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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났다.
초등학교 6학년의 국어 시간, 담임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를 던져주고 한 시간 동안 토론을 하라셨다. 주제는 전날 숙제로 주어진 것이라 다들 한 가지씩 답을 들고 왔다. 교내에서 백일장만 하면 나와 반대표를 두고 다투던 강희는 톨스토이의 책을 읽고 와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있어 보이는군. 근데 도무지 와 닿지가 않는다. 초딩 6학년의 머리 속에 ‘사랑’이란 말의 구체성과 깊이는 도저히 한데 묶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고민 고민하다, ‘사람은’ 이라는 말을 ‘어른은’ 이란 말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리고 답을 냈다.
“4번 강종희입니다. 저는 ‘사람은 일하는 보람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고, 밥값을 할 수 있어야 어른이다.’ 그래야 진짜 세상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말빨과 글빨로 늘 몇 발짝 앞서던 강희와 일대 격전을 벌이고 싶었으나 맘처럼 되지 않았다. 일하는 보람으로 산다는 말에 공감하는 녀석들이 거의 없었던 거다. 이런 뭘 모르는 것들. 일 안하고 어떻게 살래? 어떻게 어른이 될래? 나는 철없는 반 친구들의 좁은 식견에 답답해하며 그 날의 토론에 더 이상 끼어들지 못 한 채 수업을 마쳤다.
그리고 세월이 얼마나 지났느냐 하면, 우와, 딱 삼십년이다. 그 동안 열세상의 초딩의 개똥철학은 마흔을 넘긴 워커홀릭의 삶으로 구체화되었다. 예언처럼 ‘일하는 보람’ 따위를 삶의 이유로 들었던 철없는 초딩 꼬마는 내 자리를 찾아 조각배처럼 방황했던 이십대를 지나, 소처럼 일하며 노새처럼 버텨야 했던 삼십대를 지나, 드디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던 불혹의 계절, 사십대에 도착했다. 내 일, 내 가족,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나의 세상을 구축하고 싶었던 독립심 강한 꼬마의 포부는 두 아들을 거느린 단란한 가정과 탄탄한 커리어를 구축한 워킹맘이라는 완성형으로 실현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젠장, 불혹은 개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던 사십대는 알고 보니 무섭도록 만개한 양귀비밭, 아무렇지 않게 존재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만혹(萬或)의 시간이었다.
십오년의 시간 동안 간신히 마스터한 아이와 나의 일과 남편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예상치 못한 한 방에 훅~ 날아가서 그대로 나를 집에 묶어두는 목줄이 되고 말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주욱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고 수식해주던 자랑스럽고 지긋지긋한 나의 일은, (물리적인 의미 그대로) 가족의 해체라는 불길한 가능성 앞에 단 칼에 떨어져 나갔다.
일하는 인간, 일하는 삶. 나의 일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 그것을 열세살의 내가 제대로 알았을 리 없다. 그러나 말은 강력한 언령(言靈) 으로 사람을 묶는다.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라. 어떤 말도 그저 우연할 수 만은 없다. 이제 나는 그간 나의 사십년을 지배했던 언령을 풀어주어야 한다. 만혹의 한복판을 지나는 내가 붙잡고 의지할 한 마디는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머리스타일만큼 말솜씨도 멋진 허지웅이가 새로운 책을 냈다. 버티랜다. 나도, 나도, 그래야 겠다. 버티기 위한 나만의 문장을 찾아야겠다.
마음속에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 허지웅, 버티는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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