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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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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7일 12시 41분 등록

 

어릴 적에 방학이면 외가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경기도라 가깝기도 했지만 내가 외가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진한 색깔의 두꺼운 쪽마루가 깔린 대청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다. 명절이면 밤새 고은 엿물을 멍석에 조르르 흘려 엿을 만들던 일, 아이들이 둘러 앉아 깻잎을 열 장씩 모아 주면 외숙모가 받아서는 끄트머리에 두 어 번 실을 돌려 마루 틈새에 거꾸로 꽂은 면도칼에 슬쩍 갖다 대던 날렵한 손길…… 내 인생 처음으로 허무감을 느껴본 것도 그 마루에서였다. 열 살 무렵의 어느 날,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다들 어디를 갔는지 나 혼자 있었다. 마루에 앉아 안마당에 동그랗게 패이는 빗자국을 보고 있는데 문득 사방이 고요해지며 정적이 감돌았다. 그 느낌이 어찌나 강렬하고 낯설었는지 마치 차원이 다른 시간대로 들어선 것 같았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그 때 나는 천지에 혼자 있는 듯한 절대고독을 느꼈다. 산다는 것이 이토록 적막한 일이라는 느낌, 그건 분명히 실존적인 허무감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되었지만 나는 화려한 대학가 보다 농촌활동에 더 마음이 쏠렸다. 동네 머슴처럼 아무 집 일이나 하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먹었다. 강원도 산간마을에서 수확한 고추와 마늘을 신촌에 갖다 직거래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 시절처럼 이물감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백프로 순수한 연대감을 이웃에게 느낀 적은 또 없었다. 대학내내 농활에 목맨 것으로도 모자라서 나는 졸업 후에도 2년간 직접 농사를 짓고, 교직생활을 하더라도 농촌을 택하다가, 급기야 진짜 농사꾼과 결혼을 한 전력이 있다.

 

20대와 30, 내 인생의 중추를 베혀 내어 농촌에 머물게 한 그 선택이 어쩌면 어릴 적 외가에서 뛰어놀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지난 날을  굽어 볼 수 있는 산등성이에 올라 와 있는 것과 같아서, 내 삶의 지도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보기만 하면 마냥 좋은 분꽃과 과꽃 같은 우리 꽃들이 외가의 장독대 앞에 소슬하게 피어있던 기억이 떠오를 때는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내 삶을 이어가는 가느다란 줄이 생각보다 질긴 인연으로 엮여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스름 녘 동네 뒷산에 오를 때면  익숙한 그리움이 몰려 온다.  의식보다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는 듯  즉각적인 기시감에 빠지곤 한다. 그것이, 하루의 일손돕기를 마치고 저녁에 농촌 청소년들과의 모임을 갖기 위해 어두운 길을 헤쳐 가던 때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찾아낼 때 내가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할 지를 알게 된다.  잠시 다른 일을 하며 에둘러 가더라도 외가 농활 촌부로 이어지는 굵은 뼈대를 완성해야 하리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지난 주 편지에 인용했던, ‘삶이 굉장히 복잡한 것 같지만 결국엔 시 한 구절로 돌아간다. 인생이 단순하면서도 집요한 사이클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토로에 반색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느낌에 충실하여 혼자 결정하는데 익숙하지만 신뢰할만한 인생선배의 추임새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리하여 또 한 바퀴 스스로 깨우치기에 들어 간다. 인생의 중반을 살아낸 사람은 누구나 삶의 속성에 대해, 이 생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해 얼추 알고 있다. 다만 문제는 선택하느냐 않느냐일 뿐, 더구나 중년에 처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선택일지도 모른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 올수록 오후의 햇살은 더욱 가파르게 사위어 들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그대 인생의 축을 이루고 있는 원초적 경험에 단서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을 발굴하고 확인하는 데 미스토리가  도움이 된다. 이제껏 살면서 기억나는 것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쓰다 보면 그것들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줄이 보인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미처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것, 혹은 알면서도 거부했던 것들과 다시 뜨겁게 조우하는 그 과정에서 비로소 진정한 스토리가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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