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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2일 08시 48분 등록

 

 

그들이 없다는 걸 피검수치로 확인한 날은 짧은 편지를 쓸 수 없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사라졌다. 착상되지 못했다. 누구나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 갖고 있다. 초컬릿과 함께 천정이 높았던 기차역 대합실에서 열일곱에 눌러 썼던 꽃편지처럼. 가슴에는 벌집처럼 수 많은 방이 있다. 한 사랑이 끝날 때마다 방 하나가 추억과 같이 저장된다. 그것들과 함께 나이 들거나 풍부해진다.      

 

슬프다기 보담 두 팔과 두 다리가 무기력하다. 관심없음이 횡행한다. 상실감이거나 좌절감인 것 같다. 아이를 유산한 것도, 죽음으로 이별한 것도 아닌데 이런 게 느껴지네.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누가 뭐랄 건가? 유난떤다며 무시하지 않으련다. “나는 슬프다, 나는 슬퍼서 무기력하다. 상실감 때문이다.” 내 마음을 읽어준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 줄 거다. 충분히 표현하도록 기회를 줄 거다. 제대로 슬퍼할 거다. 다음 차수에 뭘 어떻게 할 건지는 그 다음에 궁리할 거다. 또 한 사람 나와 같은 당사사가 있다. 남편. 먼저 내 가슴을 듣고 돌본다면, 눈을 들어 그를 살피고, 술 한 잔 권하면서 마음을 나누고, 한 팀으로 우리를 위로할 여지가 생길 거다.

 

슬픔을 치유하는 비법은 마음껏 슬퍼하는 것 뿐이다. 다른 지름길, 사잇길은 없다. 발목을 적시지 않고는 물을 건널 수 없다. 웃음이나 씩씩함으로 가장해 보아야 시간만 늘이고 순서만 바꿀 뿐이다. 슬플 땐 더 큰 슬픔을 대하는 게 내 슬픔을 직면하게 하고, 터트려 분출하게 하는 것 같다. 카타르시스를 줄 거다. 울기 위해 나를 싸대기쳐줄 이를 찾아 싸움을 걸거나 한강에서 뺨 맞고 어디 가서 화풀이하지 않도록 도와줄 거다. 밥 먹고 나면 설거지가 필요하다. 태지를 덮어쓴 아이가 나오는 것만큼 태반과 오로가 잘 배출되는 게 중요하고, 이런 마무리가 중요하다. 나에게 기대어 울 어깨를 빌려줄 시, 비극, 영화를 찾아본다. 어쩜 나는 그녀들의 커다란 아픔에 기댄다.

 

신영복선생은 <나무야 나무야>에서 경기도 광주군 지월면에 있는 난설헌 허초희의 무덤을 찾아갔다. 정승 아들을 거두고 한국에서 발행되는 최고액권 지폐의 주인공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동향이다. 강릉 여인들이다. 신영복선생은 허난설헌이 사임당 보다 그 시대 여성의 삶을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27살에 죽었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 균의 누이다. 허균이 역모에 몰려 귀양가고, 스승 이달이 죽는 걸 지켜본다. 남편은 그녀를 외면한다. 시어머니와 고부갈등에 힘들었다. 한 해 간격으로 어린 두 남매를 잃었고, 곧 뱃 속 아이를 유산했다. 초월리의 허난설헌 묘소 발치에는 두 남매의 자그마한 봉분이 나란히 있다. 그녀는 남편과 같이 묻히지 못했다. 남매의 무덤 앞에서 소지를 살라 올리며 밤마다 손잡고 사이좋게 놀거라울며 시를 적었다. 그 시를 찾아 읽어본다.

