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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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쉬고 싶다는 마음으로 칼럼을 쓴다. 진심으로 아무 것도 안하고 시간을 방만하게 낭비하고 싶다. 하루, 이틀, 삼일, 사일… 일이고 약속이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듣지도 않은 채 공기 좋고 물 좋고 산세 좋은 데서 열흘만 있고 싶다. 책도 읽고 싶을 때 읽고 싶은 만큼만 읽고 싶다.
너무 바쁘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일과 삶의 밸런스를 잘 지키며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어느 순간부터 멈추지 않는 삶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휴식을 뒤로하고 일에만 몰두하고 있지는 않지만, 연구원과 회사일을 허덕허덕 병행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많이 구석으로 몰려있었던 모양이다. 그 첫 번째 증상으로 기억력을 잃었다. 키보드 타자 속도도 느려지고, 자꾸 깜빡깜빡하는 것이 늘어났다. 두 번째 증상으로 꿀잠을 잃었다. 나와 연구원 수업을 한 번이라도 같이 해본 사람들은 내가 타고난 잠꾸러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자는 시간도 상당하지만 잠도 거의 깨지 않고, 꿈도 안 꾸고 죽은 듯이 잔다. 그런데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은 날들이 많아졌다. 특히나 출근하기 위해 꼭 일찍 일어나야 하는 날엔 죽을 맛이다. (포항에서는 정말 오래간만에 달게 잤다) 세 번째로 좋아서 했던 것들을 더 많이 알고 싶거나 잘 하고 싶다는 의욕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많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건강도 많이 약해졌다. 아무래도 기운이 나지 않는 것을 간식 같은 것으로 만회하려 하고, 오래 전에 다쳤던 발목이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아파와서 병원 신세도 지고, 그 동안 묵묵히 버텨주었던 목과 어깨도 너무 무겁고 뻣뻣해져 통원 치료를 시작했다. 매일 저녁 고단한 신체를 이끌며 집에 오면서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보내는 시간은 무척 재미있고 좋은데, 하, 그런데 너무 힘들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휴식이란 ‘너무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쉰다는 것은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기분 전환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까지 너무 열심히 하는 것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인생에 한 번은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지만, ‘열심히 하는 것’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나중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원망하기 싫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사실은 오래 가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돌이켜보면 열정의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딘가 집착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나의 상태를 약간 관찰해보기로 했다. 중학교 물상시간에 배웠던 마찰력이 없는 수평선 위에 동그란 공을 굴릴 때 그 공의 운동 에너지를 잠시 떠올려보자. 처음엔 어느 시점까지 밀어주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지만 필요한 에너지가 모이면 적은 힘으로도 끝없이 굴러간다. 몰입이라는 것은 그런 것 같다. 다른 재미있는 것에 관심이 가는 것을 첫 15분만 참으면 몰입은 상당히 오래 유지할 수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 몰입 상태에 있을 때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다. 내가 하고 있는 작업에서 마치 엔도르핀이 나오듯이 재미있는 부분을 연속적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의 즐거움, 나와 공부 대상과의 거리감이 사라지는 데서 오는 희열, 전체 그림을 향해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가는 듯한 성취감 같은 것들이 서서히 나를 지배한다. 몰입 1시간이 넘어가게 되면 나는 이 즐거운 감정들에 사로잡혀 쉴 타이밍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오래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다. 나는 이 과정을 ‘열심 중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실 약간 집착일 정도로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은 건전한 일이며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조증’의 저자인 존 가트너는 자신의 책에서 ‘성공하는 사업가의 비밀이 조증(燥症)에 있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엉뚱함을 넘어서는 과대망상적인 사고와 실패에 굴복하지 않는 열정과 혁신을 추구하는 돌파력 같은 것은 분명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얻기 힘든 가치이다. 그리고 열심 중독은 사실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갖기를 원하는 중독이다. 아마 ‘중독’ 앞에 붙는 것들 중에 간접적으로라도 권장 받는 것은 열심히 하는 자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지쳐버릴 때까지 한 가지에 빠져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아니, 이런 삶의 자세로 제 명이나 채울 수 있을까. 완전히 소진되어 어딘가 나사 빠진 사람처럼 변해버린 나를 보듬으며 나는 다소 속도를 늦추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조금 조급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빨리 쓸모 있는 팀원이 되어야 된다, 빨리 밀리언셀러 제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빨리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글과 문장과 사례와 내용을 다루고 싶다. 같은 소망들을 나도 모르게 갖게 되었나 보다. 안다. 그러나 이루어야 할 To-do들이 너무 많다. 잠깐만 잊어버리기로 했다. 옥상정원에 올라가 바람도 쐬고, 지나가는 구름모양도 구경했다. 한 끼 정도는 적게 먹고, 점심 대신 낮잠을 잤다. 무엇보다 페이스를 잃는 것 같으면 어깨에 힘을 빼고 스스로의 호흡을 들어보았다. 이러고 있으면 열심 중독에 붕붕 떠 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지금은 다시 약간 의욕을 찾았다. 숙련의 과정은 멀고 험하다. 또한 이것은 평생 가야 할 길이다. 서른 살까지만 살고 죽을 인생도 아니다. 긴긴 시간,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오랜 친구처럼 함께 걸어가고 싶다. 내가 지금 익혀야 할 것은 지식과 기술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평생을 살게 될 습관이다. 내 인생은 나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과유불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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