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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9일 11시 42분 등록

1.제목: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책_카를융.jpg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출판사김영사

옮긴이조성기

 

2.저자 : 카를 구스파트 융(Carl Gustav Jung) (A. 아페 편집)

융.JPG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의 창시자이다.

 

1875년 스위스 북동부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스위스 바젤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1900년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흴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 밑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였다. 1904년경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제일 먼저 인식하고 연상실험을 창시하여, S.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을 입증하고, ‘콤플렉스라 이름붙였다. 이어 1906년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9084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정신분석학회 제창자가 되었으며, 이 회의에서 발행키로 결정한 기관지 정신분석학 ·정신병리학 연구연보의 편자(編者)로 뽑혔다. 1907년 이후에는 프로이트와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며 한 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고,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여겼지만 성격과 견해 차이로 인하여 5년만에 결별했다.

 

그는 리비도라고 하는 개념을 성적(性的)이 아닌 일반적인 에너지라고 하였기 때문에 프로이트와 의견이 대립되어, 1914년에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무의식세계를 탐구하여 분석심리학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경험한 강렬한 꿈과 환상 등 자신의 신비한 경험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연구하면서 신화와 역사, 연금술에 심리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자기자신의 무의식과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분석작업을 통해서 얻은 방대한 경험자료를 토대로, 원시종족의 심성과 여러 문화권의 신화, 민담,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 종교현상들을 비교 고찰한 결과, 인간심성에는 자아의식과 개인적 특성을 가진 무의식 너머에 의식의 뿌리이며 정신활동의 원천이고 인류 보편의 원초적 행동 유형인 많은 원형(原型)들로 이루어진 집단적 무의식의 층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모든 정신 활동의 원천으로 그 속에는 마음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일된 마음을 실현하도록 촉진시키는 자가 조정의 중심핵이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의 일방성을 자율적으로 보상하고 개체로 하여금 통일된 전체를 실현케 하는 핵심적인 능력을 갖춘 원형 즉, 자기원형이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의 학설은 병리적 현상의 이해와 치료뿐 아니라 이른 바 건강한 사람의 마음의 뿌리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고 모든 인간의 자기통찰을 돕는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 시대적 문화, 사회적 현상의 심리적 배경을 이해하는 기초로서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신학, 신화, 민담학, 민족학, 종교심리학, 에술, 문학은 물론 물리, 수학등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왔다.

 

만년에 융은 역사를 꿰뚫어보는 시사논평으로도 명성을 얻었으며, 196185세를 일기로 퀴스나흐트에서 죽었다. 융은 심혼(心魂)의 의사(Seelenarzt)로서 자기실현의 가설을 몸소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20세기 유럽이 낳은 정신 과학자 중에서 동양사상(東洋思想)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함으로써 동서(東西)에 다리를 놓았으며, 새 천년(千年)에 인류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한 인물이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정신분석의 이론, 심리학과 종교, 영혼을 찾는 현대인, 심리학적 유형, 미발견의 자아, 심리학과 연금술, 인간과 상징등이 있다.

 

- 옮긴이 :조성기

趙星基

조성기는라하트 하헤렙』『야훼의 밤을 필두로 한 종교 소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랑』 『우리 시대의 소설가같은 세태 소설 등으로 이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이지만 이것과 별개로 고전 연구가이기도 하다.

 

1951330일 경남 고성에서 출생하여 부산중, 경기고를 거쳐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시 카를 융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논문삼위일체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로 학위를 받았고,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을 응용한 마음의 비밀강연회를 학교,기업, 각종 단체에서 수십차례 개최했다. 대학 재학 중이 1971년 소설 만화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으며, 1985라하트하헤렙으로 제9'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1991년 중편 우리 시대의 소설가로 제15'이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그는 동양 고전을 번역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계속 해왔으며,굴원의 노래,전국시대,맹자가 살아 있다면등은 그 성과물이다. 성경도 그에게는 중요한 서양 고전의 하나이다. 이런 이유로 한문을 계속 배우고 접해왔듯, 성경을 제대로 독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고전 연구가로서의 그가 지금까지 동서양 고전을 통해 선대의 지혜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읽기 쉽도록 현대화했다면, 소설가로서의 그는 현세대의 문제점들을 부각시키는 작업들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장편소설로 야훼의 밤,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 가시둥지, 욕망의 오감도, 베데스다, 바바의 나라, 우리시대의 사랑, 굴원의 노래, 너에게 닿고 싶다, 천년 동안의 고독,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 전국시대, 소설집 왕과 개, 통도사 가는 길, 실직자 욥의 묵시록,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 안티고네의 밤,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 소설시 내 영혼의 백야, 저서 및 번역서로 한경직 평전, 유일한 평전, 예수의 일기(노먼 메일러), 카를 융 자서전(아니엘라 야페), 삼국지(모종강) 등이 있다.

 

언어와 인간, 종교, 자유 등 정신의 영역을 다루면서도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현실과 소설의 거리를 좁혀 나가는 표현력, 인간 본성을 비판하고 풍자하면서도 그에 대한 희망과 연민의 시선을 놓지 않는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세속에 대한 욕망과 초월,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 본연의 의미를 주로 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관념 소설을 주로 집필하였으나, 그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갈등 양상과 역사 돌아보기 등 다채로운 영역을 부지런히 오가는 우리 시대의 소설가이다.

 

 

 

- 참조

http://www.yes24.com/24/goods/2804982?scode=029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옮긴이 서문 - 자서전 문학의 백미 >>

 

 

-8 이 책은 융의 제자요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이 책의 특징은 야페가 쓴 서문의 한구절로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인간의 의식적인 경험보다 무의식적인 경험이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는 얼마나 무의식을 무시하며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9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규정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자기 실현(Selfstverwriklichung)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마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며 자기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멀게 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소리를 듣게 되고 나와 가까워질 수 있어서 좋다

 

<< 프롤로그 -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

 

 

-12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무한한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어떤 동물이나 식물또는 돌에도 대비해 볼 수 없다.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신이 제어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지배하는 일종의 심적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터이니, 기껏해봤자 그런 것을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인간은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지점도 단지 막연하게 제시될 뿐이다.

 

인간을 일종의 심적과정이라고 정의하다니. 그의 정의가 재미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생애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인간은 마지막까지도 변화하는 동물인 것 같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하나의 존재일 뿐이지 우위를 따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늘 인간이 자연의 최고의 자리에 위치하지만, 결코 인간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호관계의 존재일 뿐이다.

 

-13 언제가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식물에게 뿌리는 정말 깊게 뻗어 있는데 우리는 땅 속에 숨겨진 뿌리는 못보고 땅위에 있는 것으로 그동안 평가해왔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가 얼마나 큰것인가!

 

우리에게 있는 땅속 뿌리가 얼마가 깊은 존재인지 새삼 소중히 여겨야 하리라

 

 

<< 일생을 사로잡은 꿈 - 유년시절 >>

 

 

 

검은옷을 입은 남자

 

-23 나의 기억은 두세살 적부터 기억된다.

 

어떻게 이렇게 어린나이부터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며 찾아가기 시작했는지 놀랍다.

 

-27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이렇게 어릴적 기억이 성인이 되어서 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무시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중요성을 모른채 그냥 살아온 것이다.

 

 

 

<<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 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66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차츰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다.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넋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의 기억이 스스로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에 대한 바른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67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

 

그럴 무렵 나는 성실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덕을 보려고 하는 외관상의 성실성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성실성이었다.

 

나 자신을 위한 성실성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되어야 하리라. 그래야 자신의 길을 꾸준히 찾아갈 수 있는것이리라. 성실성의 가치를 시간이 갈수록 느끼게 된다.

 

-67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보여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돌 하나, 식물 하나, 그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형용할 수 없는 듯이 여겨졌다. 그 무렵 나는 자연으로 빠져들면서, 말하자면 자연의 본질 속으로 숨어들면서 모든 인간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자연의 본질이 곧 자연의 신비이기에 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너는 누구냐?

