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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5일 22시 19분 등록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

2014. 10. 05


너희들의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이 편지를 쓴다.


아빠가 어릴 적엔 시골에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부정류장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 하루에 한번(나중엔 두번으로 증편되었지만) 해질 무렵 시골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완행버스였는데 정해진 정류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릴 사람은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리고, 타고 싶은 사람은 택시를 세우듯 버스를 세우고 탔단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양전에 이르면 여기서부터는 시골집까지 비포장 길이었지. 시골집이 버스종점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내릴 즈음엔 늘 빈차가 되다시피 했는데 덜커덩거리면서 도착할 즈음이면 자그마한 동네에선 굴뚝마다 하얀 김이 오르곤 했었다. 해가 긴 여름엔 그나마 해거름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겨울이면 칠흙 같은 밤에 도착하곤 했는데 사랑채에서 차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너희에겐 증조할아버지)께서 마중을 나오시곤 하셨다. 그때는 마중 나오시는 할아버지가 당연하게 생각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신 손주인 것을 어떻게 아시고 후레쉬까지 챙겨 나오신 것인지 궁금해진다. 버스는 윗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른 아침 첫차가 되어 다시 대구로 향했는데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는 시계 같다고 생각 했었지. 사랑채에서 할아버지랑 자다가 버스 내려가는 소릴 듣고선 일어날 시간이 되었나 보다 생각하곤 했으니 말이다. “이노무 손아! 버스 내려갔다. 일나라.” 할아버지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이렇게 며칠을 묵고 대구 집으로 돌아오는 날엔 할머니에게 들키지 않고 일찌감치 버스를 타러 나오는 것이 관건이었다. 돌아 올 때면 할머니께서(너희들에겐 증조할머니가 되겠구나.) 낡은 보자기에 이것 저것 싸 주시는데 그걸 가지고 오는게 너무 싫었거든. 푸성귀나 계란, 된장, 참기름, 감, 김치 따위를 싼 보자기가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부끄러웠단다. 이렇게 몰래 도망치듯 나온 적도 여러번이었던 것 같아. 간혹 김치나 간장 따위를 싸 주시곤 했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밀폐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냄새가 버스에 가득 하기도 했고 조금만 소홀하면 국물이 넘쳐흘러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지. 


아빠가 열살 쯤 되었을 때 너희들의 할머니 그러니까 어머니께서는 우유배달을 시작하셨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자전거(얼마 후엔 오토바이로 바꾸셨다.)에 우유를 가득 싣고 골목마다 다니셨는데 아빠가 엄마를 만나서 결혼할 무렵까지 그렇게 우유를 싣고 다니셨다. 아빠가 어렸을 적엔 너희들이 살고 있는 이 집보다 많이 작은 집에 세들어 살았는데 그 주인 집엔 아빠와 고모랑 같은 나이의 남매들이 있었어. 그 아이들이 매일 아침 우유를 받아 먹는데 당신께서는 그렇게 해주지 못하시는 것이 맘이 아프셨다는구나. 그래서 자식들 우유라도 실컷 먹이자 싶어 이 일을 시작 하시게 되었다고 하셨어.


아빠가 사춘기를 지날 무렵이었을거야 아마. 할머니가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시는 것이 몹시 싫었단다. 어쩌다가 길에서 할머니를 만나기라도 할까봐 피해 다닌 적도 있었어. 아빠도 그때는 그렇게 못난 짖을 하기도 했었구나.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던거야. 아빠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는 할머니가 바쁠 때 조금씩 배달을 도와 드리기도 하고, 우유 박스가 모이면 정리하는 일을 돕기도 했었는데 그나마도 그렇게 열심히 도와 드린 것 같지는 않다. 이때 아빠는 그랬었구나.


2000년 가을 어느 날, 할머니는 20여 년 멍에 처럼 지고 다니시던 이 일을 그만두셨다. 큰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한 동안 병원에 계셔야 했고, 당분간 오토바이도 타실 수 없게 되어 버렸지. 출장 갔다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안 아빠는 태어나서 그렇게 펑펑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어느새 아빠가 그때의 할머니 나이가 되어버렸구나.


딸들아! 내 아이야.


너희들은 사무치게 그립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 모를 것이다.

너희들이 아빠 나이가 되어 이 편지를 다시 보게 될 때, 그때 쯤 알게 되려나!


요즘 할머니께서 시골서 올라오실 때면 먹을 것들을 한 차 가득 싣고 오신다. 오만 가지들을 가지고 오시는데 이럴 때면 아빠가 어릴 적에 이런 것들 가지고 오기 싫어서 도망치듯 시골에서 몰래 빠져나오던 기억이 나곤 한단다.


늘 먹는 김치지만, 늘 먹는 된장 이지만, 늘 먹는 고추장 이지만 ... 아빤 이것들을 먹을 때마다 사무치게 할머니가 그립다. 이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면서 아빤 비로소 ‘사무치게 고맙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구나.


딸들아!

사람들은 소중한 것이 곁에 있었다는 걸 모르고 있다가 잃고 나서 후회하곤 한단다. 너희들도 필연적으로 이런 과정을 지날 테지만, 아무쪼록 급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 형제는 둘이지만 둘이 아니란 걸 명심하여라.

너희들은 원래 하나였다. 혼자서는 외로울 것 같아서 둘로 나눠 놓은 것임을 잊지마라.



IP *.201.1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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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23:28:58 *.124.78.132

오오오!!!! 따스함이 넘쳐나는 글이예요.

정말 멋진 어머님을 두셨고, 또 그 어머님을 늘 절절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아름다우신 것 같아요.

그에 비하면 저는 어찌나 불효녀인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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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6 14:17:58 *.196.54.42

오호~ 사무치게 그리운 것?

초딩시절 내가 잊고간 도시락을 엄마가 학교로 가지고 오셨지. 뚜겅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 나던 정구지 나물!

아직도 내가 젤 좋아하는 것. 아내에게 전수되어 장모님이 첫물 정구지 나오면 어김없이 공수되지요^^

피울선생도 사무치게 그리운 것이 나랑 별반 다르지 않으니 우리는 같은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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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6 20:15:47 *.113.77.122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이 절절이 느껴지네요. 

갑자기 엄마,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워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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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7 10:43:42 *.7.48.97
딸들이 이 느낌을 알때쯤 피울님은 할배소리 듣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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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7 22:23:12 *.222.10.47

형님이 변하셨네요. 축하드려요. 마음이야 언제 변했겠어요. 하지만 변하셨네요.

변하지 않는 것을 지키며 변한다는 것이 소중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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