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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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람
2014. 11. 02
[종종이 떠나지 못하고 있을 줄 알았다. 플랫폼까지 따라 내려온 그녀는 만날 때 보다 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세사람은 중간지대에서 만났다. 이들은 모두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몸부림 가운데 있다. 중간지대는 그러니까 이쪽과 저쪽의 경계이거나 변방이다. 경계는 위태롭고 변방은 궁벽하다. 이들은 스스로 궁벽한 위태로움을 찾아나선 사람들이다.
- 종종, 사진 안 필요해요?
- 필요하죠.
- 함 달리까?
- 오실래요?
- 그러죠.
세련된 깐돌이! 종종은 시골로 전학 온 예쁘고 똑똑한 여학생이다. 재기발랄하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친구다. 키워드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가졌다. 함께해서 무엇을 만들기보다는 무엇을 만들어 함께할 수 있다. 그녀의 글은 깨가 튀는 것 같다.
그녀가 가장 먼저 테이프를 끊었다.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어이없게도 국수가 답이었나 보다. 그녀가 풀어놓을 국수가락이 제법 통통하고 찰지다. 국수가락들이 엮어져 책으로 만들어진다.
- 피울님이 카메라 들면 난 반사판 들래요.
참치가 끼어들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이! 그녀는 중화능력이 탁월하다. 어지간한 독기나 스트레스는 금새 중화시켜 버린다. 하얀 알, 까만 알 가리지 않고 품을 수 있다. 에너지와 함께 지구력까지 겸비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앙꼬를 잔뜩 품은 그녀를 운명이 어쩌지 못할 것이다.
책에 실을 프로필 촬영을 핑계로 오늘은 그녀들과 함께 놀기로 했다. 놀 수 있을 때 놀아야 한다. 나 처럼 주변머리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놀이까지도 새로운 도전인지라 한 껏 부푼다.
노쇠 노쇠 젊어서 노쇠!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요즘들어 화장실만큼이 자주 들락거리는 역이 오늘은 좀 설레인다. 하행선인 것도 맘에 들고 볼때마다 처연하던 닭둘기들도 반갑다. 집에서 오분이면 되는 거릴 한시간이나 미리 나와서 기다렸다. 일찌감치 플랫 폼에 내려서 닭둘기들과 놀았다. 거대한 콘크리트와 철골구조물에 생명체라곤 나와 녀석들 뿐이다. 마른 풀떼기 하나 찾을 수 없는 이 곳에서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녀석들이 순간 따뜻하게 느껴졌다. 녀석들의 날개가 퇴화되지 않고 아직까지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하지만 녀석들은 콘크리트 하늘을 누비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생명은 참 기특하다.
KTX 117 열차 9호 5B, 옆자리 그녀는 이미 두시간을 달려왔다.
- 어디까지 가십니까?
- 그쪽 가는데 까지요.
푸하핫...마주보고 씨익 웃었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바깥 풍경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뒷담화였을 것이다.
- 피울, 어디쯤 왔어요?
종종의 목소리는 아이가 소풍 갈 때 만큼이나 즐거웠다.
참 오랜만이다. 부산!
저쪽에서 폴짝거리며 종종이 뛰어왔다. 격렬하게 흔드는 손이 고마울만큼 반갑다. 이 순간만큼 존재가치가 분명해지는 때가 또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만남의 의식은 흥분이다. 낯선 도시에서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만했다.
종종은 함께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스케줄을 말하는데 적어도 일주일은 필요하겠다. 이것도 꼭 하고 싶고, 저것도 꼭 해야 한다고 했다. 역전의 돼지국밥으로 시작된 우리들의 여행은 보수동 책방골목을 거쳐 들른 커피집에서 첫 번째 절정에 닿았다. 걷고 보고 느끼겠다던 계획은 일찌감치 물 건너 가버렸다. 우리들은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연구원 생활의 끝이 보이는 시점에서 그 다음을 묻는 참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우리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명쾌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난감해 했다. 뭘 해먹고 살거냐는 물음에는 모두들 가진 고민들을 쏟아놓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언제나 닿을 듯 말 듯 하다. 밥은 꿈이 되지 못했고 꿈은 밥을 만들지 못했다.
햇볓이 따사롭다. 한 호흡을 돌리고 우리는 국제시장으로 간다.
종종과 참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조잘거린다. 시장은 넓고 역동적인 기운이 넘쳐났다. 상인들과 손님들의 표정에서는 불황의 그림자 따위를 잃을 수 없다. 이윽고 종종의 국수마크가 붙은 ‘원조비빔당면’집 앞에 닿았다.
‘저희 집을 찾아 주신 고객여러분 죄송합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고객님들 맞이하다보니 저와 식구들 몸이 아파 병이 날 지경입니다. 앞으로 오랜 시간 여러분들을 뵙기 위해서 오늘 하루 휴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그리고 고맙습니다.’
비닐커튼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지만 아쉽기만하다. 주인장 마음씀씀이로 보건데 이 집에서 만든 국수가 맛이 없을 리 없다. 시장을 이리 저리 헤집고 다니다 수제 수저를 만들어 파는 집에 닿았다. 칼라에 반해서 들어갔다가 각자 맘에 드는 것을 하나씩 집어들었다. 곱상한 주인아주머니는 우리들의 흥겨움에 덩달아 흥이 나셨는지 띠에 맞춰 젖가락 한벌씩을 챙겨 담아준다. 모두들 입이 귀에 걸려서 청사포로 넘어간다.
바다가 액자처럼 펼쳐진 카페에 앉은 우리는 두 번째 절정으로 치달았다. 어떻게 살 것인가로 시작된 이야기는 책과 연구원과 친구와 미래와 나와 여행과 여러 현인들을 넘나들며 저녁을 맞았다. 파랗게 익어가는 하늘을 보면서 세사람의 얼굴을 겹쳐보았다. 잘 어울린다.
가리비와 장어를 석가탄에 눕혀놓고 우리는 세 번째 절정에 닿았다. 정자와 먹이와 본능에 대해서 말했지만 이 말들은 모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수렴되었다. 오프수업으론 부족하니 한달에 한번쯤은 워크 샵을 하자고 종종이 말했다. 청양을 얹은 꼬들꼬들한 라면을 한젖가락 삼켰다. 오늘이 참 맛있다.
플랫폼까지 따라 들어온 종종은 만날 때 보다 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