 

-73 이 세상은 나에게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긴 했으나 막연한 위험과 무의미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나는 항상 무엇이 내게 닥치는지, 그리고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알고 싶어했다. 아마도 이것은 수개월동안 나를 버렸던 어머니와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인간은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기에 동물적 기본 욕구가 중요하다. 그래서 어머니와의 기본 신뢰 관계가 형성이 잘 되어야 그 다음 단계도 잘 이루어지리라.

 

-79 내가 안개속에서 빠져나와 를 의식하게 된 대략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통일성과 위대함, 그리고 초인성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를 결정적으로 시험삼아 써보려고 하는 존재가 하느님이며, 모든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는 결국 굴복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채 그런일이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내 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명확히 이해하고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매한 것은 늘 애매하게 남아 있기에 애매함을 늘 없애도록 노력해야 하리라.

 

-84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을 가려는 이의 외로움이 담겨있다.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문제들은 지금껏 해결되지 않은 것이 남아있는 미지의 세계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나, 그리고 나를 둘러싼 현실을 명확히 이해해야 하리라.

 

-85 그런 때는 저 돌위에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복된 평온함이 찾아왔다. 돌이 온갖 의혹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천년동안 살아왔다.‘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돌은 수천년을 살아오는데 오히려 인간의 삶이 잠시였다. 무생물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인간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 무생물이 존재할까? 그것조차 필요한 것이기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과 사원

 

 

-90 그러한 세계 옆에는 또 다른 영역이 있었다. 그 영역은 사원과 같아서 그 속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변화되었다. 그는 우주 전체의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 자신을 잊을 정도로 다만 놀라고 경탄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그 다른 인물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느님을 숨어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개인적인 비밀로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인간을 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그것은 마치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 함께 똑같이 창조의 과정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91 무엇보다 종료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2의 인격, 내적 인간에 대해 말해왔다. 2의 인격은 내 생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내부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길을 열어주려고 노력했다. 2의 인격은 전형적인 형상인데도 대개 의식이 가진 이해력으로는 사람이 제2의 인격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우리는 제2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가능성에 대해서 너무 무시하고, 그동안 너무 표면적인것에 대해서만 얘기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새롭게 정의를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91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92 하느님의 의지는 매일매일 탐색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그 정도까지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야만 되는 급박한 이유가 생기면 지체하지 않고 그렇게 할것이 분명했다. 1의 인격이 내게 너무 자주 많은 것을 요구했다.

 

 

두 인격의 어머니

 

 

-95 내 생애의 결정적인 체험이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며 내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가 나에게 제기 되었다. 그런데 누가 그 문제를 제기했는가?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 나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그 해답을 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나는 단독자이며 하느님만이 이와 같은 무서운 일을 나에게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부터 나는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내 생애에서 그것을 실현해야만 될 것처럼 느껴졌다.

나로서는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어떤 내적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증명되었다. 나는 확신을 붙든 적이 없었으나 확신이 나를 붙들어주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신념에 종종 대항하게 했다. 내가

 

그래, 이제 내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밑바닥까지 들추어서 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찾아 가야 하리라.

 

-100 그 시간 어머니는 이상한 동물이기도 한 예언자처럼, 곰의 동굴에 사는 여사제처럼 보였다. 고태적이고 잔인했다. 진리와 자연과도 같이 잔인했다. 그 때 어머니는 내가 자연의 마음이라고 불어왔던 그것의 화신의 화신이었다.

 

진리와 자연은 너무나 과학적이고 예외성이 없이 철저하기 때문에 때로는 아주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자연의 원리이리라.

 

-101 나 또한 내 안에서 이러한 고태적인 성질의 어떤 요소를 인식한다. 그것은 사람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항상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닌 재능을 부여한다.

 

진정한 인식은 본능에서 비롯되거나 타인과의 신비로운 교제에 기인한다. 그것은 비개인적인 관조행위를 통해 보는 배후의 눈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진정한 인식은 단순히 머리로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닌 본능이 인지 해야 하는 것이다.

 

-109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악의 기원

 

-112 나는 비더만의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장에서, 하느님은 인간 자아와 유사하게 상상될 수 있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또한 세계를 포괄하면서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하는 고유의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9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그토록 숭고한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어느 일정한 수준까지는 이미 발달되어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정신적 능력이 이렇게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127 나의 비탄과 분노는 위협적으로 말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때 내가 이미 이전에 나 자신 안에서 여러 번 관찰했던 어떤 일이 일어났다. 마치 시끄러운 공간에서 방음문을 닫아버린 것과도 같이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은 냉정한 호기심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너는 흥분하고 있구나. 물론 그 선생은 너의 천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다. 다시 말해 너와 똑같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생도 너와 마찬가지로 의심 많은 사람인 것이다. 너는 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믿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며 소박하고 한눈에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면 흥분하기 마련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주변에 흔들리고 흥분하기 마련이기에 자신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리라.

 

-133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사실은 체험이 문제인 것이다!’

 

머리와 마음의 차이. 체험을 해서 마음이 받아들이면 그것은 오래 기억되고 간직되지만 머릿속에 잠시 들어왔다 나가는 것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136 행복과 불행은 용돈의 액수보다 더 깊은 원인에 의해 좌우되었다.

 

같은 환경이어도 원인에 의해서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137 실제로 모든 화급한 문제들은 일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릴 적 비밀이 그러했듯이, 신의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은 나에게는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화급한 문제들은 일상에 속하는 것이 아닌 신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뭔가를 하고 있기에 뭔가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내면의 세계입장에서는 하지 않고 표면적인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144 2의 인격 안에서 나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을 초월해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천개의 눈을 가진 우주에서 하나의 눈으로 여겨졌으나 지상에서는 조약돌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제 1의 인격이 반항하여 자기가 행동하기도 하고 행동을 야기하려고도 했으나, 당분간은 해결할 수 없는 분열에 처해 있었다. 보아하니 나는 기다리면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158 나는 실제 사물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면 그것에 관해 숙고할 만한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여겼다. 누구나 공상을 할 수 는 있으나 실제로 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실제로 알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한다. 상상만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 아름다운 시간 - 대학시절 >>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171 나는 제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들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의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쉼 없이 나를 바짝 따라 붙었다. 그것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돌진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무서울 정도로 바로 여기에 실재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린다.

그 당시 나의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나는 나의 길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외부로, 제한된 세계 속으로, 삼차원의 어둠속으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낙원은 아담에게 유령이 되어버렸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돌밭을 경작해야만 하는 그곳에 빛이 있었다.

어떻게 현재의 상황을 이렇게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강력한 흡입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탐욕스럽게 끌어들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게걸스럽게 먹어야 했고, 소비해야 했다. 그래서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했던 것이다.

 

 

-171 나는 자문해보았다. “어디서 이런 꿈이 오는것인가?

진정한 문제는 왜 이러한 과정이 일어났으며 왜 그것이 의식을 뚫고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의식적으로는 그와 같은 발전을 촉진 시키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다른 방면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배후에서 비밀리에 작용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어떤 지적 존재, 아무튼 나보다는 지능이 높은 무언가가 말이다. 의식의 관점에서는 내적인 빛의 영역이 거대한 그림자라고 하는 천재적인 생각은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173 인간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개성적인 기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며,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 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 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이 가족정신이 전반적으로 동의를 표시할 경우 그것은 일종의 세계 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신이 많은 것과 대립하여 스스로 어긋나버리면 세계 불확실감이 생겨난다.

 

-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게기에 걸쳐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더 크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하고 있을 뿐인데, 자기 생각에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진리는 내적 인간에 있을 뿐이다.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210 정신의학은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실제 사건이 되는 결정적인 분야인 셈이다.

 

자연과 정신의 충돌, 어쩌면 본능과 정신의 충돌이리라.

 

-211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나의 확신을 흩뜨려 놓을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강물이 합류하여 세차게 흘러가면서 먼 목적지로 나를 가차 없이 실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통합된 이중성이라는 고양된 감정에 힘입어 나는 마법의 파도를 탄 것처럼 시험을 치러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217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인간이 하나의 사건이라니? 어쩌면 이런 사건의 누적이 현재의 나를 말하는 것이리라. 스스로는 행동하지만 그것에 대한 판결은 남이 하게 되는 것이다.