 


자식을 곡하다.                       哭子

 

지난 귀여운 딸아이 여의고    去 年 喪 愛 女

올해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今 年 喪 愛 子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廣 陵 土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雙 墳 相 對 起

사시나무엔 쓸쓸한 바람 불고     蕭 蕭 白 楊 風

도깨비불 희미하게 빛나네  鬼 火 明 松 楸

 

지전 살라 저희 넋을 부르며       紙 錢 招 汝 魂

무덤에 술잔 따라 제를 올리네     玄 酒 存 汝 丘

너희 넋이야 오누이인줄 알고      應 知 第 兄 魂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겠지.       夜 夜 相 追 遊

비록 아기를 다시 가졌다고 한들   縱 有 服 中 孩

어찌 자라길 바랄 있으리오  安 可 糞 長 成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다       浪 吟 黃 坮 詞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는구나.    血 泣 悲 呑 聲

 

그리스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 여인들>을 읽는다. 트로이가 함락된 후 여인들에게 일어난 일을 쓰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고통을 받는 건 여인과 아이들이었다. 특히 패배한 나라의 여인들은 죽임을 당하고 강간당하고, 종으로 팔려가고, 재산처럼 취급되었다. 두 여인, 헤카베와 안드로마케의 비극을 코러스들이 같이 울어준다. 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다. 트로이 최고 용장 헥토르는 헤카베의 아들이며, 안드로마케의 남편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헤카베의 남편 프리아모스왕과 헥토르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들들이 전사했다. 막내딸 폴릭세네는 죽은 아킬레우스의 묘 앞에서 제물로 바쳐졌다. 아폴론신전의 여사제가 된 딸 카산드라는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데려가 첩을 삼으려 한다. 헤카베는 오디세우스의 종으로 출발하기 직전이다. 트로이 최고의 훈남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부덕으로 칭송이 자자한 여자였다. 그 때문에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그녀를 취하고 싶어했다. 그는 트로이 최고 용사의 아이를 살려두어서는 안된다며 안드로마케와 헥토르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성곽에서 떨어뜨려 죽이려 한다.

 

엄마 안드로마케가 애간장이 끊으며 통곡한다.  

 

오오 귀여운 내 아들, 다시없는 내 소중한 아들아, 너는 이 불쌍한 어미를 남겨놓고 적의 손에 죽어야만 하느냐. 아비의 고귀한 혈통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영광이 되었는데, 너의 생명을 빼앗기게 하고 말았구나. 뛰어난 아비를 가졌던 것이 너에게 원한이 되었구나.

아아, 아가야, 너도 네 불행을 아는 지 울고 있구나. 왜 그렇게 매달려서 옷을 놓지 않으려 하느냐. 새끼새가 어미새의 날개 밑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아비는 이제 다시는 그 유명한 창을 들고 무덤에서 너를 구하러 달려와 주시지 않는단다. 아비의 육친도 이제는 없고, 그뿐이랴, 트로이는망해버렸단다. 얼마 안 있어서 너는 앞이 캄캄한 높은 곳에서 무참히도 떨어져 죽어야만 한다.

아아, 언제까지나 이렇게 안고 있었으면!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살결의 향기, 포대기 속에 싸서 젖먹여 기른 보람도 없이, 그 숱한 고생도 다 헛되고 말았구나. …자 기어이 이 아이를 떨어뜨려 죽이겠다면 데려가시오. 그래서 그 애 살덩이라도 포식하구려. 우리의 비운이 신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아이를 구할 힘이 우리에게 없을 것이니. 자 빨리 나를 배에 실어 이 비참한 꼴을 감춰 줘요. 자식을 뺏기고 혼례길로 떠나는 나를

 

제기럴. 내가 이걸 왜 보려고 했나? 이 비극은 슬픔을 위무하긴 커녕 분기탱천하게 한다. 욕이 입안 가득 장전된다. 짜증스러워 두통이 생긴다. 술을 퍼마시고, 그동안 참았던 라면과 믹스커피를 들이붓고 과자를 사 먹으며, 남편에게 사소한 일에 싫어를 연발하며 시비를 걸고, 적금을 깬 돈을 펑펑 쓰며 여행을 다녀오고 싶었다. 삐뚜러지고 싶었다. 그 분노가 슬며시 같이 올라오는 걸 본다.

 

결국 안드로마케는 품의 아들을 내주고 차마 아이를 보지 못한 채 배에 오른다. 할머니 헤카베가 손자의 시신을 받았다. 헥토르의 방패와 함께였다. 제발 헥토르의 방패를 전리품으로 가져가지 말아달라고, 석관이나 삼목의 관대신 아빠의 방패를 아래에 깔고 아이를 묻어달라고 안드로마케가 부탁을 했었다. 할머니는 아들의 방패와 손자를 같이 안고 통곡한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 울었다.

