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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9일 07시 30분 등록

 

2014.09.29 이동희

 

1. 지은이에 대하여 : 이순신 (1545 ~ 1598)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되어 있다. ‘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거칠고 파괴적인 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형태의 폭력은 전쟁이다. 이순신은 그런 전쟁을 가장 앞장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무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돌파해야 할 역경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훨씬 가혹했으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거대한 운명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인간의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만하다.

 

가계와 어린 시절

 

이순신 표준영정.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 1953년 제작한 것으로 여러 영정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충남 아산 현충사 소장.

 

이순신은 조선 인종 1(1545) 3 8(음력 기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는 이정(李貞)이고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그는 셋째 아들이었는데, 두 형은 이희신(李羲臣), 이요신(李堯臣)이고 동생은 이우신(李禹臣)이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와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와 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다. ‘신()’은 돌림자여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부모는 아들들이 그런 성군을 섬긴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순신이 성군을 만났는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의 한 전범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가문은 한미하지는 않았지만 현달했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의 선조들은 우뚝하지는 않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관직과 경력을 성취했다. 우선 6대조 이공진(李公晉)은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3)를 지냈다. 가장 현달한 인물은 5대조 이변(李邊, 1391~1473)으로 1419(세종 1) 증광시에서 급제한 뒤 대제학(2)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까지 올랐다. 그는 높은 관직을 지내고 82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런 신하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耆老所)에 소속되는 영예를 누렸고,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증조부 이거() 1480(성종 11)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5)과 병조참의(3)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비교적 순조롭고 성공적인 출세를 이어왔던 이순신의 가문은 그러나 조부 때부터 침체하기 시작했다. 조부 이백록(李百祿)과 아버지 이정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고, 당연히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그 주요한 까닭은 이백록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간주되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묘사림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묘사림이 시행한 별과(別科)에 천거된 1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기묘사림에 포함되는 인물들의 명단과 간략한 전기를 담은 [기묘록 속집]에서는 “진사 이백록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검소했다”고 적었다. 이런 가문의 상황에 따라 혼인한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되는데, 외조부 변수림(卞守琳)도 과거와 벼슬의 경력이 없었다.

 

몇 살까지라는 확실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이순신은 태어난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이순신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에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조선 태종의 가장 큰 치적은 세종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유성룡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의 혜안은 나라를 멸망에서 건졌다.

 

아직 어렸고 나중에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이 그때 어떻게 어울렸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뒤 유성룡은 “신의 집은 이순신과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선조실록] 선조 30 1 27)”고 선조(宣祖)에게 아뢸 정도로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런 기억에 따라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을 인상 깊게 회고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인생의 방향 등도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유년 시절에만 국한된 관찰은 아니라고 추정되는데, 유성룡이 기억하는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기개가 넘쳤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그 눈을 쏘려고 했다”는 대목은 어린 아이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례하거나 거칠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혼인과 급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그 뒤 이순신은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牙山)으로 이주했다. 아산은 지금 그를 기리는 대표적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와 묘소가 있어 그와 가장 연고가 깊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시행되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때문이었다.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이 풍습은 자연히 부인과 그의 집안인 처가(외가)의 위상을 높였다. 가장 익숙한 사례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상징하는 대표적 지역이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친정이 있던 강릉(江陵)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뒤 1565(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했다. 장인은 보성(寶城)군수를 지낸 방진(方辰)이었는데, 과거 급제 기록이 없고 군수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그렇게 현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그동안 이순신은 문과 응시를 준비해 왔다. 10세 전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고 보면 그는 10년 정도 문학을 수업한 것인데, 무장으로는 드물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여러 유명한 시편을 남긴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쌓은 데는 이런 학업이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인 1년 뒤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앞서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는 유성룡의 회고는 이때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선조 5)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물론 낙방했지만, 다시 일어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친 다리를 싸매고 과정을 마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무장으로서 이순신의 공식적인 경력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시작되었다. 그는 1576(선조 9) 2월 식년무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그의 나이 31세였으며, 임진왜란을 16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일생 전체가 그러했지만, 이때부터 부침이 심하고 순탄치 않은 관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험난한 관직 생활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9)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다. 석문과 사곡은 호랑이들의 소굴로 우리 영토를 엿보네. 골짜기가 갈라져 하늘은 틈이 생겼고, 강이 깊어 땅은 저절러 나뉘었네(石門與蛇谷, 虎穴窺我藩. 峽坼天成罅, 江深地自分)”라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시([동구비보를 지나며(過童仇非堡)], [학봉속집] 1)는 그런 거친 환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순신은 그곳에서 햇수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렇게 만기를 채운 뒤 1579(선조 12) 2월 서울로 올라와 훈련원 봉사(奉事, 8)로 배속되었다. 앞서는 거친 환경이 힘들었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사람 때문에 불운을 겪었다. 병조정랑(5) 서익(徐益)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고 하자 이순신은 반대했고, 8개월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된 것이었다. 핵심적인 요직인 병조정랑의 뜻을 종8품의 봉사가 반대한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즉각 불리한 인사조처로 이어진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많은 위인들이 그렇고 바로 그런 측면이 그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차이지만, 이순신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면모는 원칙을 엄수하는 강직한 행동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처음 표출된 그런 자세는 일생 내내 그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징비록]에서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썼듯이, 그런 현실적 불익은 그의 명성을 조금씩 높였고,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역사의 보상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얼마 뒤 이순신은 파격에 가까운 승진을 하게 되었다. 1580(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4)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하자 이순신이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유명한 일화는 이때의 사건이었다.

 

특별한 인사조치가 뒤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의 항명은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고 판단되지만, 서익과의 악연이 다시 불거졌다. 서익은 병기의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발포에 내려왔는데, 이순신이 병기를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말직이지만 중앙에서 근무하게 된 그에게 이때 중요한 기회가 찾아올 뻔했다. 국왕을 제외하면 당시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율곡 이이가 이순신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한 것이다. 그때 이이는 이조판서였다. 유성룡에게서 그런 의사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그러나 거절했다. 같은 가문(덕수 이씨)이므로 만나도 괜찮겠지만, 지금은 그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중직에 있으므로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이나 재력 같은 인간의 주요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어떤 자리나 직위의 획득과 관련된 측면이 많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면 권력이나 재력도 그만큼 팽창하기 때문이다. ‘지음(知音)’이라는 오래된 성어가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그 사람을 알아주고 후원하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거의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그 사람이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겨우 9세 차이였지만 탁월한 능력과 눈부신 경력으로 조선의 핵심적인 정치가로 자리잡은 같은 가문의 이조판서가 그때까지도 변방과 중앙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하고 있던 종8품의 말단 무관을 만나보고 싶어했을 때, 부적절한 정실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거절한 이순신의 태도는 그 기록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그렇게 훈련원에서 2년 넘게 근무한 뒤 이순신은 어떤 까닭에서인지 다시 강등되어 변방으로 배치되었다. 1583(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7)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불편한 통신 환경 때문에 그 소식은 이듬해 1월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는 3년상을 치렀고, 1585(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6)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그는 유성룡의 천거로 16일 만에 조산보(造山堡, 지금 함경북도 경흥) 만호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1년 반 뒤인 1587(선조 20) 8월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지금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복직 이후 비교적 순조로웠던 그의 관직 생활은 이때 그동안의 부침 중에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해 아군 11명이 전사하고 군사와 백성 160여 명이 납치되었으며 말 15필이 약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을 격퇴하고 백성 60여 명을 구출했다. 그전부터 이순신은 그 지역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중앙에 병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도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중앙 정부에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은 이 사건을 패전으로 간주했고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이순신의 생애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그러나 명예는 곧 회복할 수 있었다. 1588(선조 21) 1월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급습해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여 명을 죽인 보복전에서 이순신도 참전해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반년 뒤인 윤6월 그는 아산으로 낙향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일부 대신들과 대간의 반대를 받기도 했지만, 상당히 빠르고 순조롭게 승진했다. 1589(선조 22)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3)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도 앞서 만호 임명 때와 비슷한 파격적인 승진이었는데, 대신과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한 달 뒤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591 2월 진도군수(4)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3)로 옮겼으며, 다시 며칠만인 2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3)에 제수되었다. 그의 나이 46세였고, 임진왜란을 1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무과에 급제한 지 15년 동안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해 여러 곤경과 부침을 겪은 끝에 수군의 주요 지휘관에 오른 것이었다.

