지, 사화에 연루되었던 가문의 배경의 영향이 컸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많은 비중을 무예 연마에 두게 되었다.

그는 21세에 군수 방산의 딸과 혼인하게 되고, 방씨 부인과의 사이에 31녀를 두었다. 그리고 해주 오씨와도 혼인을 하게 되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22녀를 두었다 

28세에 첫 번째로 무과에 응시한 이순신은,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낙방하고 말았다. 우리가 많이 아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4년 후에 다시 도전하여 병과 4등으로 결국 급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2, 한남 삼수 동구비보의 권관에 임명되었다. 사실 그 당시로 보면 매우 늦은 나이에 사회로 나왔던 것인데, 늦은 시작에도, 한 번의 실패에도, 모두 굴하지 않고 무과의 길로 묵묵히 나아갔던 이순신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는 나에게도, 요즘의 청춘들에게도 끝까지 도전하는 힘을 주는 듯 하다.


3년의 임기를 마친 그는 35세에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의 봉사로 재직한다. 이때 그에게는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는데, 다름 아닌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이 제의한 부당한 인사청탁을 거절한 것이다. 이에 서익은 나쁜 감정을 갖게 되고, 후에 결국 보복을 당하게 된다. 이순신은 결국 서울 생활 8개월 만에 다시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9개월 후 전남 고흥의 만호로 수군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그의 나이 37, 서익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장계를 올린 것으로 인해 결국 파면되고 만다.

다행히도 그는 다음해 5월에 복직이 된다. 남의 모함에 의한 파면과 복직, 아마 그 기간동안 그의 마음은 매우 어지러웠을 것임에 분명하다. 나 같았으면 분통이 터지고, 또 곧게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순신은 계속해서 그의 올곧은 성품을 유지했다. 그는 평생을 공사가 분명하고 권력에 줄을 대거나 상관에게 아부할 줄 몰랐다.


복직한 그는 훈련원 봉사로 임명이 되고, 14 개월을 보낸 후 다시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으로 북청에 부임했다가 다시 3개월 후 경흥 건원보의 권관에 임명되었다. 1583 10월에는 여진족 추장 울지내를 잡는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결국 이 일로 북병사 김우서의 모함을 받게 된다. 그 당시에도 너무 잘나가면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었나 보다. 강직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누군가가 소인배들의 눈에는 가시였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어지는 모함에도 그는 꿋끗했다고 하니 대단하다.


같은 해 118, 그는 아버지 이정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 소식을 3개월 후에 들은 그는 변방에 있다가 고향으로 급히 돌아가 3년상을 치른다. 탈상을 마치고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지만,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생기게 되자 이에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을 명 받는다. 그의 첫 번째 백의 종군이었다. 재기 했다 싶으면, 이제 좀 평온해질까 싶으면 그는 다시금 시련을 겪는 인생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기 또한 그가 더욱 단단해 지는데에 한 몫 했으리라 위안해본다. 영웅의 모험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588, 드디어 그의 백의종군이 해제되었고, 이듬해 전라감사 이광의 부름을 받아 군관겸 조방장 자리에 임명된다. 성과를 인정받은 이순신은 같은 해 12월 정읍 현감에 임명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 이순신은 그의 나이 47세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된다. 이는 승진의 단계를 무시한 발탁인사 였으니, 이는 그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유성룡 등 조정 대신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왜의 침략에 대비, 병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한다. 그의 예측이 맞았던 것일까, 이듬해인 1592, 드디어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그는 옥포ㆍ합포ㆍ적진포해전에서 왜선 수십 척을 격파하는 것으로 시작으로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는 왜선 67척을, 견내, 안골포 해전에서는 왜선 97척을, 부산포 해전에서는 왜선 100척을 무찌르는 등 지속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593 8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후 몇 년간 열심히 왜적을 섬멸하는 데 여념이 없던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친다 .1597,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된 것이다. 거기에 엎친대 덮친 격으로 그의 모친까지 돌아가시게 된다. 그렇게 아끼던 어머님을, 장례도 못치르고 진영으로 가라는 명령까지 받았다 하니 그의 인생 참으로 비통하다 하겠다. 이렇게 이순신은 권율장군 아래에서 백의종군하던 중, 칠천량해전 등에서의 조선 수군의 패전이 이어지자 김명원과 이항복의 추천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다. 그에게 남겨진 것은 단 13척의 배, 조정에서는 패망할 것임을 예상하고 육전을 명하지만 그는 죽을힘을 내어 싸우면 할 수 있다고 장계하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치뤄진 명량해전에서 그의 말을 증명한다. 열세 척의 배로 왜선 백삼십여 척과 싸워 33척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는 전쟁 중에 항상 선두 배에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먼저 앞서서 겁에 질려 있는 군사들의 마음을 자동으로 움직이게 만들었고, 외부에서 들리는 어떠한 소식에도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소문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것이 못 된다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였고, '왜적이 출물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에도 부화 뇌동하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소문을 퍼뜨린 자의 목을 베어 효시함으로써 동요를 가라앉혔다. 그 와중에 비극적이게도, 이순신에게 복수를 한다며 왜적들이 아산에 불을 지르게 되고, 그의 아들 면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왜적들의 복수를 보고 있노라니 치졸하기 짝이 없다. 이순신의 마음 또한 얼마나 아팠을까 상상이 된다.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죄로 돌아오는 것이 아들의 죽음이라니 말이다.

