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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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강연을 군산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신호로 말을 거는 몸에게 집중하는 나날을 보내다가 근 스무날 만에 대중 앞에 섰더니 초반에는 감이 좀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내 참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미 자발성을 갖추고 모여든 청중은 언제나 함께 호흡을 합니다. 함께 호흡을 하는 자리에서는 일방적 가르침이나 전달로 그 시간이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강연자도 청중과의 호흡을 통해 수시로 통찰을 얻고 사유를 확장하는 경험을 갖게 됩니다.
이번 강연에서도 물었습니다. “석 달만 산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청중 속 한 분의 능글맞은 대답은 우리 모두를 오랫동안 웃게 만들었습니다. “빌릴 수 있는 만큼 돈을 빌려야죠. 가능한 악덕 사채업자들 돈으로!” 이런 대답은 처음이고 참으로 기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해서 되받아 물었습니다. “뭐하시게요? 원 없이 돈을 쓰다가 돌아가시게요?”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아니오. 그동안 여기저기 진 빚을 갚고 가려고요.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이 참 많거든요.” 독특하게 얽힌 욕망이 만든 그 대답이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내친김에 우리는 돈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 했습니다. 돈이 우리를 기쁘게 하지만 또한 돈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한다는 그 평범한 진실을 자연스레 환기하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떨어져서 스스로를 보면 곧 알게 됩니다. 나는 지금 내 복된 삶을 위한 수단으로 돈을 대하는지, 아니면 돈 자체가 이미 목적이 돼 버렸는지. 나의 진단법은 간단합니다. 시를 읽은 지 너무 오래 되었다면 의심해 봐야 합니다. 사람이나 역사, 건축이나 시간, 이야기나 흔적, 아름다움 같은 차원을 만나러 떠나는 여행이 일 년에 몇 번인지 헤아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행 너 어디까지 가봤니’의 자세로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요샛말로 ‘백퍼’에 가깝습니다. 박스오피스 순위권 밖에 있는 영화에 관심이 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심해 봐야 합니다. 오늘 하루 마주치는 풍경에서 감탄하거나 교감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면 의심해 봐야 합니다. 책을 읽기는 하는데 늘 실용의 장르 근처에서 그 책을 고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역시 의심해 봐야 합니다.
나는 제법 빚이 많은 사람입니다. 빚의 대부분은 품은 철학과 살아내기 위한 밥 사이를 지키느라 지게 된 빚입니다. 일부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일부는 금융기관에게 갚아야 할 돈입니다. 돈은 내게도 늘 버겁고 골치 아픈 놈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돈이 나를 가두지 못하는 힘이 두어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내게는 ‘이만하면 족하다’의 철학이 있습니다. 밥 먹고 살고 있으니 이만하면 족하다. 넓지 않으나 별 보며 누울 수 있는 방 있으니 족하다. 늘 여행처럼 일할 수 있으니 참으로 족하다. 신이 품은 미소를 머금고 농사지을 수 있으니 이만하면 족하다. 여행처럼 강연할 수 있으니 정말 족하다. 도착한 강연장 주변의 장소에서 사람과 시간과 이야기와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느낄 수 있으니 호사다.… 이런 식의 족하다 철학이 큰 힘입니다. 둘째 나는 빚에 대해 최후의 그림을 품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품은 철학을 향해 나가다가 쓰러지는 경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갚겠다는 다짐과 그림입니다. 그것은 어떤 또 다른 빚을 남기지 않고 빚을 정리하겠다는 다짐이어서 가난한 이가 위로로 삼을 만합니다.
고백해 둡니다. 돈이 나를 삼키게 내버려 두지 않는 법. 나의 경우 이만하면 족하다 느낄 수 있게 되면서 돈이 나를 잡아먹지 못하게 됐습니다. 열심히 살다가 쓰러질 경우 모든 것 다 내려놓을 다짐 품고 살면서 두려움과도 맞설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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