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 조회 수 2174
- 댓글 수 10
- 추천 수 0
책읽기가 힘들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북리뷰는 작가이며 변화경영사상가였던 구본형식이다. 나는 그의 개인 대학원에서 1년 공부했다. 내가 ‘발로 책읽기’라고 부르는 내용은 이러하다.
‘저자조사’,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내가 저자라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저자조사를 한 뒤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달도록 했다.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는 밑줄 그은 걸 타이핑해둔다. 필사의 개념도 있고 다음에 자신의 책을 쓸 때 인용할 수 있는 인용문을 미리 확보해둔다는 의미다. 소설가 신경숙씨는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했다. 공지영씨는 박경리씨를 필사했다. ‘내가 저자라면’ 꼭지에서는 자신의 책을 쓸 때 참고할 수 있도록 저자가 목차와 뼈대를 세운 방식을 유심히 관찰한다. 세월과 사람들에게 점검을 끝낸 양서들을 텍스트로 저자에게서 직접 기획안 훈련을 받는 거다. 장점과 보완점을 평설한다. 평설은 사전에서는 ‘비평하여 설명하다’고 풀이한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책에는 그의 개인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연구원 1인의 평설이 뒤에 붙어 있다. 구본형은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으로 나를 잘 모르는 유명인들의 평가보다는 가까운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내 책에 대해 어떻게 읽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내 연구원들에게 이 책에 대한 평설을 실어 달라 했다. 그들은 객관적일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이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애정이 있는 객관성’ 나는 이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166쪽)” 내가 책을 읽을 때의 평설 또한 이런 방식이었으면 했다.
이 방식의 북리뷰가 힘이 드는 건 인용문 타이핑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이다. 20p 이상이 기준인데 배가 넘을 때가 많다. 타이핑이 너무 노동집약적인데다, 속도가 느리고, 기본적으로 내가 초점있는 렌즈를 갖지 못해서인 듯하다. 저자조사가 나는 책 왼날개를 베끼는 정도에 머문다. 저자의 삶을 만지지 못한다. 사람에 대해 애정을 느끼기 어려운 수준의 앎을 가지고 저자를 평가할 수가 없다. 부족한 부분이다.
투덜대는 찰라, 다산 정약용이 필사 공부법에 대한 무게를 실어준다. 다산은 책을 읽을 때 카드작업, 초서를 하게 했다. 아버지의 명으로 책을 읽으면서 하나하나 옮겨 적던 아들들이 번거롭게 시간만 많이 드는 초서의 방법에 대해 회의가 들었던 모양이다. 책을 읽다 말고 붓을 들어 카드작업을 하려니까 독서의 맥락도 자꾸 끊기고, 무엇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산은 초서야말로 책을 효과적으로 빨리 읽는 최선의 방법임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찌 초서의 효과를 의심하여 이 같은 질문을 한단 말이냐? 무릇 한 권의 책을 얻더라도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채록하여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백 권의 책이라도 열흘 공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산은 도능독의 ‘그저 읽어치우는 독서’를 독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 책이나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에게 책을 읽는 행위는 중요한 부분을 초록하고 의미가 맺히는 대목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메모해가면서, 지적인 성장과 인간의 성숙을 함께 이루어가는 행위였다. (정민 <다산선생지식경영법>140쪽)
좀 쉬운 방식, 그러니까 다이제스트 방식을 제시할 때가 있다. 이건 20대의 젊은이들에게 준 책 <미치지 못해 미칠 것 같은 젊음>에 나온 거다. 나는 그 책에서 ‘나’가 꿈꾸는 10년 후의 미래에 가장 공감이 갔다. ‘나’가 초등학교 교사여서 이른 칼퇴근 이후 시간을 활용할 수 있고, 관심분야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는 저술 활동과 강연 그리고 상담이 주된 일이다. 10년 동안 1천 권의 책을 읽었다. 특히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한 4년동안 500권의 책을 읽고 각각에 대하여 3쪽 씩의 북 리뷰를 작성하여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만화와 작곡 훈련을 계속해왔다. 만화와 음악 그리고 글쓰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다. 주로 아이들 청소년을 대상으로 그들의 미래의 꿈을 구체적으로 가시화시켜 가는 과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한편 직장인, 장애인, 주부들을 대상으로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일상 속으로 꿈을 불러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꿈과 관련하여 다섯 권의 책을 썼다. 나는 적어도 1년에 한 권씩 책을 출판한다. 내 책은 내 이름을 걸고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이다. 나는 나만이 쓸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 내 홈페이지는 2010년 이후 한국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홈페이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치지 못해 미칠 것 같은 젊음>