 

1598, 계속해서 이순신은 군비를 강화하고 왜적을 끝까지 섬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그러나 퇴각하는 왜군을 맞닥뜨려 싸운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그는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아라..” 우리 모두 잘 아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가버린 그의 죽음 후 조선은 임진왜란을 종식하고 평화를 맞게 된다.


많은 이들에게 모함을 겪는 일은 다반사요, 임금은 그의 충심을 외면했으며, 결국 잘못한 것 하나 없이 고문 등의 고초만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삶에도 이순신은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웠다.  그는 1599년 아산 금성산 선영에 묻혔고, 1604년에는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에는 충무라는 시호를 인조로부터 받아 우리가 잘 아는 충무공이 되었다. 1793, 정조 때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기도 하는 등 그를 향한 후대 임금들의 그리움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결국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충심은 후대 사람들이 가슴 깊이 알아주고 있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5. 인류의 역사 변해도 만고 불변의 진리가 항상 존재하듯이 어느 시대든 이상적 사회를 위한 도리의 추구는 항상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은 국가의 보전과 민족의 안녕을 위해 올바른 의식을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한 시대의 인물이 후대에 길이 기억 되어 존경을 받는다면 그는 진정한 인간의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6. 국난 극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가며 항상 필사즉생의 각오로 전쟁에 임했으니, 전쟁 대비에 만전을 기한 결과, 왜란(1592) 발생 후 옥포해전을 비롯한 당포. 한산도. 명량 등의 해전을 지휘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에 대한 신속 정확한 대비와 파악으로 작전하는 모습에서 충무공의 철저한 유비무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6. ‘난중일기’란 바로 그 당시에 충무공이 전쟁을 몸소 체험하며 기록한 진중일기다. 임진년(1592) 1 1일부터 무술년(1598) 11 17일까지 7년 동안 부득이 출전한 날은 쓰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일기 내용에 그의 전반적인 활약상이 담겨 있는데, 가족과 관계된 일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 문제를 비롯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며 느낀 심중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데, 무능한 조정에 대한 탄식과 전쟁에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국난 극복에 대한 강한 염원 등을 서슴없이 드러내었다.

