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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9일 01시 12분 등록

<두 번 읽기-기억, , 사상>

*두 번 읽으면서 새롭게 들어오는 구절: 녹색

*인용구절 중 자신이 좋아하게 된 50개를 선택:진한 검정색, 각 구절에 대한 본인의 소감과 해석: 주황색

 

1 저자에 대하여-카를 융(1875.7.26~1961.6.6)

자신의 열정이 지옥의 문을 통과한 사람의 이야기

<C. G. Jung의 생애와 사상-스위스의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의 개척자>

<융의 생애>

융은 1875년 스위스의 케스빌에서 개신교 목사였던 요한 P. A. 융과 그의 아내 에밀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의사, 목사를 많이 배출한 지적인 가정이었다. 그러나 좀 소극적이고 회의적이며 약한 성격의 아버지와 적극적이고 고집스러우며 강한 성격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 다툼이 심하여 집안 분위기는 별로 밝지 못했고, 융의 성격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융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어린아이들은 그들에게 일어났던 어떤 구체적 사건보다는 가정의 분위기에 더 영향을 받는 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융 자신이 어떤 사건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그의 가정에 드리웠던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외롭고, 사색적인 성향을 쌓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중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학교와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 그는 학교생활 중 쓰러졌고 그로 인해 약 반년 간 학교를 쉬게 되었다. 아버지가 융의 미래를 걱정하는(쓸모없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자신의 신경증을 극복하게 된다. 융이 싫어하는 라틴어 공부를 하다 몇 차례의 발작을 일으키게 되고, 발작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부를 함으로서 극복한다. 그는 대학생이 되어 스스로 말하는 외적인 인격(그가 말한 제1인격)을 드러내술통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다.


25
세에 취리히 부르크휠츨리 병원에서 조교로 수습기간을 거친 후 의사와 취리해 대학의 강사로서 활동하게 된다. 28세에 엠마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였으며, 부유한 제조업 가문의 딸이었던 엠마의 지참금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경제적 어려움에서 해방된다. 엠마는 조용하고 차분하며 평생 그의 심리적 지지자로서 역할을 해주었다.


융은 1906년 자신의 책을 프로이트에게 보내고 7년간의 긴 서신왕래를 시작한다. 융은 지금까지 이해받고 지지받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 경험세계와 이론을 이해해줄 수 있는 최초의 동료를 만나게 된다. 융은 프로이트를 아버지처럼 느끼고 생각하였고, 프로이트 또한 그를 아들이자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프로이트와 융은 19살 차이가 남) 하지만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부정하면서 둘은 결별하게 된다.

<가정형편이 융에게 미친 영향>

부모의 잦은 다툼은 융의 성장과정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자존감 부족,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태도

-융은 가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아버지를 이상적인 존재로 동일시 할 수 없었다. 동일시의 대상이 되는 아버지의 상이 강력하지 못하자 그의 내면에 있는 남성성 역시 강력하게 형성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존감이 부족한 성격이 되었고 그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독교 또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에게 기독교는 강력하지 못한 하나님의 상을 띠고 있었고 그는 그의 아버지가 믿었던 기독교의 하나님대신 강력한 하나님을 추구하려고 했다. 자신의 나약한 아버지를 부정하고, 능가하려 했던 것이다.

(2)부정적인 여성상

-그가 세 살 되던 무렵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에 생긴 병으로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가정 분위기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해진 융은 어머니의 장기간 부재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심리학에서, 남성에게는 여성적인 것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부정적인 여성상이 나중에 아내 엠마, 제자인 볼프로부터 긍정적인 여성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3)외롭고, 내성적인 성격

-아버지와 어머니의 오랜 별거로 9살까지 다른 형제자매를 갖지 못했던 융은 항상 혼자 놀았고, 어떤 일이든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가 어렸을 때 자주했던 놀이는 불장난과 돌멩이 장난 이었는데, 그는 그만의 성스러운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했고 라인 강가에서 주운 돌을 보물처럼 다루었다. 그의 이론 중 '자기(self)'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 놀이들이 '자기'를 찾게 된 단초가 된다.

Why Carl Gustav Jung?

왜 프로이트가 아니고 융을 선택했을까? <열정과 기질>이라는 책에서 프로이트의 삶을 보았기 때문일까?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칼 융은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지목이 되었다가 그의 저서에서 프로이트와 반대되는 이론을 제기하면서 그와 등을 돌리게 되었다. 프로이트와 등을 돌린 사람 중에 칼 융만큼 자립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비난으로 자살을 한 사람이 4명이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프로이트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의 소유자인듯 하다. 하지만 융은 그것을 잘 극복했고, 항상 갈림길에서 명예나 지위를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의 소신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두 달 동안 절필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썼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융은 작가로서도 학자로서도 훌륭한 선택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점은 프로이트는 의외로 약한 사람이고, 칼 융은 아주 강하고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2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009 나의 생애는 무의식과 자기 실현의 역사다

011 나의 생애는 무의식과 자기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011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012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무한한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어떤 동물이나 식물 또는 돌에도 대비해 볼 수 없다. 어떤 동물이다.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사실은 나도 나를 잘 모를 때가 많다. 진득한 것 같다가도 변덕스럽고, 밝은 것 같다가도 우울하고,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이고……여러 가지 모습들이 나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인간의 모습이 다 이리 양극단을 갖고 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갈수록 제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심연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이 말은 과학과 심리학의 한계를 정확하게 짚어주면서 또한 이 말의 뒤로 숨을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012 인간은 자신이 제어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지배하는 일종의 심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터이나, 기껏해봤자 그런 것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0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일생을 사로 잡은 꿈 유년시절

024 그날 이후로 취리히와 유틀리산은 다다를 수 없는 꿈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꿈의 나라는 그 불타오르는 눈덮인 산들 가까이에 있었다.