 

변방의 말직만을 전전하다가 삶을 마감했을 장수도 분명히 적지 않았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역정은 수준 이상의 보상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 다가왔지만 거의 대비하지 않았던 거대한 국난을 생각하면, 전쟁 직전 그가 북방의 말단 장교가 아니라 남해의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교로운 천행이었다.

 

 

임진왜란-승전과 백의종군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선조 25) 4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 2)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 22).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 18일 노량(露梁)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크다고 할만한 고난이 닥친 것은 1597(선조 30) 1월이었다. 그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죽음 직전에 이르는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났다.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 아들 울(-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주목하고 뛰어난 통찰력과 감동적인 문장으로 표현했지만, 이 날의 일기는 이순신의 내면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자료의 하나로 생각된다. 일기는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내밀한 기록이다. 후세에 공표될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그럴 의도를 담은 일기도 적지 않고 [난중일기]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평가되지만, 그럼에도 이 날 그의 문장은 전율과 놀라움을 안겨준다.

 

그 글에서 작성자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적었다. 그동안 승전을 거듭해 국망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갑작스레 압송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은 사람에게서 상상할 수 있는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는 철저하게 제어되어 있다. 그는 오직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했고, 승리의 원동력과 그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는 한 관찰과 평가는 정곡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 짧은 일기는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이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4 13). 그는 나흘 동안(4 16~19)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이때의 일기, 특히 맨 마지막 구절은 슬픔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마음을 느끼게 한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中方浦)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정유재란-복귀와 전사

 

 

필사즉생, 필생즉사 휘호. 이순신이 명량해전에 나아가기 하루 전에 쓴 휘호다. 절대적인 열세의 전투에 임하는 그의 자세가 그대로 담겨있다.

 

그동안 소강 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 16)과 전주(8 25)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 3).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 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그는 명량(鳴梁)해전에 나아갔고(9 16),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그때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담겨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속히 죽기만을 기다린다”는 이순신의 절망과 피로는 셋째 아들 이면의 죽음으로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고 수많은 죽음을 집행했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52세의 아버지는 다시 한번 통곡했다.

 

 (10) 14일 신미. 맑았다. ····· 저녁에 사람이 천안(天安)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정신 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뉘게 의지한단 말인가.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거대한 전란과 그 전란의 가장 중심에 있던 인물의 생애는 동시에 끝났다. 1598(선조 31) 11 19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왜란도 종결되었다. 그뒤 구국의 명장을 국가에서 추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1604(선조 37) 선무(宣武) 1등공신과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책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정조 17)에는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고 2년 뒤에는 그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가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에 동상이 세워지고 현충사가 대대적으로 정비됨으로써 그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참조 :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년도

주요 활동

1545

3 8, 자시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

유년기

서울을 떠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사함. 시기를 8, 16 등으로 보나 정확하지 않음

1565

보성 군수 방진의 딸과 혼인함

1566

10, 무인이 것을 결심하고 무예를 배우기 시작함

1567

2, 맏아들 회가 태어남

1571

2, 둘째아들 울이 태어남

1572

8, 훈련원 별과시험에 응시, 낙마로 다리가 골절됨

1576

2, 식년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에 합격 (10 수련)

12,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1577

2, 셋째아들 염이 태어남, (후에 면으로 개명)

1579

2, 훈련원 봉사가

10, 충청 병사의 군관이

1580

7, 전라좌수영의 발포 수군 만호가

1581

12, 군기 경차관 서익의 모함으로 파직됨

1582

5, 훈련원 봉사로 복직됨

1583

7,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이 .

10, 건원보 권관이

11,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함

11 15, 부친이 사망함 (향년 73)

1584

1, 부친의 부음을 듣고 분상함

1586

1, 사복시 주부가

재직 16 만에 조산보 만호로 이임됨 (유성룡 추천)

1587

8, 녹둔도 둔전관을 검함

10, 이일의 무함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함

1588

1, 시전 부락 여진족 정벌의 공으로 백의종군 해제됨

1589

1, 전라관찰사 이광의 군관 전라도 조방장이

11, 선전관을 겸함

12, 정읍 현감이

1590

7, 고사리진 병마첨철제사로 임명되나 대간의 반대로 무산됨

8, 만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되나 대간의 반대로 정읍 현감에 유임됨

1591

2, 진도 군수,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에 제수되었가가 전라좌도 수군절제사가 .

왜의 침략에 대비, 병기를 정비하고 거북선을 제작함

1592

1, 본영 각진에서 무예 훈련함

2, 전선을 점검하고 발포,사도,여도,방답진을 순시함

3 37, 거북선에서 대포를 시험함. 경강선 점검

4 12,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포를 시험함

4 123 임진왜란이 일어남

4 27, 출전하라는 왕명이 내려짐

5, 옥포, 함포, 적진포해전에서 왜선 42척을 격파함. 전공으로 가선대부에 승자됨

6,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왜선 62척을 격파함. 전공으로 자헌대부에 승자됨

7, 견내량, 안골포해전에서 왜선 79척을 격파함. 정헌대부에 승자됨

9, 부산포해전에서 왜선 백척을 격파함

1593

1, 사도 첨사를 시켜 송도에서 왜병을 생포하게함

2, 부산에서 왜적을 추격하여 분멸시킴

3, 웅천에서 왜적을 격파함

7, 진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김.

8, 삼도수군통제사가 . 진영에서 둔전, 포어, 자염, 도웅 등을 시행, 군량을 비축함

12, 장계를 올려 진중에 무과 설치를 청함

1594

3 2 당항포해전에서 왜선 31척을 격파함

4, 진중에서 무과 실시, 어영담이 병사함

8월에 권율, 곽재우, 김덕령과 작전을 세우고 9월에 장문포에서 왜선 2척을 분멸함

10, 영등포, 장문포의 왜적을 공격함

1595

2, 원균이 충청 병사로 이직함

7, 견내량에 주둔, 삼도 수군을 모아 결진함

8, 체찰사 이원익이 진영에 내방함

1596

1, 왜장 심안둔의 부하 5명이 항복하여 .

4, 장사를 가장하여 부산에서 정탐온 왜병 4명을 효수함

7, 귀순한 왜병들에게 광대놀이를 허락함

8, 순천에서 체찰사와 병사를 논함

10, 여수 본영에 모친을 모셔와 구경시켜 드림

1597

요시라의 간계로 왜적이 간첩을 보내 죽이려 하고, 이산해 김응남 등의 주장으로 압송되었고, 서인과 대간들이 치죄를 주장, 박성은 죽이라고 상소함

2 26,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됨

3 4, 옥에 갇힘, 옥중에 정사신의 위로 편지를 받음

4 1, 정탁의 신구차로 특사됨

4 3, 서울을 출발하여 과천, 수원, 오산, 평택, 군포를 거쳐 어라산 선영에 찾아감.