 

11. 전쟁은 임진년 4 13일에 일어났지만, 전서본 난중일기에는 1 1일자부터 적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순신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년에 귀선을 만들고 군대를 정비한 것처럼 일기도 전쟁에 미리 대비하여 기록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이순신은 항상 미리 대비하는 정신으로 생활하였다. 임진년부터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영에서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문제들을 남긴 일기는 물론 나중을 위해 개인적으로 작성한 비망 기록이지만, 내용을 주로 일신보다는 국가와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 유비무환의 자세. 아마 하루의 성실함을 살았던 것과 함께 충무공에게서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12. ‘난중일기란 이름은 정조때 초고본을 해독하여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할당시 편찬자인 규장각 문신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

13. ‘난중일기내용은 주로 전쟁의 출동 상황, 부하 장수의 보고 내용, 공문을 발송한 일, 군율을 어긴 부하 장수를 처형한 사건, 장계를 올린 일 등이며, 그 중에는 장계 초안 및 서간문으로 추정되는 내용들이 간간이 삽입되어 있다. (임진, 계사, 갑오일기) 또한 공사간의 인사 문제와 가족에 대한 안부 걱정, 그리고 진중 생활에서 느끼는 울분과 한탄 등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로 하였다. 간혹 시와 문을 지어 적기도 하였고, 옛 시문과 병서를 인용한 글과 이순신 자신의 별호인일심을 연습한 낙서도 있으며, 명나라 장수의 이름과 그들로부터 받은 물품 목록도 적혀있다.  

>> 그야말로 솔직한 하루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 기록을 엮었기에 더욱더 담백하다. 인간적인 영웅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는 기회 자체가 감사하다.

21. 정조는 임자년(1792) 윤음에서우리나라를 재건하게 한 황은을 길이 생각하고 우리나라 충신에게 미치어 빗머리에 전자를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 “요즘 이충무유사를 읽으면 노량해전을 회상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을 하게 된다. (중략) 충무가 남긴 사적을 요즘 내각에 명하여 전서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활자로 인쇄되거든 그 한 본을 이 충렬사에 간직해 두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51.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쳤다. 우후, 가수가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 많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의 쇄석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맑았지만 춥기가 한겨울 같다.

무예 성적이 우수한 자에 대한 장계와 대가를 청하는 목록을 보내 감영으로 보냈다.

 

52.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안개비가 잠깐 뿌리다가 늦게 갰다.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이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 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새 봄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54.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더불어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하였으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은 참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통사들은 이미 잡아 가두었다 한다.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55. 순찰을 떠나 백야곶의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 부사 권준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성도 왔다. 비 온 뒤라 산꽃이 활짝 피었는데 빼어난 경치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저물녘에 이목구미에 가서 배를 타고 여도에 이르니 영주 현감과 여도 권관이 나와서 맞았다. 방비를 검열하였다. 흥양 현감은 내일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먼저 갔다.

늦게 출발하여 영주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도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다.

>> 열심히 일을 하는 와중, 새 봄의 경치를 즐길 줄 아는 그의 마음의 여유가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푸르른 바다, 꽃 색깔로 물들었을 산, 그 모습이 상상되어 왠지 한 폭의 그림 같다. 나 또한 이렇게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57. 아침에 점검을 마친 뒤 북봉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 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외딴섬이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성과 해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웠다. 첨사가 심력을 다했지만, 미처 시설하지 못했으니 어찌하겠느냐.

>> 첨사가 심력을 다한 것을 알기에 질책하지 않았던 것일까? 혹은 해자를 다시 건설할 여력은 없었던 것일까? .  

 

65. “큰 적들이 치열하게 몰아쳐 와 그 앞을 대적할 수가 없고,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달리는 모양이 마치 무인 지경에 든 것 같다”고 하면서, 내게 전선을 정비해 가지고 와서 지원해 달라는 일로 장계 올리기를 청한다고 했다.

 

69. 한꺼번에 쳐서 깨뜨리려고 비내리듯 화살을 쏘아 대니,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왜장의 머리를 벤 것이 모두 일곱 급이고 나머지 왜병들은 육지로 올라가 달아나니, 남은 수효가 매우 적었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71. 28일 맑음. 새벽에 앉아 꿈을 기억해 보니, 처음에는 흉한 것 같았으니 도리어 길한 것이었다.

 

72. 한 모퉁이의 외로운 신하가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애통해하니, 간담이 찣어지는 듯합니다.

 

73. 종사와 도성도 보전할 수 없게 되어 이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노라면 애통한 마음은 불에 타고 칼에 베이는 것 같습니다.