>나도 이 비슷한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나의 고향은 배산임수의 지형을 하고 있었는데 봄만 되면 천지에 피는 진분홍진달래를 몹시도 좋아했다. 마루에 걸터 앉아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마치 공중으로 붕 뜨는 황홀함이 껴지곤 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 꽃을 꺽으러 가지 못했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진달래꽃 근처에는 어린 아이들을 잡아먹는 문둥병환자가 살고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문둥병환자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어린 나에게 거대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만했다. 그래서 10, 고향을 떠나올 때까지 내 시야의 진달래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럴까? 너무 갖고 싶은 것은 겁이 나서 한동안 도망 다닌 기억이 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갖고 싶은 마음에는 왠지 모를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는 듯 하다.

025 그 무렵 나는 아직 네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 내 최초의 기억은 6살 정도에 꾼 꿈이건만. 아주 잔인한 꿈이었고, 최초로 눌린 가위였지. 어떤 상황에서 그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잔인해서 그런가 아직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4살의 기억이라니대단.

026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불신감이 생겼다. 그것은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이었다가도 조금만 나의 기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면 그럼 그렇지…’라고 그 사람을 평가절하해왔다. 항상 단편적인 모습들만 보고 판단해왔기 때문에 내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이성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외가 거의 없었다. 남편을 만난 후 그 증상은 거의 없어졌다.

026 나는 친구를 믿었다가 그들로 인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나도 친구들을 곧잘 믿었다. 친구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잘 믿었다. 그래서 혼자 상처받고 울곤 했다. 남자도 한 동안 나에게는 불신의 대상이었다. 아버지와 첫 번째 남편에게서 받은 상처는 남자들이라는 족속의 대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친한 지인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한 때 마음속으로 가재 눈을 뜨고 그들의 결점을 찾아내려고 했던 때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027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진 일이라든지 각이 진 난로다리에 부딪혔던 일 등이다.

>나도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다 강력하고 자극적인 일들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보다 어린 동네 동생을 리어카에서 떨어뜨려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게 한 일, 나는 피했는데 오토바이가 내쪽으로 돌진하여 결국은 나를 친 일(난 정신을 잃었고 병원으로덕분에 최초의 수술), 아버지가 집을 나가던 날의 슬픔과 두려움과 공포, 부암동에서 이야기했던 그 사건, 그리고 시골의 화장실에 가서 본 뱀, 앞마당에서 갑자기 나타낸 뱀이 날 놀래켜 괘씸한 나머지 뱀을 막대기로 때려 잡은 일, 재래식 화장실에 한쪽 발이 빠진 일 등….이런 일들은 과연 나의 무의식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자리하고 있을까?

039 나는 종종 그 어둡고 외진 방에 몰래 들어가 그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몇 시간이나 그 앞에 앉아 있곤 했다.

>요즘 내가 관심이 가는 것. 그림. 이런 경험이 어렸을 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렸을 때 부터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흠뻑 젖어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하는 생각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들었다. 그렇다면 커서 이성의 경계를 허물고 무엇인가에 몰입하는 것이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스탕달 신드롬이랄까? 한번 느껴보고 싶다.

040 “이 추잡스러운 놈아, 눈을 감아! 추잡스러운 놈아, 눈을 감으라니까!’ 그 순간 나는 그 형상들이 벗은 몸으로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걸치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인류의 역사이고 기원인 것을 우리는 왜 이런 것들을 터부시 하는 것일까? 생활의 한 부분이고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건만, 왜 자꾸 음지로만 들어가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046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내가 돌이고 어떤 자가 내 위에 앉아 있단 말인가?’

>역시 칼 융이다. 이 생각이 진정 어린 아이의 생각이란 말인가?

052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무지하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수 많은 선택에 대해 조금 더 신중해질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도 가끔 이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 싫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학창시절

056 그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

>나도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창피하지 않았다. 단칸방에 살 때도 우리 집에는 항상 친구들로 넘쳤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돈에 대한 겁이 없어서 30대에 그렇게 큰 일을 겪었을까?

059 여든세 살의 나이에 지난날의 기억들을 적어나가고 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어던 연고나성을 가지고 잇는지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나도 나의 자서전을 쓸 수 있는 날이 올까? 나의 자서전이, 나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그 근거를 찾아내고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이 누구나에게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을 때 까지 자신을 알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것만큼 큰 비극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065 거기에는 나에게 끝없는 황홀감을 안겨준 기차역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은 이전 그대로였다.

>여행과 현실이 바로 이러하거늘. 이번 여행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누군가가 간절히 그리우면서도 현실이 주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으로부터는 탈출하고 싶었다.

074 가장 무서운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이 죄를 짓는 자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7살 때부터 할머니를 따라 4km 거리에 있는 교회를 다녔고, 10살 때 꾼 예수님의 꿈도 태몽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14살 때, 교회선생님한테 실망한 나는 더 이상 교회를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는 죄스러움은 너무나도 컸다. 전지전능하신 누군가의 품에서 빠져나온 불안감, 죄책감 등이 날 괴롭혔다. 나이가 들어 35세에 다시 교회를 갔는데, 그 때는 더 이상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를 따라다녔으며 순수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했다. 지금은 그 괴로움에서 많이 벗어났다. 앞으로도 종교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나의 대답은 no에 가깝다. 요즘은 종교가 갖고 있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에만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종교인들의 타락과 부정부패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약간의 쾌락을 느끼는 듯 하다. 어쩌면 교회를 가지 않고 있는 나름의 합리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085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086 아버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은 전혀 믿지 못하거나 소문만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처럼 진부하고 공허하게 들렸다.