4 11, 모친상을 당함 (향년 83)

4 13, 해암에서 모친의 유래를 봉건함

4 19, 장례를 치르고 진영으로

6 8, 초계의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감, (광덕, 공주, 온진, 여산, 삼해, 전주, 임실, 남원, 승주, 구례, 하동, 단계, 삼가를 경유함)

7 15, 왜적의 기습을 받아 원균이 패사함. 이억기, 최호 전사함

7 16,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 패망함

8 3, 김명원과 이항복의 추천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됨

8 30, 벽파진에 진영 설치

9, 조정에서 육전을 명하나 "이제 신에게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으니 죽을힘을 내어 싸우면 있다" 장계함

9 15, 장병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 전쟁을 독려함

9 16, 명량해전에서 13척의 전선으로 왜선 133척과 싸워 13척을 격파함 (왜선: 일기 133, 징비록 300, 명량대첩비 500)

왜장 마다시가 죽음

10, 벽파진에서 보화도로 진영을 옮김. 왜적들이 명량해전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아산 고향에 방화하고 이를 대항하던 셋째아들 면이 전사함

12, 선조가 상중에 소식을 그치고 유식하기를 명함

1598

2 18, 고금도로 진영을 옮기고 경작하여 군비를 강화함

7 16, 명나라 도독 진린과 연합작전을 세움

7 24, 절이도해전에서 송영종이 포획해 적선 6척과 적군의 머리 69급을 진린장군에게 보냄

10 2, 왜교 전투에서 육군 유정과 협공, 왜적의 피해도 컷지만 명선 20 척이 피해 당함

11, 풍신수길의 죽음으로 왜군이 철수하려 하자 진린이 끊어 막자고 , 좌수영과 묘도에 진을 .

11 19, 뇌물을 받은 진린이 통신선을 통과시켜 노량에 왜선이 집결하여 소서행장 구축을 위한 전투가 벌어짐. 노량해전에서 적탁을 맞고 전사함. 운명전에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라고 유언함. 맏아들 , 조카 , 송희립 등이 이어 독전하여 왜선 500척과 싸워 200 척을 겨퇴시킴

1599

2, 아산 금성산 선영에 장사 지냄

1604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되고, 풍덕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됨

1613

충열사, 충민사, 현충사에 배향됨

1643

충무의 시호를 받음

1793

영의정에 추증됨. 2 (1795) ,이충무공전서> 간행됨

 

<참조: 교감완역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민음사>

 

2.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11

항시 전투가 따르는 현실 속에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긴박한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자세,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항상 위기에 대처했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P21

정조는 임자년 윤음에서 “우리나라를 재건하게 한 황은을 길이 생각하고 우리나라 충신에게 미치어 빗머리에 전자를 써서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요즘 이충무유사를 읽으면 노량해전을 회상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다리를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을 하게 된다. (중략) 충무가 남긴 사적을 요즘 내각에 명하여 전서를 편찬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활자로 인쇄되거든 그 한 본을 이 충렬사에 간직해 두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P51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쳤다. 우후, 가수가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자기 한 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일도 알 만하다. 성 밑에 사는 토병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의 쇄석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P52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안개비가 잠깐 뿌리다가 늦게 갰다.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수장안에 피라미 떼가 몰려들기에 그물을 쳐서 이천여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 위에 앉아서 우후 이몽구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새 봄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P54

순찰사의 편지를 보니, 통사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명나라에 무고하여 군사를 청하는 일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더불어 딴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하였으니, 그 흉포하고 패악함은 참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다. 통사들은 이미 잡아 가두었다 한다.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P55

20, 맑음. 아침에 갖가지 방비와 전선을 점검해 보니, 모두 새로 만든 것이고, 무기도 역시 어느 정도 완비되어 있었다. 늦게 출발하여 영주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에 이르니 좌우의 산꽃과 교외의 봄풀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도 역시 이와 같은 경치였던가.

 

P56

전쟁 준비에 여러 가지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죄를 처결하였으며,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가장 못한 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그 지상을 조사하지 못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P57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중위장을 순천 부사로 교체하라는 것이니, 한심스럽다.

 

P61 순찰사의 편지 가운데, "영남 관찰사 김수)의 편지는 '쓰시마 도주의 문서에, '일찍이 배 한 척을 내어 보냈는데, 만약 귀국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바람에 부서진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매우 음흉하고도 거짓되다. 동래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바다인데 그럴 리 만무하다. 말을 그와 같이 꾸며 대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 고 하였다.

 

P62

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쌌다. 늦게 여필이 떠나갔다. 홀로 책창 아래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P63

해 질 무렵에 영남 우수사가 보낸 통첩에, “왜선 구십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적 삼백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각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 병마사(최원), 우수사(이억기)에게 공문을 보냈다. 영남 관찰사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이었다.

 

P67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왜적의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도망갔는데,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내다 걸었다.

 

P71

27일 맑음. 영남 우수사와 함께 의논하고, 배를 옮겨 거제 칠내도에 이르니, 웅천 현감 이종인이 와서 말하기를 "들으니 왜적의 머리 서른다섯 급을 베었다."고 하였다. 저물녘에 제포, 서원포,를 건너니, 밤은 벌써 이경이 되었다. 서풍이 차갑게 부니, 나그네의 심사가 편하지 않았다. 이날 밤은 꿈자리도 많이 어지러웠다.

28일 맑음. 벽에 앉아 꿈을 기억해 보니, 처음에는 흉한 것 같았으니 도리어 길한 것이었다. 가덕에 이르렀다.

 

P71

일본은 해중지역에 살고 있어서 비록 추운 겨울을 만나도 바람이 오히려 따뜻하여 장정들은 짧은 소매 옷만 걸치고 긴 옷에 겹주름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이제 흉적들이 오랫동안 남의 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풍토에 익숙지 않아 한겨울 추위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P72

우리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만이 온전한 것은 천만다행인데,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운송하는 것이 모두 이 도에 달려 있고, 적을 물리쳐 국권을 회복하는 것도 이 도를 위한 계책에 달렸습니다.

 

P73

종사와 도성도 보전할 수 없게 되어 이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노라면 애통한 마음은 불에 타고 칼에 베이는 것 같습니다.

 

P74

전례를 따라 출발을 재촉하는 것은 한편으로 배의 격군을 채울 수 있고, 한편으로 성을 지킬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여 다섯 번 적에게 나아가고 열네 번 싸워 이겼던 것이 이미 여덟 달 전에 겪은 일입니다. 대저 변방의 중진을 한번 잃으면 그 해독은 심장부에까지 미치게 되니, 이것은 실로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P75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계책으로는, 먼저 전례를 따라 변방의 방어를 견고하게 한 다음 차츰 조사하고 밝히어 군사와 백성의 고통을 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이 가장 급선무라 생각합니다.

 

P75

국가가 호남과는 마치 제나라의 거, 즉묵과 같은 것이니, 이는 바로 온몸에 폐질이 있는 자가 구원하기 어려운 다리 하나만을 겨우 간호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P80

아침 식사 후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 수사는 병으로 오지 않고, 오직 전라좌우도의 장수들만이 모여 약속했다. 다만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니, 그 입에 담지 못할 짓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어란포 만호 정담수, 남도포 만호 강응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토벌을 약속하는 때에 술을 함부로 마셔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사람됨을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P85

경상 수사의 군관과 가덕 첨사의 사후선 두 척이 섬 사이를 들락날락하는데, 그 하는 꼴이 황당하므로 묶어서 영남 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게 화를 냈다. 그의 본뜻은 군관을 보내어 어부가 건진 사람의 머리들을 찾아내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P86

온종일 비가 왔다. 배의 뜸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속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P87

8, 맑음.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나니, 광양 현감, 낙안 군수, 방답 첨사 등이 왔다. 방답 첨사와 광양 현감은 술과 안주를 넉넉히 준비해 왔고, 우수사도 왔다. 어란포 만호도 소고기로 만든 음식 몇 가지를 보내왔다. 저녁에 비가 왔다.

