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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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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5일 16시 17분 등록

드디어 순례자들의 마지막 여정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였습니다. 문명을 등진 갈리시아의 깊은 산속 마을 오 세브레이로에서 출발한 버스는 루고와 오 코루나를 거쳐 저녁 8시 반에 산티아고에 도착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숙소 정하는 일까지 우연에 맡기고 있습니다. 스페인 전역을 연결하는 알사(ALSA) 버스 터미널이 예외 없이 시내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안 이후 좀 더 대담해졌습니다. 오늘도 우연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짐을 끌고 시내를 향해 걸었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래 전부터 숙원해온 나의 동행(좌샘)을 위해 처음으로 알베르게를 시도해보는 날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개인들이 빌려주는 집과 호스텔에서 주로 잠을 잤습니다. 숙소를 얻기엔 좀 불안한 시간이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미 몇 번의 특별한 경험을 한 이후였기에 우리는 여유만만이었습니다. 설사 방이 없으면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Praza do Obradoiro)에 자리 깔고 자면 되고, 순례자들의 성지인 그곳 광장에서 하루 밤을 새우는 것도 인생에 다시 해볼 수 없는 경험이니까요.

걷다 보니 외관이 괜찮아 보이는 한 알베르게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곳은 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방이 없었던 것이 우리에겐 행운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이 시간, 이렇게 멋진 알베르게에 묵어볼 기회가 없었을테니까요. 우리가 이틀을 묵게된 이곳(Albergue Seminario Menor)는 외관부터가 남다릅니다. 신학교로 쓰이는 유서깊은 석조 건물입니다. 5성급 호텔로 개조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말쑥하게 단장된 중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이 싱그러워지는 드넓은 초록의 공원(Belvis Park)을 끼고 있고 구 시가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이햐~ 감탄이 절로 납니다.

침대를 배정받자마자 우리는 가방을 내던지고 시내로 달려갔습니다. 10분도 채 안되어 우리는 미로 같은 중세의 골목을 지나 장엄한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서서히 위용을 드러내는 성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내가 순례자라면, 800킬로(카미노 프랑세스의 경우)를 한 걸음 한 걸음, 악 조건들과 싸워가며 마침내 이곳에 도달한 순례자라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비록 우리는 직접 발로 걷지는 못했지만 여행의 반 이상을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경로를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부르고스, 히혼, 오비에도, 레온, 오세브레이로(발음이 자꾸 오세이브로로 되는 바람에 제대로 발음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요 ㅎㅎ)를 거쳐 대망의 이곳, 산티아고에 입성한 것입니다. 

성당 남쪽 광장에서는 에스닉 음악 축제가 한창 진행중입니다. 그곳에서 울리는 메탈 음악이 성당의 지붕을 넘어 우리 귀를 흔듭니다. 성당 맞은편 건물의 회랑에서도 스페인 전통 악단이 귀에 익은 관타나 메나(Guant Anamena)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광장 돌바닥에 벌러덩 눕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 뿐, 시에나 캄포 광장을 연상케 하는 이 넓은 공간에 오로지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가슴에 평화 만이 가득 차오릅니다. 내가 있는 이곳은 더 이상 이역 만리 타국 땅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나의 여행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이런 순간들의 연속이자, 갈구입니다. 텅 비었고 동시에 가득 찬 느낌, 이 느낌을 위해 나는 그토록 여행을 사모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산티아고에서는 이틀을 머뭅니다. 내일 모레 정오에는 포르투(Porto)로 넘어갑니다. 하여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반, 유구한 역사와 이야기를 가진 한 도시를 탐험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아쉽지만 이 도시는 미지의 도시로 남겨두려 합니다. 진정한 순례자로 다시 한 번 이 곳에 서게 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동안 전혀 관심 외 지역이었던 이곳 갈리시아 지방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자연에 깊이 끌리고 있습니다. 로컬 여행사가 진행하는 투어, ‘Finesterre-Costa da Morte’를 신청했습니다. 내일 저는 구불구불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갈리시아 해안을 제대로 체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순례자들의 진짜 라스트 여정지인 땅끝 마을 피네스테레에 갈 수 있어 기쁩니다. 우연은 또 내일 저에게 어떤 인연과 감동을 가져다줄지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듭니다.

여러분 부에나스 노체스 Buenas no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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