 

 

<<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

 

 

꿈의 분석

 

 

-248 나는 환자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개별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문제의 해결은 항상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원칙은 다만 최소한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심리적인 진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로 뒤집을 수도 있을 때에만 타당한 것이 된다.

 

적용은 늘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집단적으로 일방적으로 단체로 했는데 개별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249 물론 의사는 소위 방법에 관하여 알고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규격화된 일정한 방식에 매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론적인 전제는 다만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은 그 전제가 타당할지 모르나 아마도 내일은 다른 전제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나의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정신세계는 워낙 다양하기에 개인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분석이 필요하리라.

 

-249 결정적인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또 다른 한 인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석은 일종의 대화이며 여기에 당사자 두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분석가와 환자는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된다. 의사도 무언가 할 말이 있고 환자도 마찬가지다.

 

-250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 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예전과는 달리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이 자연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즉 각 개인과 다수의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정신의 변이는 위험하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제대로 기능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정말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냥 다 지나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 진정한 위협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입고 있는가?

 

-250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 조건은 이른바 교육 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 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를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교육분석에서 의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환자도 이를 배우지 못한다. 의사가 배워 알지 못한 마음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환자 역시 마음의 한 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분석에서 의사가 개념체계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의사는 피분석가로서 분석이 바로 자기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교육 분석은 실제적인 삶의 한부분이지 무조건적인 암기하여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 치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남을 더 이해하고 한발 나갈 수 있는것임에. 이래서 카를 융이 훌륭한 정신과 의사인 것이리라.

 

-251 본래의 분석에서는 환자와 의사 모두 그 전인격이 대상이 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고는 치료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치료에서 중요한 고비를 맞았을 때, 결정적인 것은 의사가 자기 자신을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보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자기 권위로 씌워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인생의 심각한 위기에서는, 다시말해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 중대한 순간에는, 암시의 잔꾀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의사는 그 전 존재가 도전을 받게 된다.

치료자는 자기 자신이 환자와의 대결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수시로 해명해야 한다.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 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식이기에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무의식에 대해서 더 깊이 관찰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리라.

 

-253 나는 의사로서 환자가 나에게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 항상 자문해야 한다. 환자가 나에게 무엇을 예시하는가? 환자가 나에게 아무것도 예시하지 않았다면 나는 공격목표가 없는 셈이다. 의사는 그 자신이 고통을 당할 경우에만 효과를 얻는 법이다.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본인이 느껴보고 경험해야 정확히 전달해줄 수 있는 것이리라.

 

상처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입은 사람이 더 이해하기 쉽다고 이야기해야 하리라. 의사가 모든 상처를 다 겪을수는 없기 때문이다.

-254 그는 분석자가 되기를 원한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분석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큰일입니다! 환자를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당신 자신을 분석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재료가 되고, 나를 요리해서 새로운 음식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요리법만 머릿속에 알고 있는 요리사가 될 것이다.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260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261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 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266 나는 그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 다시 말해 그 공포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환자가 자기 자신의 길을 감으로써 스스로 책임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는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저항에 지나지 않는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진부한 가정에 동의할 용의는 없다.

 

뛰어넘어야 하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것 그 자신의 삶이기에... 이부분이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일방적으로 하라고만 했으니 그 얘기를 듣는 사람은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하리라.

 

-270 원형의 신성한 힘의 작용을 자신의 체험으로 인식하지 못한 의사는 치료과정에서 그것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원형의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피해가기 힘들 것이다. 그는 원형을 과대평가한다고 하고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지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있을 뿐 경험적인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각한 탈선이 시작되는데, 그 첫 번째 탈선이 지적인 정복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의사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표면상 확실하고 인위적이나 이차원적인 개념에 불과한 세계를 위하여 원형의 영향과 그 실제적인 체험을 외면하려는는 숨은 목적에 이바지 않다. 그 세계는 삶의 진실을 소위 명료한 개념들로 은폐하려고 한다. 개념적인 것으로 옮기는 것은 체험으루부터 실체를 빼앗고 그 대신 단지 이름들만 붙이는 셈이 된다. 이제는 진실의 자리에 이름들만 들어서게 된다. 개념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라는 안락함이다. 체험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영혼은 개념들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사실들 가운데 깃들어 있다. 말만 그럴듯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일종의 구획 심리학을 계발한다. 감정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지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나또한 체험으로부터 실체를 빼앗고 단지 이름만 붙이고 만족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다 된 것으로 착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느끼고 체험을 해야 하리라.

 

-271 나의 피분석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리고 그들과 나의 환자들이 나에게 끊임없는 이미지의 연속으로 펼쳐보였던 정신현상과의 대면에서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 단지 어떤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오류와 실패로부터 배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는 주로 여성 피분석자들을 상대했다. 그들은 대부분 성실성과 깊은 이해심, 지적인 능력으로 그 작업에 임했다.

 

-272 나는 환자들과 피분석자들은 나를 인간적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여, 그것에 관한 본질적인 것들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심리적 수준이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로서는 유명인사들과의 단편적인 대화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성과가 있었던 대화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였다.

 

 

<< 프로이트와의 만남 >>

 

 

이론적인 불화

 

-277 나는 제2의 인격의 소리를 들었다. “네가 그와 같이 프로이트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한다면, 그건 일종의 사기다. 사람은 인생을 거짓 위에 세울 수 없다.”

 

어떤 욕심을 가지면 사실 그렇게 할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삶에 대한 자세가 잘 들어나 보인다. 생각보다 세상은 이렇게 솔직 담백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287 프로이트가 성욕이 신성한 힘이며 그것은 일종의 신이면서 악마라는 심리학적인 진리를 좀 더 고려했다면 생물학 개념의 한계에 갇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니체도 인간존재의 바탕을 좀 더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면, 아마도 감정의 과잉으로 세계의 가장자리 밖으로 나가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성한 힘의 체험으로 마음이 격렬히 동요하게 되면 사람들이 매달려 있는 실이 끊어질 위험이 항상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은 절대적인 긍정으로, 또 다른 사람은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부정으로 빠지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으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거나 인정할 수 있는데, 그것의 한계와 문제점 전체를 다 파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다. 그걸 다 알았다면 거기서 멈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288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나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이럴진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이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도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해나갈 수 있는 중도의 미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덧없을 정도의 작은 의식을 스스로 인식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294 나는 파당의 지도자가 되어 실제로 짐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결코 달갑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일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나의 지적 독립성을 희생할 수도 없었다. 그러한 영광은 나의 진정한 목적에서 벗어나게 할 뿐 나에게는 전혀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진리탐구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쫓고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그것을 명확히 알고 나면 스스로 나아갈 길을 알게 된다.

 

-301 프로이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무의식과 무의식의 직접적인 표현인 꿈을 자연의 과정으로 여겼다. 이 과정에는 무엇보다 요술이나 속임수, 그리고 어떤 자의적인 것도 끼어들 수 없다. 나는 의식의 잔꾀가 무의식의 자연과정에도 확대된다는 가정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반대로 나날의 경험을 통해 오히려 무의식이 의식의 경향에 대해 얼마가 강하게 저항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무의식이 의식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잘 모르고 있었고, 반대로 의식이 무의식을 조절한다고 생각했다.

 

-303 프로이트의 인격에 감명을 받아, 나는 될 수 있는 한 나 자신의 판단은 한쪽으로 밀어놓고 비판을 억제했다. 그것은 프로이트와 협조하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었다. 나는 스스로 타이르곤 했다. “프로이트는 너보다 훨씬 현명하고 체험도 많은 분이다. 현재로서는 다만 그분의 말을 듣고 배우기만 해야한다.”

 

일단 스승이 하는 것을 배우고, 그것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비판을 스스로 해나가면서 나중에는 스승을 뛰어 넘어가는 단계까지 가는 것이다. 이런 것이 진정으로 스승을 뛰어 넘는 것이리라.

