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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에 새겨진 입맛, 평양냉면
식구(食口). 먹는 입들. 한 솥의 밥을 모자라든 남든 나눠먹어야 하는 사이. 우리는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이 한 상에서 밥을 먹은 사이이므로 가족이다. 그리하여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밥상의 추억을 공유했기에 가족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냉면발을 끊어먹지 않는 신실한 면식수행자의 자세를 타고났기에, 우리는 가족이다. 아, 그렇다. 쿵푸팬더의 아버지가 말했듯, 우리 가문의 혈관 속엔 피가 아닌 냉면 육수가 흐를 지도 모를 일이다.
단언컨데, 모든 면식범들에게 냉면의 세계는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경험하기 전과 경험한 후로 나뉜다. 국수로 세끼를 먹어도 족한, ‘아침 소면 - 점심 칼국수 - 저녁 냉면’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평양냉면은 궁극에 이르는 맛, 신성불가침의 그것이다. 물론 평양냉면의 슴슴하면서도 오묘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맛은 단번에 혀 끝을 마비시키는 프랜차이즈 함흥냉면의 매운 맛이나 빙초산의 은혜를 듬뿍 받은 여타 물냉면들과 아예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기에, 주로 고깃집의 후식으로만 냉면을 즐기는 이들이 단박에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다 보니 한 입맛 한다는 이들 중에서도 이 놈의 평양냉면이 왜 맛있다는 지는 도통 모르겠다며, 본인을 면식진리의 세계에 입문조차 못한 중생으로 취급하는 것을 억울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뭐 어쩔 도리가 없다. 말하자면 평양냉면은, 한없이 ‘원’에 가까운 맛인 것이다.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완벽한 중용의 경지에 다다른 맛이랄까. 이 궁극의 존재를 면발과 국물과 고명으로 나눠 분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 완벽하게 단순한, 단순해서 완벽한 조화를 어떻게 이해시키란 말인가. 나는 그런 이들에게 이 궁극의 맛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그냥 계속 먹어봐. 먹다 보면 알게 될 꺼야 라고 말한다. 그들에 비하면 모태신앙의 경지에서 평양냉면을 접했던 나는, 그렇다. 은혜 받았다.
* * *
나는 장충동에서 났다. 알다시피 장충동은 돼지족발의 성지이고, 평양냉면의 보루다. 장충동의 끝, 지금은 별도의 주차 타워가 들어선 평양냉면집의 위용은 여름철 점심 나절에 가면 알 수 있다. 뜨거운 여름 땡볕에 아랑곳하지 않고 줄을 선 양복쟁이들과 줄지어 들어오는 차들 때문에 주차요원들만 몇 명인지. 하지만 30여 년 전, 이 곳은 평화시장에서 도매상으로 잔 뼈가 굵은, 이북 출신의 상인들이 고향 맛이 그리워 찾던 소박한 식당이었다.
나의 할머니도 그랬다. 6.25가 터지기 전에 이미 숙청이 시작된 고향에서 할머니는 네 살 난 아버지와 아홉 살 고모를 데리고 목숨을 건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그 고난의 피난길 내내 신주단지처럼 끌어안고 내려온 짐 보따리 안에 싱거 미싱이 있었다. 열네 살 민며느리로 시집 온 그녀가 들고 온 유일한 예단이었던 미싱 덕분에, 우리 가족은 평화시장에 자리잡았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평화통일을 바랬던 피난민들이 모여 만든 장터, 그래서 이름도 평화시장이었다는 그곳에서 할머니는 칠순이 될 때까지 새벽 5시에 셔터문을 열고, ‘가새[1]’로 산더미처럼 쌓인 작업복 바지의 실밥을 따며 새벽길을 달려온 상인들과 흥정을 하고, 오후 네시면 다시 셔터문을 닫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렇게 이른 하루를 마감하면 자동차가 오를 엄두를 낼 수 없을 만치 숨가쁘게 경사진 언덕에 일본식 양옥이 다닥다닥 붙은 장충동 골목으로 뜨끈한 순대봉지를 사들고 퇴근하곤 했다. 그러니 장충동의 터줏대감격인 두 식당은 처음부터 우리 식구의 외식성지가 될 운명이었다.