 

오오 귀여운 손자여, 이 무슨 불쌍한 죽음이란 말인가. 네가 자라서 혼인을 하고 신처럼 존경받는 왕위에 오른 뒤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성을 베개 삼아 죽었다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을. 이런 때에 진실한 행복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아가야, 너는 그러한 세상의 행복을 스쳐 갔을 뿐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구나. 집안에 그 행운이 있었건만 그 행운을 한 번 맞아보지 못하고 가엽게도 아폴론이 쌓은 이래 대대로 물려온 성벽에 부딫쳐 머리칼이 무참히도 뜯겨 있구나. 이 머리칼은 네 어미가 언제나 정성껏 쓰다듬어 주고 볼을 비벼대곤 하였는데 뼈가 부스러진 사이에선……아아, 더 이상은 참혹해서 입에 담기조차 싫구나. 아버지와 꼭같이 닮은 귀여운 이 손이 무참히도 떨어져서 여기 있구나. 곧잘 어른스러운 소리를 하던 이 귀여운 입도 이제는 더 이상 말을 않게 되었구나.

내 이불 속에 들어와서 할머니,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내 머리칼을 듬뿍 잘라드릴께요. 그리고 장례의 행렬에는 친구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고별의 인사말을 아주 멋있게 해 드릴께요라고 말하더니 그 약속을 어기고 말았구나. 네가 나를 조상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라를 잃고 자식을 잃은 이 늙은이가 거꾸로 너의 불쌍한 시체를 장사 지내야 하다니. 너를 껴안고 귀여워하며 여기까지 길러온 수고도 이제는 다 소용없이 네 천진난만하게 잠든 얼굴도 다시는 볼 수가 없다. 너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것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이 청동의 방패만은 너의 것, 이 방패 위에 얹어서 묻어주겠다. 아아, 헥토르의 늠름한 팔을 지킨 이 방패는 둘도 없는 주인을 잃고 말았다. 손잡이에는 아들의 그리운 손자국이 남아있다. 또한 매끄러운 방패의 둘레에는 땀자국이, 수많은 날 싸움에 지쳐 방패에 턱을 괴고 쉬던 헥토르의 이마에 흐른 그 땀자국이 있다….”

 

송혜교와 강동원이 주연한 영화 두근두근 내인생이 개봉했다. 그들은 17살에 부모가 되었다. 34살에 16살 아들을 가진 엄마와 아빠는 아들이 조로증으로 죽어가는 걸 지켜본다. 가을발 눈물 영화다. 집 앞 대한극장에서는 이미 내려졌다. 김애란작가의 원작이라니 그 소설집을 읽어볼까나? 최루극이든, 뻔한 신파든 상관없다. 나는 정서의 내용이 무엇이든 메스나 창처럼 나를 찔러서 안에 고인 걸 짜내면 된다. 

 

절을 하고 허리가 아파서 누워서 명상을 하다가 나는 흘려야 할 눈물을 흘렸다. 야간 근무하고 북한산에 다녀오느라 피곤한 남편이 깰까봐 숨죽여, 그러나 버둥거리며 울었다. 올해 가장 슬퍼한 모습이다. 겨울, , 여름동안 인공수정 1, 시험관 3번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전날 다니던 병원 말고 다른 병원에 반복착상실패 관련 검사를 위한 상담을 다녀왔다. 내가 배아들을 잃은 걸 정말로 자식을 잃듯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찾아본 작품들이 다 그런 이야기들이었구나. 찾아가 울 어깨가 있는 이, 같이 울어주는 이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님들은 나의 눈물 역시 받아주시리라. 슬픔은 사랑의 정당한 대가다. 나는 계속 사랑하고 싶다. 제대로 슬퍼해야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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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2 14:41:13 *.255.24.171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정말 대단하네요.


'두근두근 내 인생'은 책 강추요.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안보는게 훨씬 낫다고 하더라구요.

책은 아주 신선하고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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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0:58:18 *.124.78.132

이번 오프 모임에 콩두선배님 뵙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는데...글을 읽으며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네요..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지혜. 계속 사랑을 하고자 하는 용기에 감동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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