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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0일 09시 36분 등록

논개의 기품, 기방의 화려함을 담은 진주냉면

 

그날 진주에 들른 것은 오로지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모처럼 맘 먹고 떠난 34일의 남도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악스럽도록 춥고 길었던 그 해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남해의 때이른 봄 햇살을 누리고자 떠난 여행이었다. 아직 충충한 겨울잔설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서울을 벗어나 지냈던 남해의 사흘이 어찌나 나른하고 훈훈하던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진주는 그래서 들렀다. 일단 맛있는 밥이라도 먹어야 덜 억울할 것 같아서. 그리고 답답한 귀경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진주가 먹을 것도 볼 것도 많은 곳이라는 자랑을 우연히도 진주 출신의 상사, 후배, 동기들이 포진한 직장에서 자주 들어왔던 터였다.

 

거기까지 갔어? 그럼 진주냉면 한번 먹어봐. 진주에서 나고 자란 동료가 보내준 문자에는 원조집이라는 가게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그렇담 가봐야겠지! 아직도 칼바람이 매서운 날씨에 냉면을 먹으러 가자는 제안에 모태면식의 축복을 타고난 두 아들은 군말 없이 따랐고, 남편은 툴툴대면서도 기사 노릇을 해주었다. 어렵지 않게 찾아간 식당은 계절 탓인지 한산했고 메뉴에 온면과 육전이 있어서 감기 기운이 있던 남편까지 불만 없이 음식을 주문했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따끈한 육전이 먼저 나왔다. 면식만큼이나 육식에도 열을 올리는 나로서는 그냥 아무 양념 없이 굽기만 해도 맛있는 쇠고기를 왜 굳이 전을 만드나 싶긴 했지만, 그 놈의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어서 주문한 것이었다. 어쨌든 서울에서는 본 적이 없는 음식이니까.

 

설명하자면 육전은 야들야들 얄팍하고 넓적하게 저며낸 쇠고기를 계란물을 입혀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부쳐낸 고기부침개다. 그렇다, 그냥 계란옷만 입혔을 뿐인데! 대체 고기에 무슨 짓을 했길래, 노린내는 간 데 없이 이토록 고소한 냄새가 날까? 어떻게 이렇게 기품 있는 맛이 날까? 신기해하며 게눈 감추듯 한 접시를 해치웠다.

 

 

그리고 드디어 본 경기! 육전 한 접시를 비우자마자 물냉면과 비빔냉면, 온면이 나왔다. 고풍스러운 놋쇠그릇에 담긴 냉면과 비빔냉면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 마냥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모양새였다. 메밀과 고구마 전분을 섞었다는 면발 위에 곱게 채 썬 배, 배추김치, 무채, 오이, 실처럼 얇게 썰어낸 계란지단과 파, 실고추에 채 썬 육전, 계란 반쪽이 올라가 있는 것이 꽤나 호사스런 국수다. 여기에 물냉면은 일반적인 평양냉면보다는 훨씬 진한 색감의 육수를 썼고, 비빔냉면은 입술연지처럼 빛 고운 양념장에 까만 김까지 얹으니 다채로운 색감이 더욱 돋보였다. 슴슴하고 담백한 맛이 매력인 평양냉면의 육수라면, 이렇게 다양하고 강한 맛의 고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밸런스가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진주냉면의 육수 맛은 평양냉면의 그것보다 훨씬 진하고, 독특한 깊이가 있어서 육전이나 배추김치 같은 고명과도 무리 없이 어울렸다. 대체 육수에는 또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보니 진주냉면은 소고기 육수에 동치미를 섞는 평양냉면과는 태생부터 달랐다. 남해의 자랑 죽방 멸치와 디포리, 바지락, 건홍합, 건황태, 문어, 표고버섯 등을 죄다 넣고 우려낸 다음, 달군 쇠를 써서 비린내를 없애고 보름 동안 숙성을 시켜 만든 해물 육수를 쓴단다. 비빔냉면 또한 진주비빔밥의 오랜 명성을 간직한 지역답게, 눈과 혀를 모두 사로잡는 궁극의 비빔국수라 할만 했다. 품격 있는 맛과 조화로운 모양새를 더하니 함흥회냉면보다 오히려 윗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간 냉면 꽤나 먹어본 자를 자처해왔으나 진주냉면의 맛은 예상치 못했던 신세계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음식이 몰려있다는 서울에서 왜 이런 어마어마한 냉면을 만나지 못했던 걸까? 아직 면식수행이 부족한 탓인가? 사실 답은 간단했다. 진주냉면은 진주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거. 몇 년 전 원조 진주냉면집의 자녀들이 분가해 사천과 부산에도 가게가 하나씩 생겼다는데, 그래 봤자 경남지역의 극히 일부에서나 맛볼 수 있는 향토음식이었던 거다.