그 시절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외식에 우리 식구가 찾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장충동에서 평화시장으로 이어지는 골목, 그 양쪽 끝에 위치한 두 집. 평양냉면집과 평남집이었다. 고기가 땡기면 찾았던 평남집, 그 곳에서 맛보던 윤기 흐르는 족발 한 접시와 기름기 자르르한 빈대떡. 아, 맛있었다. 반투명한 갈색 젤리 같은 비계가 두툼하게 감싼, 그 찰진 돼지 뒷다리의 자태를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그리고 평양냉면. 내가 맛본 최초의 냉면이 그 집 것이었음은 분명한데, 아쉽게도 당시의 냉면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도 식당 안에 젊은 사람들이 없었다. 할머니와 같은 말투를 쓰는 노인네들이 삼삼오오 앉아있는 가운데, 우리 남매처럼 부모의 손에 이끌려 찾아온 어린 아이들이 가족 단위의 식객들 사이에 드문드문 끼어 있었다. 할머니, 아빠, 엄마, 삼촌, 오빠, 동생과 나까지 일곱 식구가 총출동한 외식에서 식구들은 예외 없이 물냉면을 시켰다. 평양냉면집에서, 우리 식구들 사이에서, 비빔냉면 따위의 예외는 배신이다. 오로지 곱빼기냐 아니냐의 선택 만이 존재할 뿐.
어쩌다 여유를 부릴라치면 불고기를 추가했다. 평양냉면집에서 내는 불고기는 미리 양념을 해서 재워두지 않고, 즉석에서 양념을 섞어주는 방식이라 고기의 신선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국물이 자박하게 모일 정도인 여느 불고기와는 달리, 거의 전골에 가까울 정도로 양념 국물을 넉넉히 확보할 수 있도록 고안된, 불판과 냄비의 중간형태를 띈 특수한 ‘그릇’에서 조리를 한다. 가운데가 산처럼 솟은 불판에서 야들야들하게 익힌 고기를 먼저 해치운 후, 우묵한 가장자리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국물에는 국수 사리를 투하한다. 맛이 너무 강하지 않고 달지 않아 자꾸만 손이 가는 양념 국물에 면발을 익히면 그 맛이 또 기막히다. 게다가 세 남매가 질세라 집어먹다 보면 눈깜짝할 새 사라지는 보통 불고기와 달리 메밀면을 추가하니 넉넉하기까지! 어떤 성찬이든 국물이 없으면 서운한 내게는 최고의 불고기였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만두! 이 어른 주먹만한 이북식 만두는 두부와 돼지고기와 김치가 꽉 들어찬 찐만두도 좋지만, 이 덩치 좋은 만두 몇 개를 중심으로 넉넉한 국물과 빨간 고기버섯 고명이 자리한 만두국의 위용 또한 만만찮았다.
하지만 이런 메뉴들은 모두 냉면을 맛있게 먹기 위한 전희에 불과하다. 머릿수건을 동여 멘 잰 걸음의 종업원이 내 얼굴보다 한참은 커보이는 냉면 그릇 7개를 한 쟁반에 담아 들고 온다. 이 거대한 냉면 그릇을 쟁반에 층층이 얹어 한 손으로 날렵하게 내어오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눈엔 이것들이 숙련된 종업원의 손에 얹혀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비행접시마냥 날아오는 것 같았다. 갓 떠온 약수처럼 투명하여 일명 ‘맹물’이라 불리는, 살짝 노란 빛이 감도는 맑은 육수에, 소면보다는 조금 굵은 면발을 둥글게 말아 올린, 거기에 비계와 살의 배합이 절묘한 돼지고기 편육이 한두 조각, 그보다 더 얇게 저민 쇠고기 편육이 또 한 조각 얹혀 있다. 그 밑에는 납작 썬 배와 무절임이 깔려있고, 물론 면발과 고명의 정점에는 완숙 달걀 반쪽이 살포시 올라 앉아야 한다.