 

-307 그들은 이전부터 억압해오던 것에 머물기를 너무 좋아하기만한다

사람들은 억압받는 것에 싫다고 하지만 벗어나려고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 것처럼 머물기를 머문다. 그래야 안전하다 생각하기에... 하지만 이제는 그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리라.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용기리라

 

-308 분석이 그들에게 뭔가 보다 나은 다른 것을 깨우쳐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론 그 자체로 그들을 묶어놓고 단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결정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며 유치한 것들을 버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정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의지하여 설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어떤 삶의 방식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교환되지 않는 한 버릴 수 없다. 완전히 이성적인 삶의 영위란 경험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대개 불가능하다. 특히 신경증 환자처럼 본성이 그와 같이 비이성적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론 그 자체로 묶어놓고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보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다보니 이성적인 방식만 남아있고 실제적인 해결책은 없었던 것이다.

 

-308 이제 프로이트 개인의 심리가 왜 나의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었는지 분명해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이성적인 해결의 실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것은 나에게 인생문제였으므로,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 해답이 눈앞에 드러났다. 프로이트 자신이 신경증에 걸려 있는 것이다.

 

-308 나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신경증을 치료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프로이트나 그의 제자들이 정신분석 이론과 실천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먼저 자신의 치료가 이뤄 져야 하리라. 그런 후에 다른 사람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맞는 얘기다.

 

-310 그러나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소위 친구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미리 곰곰이 따져본 점이었다.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통찰로 나는 다시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나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말이다.

 

남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홀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리라.

 

-310 돌이켜보면 프로이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두 가지 문제를 논리적으로 추구해들어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두가지 문제는 고태적 잔재()’이었다.

 

그러나 나의 주요한 관심은 성의 개인적인 의미와 생물학적인 기능을 넘어서서 그것의 정신적인 측면과 신성체험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설명하는데 있었다.

 

-311 성은 지하세계의 영()의 표현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그 영은 신의 또 다른 얼굴’, 즉 신의 이미지의 어두운 면이다. 지하세계의 영의 문제는 연금술의 사고 세계를 탐구한 이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원래 이것에 대한 나의 관심은 프로이트와의 초기 대화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그때 나는 어리둥절한 가운데 그가 성의 현상에 대해 얼마나 깊이 감동하는가를 느꼈다.

프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신경증 환자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들의 개인적인 심리를 파고들어간 데 있을 것이다. 그는 환자의 사례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개별적인 환자의 심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하자면 환자의 눈으로 관찰했으며, 그 결과 병에 대하여 그때까지 가능했던 것보다 한층 더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 이 점에서 그는 불편성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많은 선입견을 극복해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처럼 그는 거짓 신들을 타파하고, 당시 마음의 부패를 무자비하게 폭로함으로써 수많은 불성실과 위선의 가면을 벗겨버렸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인기가 없어도 개의치 않았다.

 

불편성과 용기를 지니고, 많은 선입견을 극복해나가는 자세가 선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매우 필요한 자세다.

 

-311 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꿈을 무의식과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 가치를 과거와 망각으로부터 되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무의식적 정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것은 그때까지는 단지 철학적인 요구에 의해서만 존재했는데, 이를 테면 구스타프 카루스와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의 철학에서 특히 그러했다.

철학적으로 성찰해보면, 오늘날의 문화의식은 무의식개념과 거기에 따르는 결과들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세기가 넘게 무의식과 직면해왔으면서도 말이다. 우리 정신의 존재가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통찰은 여전히 장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무의식이 이렇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데 그동안 그 가치를 너무 무시하면서 살아왔다.

 

 

<<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315 나는 이론적인 관점을 모두 접어두고 환자가 꿈의 이미지를 스스로 이해하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나는 꿈을 다룰 때 이와 같은 방식을 꿈해석의 기본으로 삼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바로 그것이 꿈이 의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할 사실이다.

 

그런데 그 출발점이 그렇게 중요한지는 정말 몰랐던 것이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속에서 많은 것이 표현되었다.

 

-316 그 무렵 나는 이상하게도 명료한 정신상태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나 그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모든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자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나는 과거 민족들의 신화를 설명해왔다. 영웅에 관한 책을 쓰고 사람들이 옛날부터 그 속에서 살아온 신화에 관한 책도 썼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어떤 신화속에서 살아가고 있느가? 기독교 신화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너 자신은 그 신화속에서 살고 있는가? ” “솔직히 말해, 아니오! 나는 그 신화속에서 살고 싶지 않소.” “그럼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단 말인가? ” “그렇소. 우리는 이제 아무런 신화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오.”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속에서 살고 있는가? 여기에 이르자 내 마음이 편치 않아졌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중단했다.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고 만 것이었다.

 

나의 신화는 무엇이고, 나는 그 신화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의 신화를 만들고 신화속에서 살아가야 하리라.

 

-327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 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저항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무척 불안하기도 했다.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신과의사로서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돕는 자가 환자 옆에 있지 않느냐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소위 돕는 자인 나는 환자의 환상 내용을 나 자신의 견지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거기에 대해 쓸모도 별로 없는 몇가지 이론적인 편견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나 개인뿐 아니라 나의 환자를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자청해서 한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게 했다.

 

스스로가 자신의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하니 늘 불안하고, 누군가 한번 툭 던지는 질문에 어찔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스스로가 명확하게 답을 찾아가야 하리라.

 

 

필레몬과의 대화

 

 

-340 내 안에서 생겨난 한 여인이 나의 생각에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것은 원시적인 의미의 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혼이 왜 아니마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해보았다. 왜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속에 잇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Anima)'라고 불렀다.

 

-341 매일 저년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옛 그리스 격언을 따른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나는 차츰 내 생각과 그 소리의 내용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등을 내려놔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리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리라.

 

-341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내용을 구별하는 일이다. 무의식 내용은 이를테면 격리를 시켜야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무의식 내용에서 힘을 제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이 그 힘을 의식에 행사하게 된다. 무의식 내용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방법이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무의식 내용이 자율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스스로 익숙해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무의식과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내 마음속 목소리의 주인공이던 그 여자환자는 현실에서는 남자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내 동료 중 한사람에게 그가 오해받는 예술가라고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 말을 믿고 좌절했다. 그가 좌절한 원인은? 그는 자신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의 평가에 의해 살았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확신이 흔들렸고 아니마의 속삼임에 마음을 열어놓고 말았다. 아니마의 말은 대개 유혹하는 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교활함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를 명료하게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아니마의 유혹과 교활함을 어떤 식으로 넘길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실체를 아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342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아니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이것이 내게 중요했다. 10년 동안 나는 기분이 언짢고 안정을 잃었다고 느끼면 늘 아니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면 무의식에 무언인가 배열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아니마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도 무엇을 하려는 거요?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고? 나는 그것을 알았으면 하오!” 조금 저항을 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본 이미지를 항상 도출해냈다. 그 이미지나 나타나면 불안이나 우울은 사라졌다. 내 감정의 에너지 전체는 그 이미지 내용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전환되었다.

 

 

죽은 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

 

 

-345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그것은 오류와 불확실의 길, 그리고 오해의 길이라고 간주된다. 나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한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 ” <<파우스트>> 2부는 문학적 시도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파 사상에서 시작하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까지 이어지는 황금사슬(연금술 용어임)’의 한 고리다. 또한 세계의 다른 극점을 향한 탐험여행으로, 대부분 인기가 없고 모호하며 위험하기도 하다.

 

오류, 불확실, 오해의 길이어서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운 선택을 하고, 그 속에서 불평하고 만족하기를 반복하면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길을 선택해야 할까? 힘든데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자 숙명이 존재하는 것 같다.

 

-346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 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위를 떠돌아 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그런 비현실성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방황하고 침체되어 있던 때이긴 했지만,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됨을 나는 항상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 였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현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오지 않을 미래도 사실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니체가 이런 비현실성이 있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니체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전달해준다.

 

-349 그 특이한 분위기를 나는 원형의 누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적합하면 그것은 나타난다!”