087 아니다. 사람은 체험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알아야 한다.

136 행복과 불행은 용돈의 액수보다 더 깊은 원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나이가 먹고 시간이 지날수록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더욱 밀접해진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생활은 많은 것을 잠식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140 내 주위에서 누군가가 학문적인 대상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은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나도 누군가와 학문적인 대상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경험을 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감수성이 열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이 또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문제는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아니면 내가 얽매이고 있는 틀?

147~148 나는 다양한 작은 술잔에 너무나 고무되어 예기치 않았던, 전혀 새로운 의식상태로 옮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안과 밖이 따로 없고 나와 타인, 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조심스러움과 소심함도 없었다. 땅과 하늘, 세계와 그 안에서 기고 날고’, 돌고, 올라가고, 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 좋게 의기양양하게 술에 취했다.

>나도 술의 힘을 빌리고 싶을 때가 있고, 술의 여흥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체질적으로 바커스신에 도취되는 과정이 너무도 힘들고 그 신을 모시고 난 후는 하루 종일 두들겨 맞은 듯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제기럴~~~~ 혼자 있을 때는 술을 못하는 것이 편하고 좋았는데 지금은 즐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181 항상 찬양을 받은 그 신앙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대부분의 교양있는 진지한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속임수를 써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신앙의 가장 큰 죄는 경험을 앞지르는 것이라고 여겼다.

>신학자들도 인간과 믿음 사이에서 번뇌하고 갈등하는 구나! 이런 것을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구절이 있지. ‘사탄의 시험에 빠졌다’….할머니한테 많이 듣던 이야기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책을 읽을 수록 칼융의 아버지에게 동점심이 생긴다.

184 세계는 나에게 그러하듯 아버지에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 무한한 지식의 보물이 내 앞에처럼 아버지 앞에도 놓여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를 온통 기죽게 하고 우둔하게 만들고 쓰라리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삶의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가끔 생각한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가 엄마한테 주어졌더라면 엄마는 훨씬 더 멋진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는 매일과 꾸준히가 가능한 분이라는 것을 그 위대함을 얼마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의 시절과 인생을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아프다. 모든 사람들이 가져보지 못한 자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 지지 않을까?

184~185 나는 아버지의 다음 숨소리를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어머니는 놀란 듯이 말했다. “이렇게도 모든 것이 빨리 지나가버리다니.”

>죽음이라는 사건은 커다란 사건이지만 그의 존재 모습은 일상 속에 아주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리라.

192~193 대학에서 첫해가 지나는 동안 나는 자연과학이 엄청난 분량의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지만 통찰은 아주 빈약한데, 그것도 주로 전문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철학 강의를 통해 마음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음 없이는 지식도 통찰도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한계이고 철학이 힘인 것이다. 요즘은 자연과학만이 대두되고 철학은 대학에서도 과를 없애고 있는 실정이다. 안타깝다.

199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트라였다. 물론 이것은 두더지의 흙도둑을 몽블랑산에 비교하는 격이긴 하지만 말이다.

202 철학자들은 온통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만 말을 늘어놓고, 정작 사실들을 가지고 답변해야 할 때는 침묵해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언제 어디선가 다이아몬드계곡을 지나온 것도 같은데, 내가 가지고 온 광석표본이 자갈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나 자신까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철학이 어떻게 보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물론 실용적인 학문은 아니다. 철학이 위대하다고 한들 모든 답을 이곳에서 찾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철학이 던져주는 물음과 사색과 깨우침이 좋을 뿐이다.

210 그런데 나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게 되었다. “정신의학 교과서들이 다소 주관적인 특색을 띠는 것은 아마도, 그 분야의 특이성과 학문 형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몇 줄 더 나가자 저자는 정신병을 인격의 병이라 일컫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가슴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중략) 정신의학에서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흐름이 합류하여 그 합해진 물의 힘으로 스스로 물길을 내어 흘러갈 수 있을 것이었다. 여기에 내가 사방으로 찾아헤매었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사실과 정신적 사실에 관한 공동경험의 장이 있었다.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었다.

*나도 이 분야에 관심이 있지만, 조금씩 알게 될수록 어렵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쩌면 인간은 무모함으로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을 취미 삼는 족속이라는 생각도 든다.

211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나의 확신을 흩뜨려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먼 목적지로 나를 가차없이 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통합된 이중성이라는 고양된 감정에 힘입어 나는 마법과 파도를 탄 것처럼 시험을 치러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217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224~225 아무튼 심리학에는 명백한 진리가 거의 없다. 하나의 문제는 우리가 무의식적인 요소를 고려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대답할 수 있다.

225~226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치료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의사는 단지 그 비밀스러운 사연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를 터득해야만 한다.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인 재료의 탐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연상검사와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환자와 오랫동안 끈기 있게 인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잘 하고 있으니 거기에 지식과 기법을 좀 배우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만 보려는 경향을 고칠 수만 있다면 나도 좋은 심리치료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이가 들면서 하게 되었다.

*개인의 정신세계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역사를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역사는 곧 그 사람이니까. 한 사람에 대한 역사를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일단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취조당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으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하는 일들. 그런 재주를 가지면 좋을 것 같다.

