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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날
2014년 12월 29일
쓸데 없는데
성질을 죽일 수가 없을 때
따분하고 온갖 짜증나도
오늘 딱 하루만 참아줘
딱 하루 참아보세
평화의 날
달력에 적어보세
삶이란 갑 속에
이 순간은 돛대- 에픽하이, ‘평화의 날’ 중에서
평화의 날이 지속되던 중이었다.
그러다 휴화산이 폭발했다. 그간의 일반적이고 일방적인 패턴과 달리 주로 성질을 맘껏 발산하던 이들은 조용해졌고 늘상 성질을 죽이던 것들이 눌러왔던 ‘화’를 분출하며 팽팽한 대립 전선을 형성하였다. 그 놈의 성질을 못 죽여 장장 수개월에 걸쳐 위태롭게 유지해온 평화의 날을 깨뜨린 것은 나였다. 상대의 개무시 작전으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한번 빈 틈을 뚫고 뛰쳐나가려던 ‘성질’이라는 녀석은 갈 곳을 모르고 에너지를 분출하려 들기에 나는 뭔가를 저질러야 했다. 그래서 저질렀다.
그 결과, 나는 어제 잠을 잘 잤다. 나의 성질을 개무시한 녀석도… 잘 잤을 것 같다. 그냥 나는 어제 성질이 났고 평소와 달리 별 것도 아닌 계제에 그것은 내 혈관을 우….하고 일으켜 세워 나는 그것을 참기 싫었고, 악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고, 그래서 ‘함 해보자’ 했는데, 뭐… 별 일 안 일어났다. 저지른 수준이 너무 미약하였나… 충격 효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내 속은 좀 시원하였다.
오늘 나는 평화의 날 따위 엿이나 먹으라며 저지른, ‘성질 나는 대로 질러보기’ 작전의 연장선상에서 아예 장기적 작전상태에 돌입해볼 궁리를 한다. 이 기회에 올인이냐? 평소처럼 피곤하니까 이제 그만, 이어야 하는가. 이것도 기회라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온갖 경우의 수를 헤아리고 있는 내가 엄마라는 존재에 적합한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다가, 아니지. 이것은 동화 ‘돼지엄마’의 주제와 완전히 일치하는 상황이며 조금이라도 상황을 개선하려면 그녀와 같은 결단력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며 또 결연해진다. 에라이, 짐을 쌀 것인가, 말 것인가. 어차피 방학하면 놀러가기로 한 건데, 이틀 먼저 간다고 뭐 어떻게 될 것도 아니고, 저 얄미운 녀석만 놔두고 반성하고 오라 하리라… 생각하다가, 에픽 하이의 ‘평화의 날’을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쓸데 없는 데, 성질을 죽일 수가 없을 때,
따분하고, 온갖 짜증나죠,
…
딱 하루만 서로 돕자
딱 하루만 서로를 보자”
딱 하루만, 오늘 딱 하루만. 그 말이 자꾸 머리 속을 맴돌며 내게 묻는다. 내 속의 나는 억울하여 소리 지른다. 뭐, 딱 하루? 이게 하루 이틀 일이냐? 이게 너만 참는다고 옳은 일이냐? 네가 한번 또 참고 저렇게 내버려 두면 너는 나중에 책임질 일이 없을 것 같냐? 이번에 아주 버릇을 고쳐놔야 해.
아, 노답이다. 나는 평화롭게 떠날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가장하며 묵묵히 미움과 분노의 주파수를 발산하며 그 자리에 머물 것인가를 두고 고민 중이다. 그거 말고, ‘니가 분노를 삭히고 평화롭게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도 있지 않겠니’라고 그 분은 말씀하실 것 같은데 나는 너무 열 받아서, 성질 나서 도저히 그것은 실천을 못 하겠다!!!며 억울하다며 땡깡부리는 내 속의 어린애를 바라본다. 모르겠어, 나는 뭘 던지든 찰나의 파문 뒤에 다시 고요해지는 너른 호수 같은 부모일 수 있는가? 그게 이런 경우에도 유지할 자세가 맞는가? 아직도 못 돌려받은 사과를 내심 기대하는 나는 상처받은 어린애의 그것으로 퇴행하는 것인가? 그 사과는 내 아이에게 받아야 하는 게 맞나? 나는 내 부모의 사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것이 안 됨을 알기에 내 아이에게 똑 같은 짓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인가? 에라이!
돕고 살자, 제발.
그게 녀석에게 할 말인가. 내가 곱씹어야 할 말인가. 왜 맨날 나만 곱씹고 반성하는데. 또 억울해진다. 아, 그냥 나도 내키는 대로 성질 내고 뒤집어 엎고 무책임하게 좀 떠나주면 안 되는가. 소는 누가 키우냐고… 내 안의 무수리가 나를 말릴 때, 됐어. 에픽 하이나 마저 듣자.
"나와 너와 오늘 딱
하루만의 작은 변화
너와 나 우린 하나
두 손가락을
위로 들고 평화"
젠장, 평화의 날… 달력에 적어두자. 평화보다 적극적인 그 무엇이 생각 날 때까지. 오늘은 평화와 반성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