 

그러나 진주냉면의 명성은 우리 대에 와서 잊혀졌을 뿐, 본디 평양냉면과 함께 조선 최고의 냉면으로 꼽히는 명물이었다.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의 민족 전통(1994)’‘냉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연중 행사와 풍속을 세세히 기술한 동국세시기(1849)에 등장할 정도로 유서 깊은 음식이 진주냉면이다.[1] 이렇게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 조선 최고 일미로 발전하게 된 것은, 북 평양 기생, 남 진주 기생이라 칭할 정도로 이 지역이 조선 시대 교방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예로부터 지리산의 풍부한 농산물과 남해의 신선한 해산물이 모이는 요충지였던 진주는, 향락의 끝을 달리는 교방문화와 육해공을 망라한 풍성한 식자재가 만나 조선시대 식문화의 정수라 할 교방음식[2]이 특히 발달했다. 그러니까 진주냉면은 교방음식 중에서도 양반들이 기생들과 선주후면(先酒後麵)하는 습관에 따라 호화로운 술판 뒤에 입가심으로 먹던 고급 야참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전성기를 맞았던 교방문화는 일제의 침략과 함께 교방청이 폐쇄되면서 쇠락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진주냉면은 지금은 맥이 끊긴 교방음식의 전통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문화유산인 셈이다. 도포 자락 휘날리는 고관대작들과 비단 치마를 휘감은 꽃 같은 기생들의 연회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냉면 한 그릇, , 오늘 나는 수백 년을 살아남은 예술을 맛보았구나.    

 

*         *         *

 

 

아무리 실내가 따뜻하다지만, 차가운 냉면을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둘러 마시고 나니 몸이 후덜덜 떨린다. 그래도 진주까지 왔는데, 촉석루에는 한번 올라봐야지 싶어 코트에 목도리를 둘둘 싸매고 진주성으로 향했다. 유유히 흐르는 강을 끼고 널찍하고 양지바른 터에 자리잡은 진주성은 나처럼 눈썰미 없는 사람이 보아도 절로 감탄이 날 만큼 풍광이 좋고, 기운도 좋다. 굽이진 데 없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물길이, 굳건하게 선 성곽을 감싸고 은거울처럼 반짝였다. 볼 것 없는 겨울에 보아도 이리 훤하고 밝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명당이니, 꽃피는 계절이면 그 흥취가 오죽하랴. 예술과 향락의 교방 문화가 왜 이곳에서 그리 발달했는지 절로 이해가 됐다.

 

먹여놓고 풀어놓으니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좇아 성 안의 언덕길을 오르다 조그만 사당과 마주쳤다. 이 곳은 1593, 10만 왜군의 침입을 3천 병사가 막다 7만 백성들과 함께 죽어간 진주성 항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다. 그런데 사당 안에는 갑옷 입은 장수가 아닌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 논개였다. 그녀의 역사도 이 곳에 묻혀 있었다.