229 그리하여 영웅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그녀의 야심적인 갈망이 나에게 고착된 것이었다. 그녀는 이를 테면 나를 양자로 삼아 자신의 기적적인 치유를 세상에 널리 선전했다.

230 1904~1905년에 나는 대학병원 정신과에 실험적 정신병리학 실습실을 개설했다.

241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종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243 겉으로 보게 되면 정신병 환자에게서는 비극적인 붕괴만이 보인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환자 영혼의 다른 측면의 삶을 보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자주 환자의 외관에 속는다.

*환자의 외관뿐 아니라,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외관에 속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속에서 내려지는 판단은 길을 수정할 줄 모른다. 그 판단이 때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대도 말이다. 번번이 속으면서도 고쳐지지 못하는 것은 자기 확신이 강해서 일까? 아니면 이것도 병일까?

248~249 정신치료와 분석은 인간 개체가 그러하듯 다양한 법이다. 나는 환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개별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문제의 해결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심리적인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로 뒤집을 수도 있을 때에만 타당한 것이 된다. 나로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해결책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칙이라는 말 만큼 모순적인 것은 없는 듯 하다. 개개인이 모두가 비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에 적용시키고 판단한다는 것은 큰 오류이다.

249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어떤 분석에서는 내가 아들러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고, 다른 분석에서는 프로이트학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에 당사자 두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환자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된다. 의사도 무언가 할 말이 있고 환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환자를 한 인간으로 대면하는데 어찌 치료의 효과가 없을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병은 자신이 존중 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껴질 때 생기는 듯 하다.

249~250 교양있는 지성적인 환자들을 다를 때 정신과의사는 단순한 전문적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의사는 모든 이론적인 전제에 매이지 않고, 환자를 실제로 충동질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필요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론의 증명이 아니라, 환자가 자기 자신을 한 개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멋진 말이다. 어떤 학회의 이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자신을 알아 갈 때, 그 치료는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다.

251 의사가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고는 치료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치료에서 중요한 고비를 맞았을 때, 결정적인 것은 의사가 자기 자신을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보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자기 권위로 씌워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인생의 심각한 위기에서는, 다시 말해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 중대한 순간에는, 암시의 잔꾀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의사는 그 전존재가 도전을 받게 된다.

* ‘의사가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고는 치료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이런 프로 정신을 갖고 있는 의사를 만나고 싶다. 그의 모습은 아름다울 것 같다.

253 모든 치료자는 제3자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관점도 가지게 된다. 교황 자신도 고해신부를 두고 있다. 나는 분석가들에게 늘 이렇게 충고한다. “고해신부 역할을 해줄 아버지 같은 사람이나 어머니 같은 사람을 가지도록 하시오!” 여성들은 그런 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런 의향을 간파할 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똟어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 ‘모든 치료자는 제3자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그래야 자신의 독단과 독선에 빠지지 않고 객관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제 3자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254~255 당신은 분석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큰일입니다. 환자를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당신 자신을 분석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 않을까? 진심으로 본인이 느끼고 깨우쳐야 전달력도 풍부해지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아는 만큼 느낀 만큼 깨우친 만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리라. 사람의 내면을 다루는 정신분석은 더 하겠지.

*자신 안에 존재하는 수 많은 나를 만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 안에 존재하는 수 많은 모습의 타인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분석자의 기본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것이 가능하다면 대인 관계도 훨씬 폭넓어 지고 편안해 지리라 생각된다.

259~260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한 부인들은 자신들이 남편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속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260~261 이러한 경험에서 중요한 점은 원형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던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이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미 그날 저녁 내내 보통 때의 기분하고는 유난히 달리, 이상하게도 마음이 어수선하고 신경이 예민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이런 용어로 설명할 수 있었구나! 신기하다. 이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리라. 신빙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설득력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263 내가 이 꿈을 그녀에게 말하고 나서 여드레 만에 그녀의 신경증은 사라졌다. 그 꿈은 그녀가 단지 경망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그 내면에 성녀의 소질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믿을 수 없지만, 사람의 정신이 건강하고 약하다는 것은 어쩌면 종이 한 장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64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답은 정신세계를 넓히는 것이구나! 그리고 좀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구나!

266 저항은 특히 완강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개 그런 저항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경고를 뜻하기 때문이다. 치유에 효과적인 것은 독일 수도 있어 모든 사람이 다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는 하지 못하도록 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그런 수술이 치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저항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 답이 있을 것이다. 왜 저항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다면 저항뿐만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266~267 나는 물론 신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것에 가깝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회나 교리에 속박되어 있다. 내적 체험의 모험, 즉 영적인 모험은 많은 사람에게는 친숙하지 않다. 정신적인 실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파문에 해단한다. ‘초자연적이거나 적어도 역사적으로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흔히 사람들은 갑자기 정신에 대해 예기치 않은 깊은 경멸을 나타낸다.

269 행운이든 불행이든 세상의 관심을 끌어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상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전례가 없는 발전과 재앙을 두루 겪은 사람들을 의사는 만나게 된다. 그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모든 삶을 바치기까지 끝없이 열광할 만한 비상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능이 기묘하고도 꺼림칙한 정신적인 기질 속에 뿌리박고 있어, 우리는 그것이 천재성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단편적인 발달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271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일종의 구획 심리학을 계발한다. 감정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지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284~285 자기가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 되어 있는 경우, 그 사람의 신랄함보다 더 지독한 신랄함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검은 진흙탕 홍수로 위협을 받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프로이트 자신이 검은 심연을 퍼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왜 자신이 성에 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해야만 하는지, 왜 그러한 생각이 자신을 그토록 사로잡고 있는지 한 번도 자문해보지 않았다. ‘해석의 단조로움이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 혹은 아마도 신비주의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자신의 또 다른 면으로부터의 도피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가 그러한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자신과의 일치에 이를 수 없었다.

