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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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2014. 10. 27
- 문 열어.
- ...
- 야~~~
- ...
- 문 열어 언능.
- 싫어~~~
다급한 목소리에 낭창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랫배를 움켜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곧 터질 것 같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젠 말도 안나온다.
- 원아. 아빠 쌀 것 같애. 플리즈
- 나 샤워 중이야.
- 잠깐만 열어라. 제발
- ...
- 너 주글래.
- 싫어~~~
아침이면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30년쯤 되어가는 오래된 집엔 화장실이 하나다. 마당에 화장실이 하나 더 있지만 용도 폐기된 지 오래 되었다. 건달이 되면서부터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아졌다. 늦은 시간에 마신 차는 이내 아랫배로 신호를 보내오지만 잠은 어떻게 해서든 그 신호를 늦추어 침대에서 몸을 떼어 놓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되는데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이미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하필이면 그 때가 왜 일곱시 언저리일까!
일곱시 언저리면 우리집 여자들은 분주하다. 애비란 작자는 노숙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엉거주춤 바지춤을 부여잡고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향한다. 종종걸음으로 거실을 건너면서 아이들 방을 탐색한다. 작은 아이는 방에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있다. 다행이다. 작은 아이 방을 지나면 큰 아이 방. 주방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아내는 주방에 있는 모양이다. 큰 아이 방이 비었다. 눈은 이제 본능적으로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 스위치를 보니 ‘ON’ 상태다. 아뿔싸! 젠장찌게, 헐~ 대박~ 왕 클났다.
다급하게 문고리를 흔들지만 굳건하게 잠겼다. 언젠가부터 큰 아이는 화장실 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열세살 처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할테지만 딸 키우는 애비는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다. 그나저나 지금 서운이고 뭐고를 따질 때가 아니지. 화장실 문고리를 부여잡자 아랫배는 이제 참을 의지를 놓고 말았다. 여차하면 싱크대 개수구라도 찾을 지경이다.
- 으악! 원아~~제발~~
- ...
- 잠깐만
비명과도 같은 간절함을 전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 싫어~~~
낭창하기 그지 없는 영혼 없는 단호한 대답이다. ‘애비야! 너는 거기서 싸거나 말았거나 난 절대 열어 줄 수 없단다.’ 드디어 부여잡고 문앞에서 꿇어 앉았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마지막 잡고 있던 의지의 끈을 놓으려는 순간 ‘딸칵’ 문이 열렸다.
후다닥…쏴아~~~살았다.
녀석은 유유히 미끄러지듯 제 방으로 사라졌다. 내가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동안 녀석은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대충 말린듯하다. 나쁜 지지배! 커다란 수건으로 말아 올리고 지나는 녀석에게서 샴푸냄새가 난다. 홀랑 벗고 다닐 수 있는 날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시간은 또 속절없이 흐르고 아이들은 저마다 저대로 저만큼씩 자랄테고 나는 노안이 짙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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