 

P87

아침 식사 후에 출항하여 사량으로 향했다. 낙안 사람이 행재소에서 와 전언하기를 “명나라 군사들이 이미 개성까지 왔는데,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어 행군하기가 어려우므로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가 서울로 들어 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P88

식후에 우수사의 임시 머무는 방에서 바둑을 두었다. 광양 현감이 술을 마련해 가져왔다.

 

전시에도 바둑을 두며 술을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매사에 긴장된 시점일 테데 전시에도 삶이 있고 그 삶을 살지 않으면 오래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P88

거센 바람이 종일 불었다. 우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모양이 형편없으니 우습다.

 

형편 없는 것을 보고 형편없다 말하는 것을 보니 이순신도 우수사가 많이 싫고 모양이 나지 않은 사람이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친구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오래가지 않을 것인데 같이 군사를 부려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우수사와의 관계는 참으로 개탄스러울 것이다.

 

P89

약속한 일. 천고에도 들어 보지 못한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지국에 갑자기 닥쳐왔다. (그러나 인심이 견고하지 못한 상황에 왜적이 삼경을 함락하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적병을 겨우 근경에서 대하기만 해도 그들의 위세를 보고는 먼저 무너지니, 모든 군량을 나르는 길이 왜구를 돕는 밑바탕이 되어 버렸다.) 영해의 여러 성들은 적의 위세만 보고도 달아나 무너지니, 적이 석권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다.

 

P90

임금님의 수례는 서쪽으로 옮겨가고 백성은 짓밟히고 살육을 당했으며, 연이어 삼경이 함락되고 종사가 폐허가 되니, 오직 우리 삼도 수군은 의리를 떨쳐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는 이가 없건만 기회가 알맞지 않아 뜻한 바람을 펴지 못하였다.

 

P93

일의 형세가 지체되어 동월 29일 새벽에 다만 신의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곤양과 남해 땅 노량에 이르렀는데,  경상 우수사 원균이 신의 수군을 바라보고는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원균은 패군들이 떠난 뒤로 군사 없는 장수가 되어, 별로 지휘할 일이 없었습니다.

 

P93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차라리 우선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을 늦추고 한 번이라도 휴가를 얻게 해 준다면 인심이 필시 이러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정예한 수군과 잡색군중에 자원하는 자를 모집하여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기르도록 휴가를 가게 하였고, 8월초에는 모두 거느리고 사또 앞에 달려가 지휘를 받으며 죽음으로써 결전하고자 합니다.

 

P94

이와 같이 급급한 일에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심력을 다하고자 하지 않음이 없건만, 인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대장의 명령은 오히려 신중히 하여 가볍게 내려선 안 될 것이니, 일이 비록 뒤의 것을 생략할 만큼 급속히 해야 할 것일지라도 인심과 형세를 살피고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P96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 앞 우묵한 곳의 큰 뼈를 깊이 다쳐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까지도 차도가 없어 또한 활시위를 당길 수 없으니 무척 걱정스럽습니다.

 

P96

"경상도와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한다면, 이는 곧 이 도를 왜적에게 넘겨주는 것이니, 수비하는 사람은 부모처자가 없게 되고 다시는 서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답니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통제하여 회합할 수 있겠습니까. 순천 부사가 힘을 다하여 사람을 취합해 보았지만 온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하니, 통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각 포구의 보고 내용도 이어짐이 또한 이와 같으니, 군대를 동원할 기한을 늦추고 서서히 의리로서 깨우쳐 취합해야 할 것입니다.

 

P97

지난번 유지가 사또의 공문에 의거하였는데, 이제 의병을 많이 모아 올려 보낸다는 말을 들으니, 저는 아무개를 장수로 임명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비록 스스로 능히 적을 죽이지 못하고 거느리는 부하들에게 지시만 했지만, 한 가지 일은 이룰 수 있었습니다.

 

P98

그러나 교전할 때 스스로 조심하지 않아 적의 철환을 맞았는데,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지만 연일 값 옷을 착용하여 헌 상처가 뭉그러지고 고름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지 못하고 있으며, 밤낮을 잊고서 혹은 뽕나무 잿물로 혹은 바닷물로 씻어 보았지만, 아직 차도가 없으니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P103

저와 같은 이의 한 몸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지만 나랏일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전라도에 새로 온 관찰사와 원수조차도 군관을 보내어 연해에 있는 수군의 양식을 쌓아 둔 곳간을 털어 싣고 가고 있습니다.

 

P103

종사관 정경달이 둔전을 감독하는 일에 심력을 다하였지만, 전 관찰사의 공문에는 "도주 이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으니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한다니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정 공이 이제는 함양 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그 감독하던 일도 앞으론 허사가 될 것 같아 근심스러울 뿐입니다. 추수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대로 잉임 시킬 수는 없겠습니까.

 

P105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이었으나 이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P105

늦게 큰비가 퍼붓듯이 내리더니 온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가 개울에 물이 불어나더니 곧 가득 찼다. 농민들이 바란 것이니 매우 다행이다.

 

P108

밤에 들으니 영남 우수사에게 선전관 도언량이 왔다고 한다. 이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저리 뒤척이니,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 자려 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닭이 울고서야 선잠이 들었다.

 

P108

그들에게서 피난간 임금님의 사정과 명나라 군사들의 소행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나는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대화하며 술을 여러 잔 마셨는데, 영남우수사 원평중이 와서 술주정이 심하기가 차마 말할 수 없으니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의 거짓된 짓을 차마 말로 할 수 없었다. 영산령이 취하여 쓰러져서 정신을 못 차리니 우습다.

 

P108

아침에 낙안 군수 신호가 와서 만났다. 조금 뒤에 윤동구가 그이 대장 원균이 올린 장계의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의 거짓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P109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누워 신음하던 중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오래 체류하는 것은 반드시 교묘한 계책을 내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한 걱정이 많던 차에 일마다 이와 같으니, 더욱더 탄식이 일고 눈물이 잠겼다.

 

이 상태로 어떻게 일기를 썼을까? 아파 누워 신음하던 중에 이 글을 남기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스스로 보기 위해 그랬을까? 후대에 보라고 썼을까? 그 마음이 아프고 이 글을 남기 그 마음이 대단하다.

 

P109

영남 우수사가 군관을 보내 진양의 보고서를 가져와 보이니, 내용은 이 제독이 지금 충주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과 약탈을 일삼고 있으니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불어 마음이 또한 어지러웠다. 고성 현령이 군관을 보내 문안하고, 또 약술과 소고기 음식 한 꼬치와 꿀통을 보냈다고 한다. 상중이라 받아 두는 것이 미안하지만, 간절한 심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되돌려 보낼 수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P115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기에 병사의 공문을 통해서 나누어 보내라고 하니, 그는 공문도 내는 것을 심히 못마땅해하고 무리한 말만 많이 했다. 가소롭다. 명나라의 배신이 보낸 화공 무기인 화전 천오백서른 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니 그 잔꾀는 심히 다 말로 할 수가 없다.

 

P115

남해 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옆에 댔는데, 그 배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 봐 두려워하였다. 가소롭다.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이는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 수사 또한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는가.

 

P118

아침에 영남 수사의 우후가 군관을 보내어 살아 있는 전복을 선사하기에 구슬 서른 개를 답례로 보내어 살아 있는 전복을 선사하기에 구슬 서른 개를 답례로 보냈다. 나대용이 병이 나 본영으로 돌아갔다. 병선 진무 유충서도 병 때문에 교체되어 육지로 올라갔다. 광양 현감이 오고 소비포 권관도 왔다. 광양 현감이 소고기를 내와서 함께 먹었다.

 

P118

순천 부사, 광양 현감이 와서 개고기를 바쳤다. 몸이 불편한 것 같아 하루 종일 배에 누워 있었다.

