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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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이 누락될 것 같다는 통보를 받았다. 예상 못했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배우고 익혔던 것들에 앞서 ‘버려졌다’는 감정이 먼저 뛰쳐나왔다. 그것은 매끈한 유리잔에 맹렬한 기세로
피어 오르는 맥주거품처럼 내면 속으로 퍼져나갔다. 먼 곳에서부터 달려오는 모래 폭풍이 드디어 나를 덮쳐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여러모로 가혹한 연말이 되었다. ‘아, 이거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 생활 3년
반이 지나자 그 동안 회사와 맺었던 여러 관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있는 그대로의 크기로 알게 되었다. 막연한
두려움에 머물러 있던 것들이 그대로 현실을 집어삼키고 모습을 드러냈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나는 늘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과
나의 차별점은 자유롭지 않은 몸임에도 자유를 그리고 자유인으로서 살아남으려는 방향성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다. 컴퓨터 바탕화면도 그의 묘비명을 찍은 거라고 알려진 그리스어 세 문장으로
해두었다. 기대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말자. 특히 선캄브리아시대 마냥 자신감이 폭발하던 신입사원 무렵에는 늘 ‘걱정하지
말자. 잘 될거야.’가 입버릇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나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자극을 받으면 자동으로 무릎이 들리는 물리적 반사신경처럼,
나의 마음도 기대와 자극이라는 피드백으로 스스로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사실은
세모난 빨간 쿠션이 달린 망치로 나를 때려야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성장
곡선을 그리던 장밋빛 미래가 희미해지는 가운데 나는 더한 고난을 묵묵히 견디고 다시 일어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큰 불행을 뽑았던 두 사람. 궁형을 선고 받은 사마천의 감옥에서
보낸 밤과, 아직 젊고 타협을 모르던 무관이었던 이순신이 북쪽으로 전근 가던 날이 생각났다. 그럼에도 그들이 해냈던 놀라운 일들이 생각났다. 아마 더 연차가
적었다면 그들의 기분은 그저 감당 못할 크나큰 무게로 다가왔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것 같다. 한편에는 그들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는 몇 년간 누적된 경험과 책임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반대편에는 연구원 과제를 해내며 그들의 마음을 최대한 상상하며 읽었던 훈련의 결과물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책들이 나의 구체적 상황과 맞물려지는 부분을 만나면서, 그들의 긴긴
밤은 함박눈처럼 가만히 내게 와 닿았다.
그제서야 나는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우리들의 지금은 안녕한가? 연말에 나간
송년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그리웠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다들
어딘가 피곤한 얼굴이었다. 대단한 취업난을 뚫고 합격증을 얻어냈던 친구들. 그러나 사람 문제, 업무내용의 문제, 업무 강도의 문제 등의 제각각 말 못할 것들에 치여 시들시들해진 모습이었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나를 위로함으로써 비슷한 시기의 고민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까지 위로해줄 수 있을거라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주말 동안 외적 사건으로 시작된 일련의 생각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 자체는 별 것 아닌 것 같다.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단기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업무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전혀 아니다. 심지어 나는 연초에 입사한 게 아니라서 엄청나게 뒤쳐진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는 내가 의외였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궁금해졌다. 근원을 조금 생각해본 나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과정이 내가 공부했던 선배’인류’의 여러 레퍼런스가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10년의 독서 경력에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
기대와 두려움 둘 다 정신적 반사신경에 해당한다. 그것은 동물적 본능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목소리가 아닌 것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는 오로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자긍심을 가져라. 자아비판 대신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배짱과 맷집을 키우자. 막연한 ‘잘될거야’ 보다 한번 깨져도 다시 다잡을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소중히 하자.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만 더 해보자. 또 모른다. 우리가 세상을 놀라게 할만한 사람이었던 것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