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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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모텔
2014. 12. 03
늦은 오후 운동장엔 바람처럼 눈이 날리고 얼어붙은 땅은 바스락거린다. 내색해 주는 이 없는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맘 먹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눈을 던지거나 굴리고 있다. 여기 이곳이 학교여서 좋다.
“샘~~기숙사에 방 많아요. 여기서 주무세요.”
그 사이 녀석들은 마음을 열었다. 몇몇은 아쉬워 하는 눈치다. 이 녀석들과 기숙사에서 하루 머물면서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맘을 먹지는 못했다. 담당 선생을 찾고, 사정을 이야기 하고, 허락을 받고 하는 번다함이 내키지 않았다. 아이들 덕문에 하루종일 신나다가, 손님 대접이 이 모양인 선생들 때문에 하루종일 심드렁했다. 날씨까지 이 모양이니 가슴이 일렁인다. 살에 닿는 바람이 제법 시리다.
근처 마트에 들러 생수 큰 것 두병과 컵 라면 두개를 샀다. 책도 봐야하고, 밀린 보고서 작성 하려면 늦은 밤까지 차를 마셔야 한다. 라면까지 먹으려면 물이 제법 필요할 것이다. 계산을 하면서 묵을만한 숙소를 물었더니 차로 십여분 거리에 괜찮은 숙소들이 모여있고, 마을엔 터미널 이층에 하나 있는 것이 전부라고했다. 마트 문을 나서니 왼쪽으로 모텔간판이 보인다. 이 허름한 숙소가 오늘에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일층엔 다방과 편의점이 (간이)터미널을 담고 있고 이층엔 노래방과 여관이다. ‘양지모델’이란 간판에 ‘지’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양 모텔’이다. 군데군데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간 낡은 계단을 따라갔다. 일찍부터 얼큰한 손님들이 든 노래방에선 금방이라도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분내를 풍기며 문을 열것만 같다.
여관은 생각보다 깨끗했으나 락스냄새 만큼은 극복이 안된다. 달라는 방값에 오천원을 더 얹어 주면서 시트를 갈아달라고 했다. 방금 갈았단다. 방문과 창문을 열어둘 것을 부탁하며 먹을만한 식당을 소개해 달랬더니 개인택시 사무실 옆에 올갱이국이 먹을만 할 거라고 했다. 바람에 눈발이 휘몰아친다. 녹았던 눈과 쌓인 눈이 엉켜서 다시 얼어붙은 길바닥이 너덜너덜하다.
식당은 쉽게 찾았다. 작은 마을이다. 관절이 좋지 않은 늙은 주인은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말쑥한 사내가 낮선 모양이다. 문을 열고 이만큼 들어서 올라 앉을 때 까지 멀뚱히 쳐다만 보다가 밥 먹으로 왔다는 인사를 받고서야 펴기도 힘든 다리를 움직였다. 내가 첫 손임이었을 것이다. 알콜이 땡긴다. 치료중인 이가 아주 잠깐 걱정되었지만 소주 한잔 하지 않을 수 없다. ‘초정수로 만든 시원한 청풍’이 싸한 바람처럼 식도를 타고 흘렀다. 인정식당, 올갱이국 칠천원, 소주 삼천원.
먹다 남은 소주병을 주머니에 꽂아 숙소로 왔다. 안뿌려도 좋을 싸구려 방향제를 얼마나 뿌렸는지 눈이 따갑다. 시트를 갈고 있다. 보는 앞에서 갈아주겠노라는 명랑한 의지가 시트를 만지는 손끝으로 흘러 넘친다. 약은 척 하지만 순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천원의 힘이거나 현금결제의 힘이었을 것이다. “쉬세요~~” 나가면서 방향제를 문앞에서 몇번이나 더 뿌리고 간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찻물을 올렸다. 남은 소주를 종이컵에 반 부어놓고 노트를 열었다. 강의 준비도 마저 해야하고, 남은 숙제도 있지만 지금은 정해진 어떤 것을 해야할 것 같지 않다. 도라지 위스키 흠뻑 묻은 선홍색 벽지를 마주하고 팬티바람으로 앉았다. 옆에서 돼지를 잡는지 멱따는 소리가 벽으로 쿵쿵거린다. 이만하면 오늘 참 괜찮다.
딩동~~카톡이 울었다.
“누런 벽지에 녹은 삶의 흔적을 찾아 보아요.”
[저녁 먹고 들어오면서 커피한잔하고 올라갈랬더니 일찍 문 닫았더라. 양지다방]
[올갱이국 칠천원, 소주 삼천원, 인정식당 ... 주방은 메주콩 삶는 향이 가득하고 할머니는그 콩을 자루에 담아 밟았다.]
[먹다 남은 소주병을 주머니에 꽂아 숙소로 돌아오는 길, 이 정도면 그냥 멋지다.]
[빨래줄이 걸려있고 살짝 불쾌한 냄새가 나는 여관방에서 나는 이 글을 썼다. 일하라고 놔 준 인터넷이 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눈 뜨자 마자 빤스바람으로 창을 열었다. 카메라는 이 장면을 담고 나는 싱싱한 산소를 폐속에 가득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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