295 나의 말에 프로이트는 기묘한 시선, 의심이 가득 담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비슷한 경험이 나도 있다. 내가 멘토로 여기는 사람한테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그와의 관계가 끝나는 것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고,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안 나의 멘토는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지만, 사실 그 말은 그 언니의 무의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내 마음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 구절을 보면 프로이트가 칼 융을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했는지, 그리고

308 이제 프로이트 개인의 심리가 나의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었는지 분명해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이성적인 해결의 실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것은 나에게 인생문제였으므로,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 해답이 눈앞에 드러났다. 프로이트 자신이 신경증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그 신경증은 쉽게 진단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미국 여행에서 내가 발견한 바와 같이 무척 고통스러운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309~310 나는 두 달 동안이나 글을 쓰지 못하고 갈등으로 괴로웠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숨겨야 할 것인가. 친교가 깨지는 모험을 할 것인가? 결국 나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고 그것은 프로이트와의 친교가 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융이 결국 글을 쓰게 될 줄 알았다.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글은 진실하지 않으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신념을 따라 간다는 것은 많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신념을 져버렸을 때에는 남은 시간을 패배의식과 불편함에 휩싸인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수치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안의 여인 아니마

319 물론 나는 무의식에는 고대 체험의 유물이 남아 있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다.

322 내 후반기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다루었다.

324 8 1일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제 나의 관제는 분명해졌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나 자신의 체험이 집단의 체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만 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해야 했다.

327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도 사실의 자기 제어력을 잃을까봐 무섭다. 그래서 술도 두려운 존재 중에 하나이다. 마시지 못해 다행이긴 하지만 나의 맨얼굴은 어쩌면 내가 아직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기 때문이다.

335 필로몬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340 내 안에서 생겨난 한 여인이 나의 생각에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 혼이 왜 아니마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해보았다. 왜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라고 불렀다.

341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342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345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언어로 모든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만 한계를 많이 느낀다. 표현의 한계, 생각의 한계.....인간의 삶 자체가 워낙 신비하고 의미심장하여 모든 것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욕심이리라. 하지만 오만한 인간은 그것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도전을 거듭해 왔기에 오늘날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아직도 턱 없이 부족하며 완벽한 표현이라는 것은 꿈에 불과할 것만 같다.

345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그것은 오류와 불확실의 길, 그리고 오해의 길이라고 간주된다.

350 오늘날 내가 과거를 돌이켜보고 환상에 관해 작업하던 시절의 체험을 생각해보면 그 작업이 소명과도 같이 나를 압도하며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353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내가 공중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명과 같은 목표를 찾았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게다가 그 목표를 위해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축복된 삶이다. 그렇게 지옥의 문을 통과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도착하는 법이다.

356 만다라가 참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는 차츰 깨달아갔다. 그것은 형성, 변환, 영원한 마음의 영원한 재창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 모든 것이 잘돼가면 조화로우나 자기기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의 만다라그림들은 날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자기상태와 연관되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자기, 즉 나의 정체성이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356 자기는 나 자신인 동시에 나의 세계인 단자와 같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만다라는 이 단자를 표시하며 정신의 소우주적 성질에 해당했다.

361~362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나에 무의식에서 솟아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나의 무의식의 들여다보고 나의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노력을 하는 시기바로 지금이 아닐까 한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365~366 분석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자연과학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다른 학문보다도 훨씬 더 관찰자의 개인적인 가설에 영향을 받기 쉽다. 그러므로 적어도 심각한 판단착오만이라도 범하지 않으려면, 심리학자는 역사나 문헌에서 찾은 유례에 많이 힘입어야 한다.

367 개신교나 유대교의 영역에서는 아버지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이다. 이에 반해 연금술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이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

372 나는 곧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의 경험은 나의 경험이었고, 그들의 세계는 어떤 의미로는 나의 세계였다.

377~378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무의식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개인의 경우 그 과정을 꿈이나 환상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집단적인 세계에서는 그것이 반영된 표현이 특히 다양한 종교체계와 종교상징의 변환에서 발견된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변환과정에 대한 연구와 연금술의 상징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는 개성화과정이라는 내 심리학의 중심개념에 이르게 되었다.

387 맹목적인 수용은 결코 해답을 주지 못한다.

*맹목적인 것이 좋은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맹목적 수용 또한 수용의 의미를 희석시킨다. 수용이라함은 그것을 소화할 능력이 있을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맹목적 수용은 성장보다는 부작용을 일으키기가 쉽다.

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419 , 나의 조부 융이 괴테의 사생아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짜증스런 소문이 <파우스트>에 대한 나의 유별난 반응을 뒷받침해주고 설명하는 것같이 여겨질 정도였으니, 그만큼 그에게 나에게 먹혀든 셈이었다.