여기서 권하는 북리뷰의 양은 3페이지다. 그래도 4년 동안 500권을 읽자면 1년에 125권, 일주일에 2권씩 독파하는 속도다. 속도는 어떨까? 그는 1년 과정을 마치면서 ‘1주1책1칼럼, 1일 1문장의 리듬을 잃지 말라’고도 당부했다. 1주일에 1권은 깊이 읽으라는 말. 매일 읽고, 매일 쓰고 매일 읽은 것을 삶으로 새기라는 의미리라. 언젠가 그의 칼럼에서 1달에 1권의 고전을 꾸준히 읽으라는 걸 들었다. 그는 무엇을 읽었을까? 꽂힌 작가를 모조리 읽고 그 작가가 읽은 것을 읽는 캠벨의 독서법을 참고했을까? 그가 책을 읽었던 방식으로 눈에 띄는 게 있다.
학습은 성공을 오랫동안 빛나게 해준다. 나는 학습이 의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의무이다. 이 짐을 견디지 못하면 더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짐을 견딘다고 해서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무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의무란 재미없는 것이다. 의무감이란 일상화되는 것이고, 지겨운 것이며, 반복되는 것이고,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는 무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읽고 쓰는 것이 의무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으며,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가 되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취미가 여전히 취미일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취미가 직업으로 바뀌면서 순수한 호기심과 재미를 잃어버린 전문가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경계해야 했다. 263 나는 한 가지 책을 읽는 것을 경계했다. 읽기 싫으면 읽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썼다. 매일 쓰는 것은 다행히 아주 즐거운 놀이였다.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263쪽
이런 글도 눈에 뜨인다.
나는 우리의 삶이 골을 넣기 위한 실패투성이기를 바란다. 그 수많은 시도,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지 말자. 그 실패를 지금부터 시도라고 부르자. 첫째, 실패보다 한 번 더 도전하자. 둘째, 시도가 단순반복에 그치지 않고 창의적 시도가 되도록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자. 매일 독서를 해 1년에 50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머리 속에 남는 것이 많지 않다면 독서 방식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밑줄을 치면서 읽자. 다 읽고 나서 밑줄 친 부분을 컴퓨터에 옮기면서 다시 음미하자, 강렬하게 다가오는 구절은 따로 떼어내 ‘나를 움직이는 한 마디’라는 파일에 넣어두자. 그리고 응용하자. 프레젠테이션에도 인용하고, 팸플릿을 만들 때도 응용하고 편지를 쓸 때도 인용하자.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147쪽)
그의 유고집 편집에 참여한 제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사부님에게 책을 읽는 법과 책에서 잘 배우는 법에 대해 메일로 물은 적이 있다. 며칠후 답신이 왔고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나 책의 핵심을 이해할 것, 둘 재밌고 좋은 사례를 찾을 것, 셋,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
또 한 번은 글쓰기에 관해 한 줄의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매일 더하고 매일 흐르거라.”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편집 후기 - 홍승완)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책을 읽을 때 어제 읽은 부분의 밑줄을 한 번 죽 읽고 나서 오늘 읽을 데를 나간다는 부분이 있었다. 며칠 해보니 기억에 도움이 되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따르면 학습이 일어난 뒤 20분, 1시간, 8.8시간, 24시간, 48시간 후에 반복해주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입력하기에 좋단다. 이건 읽은 뒤 책을 덮기 전에 밑줄 훑고, 그 날 저녁 때 반복, 하루 뒤, 이틀 뒤에 읽기 전에 전에 읽은 부분을 반복한다는 의미다.