 

그 분이 오신다는 것이 이런것인가 보다. 어떤 분위기를 만들고 하다보면 뭔가 만나게 되는 그 무엇!

 

-350 오늘날 내가 과거를 돌이켜보고 환상에 관해 작업하던 시절의 체험을 생각해보면, 그 작업이 소명과도 같이 나를 압도하며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환상의 이미지속에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과도 관계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내가 나 자신에게만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그후로 내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나로서는 중요하다고 여겨져 찾아본 지식들은 당시 학문에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원초적 체험을 스스로 겪어야 했고, 더 나아가 내가 체험한 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체험은 생명력 없는 주관적 가설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결국에 자신의 소명을 만나 자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리라. 자신만의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이 제대로 되면 남을 위하는 보편적인 길이 되가는 것이리라.

 

-351 나의 학문은 나를 혼돈상태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며 수단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환상의 자료가 가시덩굴이나 쇠사슬처럼 나를 얽어매었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정리하고, 무엇보다 삶속에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대개 소홀히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미지들이 그대로 떠오르도록 하면서 거기에 대해 무척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고심하지 않는다. 거기서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결국 무의식의 부정적 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또한 이미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지식으로 이미지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위험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신의 인식을 윤리적 의미로 바라보지 않는자는 권력 원리에 빠지게 된다. 이로써 파괴적인 작용이 일어나 다른 사람뿐 아니라 이미지를 알고 있는 그 사람 자신도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무의식의 이미지는 인간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다. 그것에 대한 몰이해와 윤리적 의무의 결핍으로 많은 개인이 전체성을 상실하고 분열적 성질로 변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합리적으로 정리하고 무엇보다 삶속에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는데 나도 이러한 단계를 넘어가지 못하고 그 이전단계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디테일한 노력이 필요하리라.

 

-353 그리하여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학문적인 출세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나의 내적 인격 즉 보다 높은 이성의 길을 좇아 무의식과 직면하는 실험, 그 흥미있는 나의 과제를 서서히 밀고 나갈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알았다.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전까지는 내가 공중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대학교수가 되는 안되든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었다. 숙명에 대한 분노하는 마음까지 있었다.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여러 면에서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실은 하찮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것이 중요한 법이다.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이런 일은 내가 학문적 출세를 포기했을 때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늘 겪어왔다.

 

어느 순간은 선택의 길에 놓이게 된다.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 순간을 돌아봤을 때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354 내가 교수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나 자신을 비롯하여 아무도 아직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가운데 나는 뼈저린 외로움을 느꼈다. 그 일은 바로 금방 나에게 분명하게 일어났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생각들에 빠져 있어야만 했다. 말해봤자 오해를 사기 십상일 것이었다. 나는 외부 세계와 내면의 이미지세계간의 차이를 아주 예리하게 느꼈다. 당시에는 그 두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지금 내가 이해하듯 인식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의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심적 체험의 내용이 진실이며 그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집단적 체험으로서도 진실이라는 사실을 남에게 제시해줄 수만 있다면 , 바깥세계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일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노력을 요할 것이었다.

 

자신의 소명과 막닦드리는 순간이 되리라. 그것은 철저한 노력이 필요하고 치밀해야 하리라.

 

-356 만다라가 참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는 차츰 깨달아갔다. 그것은 형성, 변환, 영원한 마음의 영원한 재창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 모든 것이 잘돼가면 조화로우나 자기기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356 그 무렵 내가 얼마나 많은 만다라를 그렸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많은 만다라를 그렸는데, 그러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계속 의문이 일었다. 이 과정은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 것인가? 어디에 그 목표가 있는가?”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는 이제까지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자아(Ego)가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일로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자신의 에고가 아닌 무의식에서 얘기하는 목표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357 만다라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모든 것, 내가 걸어온 모든 길, 나의 모든 발걸음이 하나의 점, 즉 중심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다라가 중심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모든 길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중심을 향한 길, 즉 개성화의 길이다.

대략 1918~1920년에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직선적 발달은 없고 다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자기의 표현인 만다라로 인하여 나로서는 궁극적인 것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더 많이 알고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자기다와 지는 길을 선택해서 이제는 가는 것이다.

 

-360 그 꿈을 꾸고 나서 나는 종말의 느낌에 젖었다. 나는 그 꿈속에 삶의 목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중앙이 그 목표다. 누구도 중앙을 넘어서 갈 수 없다. 그 꿈에서 나는 자기가 방향성과 의미의 원리이며 그것들의 원형임을 이해했다. 그 안에 치유의 기능이 들어 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나는 내 신화에 대한 예감을 처음으로 가졌다.

 

-361 내가 그 무렵 체험하여 기록한 것을 과학적 작업의 그릇속에서 추출해내기까지 따지고 보면 45년이나 걸렸다. 젊은이로서 나의 목표는 학문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그 용암의 흐름을 만났고, 그 불길의 열정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원료인셈이었다. 나의 작업은 그 뜨거운 물질을 우리 시대의 세계관에 접목시키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한 시도였다. 그 최초의 환상과 꿈은 불에 녹아 흐르는 현무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단단해져 돌이 되었고 나는 그 돌을 다듬을 수 없었다.

 

45년의 생이 너무 멋지다. 지금껏 45년의 삶을 살아왔는데, 앞으로 용암의 흐름을 만나 불길같은 열정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수만 있다면 가능하리라. 치밀한 노력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

 

 

<< 연금술을 발견하다 >>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374 나 자신에게 던진 첫 질문은 무의식과 더불어 무엇을 하는가?”

-->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출간

-375 “내가 프로이트나 아들러와 어떻게 다른가? 우리의 견해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 <<황금꽃의 비밀>> 출간

 

-375 유형에 관한 책은 한 인간의 모든 판단은 그의 유형에 의해 제약되며 모든 관점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다양성을 보상하는 단일성에 관한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나를 직접 중국의 도()개념으로 이끌었다. 나의 내적 발달과 리하르트 빌헤름이 도에 관한 책을 내게 보내준 사실 사이의 상호일치작용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1929년 그와 공동작업으로 <<황금꽃의 비밀>>이 출간되었다. 그 무렵 나는 사색과 탐구를 통해 내 심리학의 핵심, 자기라는 개념에 도달했다.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383 의학적 정신치료의 주된 문제는 전이다.

 

-394 인간은 신적인 소명 앞에서도 결행을 유보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유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할 수 없다면 그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보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못해봤는데, 결행을 유보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일까?

 

- 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

 

 

죽은자들과 소통하는 곳

 

 

-405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살아가면서 삶의 단순화의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씩 단순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리라.

 

-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카르마

 

 

-418 나는 처음에는 인격의 이분화를 당연히 나 개인의 문제이며 책임으로 여겼다. 파우스트가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고 나에게 구원과도 같은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런 이분성의 원인을 규명해주지는 않았다.

 

-421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며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늘 미래를 담보로 현재는 다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늘 미래만을 꿈꾸고 했었는데 이제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하리라.

 

-422 앞을 향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지만 길게 볼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그에 반해 역행을 통한 개혁 일반적으로 비용이 덜 들고 오래가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개혁은 보다 단순하고 확실한 과거의 길로 돌아가며, 신문,라디오, 텔레비전, 그 외 겉으로 보기에 시간을 아낄 만한 온갖 신기술을 최대한 적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역행을 통한 개혁을 이루어야 하리라. 그래야 비용도 덜 들고 오래가는 법이다.

 

 

 

<< 여행 >>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430 유럽인은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들이 그 기간에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시계라는 것은 소위 중세 이래로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유럽인에게 슬며시 들어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시계라는 것은 소위 중세 이래로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유럽인에게 슬며시 들어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짐을 가볍게 하고 불확실한 목표를 향해 점점 더 속력을 올리며 여행을 재촉하고 있다. 그들은 중량의 상실과 이에 따른 공허를 열차, 기선, 항공기, 로켓과 같은 성과물의 환상으로 보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빠른 속력으로 인해 유럽인으로부터 존재의 지속성을 더욱 더 빼앗아가고, 더 나아가 유럽인을 속도와 폭발적인 가속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다른 현실로 옮겨 놓는다.