 

74. 신은 이런 폐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큰 적이 앞에 있어서 방비하여 지킬 일이 매우 급하니, 오래전부터 있는 병폐라고만 여겨 방어하는 것을 줄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75. 국가가 호남과는 마치 제나라의 거, 즉묵과 같은 것이니, 이는 바로 온몸에 폐질이 있는 자가 구원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겨우 간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많은 군사와 말들이 이곳을 휩쓸고 갔습니다.

 

83.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동풍이 크게 불었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하여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바람이 조금 멎는 듯하기에 길을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두 승장과 의명 성응지를 제포로 보내어 곧 하륙하는 체하게 하였다.

발포의 2선과 가리포의 2선이 명령도 안 했는데 돌입하다가 얕고 좁은 곳에 걸려 적에게 습격 당한 것은 매우 통분하여 가슴이 찣어질 것만 같다.

 

83~84. 얼마 후 진도의 상선이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해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는 짓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매우 통분하다. 이 때문에 수사(원균)을 꾸짖었는데 한탄스럽다. 오늘의 분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모두가 경상도 수사(원균)때문이다. 돛을 펴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아산에서 놔와 분의 편지가 웅천 진영에 왔고, 어머님의 편지도 왔다.

 

86. 온종일 비가 왔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87. 아침 식사 후에 출항하여 사량으로 향했다. 낙안 사람이 행재소에서 와 전언하기를 “명나라 군사들이 이미 개성까지 왔는데,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어 행군하기가 어려우므로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서울로 들어 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88. 맑음. 거센 바람이 종일 불었다. 우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모양이 형편없으니 우습다.

 

89. 이제 섬 오랑캐가 일으킨 변란은 천고에도 들어 보지 못한 바이고 역사에도 전해진 적이 없는 일이었다. 영해의 여러 성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졌으며, 각 진의 크고 작은 장수들도 모두 뒤로 물러나 움츠리고 산골의 쥐새끼처럼 숨어 버렸다.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연이어 삼경(평양, 개성, 한양)이 함락되었다. 종사(종묘와 사직)가 풍진을 입어 이 년간 폐허가 되니……

 

89~90. 약속한 일. 천고에도 들어 보지 못한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갑자기 닥쳐왔다. (그러나 인심이 견고하지 못한 상황에 왜적이 삼경을 함락하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적병을 겨우 근경에서 대하기만 해도 그들의 위세를 보고는 먼저 무너지니, 모든 군량을 나르는 길이 왜구를 돕는 밑바탕이 되어 버렸다.) 영해의 여러 성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지니, 적이 석권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임금님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가고 백성은 짓밟히고 살육을 당했으며,연이어 삼경이 함락되고 종사가 폐허가 되니, 오직 우리 삼도 수군은 의리를 떨쳐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는 이가 없건만 기회가 알맞지 않아 뜻한 바람을 펴지 못하였다.

 

91. 더위가 극심한데 삼가 살피지 못하였지만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전에 앓던 학질과 이질이 지

매우 얕아져 적에게만 도움 되는 형세이니, 천지신명께서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분한 마음을 품고도 할 말을 못하니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전에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탄환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바로 나아가 배알하지 못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지난번에 후퇴하여 돌아온 뒤 바로 다시 병사를 징발했지만 민심이 이미 무너져 있기에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92. 근심과 걱정이 과도하니 그 병환의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밤낮으로 그리워함에 생각하는 것조차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93.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차라리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 번이라도 휴가를 얻게 해 준다면 인심이 필시 이러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정예한 수군과 잡색군중에 자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기르도록 휴가를 가게 하였고, 8월초에는 모두 거느리고 사또 앞에 달려가 지휘를 받으며 죽음으로써 결전하고자 합니다.