 

이 작은 사당은 1593년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적이 승전 후 벌인 연회에서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투신한 의기, 논개의 영을 기리는 곳이었다. 이 비장한 여인을 그린 초상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옛 여인들을 그린 조선화풍의 초상화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서늘한 기품을 지닌 미인이었다. 지금도 사당 옆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그녀를 품고 흘러갔을 것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서글픈 여인의 초상과 사금처럼 반짝이는 강물이 가슴으로 흘러 들었다.

 

, 이 곳은 이렇게 짧게 머물다 갈 곳이 아니구나. 십여 분만에 사당문을 나서며 왠지 못할 짓을 한 것처럼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다시 와야겠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내내 그녀의 서글프도록 고운 얼굴이 떠올랐다. 꽃 피고 새 우는 따뜻한 계절에 꼭, 당신을 만나러 오리라. 그리고 그 무심하고 따뜻한 강이 내다보이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겠다.   

 

 

 


[1] 두산대백과

[2] 진주교방청의 연회음식에서 비롯된 한정식(韓定食). 조선시대에는 관찰사 등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오면 그들을 접대하기 위해 연회가 베풀어졌다. 진주교방음식은 중앙의 관리들을 접대하기 위한 연회에서 기생들의 가무와 술이 곁들여지는 진주교방청의 연회음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 중기에 음식문화의 꽃을 피웠다. 진주는 서부경상남도의 교통 중심지로 지리산의 청정 농산물과 남해바다의 신선한 수산물을 가까이 할 수 있어서 산해진미의 음식문화가 다양하게 발달되어 왔다. 이러한 요인들로 말미암아 진주교방음식이 타 지역들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다 일제 침략 후 교방이 폐쇄되면서 교방문화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고, 교방음식과 상차림은 일부 한정식 식당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 향토문화전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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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12:35:16 *.255.24.171

진주냉면....나도 먹어본 기억이 없네. 입맛이 다져지는 군.

11월의 쌀쌀한 날씨에 진주성을 방문하고선 꽃피는 봄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나도 했었지.

진주성을 두 번 갔었는데 볼수록 아름다운 곳이더라구.

역사와 냉면의 맛이 어우러지니 먹지 않아도 감칠맛이 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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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0 22:39:46 *.103.151.38

진주성은 멋진 곳인데 묘하게 서글퍼. 자꾸 논개에 감정이입하게 되더라구... 하지만 진주냉면은 케 맛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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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08:55:24 *.85.20.115

저한테 냉면은 지금까지 먹은 곳 중 진주 냉면이 제일이었어요.

비도 오는데 굵은 면발에 육전 얹은 진주냉면~땡긴다....

면 먹고 싶어질 때면 언니 국수 글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대리충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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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14:51:27 *.103.151.38

에움과 진주냉면...도 완전 땡긴다!  진주도 가고프다~ 마산부터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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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09:48:08 *.223.14.85
묘사가 죽이네요.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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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14:53:18 *.103.151.38

전국민을 면식수행자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는 글쓰기라.. 효과가 있음 다행입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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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11:12:22 *.124.78.132

비도 많이 오고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는 내내 당장 진주로 달려가 냉면 한 사발 들이키고픈 생각이 가득했어요 ^^

역시 종종 언니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나봐요. 포항에서 올라오다 진주에 들릴 시간도 있을까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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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14:54:19 *.103.151.38

진주 못 가면 부산 와서 먹어도 되지롱. 진주 원조집 딸내미가 하는 냉면집이 우리 집 가까이에 신축 개업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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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16:48:30 *.196.54.42

"서늘한 기품을 지닌 미인이었다. 지금도 사당 옆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그녀를 품고 흘러갔을 것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서글픈 여인의 초상과 사금처럼 반짝이는 강물이 가슴으로 흘러 들었다." - 이런 문장을 내가 쓸 여행기에도 함 살려봤으면.... 감동입니다^^

 

진주냉면에 이런 깊은 맛의 사연이 있을 줄은.... 종종의 국수가 맛깔스렁 기행문으로 읽히네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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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3 20:48:53 *.103.151.38

국수로 여행하기...를 주제로 쓴 글이었는데 구달님이 알아주셔서 기분이 흐뭇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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