 

P119

사경에 경상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아가 싸우자."는 것이었다. 그 흉악하고 음험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이루 말로 하지 못하겠다. 이날 밤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네 고을의 군량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P119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희 머리카락이 난 것을 어찌 꺼리랴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P120

명나라 사람 왕경과 이요가 와서 수군이 얼마나 강성한지를 살폈다. 그들을 통하여 “이 제독(이여송)이 나아가 토벌하지 않아서 명나라 조정으로 문책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과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개탄스러운 것이 많았다.

 

P120

아침 식사 후에 낙안 군수(신호)가 와서 만났다. 가리포 첨사에게 오기를 청하여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순천 부사, 광양 현감이 왔다. 광양 현감은 노루고기를 내왔다.

 

광양 현감은 늘 고기를 바친다. 이 분은 어떤 사람인가? 소고기, 개고기, 노루고기까지 말이다.

 

P128

저녁에 오수가 거제의 가참도로부터 와서 고하기를 "적선은 안팎에서 모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포로가 되었던 사람이 도망쳐서 돌아와 한 말에 '적도들이 무수히 창원 등지를 향해 갔다.'고 했다." 하였다. 그러나 남들의 말은 다 믿을 수 없다.

 

P130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P133

사도 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 사로잡은 포작 열 명이 왜군 옷으로 변장하여 한 짓이 준비된 것이기에 추궁하여 물으니, 어떤 근거가 있을 듯하더니 경상 우수사가 시킨 것이라고  하였다. 발바닥을 여남은 대씩 때리고는 놓아주었다.

 

P139

원 수사가 왔다. 음흉하고 속이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 해괴하다.

 

P142

 하나, 오랑캐의 근성은 경박하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하다.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결사의 마음을 품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므로, 아군의(정예하게 훈련되지 않은)겁에 질린 무리들은 일시에 놀라 달아나니, 그래서야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할 수 있겠는가.

 

P143

하나, 정철총통은 전쟁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작하는 묘법을 잘 알지 못한다. 이제야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 내어 조총을 만들어 내니, 왜군의 총통과 비교해도 가장 기묘하다.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사격을 시험하고자 잘되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음은 이미 그 묘법을 얻었기 때문이다. 도내에서는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서 알리게 하였다.

 

P143

나랏일이 다급한 날에

누가 곽리의 충성을 바치리오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 이루려 함인데

회복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네

관산의 달 아래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 마음이 슬퍼지네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에도

여전히 또다시 동과 서로 다투겠는가

 

P144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내리는 데 마음을 다했는지의 여부를 기회와 사정에 따라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먼저 진격을 외쳐 서로 다투어 돌진하여 싸우게 되는 때가 되면, 사랑하는 처자를 돌아보고 살기를 탐하여 중도에서 빠지는 자가 있었고, 혹은 공로와 이익을 탐하여 승패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다가 적의 손에 걸려 들어 마침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몸을 죽게 하는 재앙을 만든 자가 있었다.

 

P144

칼날 휘두르며 이르니 그 형세가 비바람과 같아 흉도의 남은 넋들도 달아나 숨고…..

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P144

만 번 죽어도 한 삶을 돌아보지 않을 계책을 내고 보니 발분하는 마음 그지없네.

 

P145

국가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능력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그렇게 하리라.

 

P145

사직의 존엄한 신령에 힘입어 겨우 작은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초월하여 분에 넘친다. 장수의 직책을 지닌 몸이지만 세운 공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고, 입으로는 교서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P145

한창 명나라 군사의 거마 소리를 기다리느라 하루를 일 년같이 여겼지만, 적을 쳐서 무찌르지 않고 화친을 위주로 하여 우선 흉악한 무리를 퇴각만 시키고 우리나라가 수년 동안 침입 당한 치욕을 씻지 못했으니, 하늘에까지 미친 분함과 수치가 더욱 간절하다.

 

P145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가고 종사는 폐허가 되니 사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기운을 빼앗기어 백성들의 희망도 절로 끊어졌다.

 

P145

신이 비록 노둔하고 겁이 많지만 몸소 시석을 무릅쓰고 나아가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어서 몸을 바쳐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데, 지금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P150

저녁에 원 수사도 왔다. 소비포 권관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어 간다는 말을 들었다.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원 수사, 공연수, 이극성이 서로 눈독을 들인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했다고 한다.

 

P150

20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어 춥기가 살을 애듯 하였다. 각 배에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P151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두 명이 원 수사의 진영에서 와서 적의 정세를 상세히 이야기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P153

어머니의 편지와 아우 여필의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천만다행이다.

 

P160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다시 적선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회를 엿보아서 무찌르기를 서로 작정하자.”는 것이었다.

 

P171

술이 세 순배 돌자 원수사가 거짓으로 술 취한 체하고 광기를 마구 부려 무리한 말을 해 대니, 순무어사가 그 괴이함을 이루 다 말하지 못했다. 원수사가 의도하는 것이 매우 흉악했다. 삼가 현감이 돌아갔다.

 

P176

9일 비가 계속 내렸다.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멍하기가 취중이고 꿈속인 듯,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P180

저녁에 겸사복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내용은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예전의 폐습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었다. 통탄하는 마음 어찌 다하랴. 이는 원균이 술에 취하면 망령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P182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 아침에 아들 울이 본영으로 가는데 이별하는 심회가 그윽하다.  홀로 빈집에 앉았으니 심정을 스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P183

아들의 편지가 왔는데, 잘 돌아갔다고 했다. 또 아내의 언문 편지에는 아들 면이 더위 먹은 증세로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마음이 애타고 답답하다.

 

P189

13일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되어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니, “군왕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 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유 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또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저녁 내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늦게 송전에 돌아가는데, 소금 한 섬을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 첨사와 순천 부사가 와서 만나고 어두워서야 돌아갔다. 비가 올 것인가 갤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앞으로 큰비가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경에 발포의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점은 언제 치는 것일까? 내가 할 바를 다하고 하늘의 뜻을 헤아려 마음을 굳건히 하고 흐트러짐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점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P191

19, 맑음. 아침에 명나라 장수에게 예의를 표시하는 단자를 올리니 감사해 마지못하겠다면서 주시는 물건도 매우 풍성하다고 하였다. 충청 수사도 역시 드렸고, 늦게 우수사도 거의 내가 준 예물과 같이 주었다. 점심을 올린 뒤에 경상 원 수사가 혼자서 술 한잔을 올리는데, 상은 무척 어지럽건만 먹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우스웠다.

 

P192

아침을 먹은 뒤 파총이 내 배로 내려와서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이별주 일곱 잔을 마신 뒤 닻줄을 풀고 함께 포구 밖으로 나가 재삼 간절한 뜻을 표하며 전송하는데 마음이 아쉬웠다. 그 길로 경수와 충청 수사, 순천 부사, 발포 만호, 사도 첨사와 같이 사인암으로 올라가 하루 종일 취하고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전쟁중에도 마음 맞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P193

25일 맑음. 아침에 하천수에게 장계를 들려 보냈다. 아침 식사를 하고서 충청 수사, 순천 부사 등과 함께 우수사에게로 가서 활 열 순을 쏘았다. 크게 취해 돌아와서 밤새도록 토했다.

 

P195

초하루 자시에 꿈을 꾸니 부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으므로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P197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해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P197

원수(권율)가 정오에 사천에 와서 군관을 보내 대화를 청하기에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 현감(기직남)의 처소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간의 인사를 마치고서 함께 이야기 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원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가소로웠다. 가지고 간 술을 마시자고 청하여 여덟 순을 돌렸는데, 원수가 몹시 취하여 자리를 파하였다.

 

P200

이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김양간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하는 뜻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수사의 일은 매우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P201

1일 맑음.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징조였다.

