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에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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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번 길로 나가보니 원체 가벼웠던 주머니는 흥부네 쌀독 마냥 바닥을 보였다. 햇빛과 물, 공기만 가지고 밥을 짓는 식물이 나는 진정 부러웠다. 명색이 동물인데 부러워만 할 수 없는 노릇에 어서 자전거를 구했다. 자전거를 타니 교통비는 몸이 냈다. 나는 몸에 대해 빚지며 길을 달리긴 했지만, 이 빚은 얻을수록 부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자전거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식물을 부러워하지 않는 동물이 되었다. ”
눈이 번쩍 뜨였다. 세상에 여행기를 이런 문체로 쓸 수도 있구나! 당장 글의 주인공을 추적했다. 30대 중반의 국어교사 한상우, 그에게 세상은 넓었고, 더 자유롭고 싶어 자전거를 구했다. 그는 틈만 나면 여장을 꾸리고 페달을 밟아 길 냄새를 찾아 다닌다. 마치 이번 생은 멀리 언덕 너머 일몰을 바라보며 자전거에 앉아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왜 힘들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냐고?
페달에 발을 올려 놓을 때의 설렘,
첫 페달을 꾹 밟을 때에 얼굴에 와 닿는 바람,
살짝 놀아진 눈높이,
몸에 적당히 맞는 속도감,
길과 지도 간의 숨바꼭질
오르막의 긴장과 내리막의 청량감,
물 한 모금의 소중함
거친 숨과 함께 마침내 얻게 되는 평화.
이 모든 낭만이 자전거 한 대에 들어 있는 걸.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야
넌 왜 자전거를 안 타니?”
자전거 타는 맛이 이토록 소소한 기쁨에 있을 줄은.. 그는 역시 자전거의 낭만을 아는 시인이다. 자전거 상에서 만나는 바람, 햇빛, 스치는 풍경과 지형에 반응하는 몸의 상태, 이 모든 것들이 자연과의 교감이며 길의 속삭임이다. 그 진한 맛을 이미 알아버린 여행자에게 자전거는 탈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몸의 연장이 된다.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길의 언어를 받아 적으려 몸부림치지만 길의 목소리는 너무 희미했고 또 항상 더디 왔다. 글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다행히 사진은 길 위에 펼쳐진 시간과 공간을 붙들어 매었고, 글을 이끌어내는 착한 마중물이 되어 주었다. 그의 책 “자전거 다큐여행”에서 핵심은 다큐다. 자전거 위에서 카메라가 포착한 다큐멘터리 같은 사진 한 장에서 그렇게 깊은 자연과 역사의 이야기가 샘물처럼 솟아날 줄은 몰랐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진이 그와 함께 자전거로 여행하듯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하지만 아무리 사진이 좋다 해도 국어 교사답게 한상우의 매력은 잘 빚어진 그의 글에 있었다.
“복어회를 떠낸 듯 얇은 꽃잎은 반투명하여 오래 들여다보기 민망하였는데, 그 야릿한 꽃잎을 연분홍으로 물들여 입은 치맛자락은 양귀비의 몸 쪽은 하얗고 세상 쪽은 붉었다. ..한가로운 바람이 슬쩍 양귀비를 건드리면, 치맛자락은 모르는 척 뒤집어졌다.”
참으로 훔치고 싶은 문장이다. “아, 나도 이런 문장으로 여행기를 쓸 수 있다면 …”, 부러웠다. 그는 내게 여행 에세이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온통 글로 된 그림이며 시적 은유와 비유로 점철되어 있다. 어쩜 그렇게 자기 삶을 여행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물에 투영해 볼 수 있는지 신기하다.
여행을 꿈꾸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새롭게 보고 느끼기 위함이 아닐까? 집과 회사 등 항상 똑 같은 장소를 전전하다 보니 사람이 고인 물같이 정체되기 쉽다. 이럴 때 여행은 삶에 신선한 충격이 되어 감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는 그러한 기회 포착의 달인이었다. 그의 자전거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났지만 그가 본 것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전율을 느낀 건 한상우 만의 시선이었다. 시인의 시선과 같은 전혀 새롭고 신선한 그의 시각과 참신한 언어를 자전거 여행기에서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짧고 간결하게 적어 내려간 문장은 그 단순함으로 인해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자전거로 만난 세상과의 교감이 자전거 위에서 느끼는 바람처럼 피부에 와 닿았다.
나는 한상우를 통해 자전거 여행기의 새로운 시각을 배웠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책을 쓸 때 책의 컨셉트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기존에 나와 있는 자전거 여행기를 보면서 몇 명째 인물탐구 중이다. 그들 중 그 누구보다 한상우는 특이했다. 그는 자연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시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로 승부했다. 책을 쓰려면 자기만의 강점, 즉 자신의 개성이 돋보이도록 컨셉트를 잡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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