>그래서 파우스트와 괴테에 집착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구나! 괴테의 사생아….소문일지라도 괴테의 삶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

421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은 미래라는 것 때문에 현재의 모든 것들을 저당 잡히는 셈이다. 모든 것은 미래를 위해 양보되어야 하고 인내되어야 한다. 그 미래가 현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미래를 기약하게 되는 병에 걸려있다. 미래에 대한 준비와 현실을 즐기는 것을 잘 조율해야 할 듯하다. 또한 쓸데없는 걱정으로 많은 시간을 암울하게 보내기도 한다. 교육의 기회가 많아져 똑똑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머리만 비대해졌을 뿐 지혜롭게 사는 방법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별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고 파악하는 사람만이 미래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서 꿈꾸는 미래는 허황되기 때문이다. 막연한 긍정은 더 큰 허무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422 앞을 향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지만 길게 볼 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바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422 그에 반해 역행을 통한 개혁은 일반적으로 비용이 덜 들고 오래가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개혁은 보다 단순하고 확실한 과거의 길로 돌아가며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그외 겉으로 보기에 시간을 아낄 만한 온갖 신기술을 최대한 적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세상에서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

여행

427 즉 유럽이 아닌 나라, 유럽말을 쓰지 않고 기독교의 전제조건이 지배하지 않으며, 다른 종족이 살고 다른 역사적 전통과 세계관이 군중의 얼굴에 각인되어 있는 곳 말이다. 나는 유럽인들을 한번 외부에서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했다. 어느 모로 보나 생소한 환경 속에서 유럽을 보고 싶었다.

*이런 기회를 가진다면 자신이 사는 곳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항상 거리를 주기 때문에 좋다. 내가 살던 곳, 나 그리고 내 주변과의 거리를 가져 본 사람만이 그 안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

431 시계라는 것은 소위 중세 이래로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유럽인에게 슬며시 들어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짐을 가볍게 하고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점점 더 속력을 올리며 여행을 재촉하고 있다. 그들은 중량의 상실과 이에 따른 공허를 열차, 기선, 항공기, 로켓과 같은 성과물의 환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빠른 속력으로 인해 유럽인으로부터 존재의 지속성을 더욱더 빼앗아가고, 더 나아가 유럽인을 속도와 폭발적인 가속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다른 현실로 옮겨놓는다.

>인도에 갔을 때 문화적인 충격을 받은 것 중에 하나가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 그들의 삶을 보면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삶인 듯 하다. 그래서 조급하거나 불안한 기색을 발견하지 못했다. 돈을 주고 여행을 하러 간 우리만이 바쁘고 초조했다. 여행에서도 현실의 틀을 벗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계도 없었지만 가진 돈이 없었어도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환한 미소를 내가 가본 나라 중 가장 못사는 나라에서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행복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행복이라는 조건을 생각 없이 여과시켰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으로….

*삶은 점점 빨라지고 편안해 지는 것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잉여되는 시간에 여유가 생길 것이고, 몸이 편하니 마음도 편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지로 더 급해지고 불편해지는 것이 생활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인간의 마음이나 정서는 어쩌면 속도나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인데, 우리는 너무도 시간의 덧셈. 뺄셈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똑똑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함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437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과거로부터 멀리 떼어놓을수록 더욱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438 유럽인은 합리적인 특성을 꽤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의 열정을 희생하고 얻은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원시적 인격부분이 국부적인 지하존재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아마 안다고 해도 무시되었을 것이다. 발전, 합리성이라는 것이 잉태가 되면서 수없이 많은 것들이 운명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치명적이다.

*편리함과 합리적인 것과 많은 것들을 맞바꾸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그 옛날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이제와 보니 너무도 많은 것을 바꾸었고, 그것은 공평하지 못한 거래였음을, 그리고 그것들이 인생을 사막과 같이 황폐하게 만들었음을 뒤 늦게 알게 된 것이다.

441 밖에서 본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집단정신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데, 이러한 동화과정에서 국가적 편견과 고유한 특성들로부터 연유한 온갖 부담되는 것들과 마주치게 된다.

442 유럽인에게는 마천루 꼭대기에서 유럽을 한번 바라보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이 없을 것 같다.

443 옥비에 비아노가 말했다. “백인들이 얼마나 사납게 생겼는지요. 그들의 입술은 얇고, 코는 나라롭고, 얼굴은 주름졌고, 눈은 완고한 눈초리를 하고 있소. 그들은 항상 뭔가를 찾고 있소. 무엇을 찾는 거지요? 또한 백인들은 항상 뭔가를 원하며 언제나 불안하고 차분하지 못하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소. 우리는 그들이 넋이 나간 사람들이라고 확신하오.”

>현대인들이 이렇게 넋이 나간 상태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제 정신으로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나의 생각이 진정으로 나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은데

443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가 진정한 백인의 모습을 나에게 묘사해준 셈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지금까지 단지 감상적으로 미화시킨 색채인쇄만을 보아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인디언은 우리의 아픈 데를 찔렀으며 우리가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부분을 건드렸다.

444 나는 은밀하게 찔림을 받으며 전설적인 십자군의 낭만적 이야기가 얼마나 공허한가를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고 콜럼버스와 코르테스, 그 밖의 정복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불과 칼과 고문과 기독교를 가지고 멀리 떨어진 이 인디언들, 평화롭게 그들의 아버지인 태양의 품안에서 꿈꾸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나는 또한 성홍렬에 오염된 옷과 화주와 매독으로 사람들이 죽어간 남쪽 바다의 섬들을 보았다.

>이런 말도 안되는 합리화는 누가 만들었으며, 그것을 역사에서 길이길이 찬양하는 것은 또 뭐란말인가?

444~445 우리가 식민지화, 이교도에 대한 복음전도, 문명의 전파 운운하는 것들이 또 하나의 다른 얼굴, 즉 사나운 맹금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냉혹한 집중력으로 먼 곳의 먹이를 탐색하는 그 얼굴은 해적이나 육지의 도둑들에게나 어울리는 그런 종류다. 우리의 문장 방패를 장식하는 온갖 독수리와 그 밖의 맹수들은 우리의 실제 본성에 잘 어울리는 심리학적인 표본들이다.