 

95. 가뭄과 더위가 이토록 심하여 강여울도 매우 얕아져서 더욱 적을 도와주게 되었으니, 마침내 독한 왜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는 것은 촛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할 따름이며, 노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분함과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고, 득실과 성패가 서로 이같이 멀기만 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군사를 일으켜 국가의 치욕을 씻는 것이 지금에 급급한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신중해하여 경솔하게 싸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형세를 살펴보니 근심에 괴로워하며 독해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96.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까지도 차도가 없어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으니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97. 요행과 만일이란 병가(兵家)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 난 그 동안 요행을 많이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솔직한 인생이 주어진 바, 더욱더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고, 또 부족한 만큼 많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101. 대선 일곱 척, 중선 다섯 척에 깃발을 잔뜩 꽂고서 날뛰며 소리치고 있거늘, 이에 거북선으로 하여금 돌진케 하여 천자, 지자 총통을 연이어 쏘아 대고, 여러 배들이 동시에 함께 진격하여 화살과 탄환을 쏘기를 바람과 비처럼 마구 퍼부었습니다. 적의 무리가 후퇴하여 달아나다가 화살을 맞고 물에 빠졌는데, 혹 몸을 끌고 산으로 오르는 자가 부지기수이며, 왜군과 왜장의 머리를 많이 베었고 배는 남김없이 다 분멸하였습니다.

 

102. 적의 무리들은 형세로 보아 더 버틸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도로 당포 선창으로 들어가 육지로 내려가는데, 탄환과 화살을 쏘는 것을 바람과 비처럼 마구 날리니, 거의 다 맞아 다치고 죽은 자도 많았습니다.

 

103. 원균이 공로를 탐하여 백성의 머리를 베어다가 왜적의 머리로 보고하였다. 2 28일자에 원균의 군관들이 섬을 오간 것도 그러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 읽다 보면 원균의 행동은 절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마 이순신이 원균을 미워했음이 자명하기에, 아마 더욱더 그의 악행은 과장되어 기술되고 이순신과 대비되며 두드러져 보일 수도 있으나,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는 인간도 아니다. 원균은 후에 이순신과 함께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이렇게 사악한 방법을 써서 그 자리에 올라간들 행복했었을까 싶다.

 

105.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내와 개울에 물이 불어나더니 곧 가득 찼다. 농민들이 바란 것이니 매우 다행이다.

-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도 갸륵하다.

 

108. 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이 울고서야 선잠이 들었다.

>> 그는 유난히 잠을 들지 못하는 일이 잦다. 걱정이 많고 긴장을 잘하는 나의 성격과도 조금은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 보다는 더욱더 태평하고 무대뽀인 구석이 있지만 말이다.

   

109.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과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음이 또한 어지러웠다.    

 

115.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하였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 수사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 내가 이순신이었다면, 이러한 답답한 현실에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어지러우면 일기를 썼고, 분노를 표현하며, 적극적으로 마음 관리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아마 그랬으니 그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마음 관리에 그 누구보다 신경 써야 하겠다.

 

119.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꺼리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130.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133. 새벽꿈에 사내아이를 얻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사내아이를 얻을 징조이다.

 

139. 꿈에 적의 형상이 보였다. 그래서 새벽에 각 도의 대장에게 알려서 바깥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하였다. 해질 무렵에 한산도 안쪽 바다로 돌아왔다.

 

142~143. 오랑캐의 근성은 경박하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하다.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결사의 마음을 품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므로, 아군의(정예하게 훈련되지 않은)겁에 질린 무리들은 일시에 놀라 달아나니, 그래서야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할 수 있겠는가.

 

143. 정철총통은 전쟁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작하는 묘법을 잘 알지 못한다. 이제야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 내어 조총을 만들어 내니, 왜군의 총통과 비교해도 가장 기묘하다.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사격을 시험하고자 잘되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음은 이미 그 묘법을 얻었기 때문이다. 도내에서는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서 알리게 하였다.

 

144.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 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을 외쳐 서로 다투어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서 빠지는 자가 있었고,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 들어 마침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재앙을 만든 자가 있었다.