선배 중에는 현역을 마친 뒤에도 끊임없이 북리뷰를 연구원 시절처럼 몇 년간 계속해 온 이가 있다. 흔치 않은 예다. 함께 읽는 스승과 동기가 없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끊임없이 1년간 연습한 방식을 수련하여 자신의 습관으로 맞아들여 매일 산다는 건. 나의 강점 테마는 최상주의자, 연결성, 신념, 개인화, 책임이다. 여기엔 효율적인 작업을 지휘하는 테마가 없다. 전략, 초점, 성취 같은 것. 두루뭉수리하고 한 없이 늘어지는 북리뷰의 원인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제자가 스승을 모시는 의미를 살펴보자.
삶에 완전히 통달한 스승은 없다. 우리 모두는 여전히 삶에 대해 배워 나간다. 누구나 인생으로서 미완성이다. 그런 아주 깊이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삶의 세밀한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스승이 있다면 삶에 깊이 귀를 기울여 듣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스승은 단지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알아내야 한다. 스승을 따름으로써가 아니라 스승이 가리켜 주는 길을 따라 스스로 걸어감으로써 알아내야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듣는 비법을 배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삶의 비법을 배울 수는 없다. 스스로 삶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레이첼 나오미 레멘 <할아버지의 기도> 245쪽)
달마대사가 한국으로 왔을 때 찾아온 제자가 있었다.
“제 마음을 편안케 해 주세요” 말했다.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 내놓아라. 내가 편안하게 해 주겠다”
그는 스승의 말을 참구하느라 밤새 눈 내리는 바깥에 서 있었다. 새벽에 스승에게 아뢴다.
“마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스승은 “내가 너를 편안케 했다” 말했다.
그가 서 있는 시간은 ‘하루’라고 표현되었지만 물리적인 양이 1년인지 5년인지 10년인지 알 수 없다. 꽃 피고 비 내리고 눈 날리는 동안의 꾸준한 정진이 제자의 할 일이다.
황상은 다산의 강진시절 제자다. 황상은 열 다섯에 들은 다산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날로 좋아졌다. 그의 임술기에 스승과 제자의 모습이 선명히 나온다. 읽어본다.
“내가 산석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 것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 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 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틔우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나는 당시 동천여사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내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동자로 관례도 치르지 않았다.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동안 독서를 그만두고 쟁기를 잡고 있을 때에도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 (임술기, 정민 <삶을 바꾼 만남> 34쪽)
그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깊은 인생>에서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인생으로 도약하는 순간에 대해 관찰했다. 자신의 가슴의 북소리를 따라 떨쳐 나서라, 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가라, 천둥 같은 스승을 모시고 일만시간을 묵묵히 가라고 했다. 그 묵묵함이 배짱이리라. 스승은 어떤 사람일까? 조주선사의 예가 나온다. 불이 났는데 방 안에 갇혀 있던 제자에게 스승은 열쇠를 던져준다. 그러나 문은 안에서 열고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에 인용한 게 모두 구본형식 독서법으로 타이핑 해둔 북리뷰에서 나왔다. 인용문을 정리하고 감동적인 장절을 뽑아서 감상을 달아두는 건 번거롭고 시간과 힘이 많이 들었지만 유용하네. 그러니 현재로서는 지금처럼 계속 읽어갈 수 밖에 없겠다. 힌트 한 가지를 쥔다. 어제 읽은 책의 밑줄을 오늘 한 번 더 보면서 읽어나가면 타이핑할 때 문장의 선발이 좀 더 명확하고 간총해질 것 같다. 스승의 일은 끝이 났고 제자의 일이 남았다. 깃발을 탓하거나 옮기는 게 아니라 그 붙박이별, 등대를 기준 삼아 나의 항로를 찾아갈 수 밖에 없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멈추지 말고 계속 시도하다 보면 나만의 방식이 체득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