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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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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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이었다. 비가 오지 않았다. 눈이 오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 진눈깨비가 나리지도 않았다. 비가 내리며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맑은 햇살 아래 빗방울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눈을 뜨면 맞이하던 어제 그제의 평범한 날이었고 그저 맑은 날이었다. 그렇게 삼백육십오일 중의 어느 날이었을 뿐이다.
약속이 있었던 듯 심장이 내 몸을 열고 나갔다. 헤어지는 연인의 그것처럼 안녕하는 종결의 인사도 없이 훌쩍이였다. 놀란 몸은 알았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자랑질했으나 일이 난 후에 그 말은 부질없을 뿐이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벌어지고 난 후에야 놀라움과 당혹감이 무성한 울림을 전해 이유를 만들어 내곤 했다. 몇몇이, 심장이 제 속에서 다리를 끄집어내는 것을 보았다 했다. 저벅이는 발소리가 정말로 ‘심장이 쿵’한다 할 때의 소리와 같은가 이런 생각들을 하긴 했지만 그것이 무슨 일을 예고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모든 몸이 일시정지하며 닭의 껍질피부를 경험한 것은 소리에서 전해진 기시감으로부터였다. 심장은 두 다리를 목을 타고 오르는데 할애했다. 붉은 심장에서 뻗어난 두 다리가 가는 목을 거니는 시간은 오래지 않았다. 제 위치를 벗어난 심장은 마침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굳은 혀를 다이빙 스프링보드처럼 두어 번 반동하더니 때마침 ‘아’하며 놀란 입술을 통해 뛰어내렸다. 아니, 날아올랐나.
그.러.니.까.아.주.맑.은.어.느.날.이.었.다.
잠시 심장이 태양 속으로 뻗어가는 듯했다. 심장이 더욱 붉었다. 태양보다 더 붉고 아름다운 심장의 형상과 빛깔에 태양이 심술을 부린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늘의 끝에까지 오르던 심장이 갑자기 멈출 리 없었다. 누군가는 그때쯤 태양의 입언저리가 심장을 향해 촛불을 끌 때의 모양을 하고 미세한 바람을 내뿜었다고 주장했다. 그 일을 담당해오던 입술이 하는 말이었으니 제법 전문가적인 신빙성이 있다고 스프링보드 역할로 몸이 덜 풀린 혀도 거들었다. 그렇게 태양과 하늘을 쳐다보던 모든 눈들은 소리가 나고서야 일제히 땅으로 눈을 돌렸다. ‘철퍼덕’. 그 소리는 눈들이 땅으로 고정된 뒤에도 메아리처럼 계속 따라왔다. 심장은 땅바닥 위로 철퍼덕 엎어졌다. 워낙 심장이 붉었기에 그 주위를 감싼 것이 심장이 내뿜는 피였는지 그저 심장 자체였는지 헷갈렸다.
그제야 매번 ‘아’하며 놀라기만 하던 입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고개를 내밀어 일제히 밖을, 아래를 내다보려던 내 모든 몸들 때문에 나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심하게 부르르 떨던 두 다리가 그때만은 꼬옥 쓰러지지 않았는데 그들을 잡아준 것은 발목까지 내려온 온갖 종류의 절망이었다. 심장이 절망들을 함께 끌고 내려온 것인지 절망이 심장을 끌어 내린 것인지 또한 헷갈렸다.
심장이 이탈해 버린 내 몸은 이상하리만치 멀쩡해 보였는데 심장을 밀어버린 것이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심장이 빈 몸으로도 잘 견디고 있었다. 비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사라진 공간으로 비바람이 통과해 부딪침이 거세지 않았기에 그러했다. 심장을 잃고 강철 옷을 입은 듯 다른 모든 곳이 무디어져 갔다. 어쩌면 내가 심장에게 바랬던 것이 그것이었을 게다. 좀 더 강한 심장. 나는 여린 심장을 늘 닦달했다. 그리고 어느날, 아주 무심하게 삶이 지겨워졌노라고 말했었다. 축적된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는데 여린 심장에게 화풀이를 해댔었다. 심장을 보면 늘 답답하다고 그러다보니 지쳐가노라고.
어느 가을엔가 750여년 된 고목을 발견했다. 아주 작아서 그저 오랜 나무의 자태로만 존재할 뿐인 나무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여전히 열매를 생산하고 있었다. 가지에 이천여개가 넘는 감이 대롱대롱 매달리어 있었다. 고목의 힘을 감탄하던 심장에게 나는 말했다. “저 감나무가 저토록 오래 살아남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