 

-433 드디어 떠오르는 태양의 동살이 비치고, 그때 무에진(Muezin: 회교 기도사)의 아침기도시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그 소리가 내 마음을 깊이 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교훈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격정으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그 격정에 의해 그들의 생이 영위되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한편으로는 공간에서의 방향설정과 외부에서 받은 인상을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인 충동과 격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성찰을 하지 않고 자아는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유럽인도 그들과 아주 다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약간 더 복잡한 셈이다. 아무튼 우리는 어느 정도는 의지와 숙고된 의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강렬함이다.

 

삶의 강렬함. 그래 그런 것이 부족했다. 그저 희희닥거리면서 끝날것이 아니라 좀 더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순간들.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다.

 

-436 아랍문화의 만남은 확실히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격정적이고 기분대로 살아가며 생() 그 자체에 한층 더 가까이 있으면서도 성찰을 모르는 이러한 인간존재가 우리 안에 있는 저 역사적 층에 강력한 암시효과를 주었다. 그 역사적 층은 우리가 이제 겨우 극복했거나 최소한 극복했다고 믿고 있는 그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빠져나왔다고 착각하는 어린 시절의 낙원과 같아서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또 다시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과거로부터 멀리 떼어놓을수록 더욱 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져나왔다. 그래서 늘 둥둥 떠있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를 정확히 알고 미래의 꿈에 매달리지 말고 현재의 집중해야 하리라

-437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441 비평의 수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대상의 외부에 관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은 특히 그 성격상 어떤 다른 학문분야보다도 훨씬 주관적인 경향을 가진 심리학적 사항들에 아주 유용하다.

 

-443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가 진정한 백인의 모습을 나에게 묘사해 준 셈이다.

 

가슴으로 자신이 느낀 것을 얘기할 수 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제 가슴이 느낀 것을 말하고 실천하면 되리라.

 

-451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지식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사회 시스템을 위한것일가? 개인을 위한 것이었을까?

 

-452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과연 나의 자리는 어디일까?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490 인도인의 목적은 도덕적인 완전성이 아니라 니르드반드바 상태다. 그들을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며 거기에 걸맞게 또한 명상을 통해서 형상이 없는 공()의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이에 반해 나는 자연과 정신의 이미지에 대한 생생한 관찰을 고수하고 싶다. 나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지도 않으며 나로부터도 자연으로부터도 그러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내게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이기 때문이다. 자연, 영혼, 그리고 인생은 나에게 활짝 피어난 신성처럼 여겨진다.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데 있지 않다.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했다. 현실을 바탕으로하는 것은 좋지만 현실이전부인 것으로 하는 것도 극단적인 방안이기에 중도적인 방안을 찾는 것이 필요하리라.

 

-491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성이 상존한다.

 

자신의 열정의 지옥이란 어떤 곳일까? 하지만 그동안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잊은체 하고 있었던 것이 맞다. 그래서 되돌아오는 힘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것이리라.

-500 낮이 잊어버린 신화를 밤이 계속 이야기하고, 의식이 평범하게 만들어버리고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축소시켜버린 그 거대한 모습들을 시인이 다시금 일깨우고 선견지명으로 살려낸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또한 변화된 모양으로사색적인 사람들에 의해 다시 새로 인식되는 법이다. 위대한 과거의 것들은 우리가 착각하듯 죽지 않고 단지 그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모양은 작지만 힘은 강력한위장된 카비르가 새집으로 옮겨간다.

 

이래서 시인의 감성으로 다시 세상이 태어나는 것이리라.

 

-502 북은 복부나 명치를 울리는 태고의 언어로 말한다. 복부나 명치는 기도하지않고, ‘은덕으로 가득한만트라나 명상적인 발성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부처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깨달은 사람의 자기구원의 여러 행위 중 하나다.

 

 

 

<< 환상들 >>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516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나에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Ich: '자아라는 용어로도 쓰임)‘라고 말이다. ’는 이를테면 남아 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라는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자아)’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지금까지 성취한과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의 집합체가 나 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체를 인정해주고 존경해주고, 그리고 를 지속적으로 키워나가야 하리라.

 

 

융합의 신비

 

 

-525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이라고 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도 없고 시간 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었다. 그 체험은 우선 하나의 상태, 즉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감정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제와 동시에 오늘과 내일 존재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한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래도 하나였다. 감정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의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제라고 해야할 것이다.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

 

영원이라 하면 끝없는 미래라고 생각했는데,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이었었던 것이다.

 

-526 내가 그 꿈과 환상에서 체험한 객관성은 완성된 개성화에 속한다. 그것은 가치평가라든가 우리가 감정적인 유대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감정적인 유대는 대체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법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투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이 되고 객관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투사를 회수할 필요가 있다. 감정적인 관계는 강요와 예속으로 부담을 주는 열망의 관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로 말미암아 상대방과 우리 자신이 부자유하게 된다. 객관적 인식은 감정적인 연관성 너머에 있다. 이 사실이 중요한 비밀로 여겨진다.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융합이 가능하다.

 

감정적인 연관성 너머에 있는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 제대로 인식을 할 때만이 진정한 융합이 가능한 것이다.

 

-527 이제는 나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고 애쓰지 않고 생각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그리하여 문제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에게 다가와 무르익으면서 형상화되었다.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인식과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527 인생은 원만해지지(융은 인생에서 완전성보다 원만성을 추구하기를 권함-옮긴이) 않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과오나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을 죽은 자의 길일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것과 다름없다.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숙명의 의도를 주제넘게 간섭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 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범주는 항시 존재하지만 그것은 구속력이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존재가 주관적인 평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 또한 존재하는 생각으로서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그것들도 전체성의 현상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숙명을 찾으면 이런 어려움도 다 극복해가면서 행할 수 있는 것이리라.

 

 

 

<< 사후의 삶에 관하여 >>

 

 

꿈과 예감

 

 

-535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테면 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한 해답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수긍이 가는 이런 회의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고찰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 우주만물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문제를 학문적이거나 지적인 문제에세 제외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거기에 관한 어떤 관념이, 예를 들어 꿈이나 신화적인 전승을 통해 나에게 제공된다면 나는 그것들을 기록해둘 것이다. 심지어 그것으로 하나의 견해를 짜내려고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 견해가 언제나 하나의 가설로 남고, 그것이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무의식의 조언을 너무 쉽게 무시하면서 살아왔다. 문제에 관한 해답은 그것이 해답인지 아닌지도 확신이 안서고 하지만 이제는 그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리라.

 

-536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들을 생각해보라!

 

그동안 과소평가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다시 재평가해야 하고, 이성에만 메이지 말고 살아가도록 해야 하리라.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551 신화는 피할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 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알으로 영원 속의 삶,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때에만, 앞에서 수를 에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이러한 과정은 성공적인 꿈 분석이 이루어질 적마다 확실한 방법으로 항상 반복된다. 그러므로 꿈의 진술과 관련하여 교조적인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해석의 획일화가 눈에 띄는 즉시 우리는 그 해석이 교조적이며 따라서 비생산적임을 알게 된다.

 

 

단일성과 무한성

 

 

-562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이 이미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향해 물음을 던지든가 아니면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를 하며 살 것인지는 본인이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하리라.

 

-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때에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있는 것은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무한 관계성과 인간관계의 본질성을 갖기 위한 노력 이것이 선행되어야 하리라.

-573 오로지 삶의 공간을 넓히고 합리적인 지식을 어찌해서든지 증가시키는데만 관심을 두는 시기에는 자신의 단일성과 유한성을 의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단일성과 유한성은 동의어다. 이것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의식화라는 것도 없다. 단지 군중과 정치권력의 열광에서 표출되는 그런 것과의 망상적 동일시가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는 모든 강조점을 이생의 인간에 두어왔다. 이로써 인간과 그의 세계의 신들림이 초래되었다. 독재자들이 출현하고 그들이 온갖 재앙을 가져오게 된 원인은, 영리하기 그지없는 지성인들의 근시안으로 인해 인간에게서 내세적인 것이 박탈된 데 있다. 그런 사람들처럼 인간은 무의식성의 제물이 되어 버린다.

