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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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한 마디로 ‘좋은 선택을 위한 학문’이다. 여러 가지 전문용어와 도표로 선택지간의 희소성과 특징을 세심하게 구분하고, 가용자원을 염두에 두고 기회비용을 따져보는 등의 노력은 모두 지속 가능한 선택을 하기 위한 생각의 틀을 짜게 도와준다. 이와 같은 합리적 선택을 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부풀어진 기대’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차가운 시선을 잃어버렸을 때 인류는 잘못된 선택을 내리곤 했다. 장하준 교수는 경제학 강의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적절하게 통제되지 못했던 욕망과 기대가 어떻게 전체 시스템을 망가뜨렸는지 보여주었다.
기대는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현실을 꿈꾸는 것이다. 그 두근거림, 그 떨림과 연결되지 않고는 어떤 미래도 사람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기대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기대가 높아졌다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좌절감은 매우 씁쓸하고 때로 화도 난다. 어떻게 설레발이 아닌 좋은 기대를 품을 수 있을까? 오늘은 이 ‘좋은 기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 한다.
#희망의 그림자
나는 원래 야구를 챙겨보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니는 회사가 프로야구팀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팀에서 야구장 직접관람을 가게 되었다. 그날 1루로 나왔던 33번 박용택 선수는 평소 버릇대로 짝다리를 짚고 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결국 그날 점수를 냈다. 그 훤칠한 뒷태와 실력에 반해 좋아하는 선수가 되었다. 그와 함께 뛰는 동료선수들이 궁금했다. 선수들의 지난 인터뷰 동영상을 찾아보고, 같은 팀의 다른 선수들이나 감독의 사연을 찾아보았다. 이렇게 나는 응원하는 야구팀을 갖게 되었다. 야구는 재미있는,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넓은 세계관이었다.
'경쟁'이라는 스포츠의 태생상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원하게 되고 나니 엘지 트윈스의 경기 한 회마다 안타까워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희망과 좌절이 겹쳐지는 상황이 아날로그 시계바늘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지자 경기를 계속해서 보고 있기 어려웠다. 또한 작은 찬스에도 희망을 갖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야구는 그 게임의 특성상 최고의 상황과 최악의 상황을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두점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9회말 풀카운트 만루 상황에 있는 투수, 혹은 등판한 타자라고 생각해보자.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병살타와 장외홈런 두 가지 가능성이 겹쳐 보일 것이다. 이 운명을 눈앞에 둔듯한 아찔한 긴장감이 야구의 묘미이지만, 이것은 정말 내적 평온 유지에 좋지 않다.
반면 같이 야구를 보곤 하는 오랜 엘지팬 친구는 늘 별 반응이 없었다.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했는지 물어봤더니 대답이 일품이다. “아, 엘지가 플레이오프에 못간지 10년째거든.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이제 1-2점 뒤지는 것 정도는 매우 괜찮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 엘지 트윈스를 오랫동안 꾸준히 응원했던 팬들은 나처럼 한 경기의 승리에 목숨 거는 것을 자연스레 놓아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즌 4위에 들어 가을야구라 불리는 준 포스트오프엘 가도 엘레발(엘지+설레발) 치지 않는단다. 팀과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주기만을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놀라웠다.
엘지 트윈스는 지난 금요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올해 야구를 마무리 했다. 한국시리즈 진출은 아쉽게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올 가을 트윈스 덕분에 흥미진진한 밤을 보냈는데 이제 텔레비전에서 내가 좋아하는 선수들을 볼 수 없다니 쓸쓸해진다. 또한 우승에 대한 기대가 무산되니 이리 허망하다. 그러나 이제 ‘야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관람 갔던 경기장에서의 응원열기, 선선한 평일 저녁 설레는 마음으로 지하철을 탔던 시간들, 같이 응원하던 친구들과의 훈훈한 저녁식사 등이 장면장면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날들이었다.
#두려움 속의 빛
몇 주째 매우 낙심한 상태였다.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슬픈 경험이 몇 달 뒤 다시 살펴보니 전혀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나는 영원히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쫓기듯 열심히 지냈다. 고깃집에서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심리상담가 친구는 삼겹살이 익어가는 불판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직언의 상담이 먹히던 시대는 갔다. 그것은 한 번 보고 접촉이 없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전략이다. 지금의 상담은 키워주는 상담이다. 자기 내부에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돕고, 그것으로 자신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방법이 바뀌면서 상담이 진행되는 회수도 열 번 이상에서 대여섯 번 정도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두려움을 느낄만한 상황은 늘 숨어있다. 그러나 위기에 지지 않을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면 그건 도전적인 과제로 바뀐다. 필연적으로 극복될 장애물인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 속에 별이 있듯이 두려움 속에도 빛이 있다. 둘은 늘 같이 온다. 그 말을 들은 고민 있던 나는 삼겹살을 씹으며 무적의 주문을 외운다. 그래, 한번 뎀벼보자. 그래서 나동그라지면 또 한 번 덤비자. 마음 속 문제라는 거,마치 그게 절대로 변하지 않고 내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서 내가 무엇을 하든 훼방만 놓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간 아니야. 그러니까 결국에는 나 자신조차 나를 돕게 될거야. 고민하던 나는 스스로 변할 수 있음을 믿기로 했다.
#결론
살면서 어떻게 즐거운 일에 즐거워하지 않고 슬픈 일에 콧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희망과 절망은 상당히 수동적이다. 상황에 따라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좋은 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과정과 결과' 두 가지를 모두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작은 성취들을 계속 맛보며 재미를 얻고, 과정 자체가 가져다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기대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하며, 과정을 즐기기 위해 순간에 몰입하며 나중에 그 기록을 간단하게라도 적어두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몰입을 돕는 것으로는 감정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강력했다. 이것은 학문적으로도 이미 알려진 주장이다.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1916~2001)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는 제한된 정신적 자원을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을 해결하는데 집중해야 하는데 감정이 바로 이런 집중력을 제공한다.
두 번째는 걱정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무것도 도움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대를 비현실적으로 과장시키거나 축소시키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두려운 상태의 인간은 상황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결론을 내리고 그대로 진행해보라. 최악의 상황은 내가 틀렸다는 것이 명백해진 상황인데, 그럴 경우에는 인정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면 된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인류를 발전시켰다. 그것은 더 큰 규모의 투자를 가능하게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기대는 다른 인간의 능력들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방향을 터주어야 인간을 이롭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나는 이 생각이 개인의 삶에서도 필요한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기대를 내 편으로 만들고, 거기에 현실의 옷을 입혀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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