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정수일
  • 조회 수 1504
  • 댓글 수 10
  • 추천 수 0
2014년 10월 20일 01시 59분 등록

동창 녀석들

2014. 10. 20


- 정수일씨?

- 네. 누구신지...

- 우철이다.

- 네?

- 우철이다. 내 누군지 모르겠나?

- 우철이? 와~~니가 우얀일이고?

녀석과의 통화를 계기로 하나 둘씩 연락이 닿고 얼마 후 우리 여섯 명은 한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25년 만이다. 설레었다. 그간 어떻게들 살았는지… 많이 변했을 것이다. 만나면 알아보기나 하려나!


어머니는 늘 ‘너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 고 말씀 하셨다. 남들보다 한 해 일찍 들어간 시골학교에서 나보다 머리 하나쯤 더 있는 녀석들에게 뒤지지 않고 제법 똑똑하단 소릴 들으며 학창시절을 시작했다. 조그만 시골동네에선 이 조차도 이야기꺼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어머니는 내게 늘 긍정적이었다.


나는 이 땅에서 일본식 교복을 입은 마지막 세대다. 학교 정문에선 선도 완장을 찬 고등학교 선배들이 각을 잡고 있었고 복장과 두발이 불량하거나 지각한 학생들을 단속했다. 박달나무 몽둥이를 든 학생부장 선생님은 아이들 엉덩이에서 먼지가 풀석풀석 나도록 두들기고 있었고, 나는 정문 앞에서 긴장하곤 했었다. 키가 작고 외소 했던 나는 힘세고 두꺼운 단짝친구가 늘 몇 명은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이런 친구가 있어야 보호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친구들은 오징어 가생, 수제비 따위의 놀이에 나를 끼워 주었으며 나를 좋아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두발과 교복이 자율화 되었다. 양복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계셨지만 어머니는 아들 교복을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마련해 주실 수 있었다. 그것마저도 아버지 친구 분이 하시는 맞춤집에서 외상으로 하셨을 것이다. 어렵게 마련한 교복은 채 일 년도 못 입고, 어머니는 이제 교복 대신 조다쉬 청바지에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장만해 주셔야 했지만 당신의 등골이라도 빼서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키고 싶어 하셨다. 당신을 닮아 마음만 먹으면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평범한 중학생이었지만 공부만큼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왜 인문계 고등학교를 고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재수생이 되었다. 당시 고등학교 재수가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드문 경우도 아니어서 시내 학원가엔 학교 만한 입시학원들이 즐비했었다. 


그렇게 일년, 사립학원에 다니면서 어머니의 등골을 쪽쪽 빨아 원하던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지만 학교생활은 평온하지 못했다. 도시락 말고는 가방에 넣어 다닌 기억이 없다. 불행하게도 내게 고등학교의 기억은 몽둥이, 도망 그리고 반항(저항이라고 하고 싶지만)이었다. 재수생이란 이유로 나와 친구들은 선생님과 선배들에게 요주의 인물들이었으며, 동기이자 동생인 동급생 녀석들은 어떤 놈은 형이라고 하고 또 어떤 놈은 노골적으로 한판하자는 분위기였다. 


고등학교 2학년 우리 반엔 재수생이 아홉이나 몰려 배정되었다. 어느 날 우리는 교무실로 호출되어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그 이유가 반이 전교 꼴찌를 했으며 그 이유가 우리 아홉 명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공부 못한다고 두들겨 맞고, 분위기 흐린다고 두들겨 맞고, 담배 핀다고 두들겨 맞고, 집 나간 놈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두들겨 맞고, 인사 안한다고 두들겨 맞고, 교과서 옆 반에서 빌려 왔다고 두들겨 맞고, 맞다가 도망갔다고 또 두들겨 맞고, 이래서 맞고, 저래서 맞았다.


또 한번은 소풍을 갔다가 파출소에 잡혀 들어가 꽤 긴 시간 두들겨 맞았다. 다른 학교에서 소풍을 왔는데 그 가운데 어떤 녀석들이 두들겨 맞고 돈을 뺏긴 모양이었다. 우리가 두들겨 맞은 것은 이들이 진술한 녀석들과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오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가서는 학교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또 두들겨 맞아야 했다. ‘오해받을 짓을 하고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겼다.’ 는 것이었다.


덕분에 어머니는 종종 학교에 불려 오셔야 했다. 웬만한 것은 몸으로 때웠는데 학교에서 어머니께 직접 연락이 갈 때는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 오시던 날 저녁상은 늘 푸짐 했다. 어머니의 훈계는 항상 이런식이어서 넘어가지 않는 밥알을 억지로 꾸역꾸역 삼켰지만 날이 새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는 어제로 돌아가 있었다.


녀석들을 만났다. 그때 얼굴 그대로다. 단박에 알아볼 수 있겠다. 늦도록 먹고 마시며 그때 기억들을 들췄다. 웃고 떠들었지만 함께 나눌만한 추억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다. 희미한 그때 그 시절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사이 머리가 다 까진 녀석, 아직 결혼을 못한 녀석, 결혼을 여러번 한 녀석, 몇 번 말아 먹은 녀석, 제법 성공한 녀석, 악착같이 알뜰한 녀석, 모두들 살아온 삶들이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사는 이야기로 돌아 나오니 두 마디 이어가기 어렵다. 짧은 적막이 흐르면 누군가가 건배 제의를 한다. 그리고는 다시 그 시절 이야기로 돌아갔다. 