인간의 과제는 이를테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무의식에서 밀려오는 것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 만년의 사상 >>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579 악은 결정적인 현실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이 세상에서 제거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와 함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엄청난 피해 없이 가능할는지 당분간은 예측할 수 없다.

 

악에 대해서도 다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쉽게 영향을 받고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582 인간의 일반적인 불충분함을 제외하면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이 교육에 있다. 교육은 오로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각 개인의 사적인 경험에 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이상주의적 관념들이 교육되고 있다. 또한 스스로 그것을 결코 실현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실현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 다만 직책상 그런 것들을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제대로 점검되지 않은 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절저한 자기 인식, 즉 자신의 전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만큼 선을 행할 수 있으면 어떤 파렴치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지 냉철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현재 교육의 문제점이다. 일괄적으로 진행하던 교육방식에서 이제는 개인화화 차별화가 주요 요인이 된다.

 

-582 이러한 자기 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바탕에서 우리가 본능과 마주치게 되는 기층 또는 인간존재의 핵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동적요인으로, 우리 의식의 윤리적 결단이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좌우된다.

 

-583 우리는 오직 의식을 확장해주는 학문을 통해서만 자연인식에 이르게 된다. 그와 같이 심화된 자기인식도 학문, 즉 심리학을 필요로 한다.

 

-584 신화가 생동하지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신화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잘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신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방면의 온갖 시도를 억압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589 그럼에도 모든 것이 잘되면 해답은 본성에서 자발적으로 제시된다. 오직 이때에만 해결은 확실한 것이 된다.

 

-594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 본성이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하여 증명한다. 의식을 발달을 통하여 그는 자연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세계의 현존을 인식하며 이를테면 창조주를 입증한다. 이로써 세계는 현상이 된다. 의식적인 성찰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성찰하는 힘의 중요성. 마음 공부를 지속하지 않으면 이런 세계에 대해서 알지못하고 자신의 본질적인 요소와 멀게만 느껴지게 만든다.

 

-595 그러나 정신의 역사는 별개의 문제다. 여기서는 성찰하는 의식의 기적, 2의 우주진화론이 끼어든다. 의식의 의미는 무척 커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어마어마하고 의미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생물학적 향연의 어딘가에 의미의 요소가 숨어 있다고 말이다. 그 의미의 요소는 분화된 뇌와 항온동물의 단계에서 마침내 자신을 표명할 수 있는 길을 우연처럼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의도되거나 미리 내다본 것이 아니라 어두운 충동으로부터 예감되고, 느낌으로 알게 되고, 손으로 더듬어 찾아진 것이었다.

 

-597 무의미는 생의 충만을 방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뜻한다. 의미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해준다.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신과 다른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방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말씀은 우리에게 자연발생적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강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모두 인간적이며 인식할 수 이쓴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영감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착상이 우리가 궁리해낸 결과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고셍서우리에게로 스며들어왔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선인식에 속하는 꿈을 우리가 다루면서 어떻게 꿈을 자신의 이성작용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그 꿈이 일종의 예지 혹은 원견(原見 :멀리까지 내다본다는 의미)을 의미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599 이러한 성과를 확고히 거두고 난후에야, 이미 주어졌기에 임의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제거할 수도 없는 자신의 근본과 기원을 대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단계에 비로소 이르게 된다. 그런데 그의 기원은 단순한 과거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존재의 지속적인 토대로서 그와 더불어 공생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의식은 적어도 물질적인 환경에 의존하고 있는 그만큼 그러한 공생에 의존하고 있다.

 

세상은 공생의 관계이다. 의식과 물질적인 환경에 의존하면서 서로간의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608 그러한 공식화를 통해 사물의 성질이 어느 정도 변화되리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단지 언어를 맹신함으로써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진정한 사실은 거기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변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 자신이 거기에 영향을 받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을 순수한 무()라고 파악한다고 해도 그것은 더 포괄적인 상위 원리의 사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는 이전과 똑같이 거기에 매여 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618 에로스는 우주의 생성원, 창조자, 그리고 모든 의식성의 아버지요 어머니다. 내게는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한 바울의 조건문이 모든 인식중에서 최초의 인식이며 신성 그 자체의 진수인처럼 느껴진다.

 

-619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 (고린도 전서 13:7)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 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나.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부분으로서의 인간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전체에 압도당하고 있다. 그는 찬성하거나 분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그 속에 갇혀있고 에워싸여 있다. 언제나 그는 거기에 좌우되며 그것에 기인하고 있다.

 

-620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을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랑에다 온갖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붙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단지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그가 한줌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여 미지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전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 사이에서 선택의 자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 회고 >>

 

 

비밀로 가득찬 세계

 

 

-623 사람들이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知者)’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대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이것이 자연의 신비이다. 내가 뭔가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할 것은 없는 것이다. 그저 보고 경탄을 할 뿐이다.

 

-623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강물을 길으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나의 차이점은, 내게는 칸막이벽들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벽들이 너무 두꺼워서 그 뒤를 보지 못하므로 거기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배후의 과정을 인지하는 편이어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끌어 낼 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 나로 하여금 삶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어쩌면 어릴적 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결정해버렸다.

 

자신의 고유의 특성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나에게는 과연 어떤 벽들이 있는 것일까?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것이다.

 

고독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역시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다.

 

-627 나는 자주 내가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나의 친애하는 전우인 당신은 이제 쓰러졌다. 그러나 나는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정말이지 나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창피스럽게도 어떤 힘이 우리 심장을 앗아가기때문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순간이다. 나 자신이 희생제물이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데몬이 사람이 빠져나가도록 해주면서 그와 함께 복된 모순을 가져다준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의 불성실과는 아주 명백하게 대극을 이루는, 예기치 못할 정도의 성실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멍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628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아마도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대로 그렇게 디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629 많은 일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으나 항상 나에게 이로운것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이 저절로 숙명적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나는 인간에게서 경이로운 것들을 경험했고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현상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그만큼 더 나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놀라고 실망하고 기뻐한다. 나는 슬퍼하고 낙심하고 열광한다. 또한 나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것의 합을 계산할 수는 없다.

 

-630 인생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또는 인생은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가지고 있지 않기도 하다. 나는 의미가 우세하여 전투에서 이겼으면 하고 마음 졸이며 희망하고 있다.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그는 가치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이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노년이란 그런 것이면서 또한 하나의 제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주 많다. 식물, 동물, 구름, 낮과 밤,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 등이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그렇다. 마치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세계와 갈라놓았던 저 생소함이 나의내면세계로 옮겨와서 나 자신에 대한 예기치 않은 낯설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도 이런 노년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굳이 노년이 아니어도 지금만으로도 충족시켜주는 것이 많은 것임을 다시 인식하고서 감사해야 하리라.

 

 

편집자의 말 A.아페

 

 

-631 그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온통 어지러웠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별자리처럼 보였다.

그는 세계 속에 감추어진 세계를 그의 의식에 보태었다.

-콜리지의 <<노트>>에서

 

-636 항상 그랬듯이 내 인생에서 모든 외적인 것은 우연한 것이고, 오직 내적인 것만이 실체성이 있으며 결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숙명적이네. 그 결과 외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들은 모두 희미해졌네. 아마도 외적인경험들은 한번도 실재가 된 적이 없거나, 아니면 단지 나의 내적 발달 단계와 일치할 때만 실재가 되었을 것일세. 내 존재의 이러한 외적인발현들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나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네. 그것은 내가 모든 정력을 기울여 그러한 일들에 참여했기 때문인 듯이 여겨지기도 하네.

 

-641 학문적인 저작에서는 융은 신에 관해 말하지 않고 인간 마음속에 있는 신의 형상에 관해 말할 뿐이다. 이러한 말들은 모순이 되지 않는다. 하나는 주관적인 체험에 기초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진술이다.

