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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9일 11시 57분 등록

왼쪽다리 근육이 지끈거린다.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통증이 발목까지 내려왔다. 퇴근하면 뾰족구두에 회사원 복장으로 줄기차게 걸어댔더니 몸이 버티질 못한 모양이다. 점심 약속을 취소하고, 오래간만에 2층 발코니에 나가 앉았다. 윗집에서 기르는 삽살개가 나를 경계하며 한참을 짖다가 결국 포기하고 잠잠해졌다. 그래,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야. 해치지 않아요.


사방이 고요하다. 왼쪽으로 멀리 보현봉의 뾰족한 정수리가 보이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집 한채, 다시 나무 한 그루, 집 한채가 이어진다. 자연과 문명이 땋은 머리처럼 능선을 따라 흘러내린다. 정면으로는 북한산에서 갈라져 내려오는 삼각산 능선이 병풍 같은 곡선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인왕산이 까진 이마를 들이댄다. 대머리는 어딘가 능글맞은데 산은 그저 부드럽다.


책을 한 권 들고 나갔다. 그 책은 작게 틀어놓은 잔잔한 음악처럼 나에게 젖어 들었다. 몇 주 전에 한 번 읽었는데, 그 때랑은 다르다. 소개팅 나가서 실망한 소개남을 속는 셈치고 두 번째 보니 갑자기 사랑스러워진 반전이다. 찬찬히 봐야 예쁘다. 너도 그런데 책도 그렇다.


책은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한 저명한 심리학자의 자서전인데, 얼마나 연구를 많이 했으면 그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이 마치 무의식의 강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가 기록한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소르르 잠이 들었다. 꿈을 두 가지 정도 꾸었다.


첫번째 꿈은 배경이 임진왜란이었다. 왜구들이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도륙했다. 대대로 기술자 집안이었던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밖에서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천연 요새 같은 바위 위에 성을 쌓고 공방전을 펼쳤으나 왜구의 모략으로 전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밖에서는 들어올 수가 없어서 성안에는 누구도 침입하지 못했다. 나는 한 열 살쯤 된 계집애였는데, 옷차림은 남자아이처럼 입고 있었다. 시체더미 밑에 숨어 살아 남았다. 총구를 내밀던 돌틈으로 내다보아도 온 산은 조용하기만 하다. 붉은 단풍으로 물들었다. 나는 외로웠지만 선비 같은 자세와 수행으로 마음을 잘 다스렸다. 이 성에는 문이 없어 나갈 수가 없다. 설령 나간다 해도 다시 들어올 수 없다. 거기에 이 성이 가족들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이 바뀌어 두번째 꿈에서는 데카상스와 산에서 노숙한데서 준비를 위해 마트를 갔다. 오래 등산할 줄 알고 온갖 등산장비를 커다란 배낭에 차곡차곡 넣고 물도 큰 걸로 4병이나 샀다. 그런데 바로 장면이 바뀌어 다음날 아침에 산행이 끝났다. 나는 조금 싱겁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평평한 바위를 저마다 골라 앉아 간밤에 생각한 것들을 발표했다. 나는 꿈에서라도 데카상스랑 같이 있어서 좋기는 했지만, 좀더 커다란 산이 아니라서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꿈에 대해 생각해보는데 내가 어디쯤 서있는지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의식은 지금의 나를 좀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이제 내 것을 찾는 길을 떠나야 한다고 종용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스스로 인생의 질문에 답을 해야할 때가 되었고, 난 준비도 되어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자주적인 삶의 방식을 찾아, 독립적인 정신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연구원을 지원한 여러 이유 중 가장 강력한 동기는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계연수에서 나는 그 그림자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스스로 생각되었다. 그 시간은 뜨거운 여름 태양처럼 삶의 정점에 서있는 것 같았다. 이제 주어진 고난을 극복하는 것만이 나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연구원은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구나. 올 초 시작할 때는 연구원 자체가 커다란 도전이었는데이제 이 과정 자체보다 내게 남겨진 과제는 더 큰 것일지 모른다는 표지가 찾아왔다. 이제 나를 움직이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 꿈을 통해 나의 절실함에 한 스푼의 위기 의식이 더해졌다. 이것으로 좀 더 명료해졌다. 호기심이 드는 대상 속으로 나는 빠져들어보겠다. 그것을 체험해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겠다.


어떤 책을 쓸건가? 아직 대답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조금씩 구체화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좋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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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19:13:31 *.104.9.216
나만큼이나 괴상한 꿈을 꾸는군요.^^

나도 알아 차리다가 날 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적인 예감이든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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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30 22:06:17 *.223.15.40
한꺼번에 꿈을 이렇게 많이 꾸고 또 그대로 기억하는 사람 보면 부러워요.
나의 소원은 꿈꾸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 소박하죠^^ㅎㅎ

어니언의 뾰족구두가 걱정이네. 하루에 13000보나 걷는데 그 구두론 안되지.
하이힐은 여성건강에 최악이야~ 샤방샤방 돌순이에겐 단화가 최고지...그러려면 바지를 입어야 하나? 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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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00:38:01 *.222.10.47

변경연이라는 성에서 데카상스와 노니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그대의 꿈이 우리의 꿈이니 전환점에서 굳건히 걸어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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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1 09:33:42 *.223.20.243
나도 요즘 괴상한 꿈들을 많이 꾸는데....어이언이랑 같은 심정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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