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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9일 22시 26분 등록

밥 해주는 남자, 밥 먹는 여자

10기 김정은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채용자가 있다. 하나는 당신의 핸디캡을 불쾌하게 생각해서 당신을 채용하지 않는 부류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핸디캡을 불쾌하게 보지 않고 자격만 갖추고 있으면 채용하고 싶어하는 부류이다.”

- 리처드 N. 볼스 <당신의 파라슈트는 어떤 색깔입니까?> 중에서 -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밥 해주는 남자와 밥 먹는 여자로.

 

2000년의 봄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 곳, 그 낯선 곳에서 나는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막 군대를 제대하여 4학년 1년을 남겨놓은 학생이었고, 나는 막 첫 직장에서 실패를 경험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우린 둘 다 새로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있었다. 어렵게 선택한 첫 직장에서 적응하는데 실패한 이유가 내 능력의 문제도 아니고, 내 학력의 문제도 아니고, 문제가 내 건강하지 못한 신체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새로 태어나는 것 외엔 개선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미국의 한 주립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게 그는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그가 자신을 소개하기를 그는 중학생일 때부터 영어에 손을 놓아버린 영포자이며, 영어를 잘 하고 싶어서 이 곳 미국까지 왔지만 도저히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인 학생들에게 열심히 말을 걸어 봤지만 그들은 자신의 영어를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영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도와달라는 것이다. ‘영포자가 미국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감은 했지만 난 그의 영어를 봐 줄만큼의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난 사정은 알겠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그건 힘들겠다고 대답했다.

 

그가 갑자기 영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이 사람, 한국어 어순으로 영어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어에 묵음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모든 스펠을 다 발음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아니라면 그의 영어를 못 알아 듣는 것이 당연했다. 한마디로 그는 알파벳만 겨우 아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어순과 묵음 몇 개만 알려주었는데도 그는 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그는 이 대학의 랭귀지스쿨 하위 레벨 클래스에 속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 내가 한번 가르쳐볼까? 나는 그의 그런 뻔뻔스러움에 기대를 걸었다. 언어의 반은 뻔뻔함 아닌가. 이 사람, 기본만 안다면 영어를 아주 잘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수업료로 제가 밥을 차려드리는 것 어떨까요?

 

? 밥이라고? 미국의 대학 기숙사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단어는 아마도 밥일 것이다. 한국식 밥을 차리기 위해서는 먼저 차가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야 한다. 친구와 나의 스케줄을 맞춰서 한국마켓에서 장을 봐 와야 한다. 양념 고추장 냄새도 꺼려했던 미국인 룸메이트가 떠오른다. 그녀가 없을 때 한국 음식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도록 조리해 먹어야 한다. 행여 냄새가 밴다면 몇 날 며칠을 룸메이트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장보기부터 뒤처리까지 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기 위해 나는 학교 식당에서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사 먹거나 아주 가끔 기숙사 방에서 신라면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는 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 밥을 차려준단 말이지. 오케이! 무조건 오케이였다. 그렇게 우리의 지속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그는 밥을 먹여주겠다는 약속을 아주 잘 지켰다. 주로 이민자 노인들로 구성된 그 지역의 한인 교회나 한인 성당은 젊은 청년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는 주말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감사의 표시로 한국식 반찬들을 받아 왔다. 그렇게 받은 반찬들은 그가 혼자 먹기에 너무 많은 양이었고, 같은 기숙사에 있었던 나와 나눠 먹기엔 적당한 양이었다. 그는 작은 전기밥솥을 구해서 매일 밥을 했으며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반찬들과 함께 한 상을 차려내었다. 김치며, 삼색나물, 불고기, 낙지볶음, 전 등, 30년 이상 타국에서 살아오신 한인 할머니들의 손맛은 우리의 전통 음식 맛을 그대로 살려내었다. 그는 매일 점심을 차려주었고 저녁 먹을 거리들을 알뜰살뜰 챙겨주기도 했다.