 

P202

새벽에 비밀 유지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삼 년 동안 해상에서 있으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목숨 걸고 원수를 갚을 뜻으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지만, 다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P205

20일 새벽 바람이 그치지 않았으나 비가 잠깐 그쳤다.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보니, 바다 가운데 외딴섬이 눈앞으로 달려와서 멈췄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 홀로 서서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참으로 흔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구하다가 스스로 멸망할 상이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이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라갈 징조이다.

 

P211

비변사의 공문에 의하여 원수가 쥐가죽으로 만든 남바위(귀가리개)를 좌도에 열다섯 개, 우도에 열 개, 경상도에 열 개, 충청도에 다섯 개로 나누어 보냈다.

 

P211

새벽 꿈에 왜적들이 항복을 청하면서 육혈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쳤다. 말을 전해 준 자는 그 이름이 ‘김 서신’이라고 하는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꿈이었다.

 

P211

17일 맑음. 아침에 어사의 처소에 사람을 보냈더니, 식사 후에 오겠다고 하였다. 늦게 우수사가 오고 어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원 수사의 기만한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하다. 원 수사도 왔는데 그 흉포하고 패악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P216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음양이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라고 할 만하다.

 

P218

25일 흐렸다. 새벽꿈에 이일과 서로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였는데,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때를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고 구태여 음탕한 계집을 두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밖의 집에 멋대로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또 수군 각 관청과 포구에 육전의 병기를 배정하여 독촉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라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기지개 켜고 깨어나니 한바탕 꿈이었다.

 

정말 꿈이었을까? 꿈 얘기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정말 꿈이었다면 평소 마음에 둔 것이리라.

 

P219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으로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으니 더욱 더 배를 만들고 무기를 다스리어 적들을 불리하게 하고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P219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움에 백 번 이기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질 것이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할 것이다. 이는 만고의 변함없는 이론이다.

 

P222

쓸쓸이 바라보며

 

비바람 몰아치는 밤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누구에게 능히 평정을 맡기리오

배를 몰던 몇 해의 계책은

이제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비바람을 몰아치는 밤

마음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슬픈 마음은 쓸개가 찢기고

쓰라린 가슴은 살을 에는 듯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 자꾸 흐르네

쓰라린 가슴은 쓸개가 잘리고

슬픈 마음은 살을 에는 듯

산하가 참혹한 빛을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태평세월 이백 년에

화려한 문물은 삼천 가지

나라의 다급한 형세에

평정을 맡길 인재 없도다

여러 해 바다 막을 계책 세우노라니

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을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P227

1일 맑음.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는 여러 장수들과 색군들이 와서 새해 인사를 했다. 원전, 윤언심, 고경운 등이 와서 만났다. 제색군 들에게 술을 먹였다.

 

P245

아침에 원수(권율)의 계본과 기, 이씨 두 사람의 공초(죄인의 진술)한 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원수의 지위에 눌러앉을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일기초)

 

P246

"4일에 종 춘세가 불을 내어 집 여남은 채가 탔으나 어머님이 계신 집에는 미치지 않았다."고 했다. 이것만도 다행이다.

 

종 춘세는 왜 불을 질렀을까? 불만이라도 있던 것일까? 이순신의 집 종인데 기이하다.

 

P247

아침 식사 후에 나가 공무를 보니, 광양의 김두검이 복병으로 나갔을 때 순천과 광양의 두 수령에게서 이중으로 월급을 받은 일 때문에 벌로써 수군으로 나왔는데, 칼도 안 차고 또 활도 안 차고서 무척 오만을 떨기에 곤장 일흔 대를 쳤다.

 

P250

비바람이 그치지 않고 종일 퍼부었다.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뛰어넘어서 분에 넘쳤다. 몸이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는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P255

오늘이 권언경 영공의 생일이라고 해서, 국수를 만들어 먹고 술도 몹시 취했다. 거문고 소리도 듣고 피리도 불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P256

내일은 돌아가신 부친의 생신이신데, 슬픔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일기초)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P257

“나라의 재앙이 참혹하고 원수가 사직에 남아 있어서 귀신의 부끄러움과 사람의 원통함이 온천지에 사무쳤건만, 아직도 요사한 기운을 재빨리 쓸어 버리지 못하고 원수와 함께 한 하늘을 이는 분통함을 모두 절감하고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가 팔을 걷고 절치 부심하며 그놈의 그 살을 찢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경은 적과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는 장수로서 조정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적과 대면하여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지껄이는가. 또 누차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높여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호, 강화하자는 말을 하여, 명나라 조정에 까지 들리게 해서 치욕을 끼치고 사이가 벌어지게 했음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도다.

 

P258

김응서란 어떠한 사람이기에 스스로 회개하여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만약 쓸개 있는 자라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

 

P270

북방에 갔을 때에 같이 힘써 일했더니

남방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 하네

한잔 술 오늘 밤 달빛 아래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의 슬픈 정만 남으리

 

P277

"요동의 왕 울덕은 왕씨의 후예로서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고 하였다. 매우 놀랄 일이다. 우리 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

 

P279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혼자 앉아서 그리워하는 생각에 품은 마음을 스스로 가누지 못했다.

 

P288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점쳤더니,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쳤더니, ‘군왕을 만나 본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와 모두 길한 괘라고 기뻐하였다.

 

289 이날 바람이 자고 날씨가 따뜻했다. 이날 저녁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었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번잡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홍수를 불러서 피리 부는 소리를 듣다가 밤 이경에 잠들었다.

 

P294

초저녁에 어란 만호가 견내량의 복병한 곳으로부터 와서 보고하기를, “부산의 왜놈 세 명이 성주에서 투항한 사람을 거느리고 복병한 곳에 와서 장사를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장흥 부사에게 전령하게 “내일 새벽에 가서 보고 타일러 쫓으라.”고 하였다. 이 왜적들이 어찌 물건을 팔고자 하겠는가. 우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한 것이 틀림없다.

 

P309

저물녘 몸이 몹시 피곤하고 수시로 땀이 흐르니 이 또한 비가 올 징조다.

25일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종일 퍼부어 잠시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저녁 내내 수루에 기대었는데 품은 마음이 점차 언짢아졌다. 머리를 한참 동안 빗었다. 낮에 땀이 옷을 적셨는데 밤에는 옷 두 겹이 젖고 다시 방바닥까지 흘렀다.

 

P312

아침에 암행어사가 들어온다는 기별을 들었기에 수사 이하 모두가 포구로 나가서 기다렸다. 조붕이 와서 만났다. 그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학질을 앓아서 무척 야위었다. 매우 안쓰러웠다. 늦게 암행어사가 들어와서 내려앉아 함께 이야기하다가 촛불을 밝히고 헤어졌다.

 

P313

이날 아침에 남녀문을 통해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 말은 벌써부터 퍼졌었지만, 아직은 확실한 기별이 오지 않았다.

 

P315

25일 맑음, 남풍이 세게 불었다. 일찍 목욕탕에 잠깐 들어갔었다. 저녁에 우수사가 와서 만나고 돌아갔다.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물이 너무 뜨거워서 오래 있지 못하고 도로 나왔다.

 

P317

초저녁 무렵 총통과 숯을 넣어 둔 창고에 불이 나서 모두 타 버렸다. 이는 감독관들이 새로 받은 숯을 쌓을 때 조심하지 않고 묵은 불씨를 살피지 않아서 이러한 재난이 있게 한 것이다.

 

P328

새벽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것이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 보니, ‘화살을 멀리 쏜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또 ‘삿갓을 발로 차서 부순 것’은 삿갓이 머리에 써야 할 것이나 발로 걷어채인 것이니, 이는 적의 괴수에 대한 것으로서 왜적을 모조리 무찌를 징조라 하겠다.

 

P329

늦게 경상 수사가 와서 바다를 건너갈 격군들에 대해 의논하였다. 또 그들의 길 양식으로 벼 스물세 섬을 찧은 것이 스물한 섬이 되어 두 섬 한 말이 줄었다.

