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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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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5일 11시 47분 등록

■칼럼27■

귤 까 드세요


 

 귤 한 상자를 샀다. 혼자 먹기엔 많아도 조카들이 있으니 괜찮다 싶었다. 떠나는 트럭 끝자락에 매달리어 용케 한 상자를 짊어질 수 있었다. 조카들이 떠나고 남은 귤 상자를 옮겼다. 귤은 빛깔도 바랬고 상처 난 것이 많았다. 아저씨…믿었건만…. 그래 믿었다. 맛있는 귤이라며 아저씨가 골라 주는 귤 상자를, 아저씨의 기본을 믿었다. 맛보라며 건넨 귤에 안심할 것이 아니었다. 내가 믿어야 했던 것은 아저씨가 아니라 내 눈으로 내 손으로 귤 상자를 고르는 것이었을 거다.

 그날 오후 한 상자의 귤에서 곪은 귤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맨 위에 놓여 있던 귤은 역시 전시용이라 괜찮았다. 상자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귤 상태는 심각했다. 하나의 곪은 귤이라도 있으면 귤 상자 전체로 옮겨져 결국 모든 귤이 상하게 된다. 귤 한 상자를 혼자 다 먹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잘 골라내야 했다. 한 상자에서 어느 정도의 상처난 귤은 감내할 수 있다. 그 정도는 수긍이 된다. 그러나 헤집을수록 나오는 곪은 귤들을 보다가, 서글퍼졌다. 나의 손길로 상자에는 멀쩡한 귤들만이 남았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여러 감상에 빠졌는데 그 첫 번째가 서글픔이었다.

 내 손으로 골라 집어던져 놓고도 곪은 귤들이 안쓰러이 여겨졌다. 마치 그것들이 내 몸인 양 이 사회에서 상처난 몸으로 살아가는 일은 버겁다는 것을 생각했다. 상처있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버려지는 구나. 때깔 좋은 사람들이 더 잘 살기 위해서 그들은 충분히 숨어있어야 했고, 가려져야 했고, 그리고는 마침내 버려져야 한다. 한 해가 마감되고 또 한 해가 시작되면서, 추위의 강도가 점점 강해지면서 더욱 더 드는 생각들이다. 아니, 으레히 반복되는 생각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왜 아저씨는 때깔 좋은 귤만을 골라 상자에 담아서 좋은 귤들만이 있는 최상품이라며 값을 더 쳐서 팔지 않고 흠집난 귤 위에 멀쩡한 귤들을 휘장처럼 둘러놓았는가. 나는 애당초 조금 더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서둘러 한상자의 귤을 사야했나. 낱개로 샀다면 분명 하나씩 골라 담았을 터, 잠깐 들여다본 귤에서는 곪은 티가 보이지 않았었다. 잘 전진배치된 귤들 덕분이었을 거다.

 한 상자의 귤이 한 상자만큼의 사회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아저씨는 제가 키운 농산물이,  제가 파는 농산물이 모두 좋은 것이라고 나를 속였다. 아저씨가 키운 한 나라는 어떤 경로든 잘못된 상황들의 연속이자 범벅이었을 텐데 그는 아무것도 처리하지 않고 그저 가림으로 위장으로 괜찮다, 괜찮다 하고 있었다. 아저씨에게 속은 것도 분하지만 믿지 뭐, 라며 쉽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더 한심하다. 곪은 귤들을 내버리고 괜찮은 귤들이 남은 귤 상자를 본다. 다른 귤들이 썪을 것을 방지했다는 뿌듯함보다 이 귤들만이 담겨져 있을 상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특정한 이들만을 위한 세상. 한 해의 세상살이도 결국 이렇게 귀결지어졌다. 당연히 소원하는 사회는 급속히 물러나 앉았다.

 하나의 쇼가 그려졌다. 펜이 만든 쇼다. 그는 한 시간의 쇼를 기획했다. 개인이 순서대로 지나가는 가장행렬이다. 개인들은 소득에 비례한 키를 가졌다. 쇼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땅 속에 머리가 처박힌 채 거꾸로 들어서는 사람이었다. 그는 파산한 사람이다.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에서 봄직한 소인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쇼가 마칠 때가 되었는데도 이들과 같은 고만고만한 키의 사람들만이 지나간다. 아, 그런데 쇼에 참가하는 전체의 평균은 170cm라 한다. 쇼가 중반을 넘어가도 평균의 키가 되는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쇼가 끝나기 12분 전에서야 평균 신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6분을 넘겨두고 2미터의 키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지막 1분을 남기고 20미터가 되는 사람들이 등장하더니 급기야는 엄청난 거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은 구름 위에 머리가 가 있는 사람들이다.

 펜은 이 쇼의 이름을 이렇게 붙였다. “난쟁이의 행렬”. 우리 사회의 소득불평등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난쟁이들만이 가득한 사회, 그러나 구름 위에 시선이 모이는 이들은 늘 고개를 숙이지 않기에 그들을 볼 수가 없다. 그러면서 왜 굳이 챙기겠다고 말을 내뱉는지 모르겠다. 펜의 쇼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이 땅의 난쟁이들은 구름 위에서 목이 달랑달랑 떠도는 이들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다. 권력과 소득을 움켜쥐고 늘 그렇듯 ‘아랫것들을 챙기려 하니’ 늘 그렇게 뜬구름 속에 사는 것이다. 난쟁이들은 그들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이런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을까. 귤 한 상자를 뒤집어엎어 나온 귤들을 까먹으며 여전히 복잡 복닥한 생각들만을 까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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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5:17:59 *.70.47.227
귤 하나도 믿고 먹기 힘든 세상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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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5 15:44:36 *.53.209.142

이상해... 귤이 점점 더 빨리 상해. 예전에 먹던 귤들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너무 빨리 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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