 

145.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사직의 존엄한 신령에 힘입어 겨우 작은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초월하여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지닌 몸이지만 세운 공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고,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한창 명나라 군사의 거마 소리를 기다리느라 하루를 일 년같이 여겼지만, 적을 쳐서 무찌르지 않고 화친을 위주로 하여 우선 흉악한 무리를 퇴각만 시키고 우리나라가 수년 동안 침입 당한 치욕을 씻지 못했으니, 하늘에까지 미친 분함과 수치가 더욱 간절하다.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가고 종사는 폐허가 되니 사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기운을 빼앗기어 백성들의 희망도 절로 끊어졌다.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몸소 시석을 무릅쓰고 나아가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어서 몸을 바쳐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데, 지금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그의 충성스런 마음이 느껴져서, 영화 명량에서의 장면들이 겹쳐져서,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이 가슴이 찡하다.  

 

146. 유기는 문에 땔나무를 쌓아 두고는 파수꾼에게 경계하기를, “빠져나가다가 불리해지거든 즉시 내 집을 불사르고 적의 손에 들어가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149. 아침 식사 후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씼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 김구의 어머니도 그렇고, 위대한 인물들 곁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는 것 같다.

 

150~151.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춥기가 살을 에듯 하였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를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 추운 그 때의 풍경이 실감나게 전달된다. 아랫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는 장군의 풍모가 느껴진다.

 

160.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는 것이었다.

 

176.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 어지로운 마음으로 괴로웠던 요즘의 나를 보는 것 같다.

 

179.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걱정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182.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가는데 이별하는 심회가 그윽하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정을 스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89.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 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 이순신 장군 또한 이렇게 점을 치면서 어찌될지 모를 앞날을 예측해보았다는 것이 매우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그래. 나만 이렇게 불안한 것이 아닐 것이다.

 

194. 순천 부사와 충청 수사가 바둑 두는 것을 구경했는데 몸이 몹시 불편했다. 낙안 군수도 와서 함께 했다. 이날 밤은 신음으로 날을 새웠다.

 

200~201. 이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201. 원수사의 일은 매우 회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또 남의 뒷말은 하지 말라는 옛말들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꼴보기 싫은 자들을 볼 때 마다 동정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용서하기가 쉽지 않다. 성웅 이순신도 이렇게 뒷담화를 하며 마음을 풀었는데, 나도 잠시나마 일기에는 한바탕 욕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충무공은 보면 볼 수록 인간적이다. 그러면서도 영웅의 면모를 갖고 있어 희망과 기운을 준다. 

 

201.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였다.

>> 아내에 대한 사랑이 전해지나, 그래도 조금 더 로맨틱하게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왠지 그가 좋은 남편이었기를 바라게 된다.

 

202. 새벽에 비밀 유지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삼 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다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205.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눈앞으로 달려와서 멈췄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흔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구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상이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이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는데... 아마 불안했던 그의 마음이 이러한 계시를 보내준 것이 아닌가 한다.

 

207.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점은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는 것이었고, 다시 점을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208.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자리 잡고서 나오지 않았다. 누각을 높이 세우고 양쪽 봉우리에 보루를 쌓고는 조금도 나와서 항전하려 하지 않았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육지로 내려가 도망쳤다. 빈 배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칠전량에서 밤을 지냈다.

 

216.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음양이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라고 할 만하다.

 

219.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 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 역시 모든 것의 시작은 나를 아는 것이다. 나를 아는 일이 어렵다 하지 말고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나와 관련된 특성을 찾을 일이다.

 

223. 궂은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부는데 종일 그치지 않았다. 울이 가는데 어려울 것 같아 염려되었고, 또 면의 병이 어떠한지 궁금하였다.

>> 일도 열심히 하고, 또 가족에게도 충실한 멋진 남자인 듯 하다. 아버지의 마음이란 이런 것일까? 그러나 조금 더 부인에 대한 이야기도 보였으면하고 계속해서 희망하게 된다.

 

227.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 옛 사람들을 보면 더더욱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우리는 매일 보아도 궁금하고 보고 싶고,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싶어 온라인 메신저를 멈추지 않는데 옛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 소식이 얼마나 궁금했을 것이며, 간혹 들려오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그 그리움은 얼마나 애절했을까! 싶다. 아마 그래서 우리 민족의 한은 깊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옛 사람들은 위생상태도 위생상태지만, 혹시나 가슴 깊이 묻어두어야만 했던 한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단명한 것이 아닐지조심스레 추측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237. 전라좌도에 있는 왜적의 형세와 투항한 왜군이 보고한 내용을 전하였다. 그 내용은 ”풍신수길이 삼 년 동안 군사들을 내보냈지만 끝내 성과가 없으므로, 군사를 더 내어 바다를 건너와 부산에다 진영을 설치하려고 하는데, 311일에 바다를 건너오기로 이미 정했다.”는 것이었다.  

