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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7일 11시 59분 등록


문득 생각났다.

초등학교 6학년의 국어 시간,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를 던져주고 한 시간 동안 토론을 하라셨다. 주제는 전날 숙제로 주어진 것이라 다들 한 가지씩 답을 들고 왔다. 교내에서 백일장만 하면 나와 반대표를 두고 다투던 강희는 톨스토이의 책을 읽고 와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있어 보이는군. 근데 도무지 와 닿지가 않는다. 초딩 6학년의 머리 속에 사랑이란 말의 구체성과 깊이는 도저히 한데 묶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 고민하다, ‘사람은이라는 말을 어른은이란 말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리고 답을 냈다.

“4번 강종희입니다. 저는 사람은 일하는 보람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고, 밥값을 할 수 있어야 어른이다.’ 그래야 진짜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말빨과 글빨로 늘 몇 발짝 앞서던 강희와 일대 격전을 벌이고 싶었으나 맘처럼 되지 않았다. 일하는 보람으로 산다는 말에 공감하는 녀석들이 거의 없었던 거다. 이런 뭘 모르는 것들. 일 안하고 어떻게 살래? 어떻게 어른이 될래? 나는 철없는 반 친구들의 좁은 식견에 답답해하며 그 날의 토론에 더 이상 끼어들지 못 한 채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세월이 얼마나 지났느냐 하면, 우와, 딱 삼십년이다. 그 동안 열세상의 초딩의 개똥철학은 마흔을 넘긴 워커홀릭의 삶으로 구체화되었다. 예언처럼 일하는 보람따위를 삶의 이유로 들었던 철없는 초딩 꼬마는 내 자리를 찾아 조각배처럼 방황했던 이십대를 지나, 소처럼 일하며 노새처럼 버텨야 했던 삼십대를 지나, 드디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던 불혹의 계절, 사십대에 도착했다. 내 일, 내 가족,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나의 세상을 구축하고 싶었던 독립심 강한 꼬마의 포부는 두 아들을 거느린 단란한 가정과 탄탄한 커리어를 구축한 워킹맘이라는 완성형으로 실현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젠장, 불혹은 개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던 사십대는 알고 보니 무섭도록 만개한 양귀비밭, 아무렇지 않게 존재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만혹(萬或)의 시간이었다.

십오년의 시간 동안 간신히 마스터한 아이와 나의 일과 남편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예상치 못한 한 방에 훅~ 날아가서 그대로 나를 집에 묶어두는 목줄이 되고 말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주욱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고 수식해주던 자랑스럽고 지긋지긋한 나의 일은, (물리적인 의미 그대로) 가족의 해체라는 불길한 가능성 앞에 단 칼에 떨어져 나갔다.


일하는 인간, 일하는 삶. 나의 일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 그것을 열세살의 내가 제대로 알았을 리 없다. 그러나 말은 강력한 언령(言靈) 으로 사람을 묶는다.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어떤 말도 그저 우연할 수 만은 없다. 이제 나는 그간 나의 사십년을 지배했던 언령을 풀어주어야 한다. 만혹의 한복판을 지나는 내가 붙잡고 의지할 한 마디는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머리스타일만큼 말솜씨도 멋진 허지웅이가 새로운 책을 냈다. 버티랜다. 나도, 나도, 그래야 겠다. 버티기 위한 나만의 문장을 찾아야겠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 허지웅, 버티는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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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7 18:40:41 *.223.20.153
일하는 보람이 책쓰는 보람으로 승화했으니 종종은 비상한 셈^^
나만의 문장? 종종체도 나왔으니 이미 찾은 것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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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5:21:38 *.103.151.38

흠... 구달님의 말씀을 들으니 나만의 문장도 책 쓰는 보람 속에서 한번 찾아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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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7 22:18:42 *.255.24.171

나도 이 책 서점에서 봤는데....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는 신념을 매일매일 실천하고 있다고 하더군.

연예인으로 불리는 것이 싫어 항상 '글 쓰는 허지웅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종종이 잡을 글귀를 만나면 공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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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5:24:00 *.103.151.38

그럴께. 요즘은 마흔의 아침이 저문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흔들해.... 자꾸 신경쓰이네. 참치와 희동, 맞다. 콩두선배와도 이런 저런 얘기를 좀 더 하고 시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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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5:30:55 *.175.14.49

맞아요. 우리가 모두 동갑이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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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5:32:37 *.255.24.171

쥐띠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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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08:12:02 *.50.21.20

제목과 첫문단을 읽는데 에움 칼럼을 종종 칼럼으로 잘못알았나 했어요. ㅎㅎ 

두 분 사건을 기술하는 문체며 분위기가 닮은점이 많네용. 

1인분 인생 사는데,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와 같은 책임감이 잘 느껴졌어요. 

포항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같이 타고오던 택시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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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8 15:27:26 *.103.151.38

ㅎㅎㅎ...  그럼 나는 아줌마 버전 에움? ^^  포항 갔다온지가 벌써... 어휴 나는 잠깐 다녀와서 그런지 꿈 속에서 다녀온 듯 아득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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