 

 

 

4. 내가 저자라면

 

한 사람의 과 이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까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말해주었다. 그꿈은 그냥 꾸고 잊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의식의 애기를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기까지의 뼈저린 외로움을 견뎌내고, 정신의학자가 신화에 대한 연구 등 다방면의 지식을 갖추면서 총체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정신분야가 보이지 않은 분야이기에 뜬 구름 잡는 것이 많고,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는데, 오히려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분석,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치밀한 노력 등이 돋보였다.

그리고 그 분야의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지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겸손함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오픈 마인드가 고수의 진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1) 요약

카를 융의 자서전으로, ‘기억, , 사상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였다. 융의 제자이면서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대담을 하면서 정리한 것으로, 내용은 그의 죽음 전에 정리가 되었으나 출간은 반드시 사후에 할 것을 약속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전집 19권에는 이 책을 포함하지 않도록 하였다.

 

2) 특징 및 차별화 포인트

보통 자서전이면 년대기적 일어난 사건과 그때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가 기술되었는데, 이 책은 눈에 일어난 사건보다는 무의식의 세계를 자세히 묘사했다.

그리고, 책 제목에 기억, , 사상이라고 책 내용을 제목에 같이 정리를 해주니 내용이해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

 

 

3) 이 책의 키워드

무의식의 자기 실현, 고유한 내면,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 , 진정한 인식, 초 인간적인 것들 , 통합된 이중성, 자기 분석,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 , 아니마, 개성화의 길, 만다라 , 숙명, 단일성과 유한성, 공생

 

4) 내 책을 쓸 때 참고사항

각 장을 주제별로 묶어보던가 , 유년시절, 학창시절, 대학시절 식으로 어느 시기별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리고, <카를 구스타프 융 분석 심리학 개념 및 용어>가 별도 부록으로 빠져있는데 용어 설명을 뒤에서 따로 할지 아니면 필요한 중간에 할지 본문에 잠시 언급하고 넘어갈지 고려필요.

이 책에서는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었기에, 내 책에서도 무의식의 세계를 언급할 부분이 있는지 다시한번 보면서 검토 필요

 

5)전체적인 뼈대와 목차

13개의 카테고리로 앞부분은 시기적으로 구분을 해놓았고, 뒷 부분은 꿈, 사상을 소 주제별로 구성을 하였다.

 

-목차

 

옮긴이 서문 - 자서전 문학의 백미

프롤로그

 

일생을 사로잡은 꿈 - 유년시절

검은옷을 입은 남자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 학창시절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너는 누구냐?

자연과 사원

두 인격의 어머니

악의 기원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아름다운 시간 - 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환자들

꿈의 분석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필레몬과의 대화

죽은 자를 향한 일곱가지 설법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자들과 소통하는 곳

카르마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융합의 신비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단일성과 무한성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회고

비밀로 가득찬 세계

모든 사람이 멍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편집자의 말 A.아페

카를 구스타프 융 분석 심리학 개념 및 용어

찾아보기

 

6) 감동적인 장절

 

-9 융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자기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규정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자기 실현(Selfstverwriklichung)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듣고 그 지시를 받아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마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며 자기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멀게 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소리를 듣게 되고 나와 가까워질 수 있어서 좋다

 

-171 나는 제1의 인격으로서 공부, 돈벌기, 책임, 분규, 혼란, 과실, 복종, 패배들을 헤쳐나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를 향해 밀려오는 폭풍의 시간이었으며,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가면서도 동시에 쉼 없이 나를 바짝 따라 붙었다. 그것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우리는 단지 앞으로 돌진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잠깐 동안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과거는 무서울 정도로 바로 여기에 실재하며,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서 끌고 가버린다.

그 당시 나의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나는 나의 길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외부로, 제한된 세계 속으로, 삼차원의 어둠속으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낙원은 아담에게 유령이 되어버렸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돌밭을 경작해야만 하는 그곳에 빛이 있었다.

 

어떻게 현재의 상황을 이렇게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강력한 흡입력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속으로 탐욕스럽게 끌어들인다. ’ 탐욕스럽게 끌어들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게걸스럽게 먹어야 했고, 소비해야 했다. 그래서 충분한 해답으로써 몸값을 치르고 자유로워지지 못했던 것이다.

 

-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게기에 걸쳐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더 크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세계라고 하는 극장무대에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하고 있을 뿐인데, 자기 생각에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진리는 내적 인간에 있을 뿐이다.

 

 

-250 그런데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필수 조건은 이른바 교육 분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기 분석이다. 환자의 치료는 말하자면 의사로부터 시작된다.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를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만 된다. 교육분석에서 의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의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환자도 이를 배우지 못한다. 의사가 배워 알지 못한 마음의 한 부분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환자 역시 마음의 한 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분석에서 의사가 개념체계를 습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의사는 피분석가로서 분석이 바로 자기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교육 분석은 실제적인 삶의 한부분이지 무조건적인 암기하여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냥 다 지나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제 진정한 위협은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입고 있는가?

 

 

-254 그는 분석자가 되기를 원한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분석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큰일입니다! 환자를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당신 자신을 분석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재료가 되고, 나를 요리해서 새로운 음식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요리법만 머릿속에 알고 있는 요리사가 될 것이다.

 

-270 원형의 신성한 힘의 작용을 자신의 체험으로 인식하지 못한 의사는 치료과정에서 그것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원형의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피해가기 힘들 것이다. 그는 원형을 과대평가하디고 하고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지적인 개념만을 가지고 있을 뿐 경험적인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각한 탈선이 시작되는데, 그 첫 번째 탈선이 지적인 정복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의사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표면상 확실하고 인위적이나 이차원적인 개념에 불과한 세계를 위하여 원형의 영향과 그 실제적인 체험을 외면하려는는 숨은 목적에 이바지 않다. 그 세계는 삶의 진실을 소위 명료한 개념들로 은폐하려고 한다. 개념적인 것으로 옮기는 것은 체험으루부터 실체를 빼앗고 그 대신 단지 이름들만 붙이는 셈이 된다. 이제는 진실의 자리에 이름들만 들어서게 된다. 개념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라는 안락함이다. 체험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영혼은 개념들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사실들 가운데 깃들어 있다. 말만 그럴듯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나또한 체험으로부터 실체를 빼앗고 단지 이름만 붙이고 만족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다 된 것으로 착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느끼고 체험을 해야 하리라.

 

-308 분석이 그들에게 뭔가 보다 나은 다른 것을 깨우쳐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론 그 자체로 그들을 묶어놓고 단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결정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며 유치한 것들을 버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정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의지하여 설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어떤 삶의 방식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교환되지 않는 한 버릴 수 없다. 완전히 이성적인 삶의 영위란 경험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대개 불가능하다. 특히 신경증 환자처럼 본성이 그와 같이 비이성적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론 그 자체로 묶어놓고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보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다보니 이성적인 방식만 남아있고 실제적인 해결책은 없었던 것이다.

 

-353 그리하여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학문적인 출세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나의 내적 인격 즉 보다 높은 이성의 길을 좇아 무의식과 직면하는 실험, 그 흥미있는 나의 과제를 서서히 밀고 나갈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알았다.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전까지는 내가 공중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대학교수가 되는 안되든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었다. 숙명에 대한 분노하는 마음까지 있었다.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여러 면에서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실은 하찮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것이 중요한 법이다.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이런 일은 내가 학문적 출세를 포기했을 때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늘 겪어왔다.

 

어느 순간은 선택의 길에 놓이게 된다.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 순간을 돌아봤을 때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562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이 이미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향해 물음을 던지든가 아니면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를 하며 살 것인지는 본인이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하리라.

 

-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때에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있는 것은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무한 관계성과 인간관계의 본질성을 갖기 위한 노력 이것이 선행되어야 하리라.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것이다.

 

고독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역시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다.

 

 

7) 보완점

기억, , 사상이라는 카테고리로 내용은 묶어지는데 챕터도 세 가지 카테고리로 정리를 했으면 이해하는데 더 많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8) 용어 설명

- 아니마 ([라틴어]anima)

<심리>남성이 지니는 무의식적인 여성적 요소. (Jung, C. G.)의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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