 

그가 봉사활동을 하는 그 시간에 나는 그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메울만한 초특급 울트라 기초부터 시작해서 토플 시험 대비와 현지 수업을 따라갈만한 수준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내용들을 정리했다. 석 달이 지나 그는 자신이 원했던 토플 성적을 받았고, 그 곳 주립 대학의 입학 허가서를 받아냈다. 대학부설 랭귀지스쿨의 하위 레벨 클래스에서 시작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성과였다. 그는 랭귀지스쿨을 나와 주립 대학의 학부 학생이 되어 전공 수업을 듣게 되었다. 사회학 수업을 들으며 노동가치설에 기반한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라는 에세이를 제출하고 미국 제국주의의 비판에 대한 시험을 치르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미국 사회학 교수로부터 같이 공부해 보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가 나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건강을 포기한 사람, ‘건포자로 보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먹는 것이라곤 인스턴트 음식 밖에 없었으며, 토막잠을 자면서 강도 높은 노동 알바를 하며 수업을 듣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타고난 체력이 부실한 나는 애초에 건강을 위해 무언가 노력해 본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건강을 위해 애 써 본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불태우는 초처럼, 나는 불꽃같이 살다가 어느 날 장렬히 전사하고 싶었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굳이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을 필요도 없었으며, 매일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잠을 챙겨 잘 필요도 없었다. 사실 나는 배가 고픈지도 잠이 오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나는 감각적으로는 참으로 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매일 그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갔다. 끼니 때가 되면 배가 고팠고 잠 잘 시간이 되면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면서 나는 체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의 영어는 그 지역 원어민으로 새로 태어난 것만큼 유창한 수준은 아니지만 외국계 회사에서 월급 받을 정도로 향상되었고, 나의 체력은 새로 태어나 선천적인 장애를 극복한 수준은 아니지만 일을 하면서 건강한 아이 둘을 낳고 키울 정도로 건강해졌다. 세상에 핸디캡이 없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핸디캡은 서로를 더욱 견고하게 엮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밥 해주는 남자와 밥 먹는 여자로.


 

IP *.65.15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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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01:21:30 *.113.77.122

남편이 보리차와 수육 챙겨주는 이유가 있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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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22:41:53 *.65.153.202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보리차 수육 챙겨주는 걸 화장실 청소랑 바꾸면 안 되겠냐며 협상중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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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09:07:42 *.255.24.171

처음 듣는 이야기...아름답네. 이런 스토리였구나! 궁금했는데...

서로 같이 껴안을 수 있는 핸디캡이나 상처가 있다는 것은 남들이 생각하는 이상의 결속력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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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22:43:06 *.65.153.202

완벽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부는 서로 돕고 사는 재미는 덜할 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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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6:11:27 *.196.54.42

"나는 불꽃같이 살다가 어느 날 장렬히 전사하고 싶었다." 오호~ 이런, 불꽃같은 정열의 앨리스!

참으로 극적인 만남이군요, 핸디캡이 사랑의 불씨였다니.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밥 해주는 남자와 밥 먹는 여자로."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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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22:45:47 *.65.153.202

애가 생긴 이후로는 엄청 잘 챙겨먹고 있습니다. 자기애보단 모성애가 강하더라구요~~^^

열정의 구달님은 역시 제 열정을 알아보시군요~~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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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2:43:54 *.103.151.38

아, 이쁘당. 역시! 거저 사람은 뭘 좀 먹여야 따라오게 되어 있는 거닷~~~ ^^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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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22:50:40 *.65.153.202

먹는 거 중요하지요~~ 하지만 전 미각이 둔해 안타깝다는.... 그저 배만 채우면 된다는;;;; 감각적인 종종언니를 항시 부러워한다는거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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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08:49:32 *.85.20.115

오늘도 맛난 밥 먹었어? 두 사람 얘기는 늘~따땃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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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22:51:27 *.65.153.202

에움에게 내 따뜻함이 전해진거야? 뿌듯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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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11:19:05 *.124.78.132

두 분의 만남이 늘 궁금했는데 드디어 이렇게 알게 되네요.

로맨틱 코메디 같은 해피엔딩 로맨스에 열광하는 저인지라 읽는 내내 우와!를 연발했어요.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아름다운 인연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인연을 이렇게 '핸디캡'이라는 소재로 잘 풀어나가시는 모습이 어찌나 또 감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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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22:54:27 *.65.153.202

<파라슈트> 읽으면서 꽂힌 단어가 핸디캡이네.... 모든 이가 후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후자가 상식인 이상을 꿈꾼다네... 그렇게 된다면 일상이 로맨틱 코미디, 해피엔딩 로맨스가 될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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