이 우아한 냉면에 허용되는 기본 양념은 물론 식초와 겨자. 거기에 가게에 따라 다르지만 고춧가루와 간장이 추가된다. 우리 남매는 아버지에게 이 순수한 냉면에 식초 한두 방울과 겨자 약간, 아주 살짝 고추가루를 더하고 그날의 국물간을 봐서 간장은 생략하거나 한두 방울을 조심스레 떨어뜨려 원 육수의 풍미를 해치지 않고 간하는 법을 배웠다. 가위는 받아두지만 국수는 자르지 않는다. 본디 국수의 긴 면발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 들었기에 웬만해선 잘라먹지 않는 게 예의라 했다. 거기다 메밀과 밀의 배합으로만 이뤄지는 면발은 전분 함량이 높은 함흥 냉면과 달리 노인네 잇몸으로 끊어먹기에도 무리가 없다.
1977년, 장충동 시대를 마감한 후 우리 식구는 딱 두 번 이사했다. 서울특별시에 속하면서도 ‘동’이 아닌 ‘리’를 꼬리표처럼 달고 있던 수유리로 이사했고, 후엔 그보다 더 북쪽,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우이동 산자락으로 이사했다. 그러고 나니 장충동이 너무 멀어졌다. 하지만 우리에겐 의정부면옥이 있었다! 지역이 외져서 그렇지 그 유명한 을지면옥과 필동면옥의 뿌리가 된, 진짜배기 평양냉면집이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냉면 먹으러 가자’는 한마디에 온 식구가 군기 바짝 든 신병들 마냥 앞다퉈 신발을 신던 모습이 생각난다. 생채기 가득한 호마이카 식탁에 보기에도 넉넉한 ‘스뎅’ 냉면 그릇을 조상의 제기라도 되는 양 모셔놓고, 온 식구가 그렇게 의식처럼 축제처럼 동질의 입맛을 확인하곤 했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와 아버지 대신 남편과 두 아들의 손을 잡고 평양면옥을 찾았다. 이제 막 열 살과 여섯 살이 된 두 녀석은 이 낯선 국수를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흡입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 입맛 한다는 사람들도 단번에 맛을 알기 어려워 처음 먹을 때는 이게 왠 맹물이냐며 한 소리를 하는 게 평양냉면이다. 그런데 녀석들은 첫 방에 냉면계의 신동으로 데뷔한 뒤, 웬만한 고깃집의 냉면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면서 서울 시내에 제대로 한다고 소문난 평양냉면집을 데려가면 귀신 같이 맛을 알고 곱빼기를 해치우는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모태 신앙, 아니 모태 면식의 힘인 것인가? 아, 이 우습고 신기한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 아버지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럼 그렇지. 여섯 살 짜리 녀석이 냉면맛을 알고 곱빼기를…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 놈 참…” 아이가 첫 걸음마에 성공했을 때보다 더 대견해 하던 아버지였다.
혈육. 같은 피, 같은 살로 빚어진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인 집단. 그러나 혈육이나 가족이라는 표현보다 이 일단의 무리를 이어주는 더 본질적인 표현은 ‘식구’(食口)라는 말이 아닐까. 먹는 입들, 한 솥의 밥을 모자라든 남든 나눠먹어야 하는 사이. 같은 피를 타고났다지만, 같은 유전자를 공유했다지만, 그런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 속에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이 한 상에서 밥을 먹은 사이이므로 가족이다. 그리하여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밥상의 추억을 공유했기에 가족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냉면발을 끊어먹지 않는 신실한 면식수행자의 자세를 타고났기에, 우리는 가족이다. 아, 그렇다. 쿵푸팬더의 아버지가 말했듯, 우리 가문의 혈관 속엔 피가 아닌 냉면 육수가 흐를 지도 모를 일이다. 혈육의 의미를 일깨우는 맛, 할머니에서 아버지로, 나와 내 아들에게 이어지는 유전자에 새겨진 입맛, 평양냉면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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