 

P329

어두울 무렵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많이 벌였다. 장수된 자로서 좌시할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하여 따르는 왜인들이 마당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금하지 않았다.

 

P330

충청도 홍산에서 큰 도둑들이 도발하여 홍산 현감 윤영현이 붙잡히고, 서천 군수 박진국도 끌려 들어갔다고 한다. 바깥 도둑도 아직 없애지 못했는데, 안의 도둑들이 이러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P331

이날 아들 회가 방자 수에게 곤장을 쳤다고 하기에 아들을 뜰 아래에 붙들어다가 잘 타일렀다.

 

P331

저녁에 순천 관리의 공문에, "충청도 도둑들이 홍산에서 일어났다가 처형되었고, 홍주 등 세 고을이 포위되었다가 간신히 면했다."고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P334

늦게 수루에 앉아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느라 몸 상하는 줄도 몰랐다. 늦게 대청으로 나가 활 몇 순을 쏘다가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활 쏘는 것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오니, 몸은 언 거북이처럼 움츠러들기에 바로 옷을 두껍게 입고 땀을 냈다. 저물녘 경상 수사가 와서 문병하고 갔다. 밤의 통증이 낮보다 배로 심하여 신음하며 밤을 보냈다.

 

P341

12일 맑음. 종일 노를 바삐 저어 이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다. 백발이 성성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숨이 곧 끊어지려 하시는 모습이 아침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새도록 위안하며 기쁘게 해 드려 마음을 풀어 드렸다.

 

P341

어머니 곁에서 모시고 아침밥을 올리니 기뻐하시는 빛이 가득했다 늦게 하직을 고하고 본영으로 왔다. 유시에 작은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재촉하였다.

 

P342

남방산에 함께 오르니, 좌우로 적들이 다니는 길과 여러 섬들을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참으로 한도의 요충지다. 그렇지만 이곳은 형세가 지극히 외롭고 위태롭기에 부득이 이진으로 옮겨 합하였다. 병영에 도착하였다. 원 공의 흉악한 행동은 여기에 적지 않겠다.

 

P355

5일 맑음. 해가 뜰 때 길을 떠나 곧장 선산에 이르렀다. 수목이 거듭 야화를 겪고 말라 비틀어져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무덤 아래에서 절하며 곡하는데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외가로 내려가 사당에 절하고,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가서 조상의 사당에 곡하며 절했다. 또한 들으니 남양 아저씨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저물녘 본가에 이르러 장인, 장모님의 신위 앞에 절하고 바로 작은 형님과 아우 여필의 부인인 제수의 사당에도 갔다가 잠자리에 들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P356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보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찌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P357

16일 궂은비가 왔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P361

아침에 둘째아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의 음은 열()이다. 싹이 처음 트거나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니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P362

5일 맑음. 새벽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아침에 부사가 와서 만났다.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도로부터 와서 원 공의 흉포하고 패악함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이탈하여 반역하니, 그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천리 되는 천애의 땅에 멀리 와서 종군하여 어머님 장례도 못 모시고 곡하고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앙갚음을 받는 것인가.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에도 같은 것이 없을 터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P364

원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P366

주인집이 너무 낮고 추하여 파리가 벌떼처럼 들끓어 사람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관아의 모정으로 옮겨 왔더니 남풍이 바로 불어 들어왔다. 현감과 함께 종일 이야기하다가 거기서 그대로 잤다.

 

P367

19일 맑음. 체찰사가 구례현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성안에 머물고 있기가 미안해서 동문 밖 장세호의 집으로 옮겨 나갔다. 명협정에 앉았는데, 구례 현감(이원춘)이 와서 만났다. 저녁에 체찰사가 현으로 들어왔다. 신시에 소나기가 크게 쏟아지더니 유시에 갰다.

 

P368

유해가 또 말하기를, "왕옥(의금부 감옥)에 갇힌 이덕룡을 고소한 사람이 옥에 갇혀 세 차례나 형장을 맞고 다 죽어 간다."고 하니 매우 놀랄 일이다. 또 과천의 좌수 안홍제 등이 이상공에게 말과 스무 살 난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나 돌아갔다고 한다. 안은 본디 죽을죄도 아닌데 여러 번 형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아직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이것이 이른바 "백전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게 한다." 는 것이리라.

 

P371

늦게 삼가에 이르니, 삼가 현감은 이미 산성으로 가고 없어서 빈 관사에서 잤다. 고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갖고 와서 먹으라고 하나 먹지 말라고 종들에게 타일렀다. ... 아침에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는 말을 들었기에 종들을 매질하고 밥한 쌀을 돌려주었다.

 

P372

함께 점심을 먹고 거처할 방을 도배했다. 저녁에 이승서가 보러 와서 파수병과 복명이 도피한 일을 말했다. 이날 아침에 구례 사람과 하동 현감이 보내 준 종과 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P375

내가 원수에게 가 보니, 우병사의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포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고 하므로 복병군을 보내어 길을 막고 우리 군대의 위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P377

또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다고 하니, 안골포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습니까?" 하였고, 또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이 전진하려 하지 않고, 우선 안골포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 하지만,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이와 다른 생각을 많이 갖고 있고, 원균은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의 합의하여 꾀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합니다."라고 하였다.

 

P378

내가 들어가 보니 원수는 원균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데, “통제사(원균)의 일은 흉악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소. 그는 조정에 청하여 안골과 가덕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떤 마음이겠소? 일이 끌어 미루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에 불과한 것이오.

 

P387

비 올 징후가 많아서 돌아와 집에 도착하니 비가 마구 쏟아졌다. 이경에 맑고 개고 달빛이 조금씩 밝아져 낮보다 갑절 밝으니 회포를 어지 말로 다 하랴.

 

P389

18일 맑음. 새벽에 이덕필,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얼마 뒤 원수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미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쩔 수 없다." 고 하면서 사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다."고 말했더니, 원수가 기뻐하기를 마지 않았다.

 

P390

우후 이의득이 보러 왔기에 패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을 입으로는 다 말할 수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P394

9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낙안에 이르니, 오 리의 길에까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인사하였다.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난 까닭을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병사(이복남)가 적이 쳐들어온다고 떠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니, 이런 까닭에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갔다."고 하였다. 관사에 이르니 적막하여 인기척도 없었다.

 

P395

우후 이몽구는 오긴 했으나 만나지 않았다. 하동 현감을 통해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은 병사(이복남)스스로 외진을 파괴시켰다는 소식을 들으니 통탄할 일이다.

 

P397

25일 맑음. 그대로 어란포에 머물렀다. 아침 식사를 할 때 당포의 포작이 방목하던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헛소문을 퍼뜨리되 "왜적이 왔다. 왜적이 왔다."고 하였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게 하니, 군중의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P397

28일 맑음.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 않게 들어와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피하려고 하니, 경상 수사가 피하여 후퇴하려고 하였다. 나는 꼼짝 않고 있다가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지휘하며 뒤쫓게 하니, 적선들이 물러갔다. 갈두까지 뒤쫓아 갔다가 돌아왔다. 저녁에는 장도로 옮겨 머물렀다.

 

P399

신시에 적선 열세 척이 곧장 진치고 있는 곳으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서 공격하여 나아가니, 적선들이 배를 돌려 달아났다. 먼바다까지 쫓아갔지만, 바람과 물결에 모두 거슬려 배를 몰 수 없으므로 벽파진으로 되돌아왔다. 아마도 밤의 습격이 있을 것 같았다. 이경에 적선이 포를 쏘면서 밤에 습격해 오자,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먹은 것 같으므로 다시 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연거푸 포를 쏘니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삼경에 물러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P400

이른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려 이백여척의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잇는 곳으로 향해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상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 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배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라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하고 말했다.