녀석들을 만나면 까까머리 머슴애들로 돌아가 그때 처럼 위하고 그때 처럼 나누고 그때 처럼 까불 거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주잔이 몇 순 배 돌고 났을 때 나는 그때 그 시절 이야기 말고는 공유할 수 있는 꺼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사이에는 긴 시간의 벽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인연도 흐르고 친구도 흐른다. 묵은 인연이라 깊고 무거운 것이 아니며 새로운 인연이라 얕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함께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그때 그 인연으로 족하다. 다행히 인연이 이어져 길게 닿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인연이란 것도 각각의 무게와 쓰임 만큼 유통기한이 있는 것이더라. 오늘 그대들과의 인연을 가벼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후 녀석들과 몇 번을 더 만났다. 때때로 안부를 묻고 때때로 다시 만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25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사는 모양도 생각하는 것도 가치관도 다르다. 그 시절 이야기가 멈추면 금새 서먹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함께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씩 공유 꺼리가 늘어나고 함께 할 꺼리가 생길 것이다.


길게 함께 하고 픈 사람이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저 만나고 또 만나자. 친구니까, 친구는 그러는거니까.



IP *.182.55.91

프로필 이미지
2014.10.20 12:09:14 *.255.24.171

간만에 재미 있었겠네요.

언제나 무슨 이야기를 하든 어머니의 이야기는 빠질 수가 없군요. ㅋㅋㅋ


프로필 이미지
2014.10.21 10:09:40 *.104.9.216
그러네. ㅎㅎ
어릴적 이야기에 어무이가 빠질턱이...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4.10.20 17:43:26 *.196.54.42

공감! 그대의 80년대 이바구나 내 70년대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네^^

"함께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그때 그 인연으로 족하다." 완전 멋진 문장!

프로필 이미지
2014.10.21 10:10:16 *.104.9.216
세대를 아우르는 글빨인가요?
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4.10.21 09:36:00 *.85.20.115

어린 시절 하던 놀이가 뭔지 모르는 걸 보니 피울님과 나이차가 느껴지는데..

친구와 인연에 대한 이야긴 차이가 안 느껴지네요~ㅍ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4.10.21 10:11:03 *.104.9.216
그래서 지금 인연들이 귀하다에 백만스물두표.
세대차이는 없는 걸로...
프로필 이미지
2014.10.21 09:53:38 *.223.14.85
인연도, 친구도 흐르는군요. 좋네.
프로필 이미지
2014.10.21 10:12:00 *.104.9.216
흐르고 흘러 하구에서 다시 모일 수 있을까...싶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4.10.21 11:16:52 *.124.78.132

만나요 우리 ^^!!! ㅋㅋㅋㅋ

저도 요즘은 오래된 친구가 편하고 또 좋더라고요. 그 당시에 싫어했던 사람도 다시 보면 또 달라진 모습에 정이 가기도 하고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래요 ^^ 물론 우리 데카상스는 만난지 1년도 안됐지만 , 왠지 만난 지 엄청 오래된 편안한 동지 느낌이라는~~~  

프로필 이미지
2014.10.21 19:55:46 *.104.9.218

네...자주 봅시다.

ㅎㅎ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332 답은 바로 나 [10] 어니언 2014.10.20 1428
4331 19번째 남편의 생일_찰나칼럼#26 [10] 찰나 2014.10.20 1674
4330 인생의 통과의례? [8] 왕참치 2014.10.20 1638
4329 ㅂ의 시대가 흘러간다 [6] 에움길~ 2014.10.20 1576
4328 함께 하는 즐거움 [3] 녕이~ 2014.10.20 1350
4327 논개의 기품, 기방의 화려함을 담은 진주냉면 [10] 종종 2014.10.20 2013
4326 #26 - 여보 축하해! [5] 희동이 2014.10.20 1378
» #26 동창녀석들_정수일 [10] 정수일 2014.10.20 1504
4324 밥 해주는 남자, 밥 먹는 여자 [12] 앨리스 2014.10.19 1979
4323 자전거로인생전환_구달칼럼#26 [10] 구름에달가듯이 2014.10.19 1481
4322 3-24. 가족세우기로 하는 우리집 기초공사 [3] 콩두 2014.10.18 1543
4321 종종의 인터뷰 수업 후기 + 과제 [7] 종종 2014.10.14 1727
4320 10월 오프 수업 후기 [5] 앨리스 2014.10.14 3135
4319 10월 오프수업 [2] 녕이~ 2014.10.14 1482
4318 지금까지 만났던 저자의 인터뷰 [1] 어니언 2014.10.14 1573
4317 #25 나는 신을 안다_정수일 [5] 정수일 2014.10.14 1520
4316 10월 오프수업과제와 후기-Brother!!1 [4] 왕참치 2014.10.14 1395
4315 10월 오프 수업 후기 - 희동이의 인터뷰 [7] 희동이 2014.10.14 1499
4314 역사 속 인물을 만난 기적 같은 날_10월오프 후기_찰나칼럼#25 [4] 찰나 2014.10.14 1627
4313 인물탐구_10월오프수업후기_구달칼럼#25 [6] 구름에달가듯이 2014.10.13 1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