 

238. 삼 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다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245.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점은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는 것이었고, 다시 점을 치니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250.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부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 분에 넘쳤다. 몸이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256. 내일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257.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원수가 사직에 남아 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온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어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는 분통함을 모두 절감하고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가 팔을 걷고 절치 부심하며 그놈의 그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하여진 진을 치고 잇는 장수로서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지껄이는가. 또 누차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높여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 강화하자는 말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 까지 들리게 해서 치욕을 끼치고 사이가 벌어지게 했음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289. 이날 바람이 자고 날씨가 따뜻했다. 이날 저녁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었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번잡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홍수를 불러서 피리 부는 소리를 듣다가 밤 이경에 잠들었다.

- 요즘 들어 내가 너무 낭만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을 보며또 피리소리를 들으며 잠들다니 취하는 듯한 느낌이다.

 

313. 이날 아침에 남녀문을 통해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 말은 벌써부터 퍼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오지 않았다.

 >> 신중한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317. 초저녁 무렵 총통과 숯을 넣어 둔 창고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이는 감독관들이 새로 받은 숯을 쌓을 때 조심하지 않고 묵은 불씨를 살피지 않아서 이러한 재난이 있게 한 것이다.

   

341. 종일 노를 바삐 저어 이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려 마음을 풀어 드렸다.

어머니 곁에서 모시고 아침밥을 올리니 기뻐하시는 빛이 가득했다 늦게 하직을 고하고 본영으로 왔다. 유시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 효자인 그의 모습을 왠지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342. 남방산에 함께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도의 요충지다. 그렇지만 이곳은 형세가 지극히 외롭고 위태롭기에 부득이 이진으로 옮겨 합하였다. 병영에 도착하였다. 원 공의 흉악한 행동은 여기에 적지 않겠다.

>> 일기 곳곳에서 계속되는 원균에 대한 이야기…이제는 너무 기가 차서 적기도 싫은 모양이다. 나를 모함하며 계략을 꾸미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까상상하기조차 싫다. 역시 사람이 문제다. 사람 때문에 힘든 경우가 현대에도 비일비재 하니 말이다.

 

346. 이중익이 군색하고 급하다는 말을 많이 하므로 내 옷을 벗어 주었다. 종일 이야기 했다.

- 내 옷까지 벗어 주기가 쉽지 않을텐데.. 일기 곳곳에서 그의 인격을 엿볼 수 있다.

 

355. 동네 사람들이 각기 술병을 갖고 와서 멀리 가는 이의 심정을 위로해 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홍군우는 창을 하고 이 별좌도 창을 하였다. 나는 창을 들어도 즐겁지 않았다. 금부 도사는 술을 잘 마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356~357.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찌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후에 대강 적었다.

 

357.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종일 비가 계속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고개도 내밀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359. 우수사와 경상수사도 함께 앉아서 아우 여필이 가져온 술에 함께 취했다. 가리포 첨사와 방답 첨사도 같이 마셨는데,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이날 밤 바다에는 달빛이 차갑게 비치고 티끌 한 점 일지 않았다.

>> 나는 옛 사람들의 풍류가 그립다. 나 또한 낭만을 누릴 줄 아는 이이고 싶다.

 

361. 아침에 둘째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 이 글을 읽고 나중에 남편에게 아이 이름을 로 하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가 면박을 당했다. 나의 풍류를 몰라주니 답답하다. J

 

362.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되는 천애의 땅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받는 것인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 때를 못 만난 것을 안타까워 하나, 그 또한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368.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백전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는 것이리라.

>> 답답하다. 돈의 힘이란지금도 억울한 것이 많은데, 가난이 심각하게 세습되던 그 시절에는 억울한 일들이 더 많았으리라….