 

P401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억지 부리다 군법에 죽고 싶으냐?”고 하였고, 다시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가면 살 것 같으냐?”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과 교전하는 사이를 곧장 들어가니, 적장의 배와 다른 두척의 적선이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고, 안위의 격군 일고여덟 명은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니 거의 구할 수 없었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가 있는 데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 대고 내가 탄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어 적선 두 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매우 천행한 일이었다.

 

P404

, 슬프도다. 그때가 어느 때인데, ()은 떠나고자 했는가, 떠나면 또 어디로 가려 했던가. 인신이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오, 다른 길은 없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종사의 위태함은 마치 머리털 하나에 천 균을 매단 것과 같아서, 한창 인신이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에 떠난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싹트게 해서는 안될 것이거늘, 하물며 이를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P410

늦게 거제 현령, 발포 만호가 들어와서 명령을 들었다. 그 편에 배설의 겁내하던 꼴을 들으니 더해지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가서 국가의 일을 크게 그르쳤건만, 조정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P414

신시에 과연 적선 열세 척이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여러 배들이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추격하자, 적선은 뱃머리를 돌려 피해 달아났다. 먼바다 밖까지 쫓아갔지만 바람과 물결이 모두 거스르고 복병선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끝까지 쫓아가지 않았다. 벽파정으로 돌아와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오늘밤에는 반드시 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니 모든 장수들은 미리 알아서 대비할 것이요,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할 것이다."라 하고 재삼 거듭 당부하고 헤어졌다. 밤 이경에 왜적이 과연 와서 야습하여 탄환을 많이 쏘았다.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앞장서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온통 흔들렸다. 적의 무리들도 범할 수 없음을 알고 네 번이나 나왔다가 물러났다. 하면서 화포만 쏘다가 삼경 말에 아주 물러갔다.

 

P415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불편해하였다.

 

P416

벽파정 귀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고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

 

P418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라고 말하였다.

 

P418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당 마다시입니다.”라고고 말했다. 내가 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었다.

 

P423

"해남에 들어와 웅거한 적들이 10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빠짐없이 다 도망갔는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과  신용 등이 적진으로 들어가 왜놈을 꾀어 내어 그 지방의 사족들을 많이 죽였다."고 하였다. 통분함을 참지 못했다.

 

P424

사경에 꿈을 꾸니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에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는데,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은 형상이 보이는 듯하다가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P424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보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 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P425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이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P426

어두울 무렵 코피가 한 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느라 눈물이 났다. 어찌 말로 다하리요. 이제는 영령이 되었으니 끝내 불효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어찌 알랴. 비통한 마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함을 억누를 수가 없다.

 

P435

도원수의 군관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 선전관을 통해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이 아직도 권도를 쫓지 않아서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고, 옛사람의 말에도 ‘전진( 전쟁 진터에서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전진에서의 용감함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력이 노곤한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법에도 경(, 원칙)과 권(, 방편)이 있으니, 꼭 고정된 법만을 고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깊이 깨달아서 소찬 먹기를 그만두고 권도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P446

나의 임무는 곧 각 장병들이 배를 통솔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으니, 각 관병들은 격분하여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곧장 왜선에 돌진하여 불태우고 여남은 척을 끌어냈는데, 왜적은 산성 위에서 총포가 이미 다하여 관병이 승리하였다.

 

P448 도독이 말하기를, 순천의 왜교의 적들이 10일 사이에 철수하여 도망한다는 기별이 육지로부터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먹자.고 하였다.

 

P449

17일 어제 복병장 발포 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간 배 한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3. 내가 저자라면

 

7년간의 고통의 시간을 일기에 고스란히 담은 난중일기는 나라의 위난에서 신하로서 무장으로서 행할 바에 대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고 이를 글로 옮겨 놓은 것이 실로 대단합니다. 이순신에 대한 소설과 글들 그리고 영화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 들이 만들어졌지만 직접 쓴 난중일기는 또 다른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임진왜란 당시의 일기입니다. 이 일기는 후대인들이 당대의 상황을 거울 삼아 잘못된 점은 고치고 좋은 점은 본받기를 바라며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 내용은 전쟁을 임하는 장수로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령에 따라 죄인을 벌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군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일화를 담고 있어 전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줍니다. 난중일기를 읽으면 나라의 위난이라는 두렵고 어려운 상황 앞에 굳건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임하는 위대한 장수의 마음과 생활 그리고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의 글은 매우 간결합니다. 날씨를 빠뜨리지 않았고, 들고 난 사람들에 기록하였고, 벌한 것에 대해 소상히 적었으며, 들고 난 물건들에 대해서도 잘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전쟁에 임하는 마음을 간결하게 표현하며 굳은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호한 자신의 모습과 주저함이 없는 행동이 그의 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늘 가족의 안위를 살피며 어머니와 처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과 농사와 부하들의 안위를 살피는 마음이 아버지와 같습니다.

 

본 난중일기는 전시에 간결하게 중요 사항과 심정만을 적어내려 갔으므로 내용이 드라마틱하거나 스토리가 길게 전개되어 마음을 동화하는 면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렇게 반복되는 그의 일기를 통해 그 시기에 그의 마음 자세와 행동들이 하루 하루 일기에 베어 있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상은 현재도 마찬가지로 늘 반복의 연속입니다. 정황이나 전쟁의 상황 등이 소상이 언급되지 않아 전시 상황에서 오는 긴박감을 일기에서는 읽기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가 그래서 필요한 것인가 보다. 칼의 노래가 풀어놓은 그 당시의 상황과 전쟁 상황 속에서 이순신을 관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고 그를 읽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지금도 매일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쩐의 전쟁이고 전세계를 무대로 한 거대한 시장에서의 전쟁이다 살아남는 것이 승자가 되어버린 쩐의 전쟁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은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난중일기는 몇 가지 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준비하는 하루는 곳 준비된 하루가 됩니다. 임하여 물러섬이 없으며 그 위세가 대단하여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한다.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모두를 위한 길을 찾는 다면 그 길은 나만의 길이 아닌 모두의 길이고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앞세우면 결국 패망하게 됩니다. 우리 개인 개인은 결국 죽을 목숨으로 온갖 욕심을 채워도 결국은 사라지게 되는 존재지만 우리 모두는 끝없는 이어짐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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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난중일기 두번읽기 희동이 2014.09.29 1630
730 카를 융-기억 꿈 사상 에움길~ 2014.09.29 3027
729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2번읽기 어니언 2014.09.29 2200
728 미식견문록 종종 2014.09.29 1792
727 카를 융 (기억 꿈 사상)_두번읽기_찰나리뷰#23 file 찰나 2014.09.29 2233
726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두번읽기 앨리스 2014.09.29 1840
725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_찰나리뷰#24 file 찰나 2014.10.05 1874
724 #24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_정수일 정수일 2014.10.05 1572
723 How to Live,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_구달리뷰#24 구름에달가듯이 2014.10.05 1567
722 #24.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 녕이~ 2014.10.05 1726
721 How to Live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 앨리스 2014.10.06 2230
720 #24 How to live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 왕참치 2014.10.06 1684
719 How to live, 갈림길에서 길을 묻다 어니언 2014.10.06 1731
718 How to Live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 에움길~ 2014.10.06 1518
717 차별받은 식탁 종종 2014.10.06 1992
716 #24. 갈림길에서 삶을 묻다. [1] 희동이 2014.10.06 1565
715 3-11. 삶의 얽힘을 푸는 가족세우기 - 스바기토 R. 리버마이스터 콩두 2014.10.12 2648
714 3-12. 시, 사랑에 빠지다 - 현대문학 [1] 콩두 2014.10.13 2208
713 위대한나의발견_강점혁명_구달리뷰#25 [1] 구름에달가듯이 2014.10.13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