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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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위기의 가족이 다시 뭉쳤다
10기 김정은
“텔레비전이 없다고요?”
우리 집엔 텔레비전이 없다. 3년 전에 내가 갖다 버렸다. 결혼할 때 언니가 사준 29인치 뚱땡이 텔레비전이 고장 날 때가 되어 고장이 난 것이 원인이었다. 사실 진짜 원인은 내가 갖다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참아 온 목 디스크 증상이 양 손가락까지 내려와 자판을 두드릴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에게 가장 중요한 건 튼튼한 손가락이란 걸 그 때 알았다. 진통제가 안 먹힐 무렵 나는 그렇게 프로그래머란 직업과 바이바이했다. 그리하여 태어나 만 7년이 되어서야 엄마와 함께 살게 된 큰 딸과 태어나 만 3년이 되어서야 엄마와 함께 살게 된 작은 딸은 쾌재를 불렀다. 한 달에 한두 번 볼 수 있었던 엄마와 드디어 함께 살게 된 것이다.
한 달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을 때, 두 아이들에게 엄마는 항상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양 손 가득 선물을 들고 오는 하늘에서 금방 내려 온 천사 같은 존재였다. 아이들이 원한다면 함께 밤을 지새우며 그림책들을 같이 읽어주는 것도 불사하는 열정 넘치는 엄마였다. 하지만 같이 살게 된 엄마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거나 거실에서 주구장창 텔레비전만 보는 나는 그런 엄마였다. 디스크 치료를 받느라 양 팔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나는 집안 청소도, 음식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무렵 텔레비전이 고장 났고, 나는 그 당시의 그 생활과 결별을 선언하듯 고장 난 텔레비전을 갖다 버렸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선언의 표시였다.
그렇게 텔레비전과 이별을 하고 집어 든 것이 그림책이었다. 직장 생활보다 집안 일하는 것이 더 어려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 밖에 없었다. 매일 도서관에 가서 그 날 읽어줄 책을 빌려와서 아이들이 그만 듣고 싶다고 할 때까지 읽어 주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으며 나는 다시 기쁨을 찾았다. 책을 읽어주는 일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옛 친구를 다시 만난 듯 행복했다. 계속 읽어주다 보니 어느새 그 일은 내 아이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지냈던 아내가 다시 일어나 두 아이들에게 읽어 줄 책들을 고르는 모습을 보고 남편도 끼어들었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겪는 남편 또한 생애 최고 위기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중이었다. 남편은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의 오랜 추억을 다시 떠올렸다고 했다. 우리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만났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우리는 그 기숙사의 그룹 스터디룸에서 철학과 시에 대해 밤새 이야기하곤 했다. 철학을 사랑하는 남자와 시를 사랑하는 여자는 철학과 시로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갔고,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약속했었던 것이다.
나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책 읽기 시간에 남편이 끼어들면서 우리의 밤 시간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림책에 철학과 시가 추가된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아이들의 관심사에 따라 역사와 문학, 과학과 예술로 그 분야가 확장되고 있다. 나의 퇴사와 남편 회사의 구조조정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부모의 부재라는 위기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우리 가족이 선택한 것은 바로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책이었다. 우리 가족은 함께 책을 읽으며 위기 상황을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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