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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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은 어땠어? 뭐 물어보든?” 나의 질문에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면접관이 이력서를 보면 언젠가 하고 싶은 거 하러 회사 뛰쳐나갈 거 같다고 말하는 거야.
나 참! 아닌데! 난 완전 진지한데! 정년까지 일할 건데! 이력서만 보니까 그런 말을 하지!”
고3이 지나면 수능을 잊고, 취업을
뽀개면 취업준비기간은 추억이 된다. 억울함을 토로하는 취준생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늘 그렇게 준비하고-넘고-잊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생의 전부일 줄 알았던 목표들은 넘고 나면 잊혀진다. 과거의 과업은
지금, 당장 해내야 할 것들에 떠밀려 지나간다. 자연스레
지나온 길에 대해서 생각해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미래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자세는 항상 결정된 삶을 수동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모양이다.왜냐하면 자크 아탈리가 미래의 물결에서 말했듯, 모든 미래는 잠재적으로
현재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의 오늘날도 지난날 내재되어 있던 어느 가능성의
발현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문이 아주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지나버린 시점에 대한 곱씹음으로 나는 일부러 휴가를 내어 몇 가지 거점을 따라 시간여행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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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추구, 완전함에 쉽게 감화되는 경향, 선동질 당해 활활 타는 가슴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두리번거리던 삶. 탈
물질, 산소, 열이라는 연소의 3요소가 늘 갖춰진 즉발성 의지의 소유자, 스무 살. 지금도 그 무렵을
돌이키면 불붙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슬아슬한 장작의 기분이 느껴진다. 그러나 깊은 고민을 통해 숙성되지
못하고 뛰쳐나간 열정은 늘 1차 장애물에서 가로막혔다. 좌충우돌,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만 알았던 그 철없던 대학생은 같은 과 동기들에 비해 조금 특이한 행보를 가긴
간다. 그러나 그런 경험들이 한 개의 직선 위로 연결되기에는 상당히 난해했다. 지난 해에 어떤 점이 아쉬웠고 올해 이 부분을 보충해서 내년에는 이런 저런 것을 해보겠다는 식의 사업계획서
위에는 적힐 수 없는 것들이었다.
정리하자면, 내 20대는
실험의 시기였다. 특히 대부분 실수의 시기였다. 앞서 언급했던
‘완전함’에 매료되었던 젊은이는 거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실수나 부족함 앞에 지나치게 분노하고 좌절하곤 했지만, 실험과 실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깨닫곤 했다.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진짜 아닌지, 맞다고 생각했던 건 진짜 맞는지? 구체적으로
남들과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도대체 내 인생을 온전히 바쳐 살고 싶은 그 단 하나의 분야, 가치가 무엇일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여러 가지 경험들마다 정수를 꿰뚫어 연결해줄 수 있는 초시공간적 가치. 조셉 캠벨에 따르면 천복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마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그게 도대체 뭘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의 첫 번째 거점은 ‘세상 모든 경험의 적극적 추구’였다. 지루한 학창시절을 보내는 주된 방법이었던 ‘기다리기’ 방법을 사용하며 위의 고민에 대응하던 나는 최초의 실연을
통해 행복한 인생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아낸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는 이것저것 시도해보았다. 연극도 올려보고, 시나리오도 써보고, 평생 못 가볼 줄 알았던 대륙으로 교환학생도
갔고, 연애도 꾸준히 했으며, 학교 공부에도 메어 보고, 한 달 동안 영어만도 해보았다. 바쁘게 산 보람도 없게 나는 이
모든 재미있어 보이던 시도들이 실제로 해보면 약간의 재미는 있으나 나와는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깊어져 보고 싶다’, ‘더 해보고 싶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 그만하고 싶다’, ‘남이 써준 것을 내가 읽는 건 싫어, 내가 쓴 걸 남이 읽는
것도 시시해.’ 이런 종류의 네거티브 반응들만 얻게 되었다. 이렇게
첫 번째 거점은 인생을 바칠 그 무엇을 찾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두 번째 거점은 지난 거점의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남들이 재밌겠다고
해주었던 것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표류했던 시간들은 모두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내가 재밌다고, 멋있다고 생각한 것들의 재조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내가
만족감을 얻는 것들은 아주 가까이에 있던 것은 아닐까? 이 반성은 지난 사건들에 대한 반성과 일벌리기의
축소, 혼자 있는 시간의 확대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두
번째 거점은 관계에 있어서 많이 도드라졌다. 새 친구를 무한정 사귀는 것보다 지난 관계들을 돌보고 공고히
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 두 번째 거점 때는 취직을 하며 인간관계가 한
번 정리되고, 직장생활로 시간적 가용자원이 줄어든 상태여서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흘러 들어 갔다. 살아 남은 친구들은 주기적으로 연락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알 수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두 번째 거점부터
나의 속도는 조금씩 느려졌다. 사람이든 일이든 취미든 아니다 싶으면 단칼에 잘라버렸던 지난날에 비해
나는 조금 더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거점은 부친상을 치르는 것과 연구원을 시작함과 함께 다져져 다음 거점으로 넘어갔다. 단순히 반성에만
머물던 시기 다음으로, 나는 이 기간을 통해 지난날을 밑바닥까지 훑어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 세 번째 거점에서 비로소 감각을 사용해 기준을 정하기로 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뭘 선택하든 평생, 아주 긴 시간 질리지 않고
오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오랫동안 질리지 않고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최초로
스스로 찾아낸 하나의 기준이었다. 검토가 끝났던 지난 거점들이 남겨놓은 유산들을 다시 찾아가 먼지를
털고 재조명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오래 전부터 내 안에 들어있던 것들을 다시 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원하는 이미지를 실체화하는 것을 좋아하고, 나아지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아주 어렸을 때의 초기 감각을 되살려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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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 권리, 자크 아탈리식 표현에 따르면 나의 본질적 재산은 이제야 비로소 그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다시 스물 하나부터 시작하겠냐는 질문에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답하겠다. 지금까지 했던 불확실한 삽질을 또 해야하는 무엇도 확실하지 않던 그 시기로는 돌아가지 않겠다. 그러나 지금의 깨달음과 마음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 내가 만나게 된 읽고 쓰고 평생 학습하며 사는 삶을 20대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평생 읽고 쓰고, 토론하고, 더 발전시키며 내게는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고, 함께 토론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