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 조회 수 232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이틀에 걸려 찾아왔던 거친 비와 찬바람이 지나갔습니다. 햇살은 더욱 찬란하고 가을빛은 더욱 고와졌습니다. 때이른 서리와 함께 노오란 산국도 다투어 만개하는 중입니다. 이즈음 나는 어김없이 그 작고 늦된 꽃, 산국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반 시간 가까이 물끄러미 그 꽃에 취해 있었습니다. 벌과 꽃등에와 파리와 나비는 물론이고 무당벌레까지, 손으로도 머리로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곤충들이 날아들고 떠나가며 그 향기와 꽃가루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비오기 전날의 숲은 그 햇살과 바람과 빛이 예술이었습니다. 예의 앞 마당의 산국 곁에 머물고 있는데 문득 스승님이 사무치게 보고싶어 졌습니다. 저 찬연한 가을 햇살 아래서 각자 끌리는 종류의 술을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기며 물들어가는 숲의 한낮 풍경을 말없이 누릴 수 있다면... 더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여쭙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저 저 깊은 산국의 향을 몸으로 느끼듯 스승님의 향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을 품고 숲으로 떠나와 깊은 겨울을 보내던 어느날 나는 스승님께 문자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살고 싶었던 삶에 대한 확신이 그보다 더 무겁고 큰 두려움 앞에 떨고 있던 그 겨울 늦은밤, 나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스승님, 제 꽃 피는 날 있을까요? 정말 있을까요?"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두려움에 밤을 뒤척이다가 뜬 눈으로 새벽을 맞았는데,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휴대전화가 짧게 부르르 두어 번 몸을 떨었습니다. 스승님의 짧은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집으로 오르는 길에 겨울 목련을 보았다. 가지끝에 꽃망울이 달려 있더구나. 털 가죽 꽃망울 안에 그 고운 꽃 곱게 담겨 있겠지."
그 전 언젠가 비슷한 두려움이 나를 장악하고 놓아주지 않을 때도 나는 문자를 통해 여쭌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더러 두려운 날 있으십니까?" 여백을 두지 않고 이런 대답이 날라왔습니다. "나는 매일 두렵다. 눈을 뜨는 하루하루 그렇지 않은 날 없다."
어느새 이제는 더러 다른 이들이 내게 비슷한 질문을 던져오고 있습니다. 나는 스승님과 나눈 그 짧은 이야기를 대신 들려줍니다.
삶의 변곡점마다에서 마주한 그 두려움들을 온 몸으로 관통하는 방법을 알게 된 나는 이제 더 이상은 두려움에 대하여 여쭙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가을 비록 당신과 함께 저 산국향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가슴을 아리게 하지만, 또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움만은 어쩌지 못하는 가을입니다. 이번 주말 이 숲으로 모이는 꿈벗들과 저마다 품고 있는 그 그리움 짙게 나누어 볼 작정입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156 | 나를 기억해줘 (도대체 무엇으로?) | 한 명석 | 2015.06.10 | 2316 |
2155 | [변화경영연구소] [월요편지 44] 가난한 아빠가 해준 말, 부자 아빠가 해준 말 [2] | 습관의 완성 | 2021.01.24 | 2316 |
2154 | 인공지능의 시대, 창의성이란?(5편) [2] | 차칸양(양재우) | 2016.09.20 | 2318 |
» | 두려운 날 있으십니까? | 김용규 | 2014.10.23 | 2325 |
2152 | 목요편지 - 건배사 | 운제 | 2020.04.23 | 2326 |
2151 | [월요편지 62] 나의 4번 째 습관 [2] | 습관의 완성 | 2021.06.06 | 2330 |
2150 | 고1 때 동거를 시작한 친구 | 김용규 | 2014.12.04 | 2332 |
2149 | 가족처방전 - 명절에 시댁에 가기 싫어요. | 제산 | 2018.02.12 | 2334 |
2148 | 재미있게 사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 한 명석 | 2015.02.25 | 2337 |
2147 | 부부는 부창부수하며 산다 | 연지원 | 2015.10.12 | 2337 |
2146 | 적석산, 쌓는 자의 꿈 [1] | 장재용 | 2020.12.15 | 2339 |
2145 | 2015년에도 다사다난 하세요~ | 차칸양(양재우) | 2014.12.30 | 2341 |
2144 | [용기충전소] 서울한달살이의 최고 맛집 [1] | 김글리 | 2020.12.18 | 2344 |
2143 | 살아남기 위하여 | 박미옥 | 2014.10.24 | 2346 |
2142 | 경제공부를 위한 4가지 중요 포인트 | 차칸양(양재우) | 2014.12.02 | 2347 |
2141 | 세계인의 일상을 엿보다 - airbnb | 한 명석 | 2014.07.30 | 2348 |
2140 | 인문학으로 맛보다, 와인, 치즈 빵 [3] | 알로하 | 2020.11.29 | 2348 |
2139 | 참된 공부란 무엇인가? | 김용규 | 2015.04.09 | 2352 |
2138 | 사부님, 이제 저 졸업합니다! [14] | 박미옥 | 2013.12.20 | 2356 |
2137 | 노년 (老年) | 書元 | 2014.12.27 | 23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