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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9일 09시 19분 등록

태일이

10기 김정은

 

 

큰 아이가 늦는다. 2시면 집에 올 시간인데 5시가 넘어도 안 온다. 학교 도서관에 새 책이 오는 날이면 열 살 큰 아이는 새 책 구경하느라 늦게 오기도 했다. 학교 도서관은 4시 반에 문을 닫는다. 늦어도 4 40분이면 집에 오는 아이인데 오늘은 늦는다. 초조해진다. 5시 반이 넘어 큰 아이가 들어왔다. 양 손 바닥이 새까맣게 된 채로.

 

- 왜 이렇게 늦었어? 도서관 문 닫을 시간 훨씬 지났잖아?

- 도서관에서 새 책 구경하다가, 오는 길에 할아버지 좀 도와드렸어.

 

아이는 손을 씻으러 갔고, 나는 궁금했다. 어느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와드렸다는 걸까.

 

- 엄마, 태일이 알아? 태일이?

- 태일이가 누구야? 처음 듣는 친구 이름인데?

- 엄마, 태일이 몰라? 전태일!

 

오늘 큰 아이가 늦은 이유는 순전히 태일이 때문이었다. 전태일! 그 이름을 어찌 모를 수가. 하지만 나는 큰 아이가 하는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일부러 모른 척했다. 아이 말로는 학교 도서관에 새 책으로 태일이 만화 5권 시리즈가 들어왔고, 그걸 다 읽고는 태일이가 궁금해져서 문고판 전태일 평전을 찾아서 반쯤 읽었는데 학교 도서관 문을 닫을 시간이었단다. 큰 아이는 할 수 없이 반쯤 읽은 전태일 평전을 두고 학교에서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평소에 항상 같은 자리에서 파지를 주워서 정리하시는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고, 그 할아버지를 도와 파지 정리를 하다가 늦었다는 것이었다.

 

- 엄마도 그 만화 한번 봐봐! 특히 태일이 마지막 ‘5권 불꽃이 되어가 제일 감동적이야.

- 어떤 점이 그렇게 감동적이었어?

 

큰 아이 말은 이랬다. 태일이는 바보회를 만든다. 바보회는 1968년 전태일이 만든 노동운동단체이다. 스무 살 태일이는 바보회를 통해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 평화시장 여공들의 이야기를 방송국에도 알리고, 노동청에도 알리고,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쓴다. 아무리 얘기해도 들어주는 이가 없자, 스물 두 살 태일이는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 자살하고 만다. 태일이의 죽음으로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큰 아이는 그것이 감동적이라고 했다.

 

- 엄마, 태일이가 안 그랬으면 사람들은 몰랐을 거야.

 

이 순간, 나는 목숨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12년부터 시작된 남편의 파업과 구조조정은 이제 마무리 되었다. 파업과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노동조합의 도움을 얼마나 받았던가? 회사에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태일이가 살았던 1960년대처럼, 노동자의 이야기는 아무리 얘기해도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발달이 미래의 사건들을 얼마나 미리 잘 말해주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한 계시는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이미 그 그림자를 던져온 것이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을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이와 같이, 적어도 우리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서 살아온 것이다. “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175)

 

태일이가 살았던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시대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우리 존재의 일부는 수세기에 걸쳐 살아온 것으로, 개인의 삶이 어떤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 정신의 대변이 될 수 있음을 느낀다. 나는 큰 아이에게 태일이 이후 노동조합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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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10:28:04 *.255.24.171

큰 딸 완전 멋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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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13:01:48 *.65.153.133

다른 재밌는 책 많았을텐데... 저 책을 읽을 줄은.... 저도 놀랐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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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30 23:58:45 *.222.10.47

저도 이야기만 들었던 전태일에 대한 책을 아이가 빨리 읽었네요. 오늘 퇴근하니 식탁에 아이가 책을 올려 놓고 독서록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투덜거립니다. 정약용 너무 어려워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아빠도 어려워~~ 요즘 아이들은 내가 클 때와 다른 것 같아요. 하지만 미안한 것은 자연을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어려서는 산과 들과 바닷가를 늘 돌아다니며 큰 나로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재산을 가진 것 같은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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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8:03:18 *.65.153.84

부모의 영향을 받는 듯 합니다. 2년 이상 끌었던 파업과 구조조정이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친 듯 해요.... 아이들은 그저 자연에서 뛰어놀아야 하는데 왠지 미안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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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06:08:07 *.7.54.204
'끈'이란 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종종의 국수가락에서도 나왔던 말인데, 우리와 아이들이 조상뿐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과도 하나의 끈으로 이어져 있음을 진정으로 느낀다면 우리 삶이 많이 달라지겠죠.

큰딸의 성숙함에 작은 엘리스를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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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18:04:47 *.65.153.84

일찍 성숙한 거 같아 엄마로서는 짠한 마음이 있답니다.... 엄마가 바로 서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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