>그럼 자신들의 얼굴이 해적이나 도둑인지 몰랐단 말인가? 하기야 내가 알고 있는 세계사도 강자의 입장에서 써졌기 때문에 무분별하게 그들의 시각으로 받아들였는데,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얼마나 잔인한 피의 역사고 피의 승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나는 내가 아는 위인 중에 콜럼부스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아주 미개한 원시인보다도 못한 잔혹성을 갖고 있는 그를 왜 칭송하는 것일가? 그 때문에 인류의 식민지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말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마케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피에 굶주린 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놓고 유럽의 3대 성당에 들기 위해 세비야 성당에 안치된 그의 관을 보며 나는 구역질이 났다.

*복음전도, 문명의 전파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을 휘둘렀는가? 지금도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수 많은 나라들의 문명과 종교를 획일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어느 나라를 가나 이국적이지 않은 것이 그 특징이다. 세계는 점점 매력적이지 않은 시대로 향하고 있다.

449 미국인은 우리를 가만놔두지 않는 거요? 왜 그들은 우리의 춤을 금하려 하오? 우리가 젊은이들을 키와로 데려가서 종교를 가르치려고 하면 왜 미국인은 우리 젊은이들이 학교에서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거요? 우리는 미국인에 대항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소!”

*선진문명이라는 이름은 잔인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선진문명….? 누구의 기준일까? 그것은 자기만이 옳다고 믿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독단과 우월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정으로 넓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람이겠지. 그러면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추구할 수 있어야겠지.

450~451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지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뿐이지, 이 지식은 인디언들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을지도 모른다. 지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한정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455 그것은 내가 어린시절의 시골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으며, 오천 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검은 남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457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만약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제 2의 창조는 그곳을 사용하는 인간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말이 아닐까? 신이 창조해 놓고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난감에 불과하지 않은가?

470 온갖 마귀의 어머니인 유럽과 나는 수천 킬로미터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귀들이 이곳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중략) 나의 해방된 정신력은 큰 기쁨을 안고 태고의 광대한 곳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마귀의 어머니….피로 얼룩진 문명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에 이런 표현을 썼으리라. 잔인하고 포악하고, 강자에 의한 약탈과 침략을 일삼는 그 찬란한 문명의 역사 말이다.

489 오직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하고, 나의 내면이 말하는 것이거나 본성이 내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

491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491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491 자신의 열정이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열정이 지옥과 같은 고통과 인내를 거쳐야만이 제 길로 들어서면서 꽃을 피울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 가만히 있는다면 인생에 밀려오는 쓰나미와 같은 후회와 아픔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열정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행복한 것이고 선택받은 자의 것이다. 일단 그들을 만난다면 무조건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평생을 후회라는 그늘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500 낮이 잊어버린 신화를 밤이 계속 이야기하고, 의식이 평범하게 만들어버리고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축소시켜버린 그 거대한 모습들을 시인이 다시금 일깨우고 선견지명으로 살려낸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또한 변화된 모양으로사색적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새로 인식되는 법이다. 위대한 과거의 것들은 우리가 착각하듯 죽지 않고 단지 그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모양은 작지만 힘은 강력한위장된 카비르가 새 집으로 옮겨간다.

502 이 꽃의 아름다움처럼 인생도 그러게 지나가버리고 말도다.

507 남자의 아니마는 현저히 역사성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남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 아니마와의 관계에서 나는 늘 나 자신이 원래 어떤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야만인처럼 여겨진다. 마치 이전도 이후도 없이 그야말로 무에서 생겨난 자같이 생각된다.

>그렇구나! 그럼 내 안에 있는 아니무스도 야성의 모습을 닮고 있겠구나!

510 예를 들어 파리나 런던에 가듯이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도시나 저 도시나 기호에 맞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는 데마다 그곳을 지배했던 정신에 의해 마음 깊은 곳에서 충격을 받을 때, 그리고 거기 있는 성벽 잔해와 둥근 기둥 하나가 내 눈에 이제 막 새롭게 인식될 때 문제는 달라지는 법이다.

>그래서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로마 여행을 많이 미루어 놓았다. 꼭 가야 하는 곳이지만 더 많이 느끼기 위해서는 더 치열한 공부가 필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510 1949년 이미 고령에 이르러 내가 그 동안 미뤄두었던 일(로마여행)을 뒤늦게 해보려고 했으나, 차표를 사자마자 나는 기절해버렸다. 그 후로 로마여행 계획은 단호히 접어두고 말았다.

>물론 고령의 나이라는 육체적 부담감도 있었겠지만, 로마라는 도시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로마는 꼭 가보고 싶은 도시이지만 당장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로마를 제대로 보고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곳이다. 이번 스페인 여행처럼 모든 것을 눈 앞에 두고 한 줌도 움켜쥐고 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환상들

516~517 나에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라고 말이다. ‘는 이를 테면 남아 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라는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 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중략) ,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말살되고 빼앗기거나 약탈당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기도 했으나, 한순간 그런 느낌도 스러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나간 듯이 여겨졌다. 하나의 기정사실만 남았다. 이전의 일들과 다시 어떤 연관도 맺지 않고 말이다. 어떤 것이 떨어져 나갔다거나 빼앗겼다는 아쉬움은 이제 없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나라고 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오직 그것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신의 인생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장미빛 인생만을 이야기하고 꿈꾸지만 인생의 굽이굽이에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것들이 숨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을 보물로 만들 것인지, 악취나는 하수구로 만들지가 문제이다. 그리고 한 때 악취나는 하수구를 지나왔다 하더라도 그 또한 자신의 인생이기에 껴안아야 한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 이곳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 순간을 지우려 하지 말고 그곳을 토대로 꽃을 피우는 것이 어떨까?

