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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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예!"라고 말했다. 《무문관》12칙, 암환주인(巖喚主人)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부정해왔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행복을 스스로 포기했던 것 아닐까? 깨달음의 희열이 별것이겠습니까?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열반일 테니까 말입니다.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서암 사언 스님이 왜 아침마다 자신을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불렀는지 말입니다. 단순한 주인이 아니라 존칭어인 공(公)을 붙여서 부를 정도로 서암 스님은 깨달음이란 별것이 아니라 바로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남이 아무리 선의지를 가지고 조언을 해도, 그 말에 따라 사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악의를 가지고 우리를 노예로 부리려는 사람에 대해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인으로 산다고 해서 마치 독재자나 잔혹한 자본가, 혹은 권위적인 아버지처럼 누군가를 노예처럼 부린다는 것은 아니니까요. 단지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주인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지 않는 법입니다.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으로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예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고개를 갸우뚱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분명해지는 일이니까요. 타인이 밥을 차려주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또 타인이 운전을 해주어야 길을 떠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법입니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자기가 부리는 사람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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