 

374. 편을 갈라 활을 쏘았는데, 경상순찰사 편이 162점이나 졌다. 종일토록 매우 즐겁게 보내고 촛불을 켜들고 돌아왔다.

>> 한 때 국궁을 배우고 싶은 적이 있었다. 왠지 다시 배우고 싶어지는 밤이다.

 

378. 내가 들어가 보니 원수는 원균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데, “통제사(원균)의 일은 흉악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소. 그는 조정에 청하여 안골과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떤 마음이겠소? 일이 끌어 미루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에 불과한 것이오.

 

390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 모두의 분노가 어떠했는지 생생하게 느껴지는 표현이다. 리더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물러서지 않는 충무공의 용기를 배우고 싶다.

  

399. 아마도 밤의 습격이 있을 것 같았다. 이경에 적선이 포를 쏘면서 밤에 습격해 오자,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먹은 것 같으므로 다시 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연거푸 포를 쏘니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삼경에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400.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려 이백여척의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잇는 곳으로 향해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 서른세 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상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 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하고 말했다.

 

401.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가 탄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어 적선 두 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404. , 슬프도다. 그때가 어느 때인데, 강은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 했던가. 인신이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다른 길은 없다.

 

407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영화 명량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듯 하다. 가슴 아프지만, 때로는 대의를 위해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기도 하다.

 

415.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불편해하였다.

 

416.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고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 얼마나 간절히 생각하고 염원하였으면, 꿈에 신인까지 나타나 이길 방도를 알려주었을까? 나도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상에 내 모든 것을 던져야 할 것 같다.

 

424~425.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보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 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하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와 같다니….정말 보고 있는 나 또한 슬플 지경이다.

 

435.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진(戰지 전쟁 진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진에서의 용감함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법에도 경(원칙)과 권(방편)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권도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 용기나에게 늘 필요한 덕목이다. 조금 더 용기를 내자.

 

446. 나의 임무는 곧 각 장병들이 배를 통솔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으니, 각 관병들은 격분하여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곧장 왜선에 돌진하여 불태우고 여남은 척을 끌어냈는데, 왜적은 산성 위에서 총포가 이미 다하여 관병이 승리하였다. 한창 전쟁에 전념하고 있을 때 마침 조수가 막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나의 임무는 철수하라고 호령함을 맡은 것이었다.

 

. 내가 저자라면

1) 주요 키워드

매일의 힘, 성실함, , 충심,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 유비무환, 필사즉생 필생즉사,

 

2) 감동적인 장절

149. 아침 식사 후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씼어야 한다.”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 김구의 어머니도 그렇고, 위대한 인물들 곁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는 것 같다.

219.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 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비 만이 살길임을 그는 알았던 것 같다. 작금에 현실에 통타만 하기 보다는 더욱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려 하는 그의 적극적인 대응이 나는 존경스럽다.

 

219.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 역시 모든 것의 시작은 나를 아는 것이다. 나를 아는 일이 어렵다 하지 말고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나와 관련된 특성을 찾을 일이다.

 

416.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고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 얼마나 간절히 생각하고 염원하였으면, 꿈에 신인까지 나타나 이길 방도를 알려주었을까? 나도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상에 내 모든 것을 던져야 할 것 같다.

 

3) 보완점

다시 읽는 차라 그런지 책장은 쉬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단조로운 부분이 보인다. 아무래도 저자 자체가 독자를 고려하고 쓴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기를 엮은 형태이기 때문에 흡입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편집의 묘를 발휘할 부분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저 충실하게 원본을 해석하고 있는 점이 다소 아쉽다. 우선 김구 자서전에서의 독자들의 이해도를 높였던 많은 주석들을 벤치마킹 해봄직하며, 특히 역사적인 배경 설명이라던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 등도 함께 설명해주면 좋을 것 같다.

 

4) 이 책의 뼈대

인물의 연대기가 그러하듯 시간 순으로 나열하고 있다. 편집 시 매 장의 앞에 매년의 시대 배경 등도 함께 설명해주었더라면 독자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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