517 나의 인생은 긴 사슬에서 가위로 잘려진 것처럼 보였고, 많은 물음은 해답이 없는 채로 남았다.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이 진행되었을까? 왜 나는 그런 가설들을 가지고 왔는가?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 결과가 무엇인가?

519~520 삶과 모든 세계가 나에게는 감옥처럼 보였고 내가 다시 건강해지리라는 사실에 무척 화가 났다. 모든 것이 마침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면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시금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실에 매달린 채 작은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우주공간에 있을 때는 무중력상태였고 나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은 다 지나가버렸다!

>상자, 감옥느낌이 온다.

525 감정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의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

527~528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숙명의 의도를 주제넘게 간섭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신화가 인간의 삶과 이리 깊숙한 교집한 상태인지 몰랐다. 삶에는 과학적으로 말할 수 없는 수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의 기원을 가만히 살펴보면 신화에 근거한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요소, 우리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신화와 비신화적인 것의 혼합인데, 신화적인 요소는 과학도 설명할 수 없으며 우리의 지식과도 관계가 없는 그저 삶에 함께 존재하는 역사성이라고 보면 가능할까?

560 서양인으로서는 정적이기만 한 세계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동양인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전제를 구현한다.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561 내가 살아가면서 감당하고 있는 카르마가 내 전생의 결과인지, 혹은 내 속에 유산을 모아 남겨준 조상의 소산인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나도 답을 잘 모르겠다.

>나도 한때 나의 받아들일 수 없는 카르마 때문에 억울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감당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카르마의 힘이 아닐까?

*인생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 점점 커진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인연이라는 이름의 실타래가 오래 전부터 엮어 있었던 것인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574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 그 자체의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무의식이 우리에게 작용하듯 우리 의식의 증가가 무의식에 작용한다는 사실까지도 추정해볼 수 있다.

만년의 사상

582~583 이러한 자기 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바탕에서 우리가 본능과 마주치게 되는 기층 또는 인간존재의 핵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동적 요인으로, 우리 의식의 윤리적 결단이 궁극적으로 거기에 좌우된다.

회고

624~625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이 말에 적극 공감한다. 고독이란 대중 속에서도 있을 수 있으며 혼자서도 고독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게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그는 가치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이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3 내가 저자라면

프로이트를 과감하게 떠나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 융의 생애가 궁금했었다. 이 책은 융이 직접 쓴 자서전이다. 보통의 자서전이 외적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내적 사건을 덧붙이는 방식이라면 이 책은 내적 사건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융의 꿈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을 가늠하기 힘들 때가 있다. 그래서 융의 이론은 신비스럽고 이해하기 난해한 개념을 사용하며, 또한 환자로 하여금 현실을 떠나 신비하고 어느 정도 종교적인 환상적 생활을 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로 융의 꿈의 해석은 수긍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의 학자로서의 고집은 높게 사고 싶다.

<목차와 뼈대>

내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자서전이다. 어렸을 때의 꿈과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고 자신의 인생에 내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심리학 서적이라는 생각이 목차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좋았던 장과 절>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225~226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치료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의사는 단지 그 비밀스러운 사연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를 터득해야만 한다. 의사는 증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꿰뚫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의식적인 재료의 탐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연상검사와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 또한 꿈의 해석을 통해서나 환자와 오랫동안 끈기 있게 인간적으로 접촉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

*환자의 인생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 치료법은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을 것이다. 지금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작은 칼 융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질문을 통해서 환자의 비밀스런 영역으로 진입했으며 그 방법은 그 사람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의 치료법이 인간적이어서 좋다. 질문의 힘에 대해서도 새삼 느낀다. 인터뷰를 잘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이 대목이 마음에 든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309~310 나는 두 달 동안이나 글을 쓰지 못하고 갈등으로 괴로웠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숨겨야 할 것인가. 친교가 깨지는 모험을 할 것인가? 결국 나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고 그것은 프로이트와의 친교가 깨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부분이 왜 통쾌할까? 그것은 아마도 프로이트라는 커다란 사람을 상대로 소신 있는 싸움을 벌였으며, 그것에 대해 대리만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

491 자신의 열정이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하는 말이다. 열정이 지옥의 문을 통과하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늘 알고 있는 이야기이면서도 이렇게 활자화 되어 있으면 전달력이 또 달라지는 것 같다.

<보완점>

칼 융이 직접 쓴 자서전으로 꿈과 정신분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칼 융의 정신분석과 꿈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용이 신선할 수도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지리하게 느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1 너무 추상적이다. 이 책이 융의 자서전인지 꿈의 해석에 관한 책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특히나 현대식의 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융이 주장하는 것들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모호하며 더 정확한 근거제시를 요구하게 된다.

2 사건의 나열보다는 융의 꿈과 내면의 세계를 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지리하다. 그리고 사건과 꿈의 해석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3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적인 배경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지, 그의 삶 특히 가족과 사랑에 관한 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삶에서 어찌 사랑과 가족을 빼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기다리며 책장을 뒤로 넘겨도 나오지 않아 조금 실망스러웠다.

4 소제목과 내용의 일관성을 찾기가 힘든 장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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