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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8일 22시 43분 등록

1.제목: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있다.jpg

- 출판사: 에코의 서재

- 옮긴이: 고혜경

 



2.저자 : 로버트 A.존슨 Robert A. Johnson


로버트A존슨.jpg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융연구소에서 수학한 미국의 정신분석가이자 심리학자이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강연자이면서 수많은 책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존슨은 꿈과 신화의 세계를 존중하고 무의식의 메시지를 따르는 삶이 얼마나 경이와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게 되는지, 그리고 또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영성적인 자세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를 전 생애로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저서로는 『남성 (He), 『여성 (She), 『우리들 (We), 『내면작업 (Inner Work),『엑스타시(Ecstasy), 『여성성의 상실과 회복 (Femininity Lost and Regained), 『자신의 그림자 받아들이기 (Owning One's Own Shadow), 『변형 (Transformation), 『천상의 여인과 함께 누워 (Lying with the Heavenly Woman), 『하늘과 땅 사이의 균형 찾기(Balancing Heaven and Earth), 『충만함(Contentment)』 등이 있다. 

그의 최신작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는 융 심리학 이론을 토대로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두운 존재, 그림자를 탐구한 심리분석서이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 괴테의 '파우스트', 남미와 동유럽의 민속신앙, 중세의 마녀사냥 등 역사, 신화, 종교,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며 그림자의 존재와 의미를 탐구한다. 그림자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기원하며, 어떻게 축적되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고, 우리가 그림자를 받아들여 완성된 삶에 이르는 과정을 친절히 보여준다.





 

-옮긴이: 고혜경

 

신화학 박사이며 꿈 분석가이다. 미국 퍼시피카대학원(Pacifica Graduate Institute, Santa Barbara)에서 신화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오클랜드 창조영성대학원(Institute of Culture and Creation Spirituality, Oakland)에서 영성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샌프란시스코 국제문화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국내 대학과 대학원에서 꿈과 신화 강의를 하고, ‘신화와 꿈 연구회’ 회장으로 꿈 그룹투사작업과 워크숍 팀을 이끈다. 저서로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가 있고, 번역서로 로버트 존슨의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제레미 테일러의 『꿈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나라』등이 있다.

 

 

-참조

http://www.yes24.com/24/goods/2491603?scode=032&OzSrank=2

 

 

3.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 칼 구스타프 융

 

<< 들어가는 말 그림자, 새로운 삶의 가능성>>

 

-7 이야기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대목은 샘물이 항상 어디에선가 솟아 흐른다는 사실이다. 또 생명의 물을 찾으려는 용기 있는 지성인들에게는 저마다 시대에 맞는 맞는 모습으로 이 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삶의 용기를 내면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 내어 찾아보자. 그러면 나에 맞는 형태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8 인간의 영혼에서 이 기대치 않았던 원천 중 하나가 바로 그림자다. 다들 제것이 아닌 양 쓰레기 처리하듯 던져버리는 장소가 자신의 그림자다. 그러나 책을 읽는 과정에서 알게 되겠지만 이렇게 우리가 거부한 그림자는 아주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생명의 물이 언제나 무료이듯, 물의 일환인 그림자에게도 돈을 낼 필요가 없다.

당혹스럽겠지만 그림자는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수용하는 일은 심오한 단계의 영적 수행이다. 이 수행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이므로 그 자체만으로 성스럽다. 이것은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체험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림자는 우리 곁에 있었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준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림자까지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하리라.

 

 

<< 옮긴이의 말 빛과 어두움, 그 창조적 통함 >>

 

-10 칼 융은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 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

 

-10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히면 밝힐수록 어두움 또한 확대된다는 것이다. 융이 말하는 전일적이란 표현도 빛과 어두움 둘 다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성장한다는 말은 집단문화가 수용하는 것과 수용하지 않는 것을 가려내어 전자를 습관화하도록 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가 수용하는 것은 자아가, 수용하지 않는 것은 그림자가 되는데 성장은 그림자 형성과 함께 필연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림자란 한마디로 심리의 어두운 측면이다. 그것은 자아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 내면의 유쾌하지 않고, 수치스럽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이다.

워킹맘의 죄책감도 사회에서 수용하는 것과 맞물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2 현재 우리는 그림자와 자아라는 두 대극적인 축으로 양분되어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고 있다. 저자는 이 둘 사이의 모순으로 인한 갈등과 회의로 자신을 고갈시키지 말고 창조적인 통합의 장인 역설을 찾을 것을 주장한다. 역설은 의식의 진화에 있어 가장 커다란 도약의 순간이다. 그러면서 역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하지만 심오한 이미지를 제공하는데,그것이 만돌라이다.

 

 

<< 1장 그림자 >>

 

-19 페르소나는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인 동시에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페르소나는 심리적인 옷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를 대변하듯, 페르소나는 진짜 자신과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아ego는 진짜 본연의 자기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자, 자기가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신이다. 이에 반해 그림자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우리가 보려 하지 않거나 이해하는데 실패한 부분이다.

 

 

<그림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1 인류는 천재적으로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인류가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특질은 조화롭게 발휘되지만 위협적으로 비치는 특질은 걸러진다. 이런 과정을 겪지 않는 사람은 소위 말해 원시적으로 남아 있게 되는데, 문명화된 사회에 이들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온전하게 태어나지만 우리가 타고난 자연스런 특질 중 어떤 부분은 살아 있도록 허용하고 또 어떤 부분은 계승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문명이다.

집단문화는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양식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자기self에서 자아ego와 그림자shadow가 분리되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런 분리가 유증되어 내려온다. 우리가 단순한 상태의 인간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고 훨씬 복잡하고 세련된 인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어린이는 문명화 과정을 견딜만큼 강해질 때까지 에덴동산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22 세계여행을 하면서 나는 각 문화권의 어떤 특질은 자아에 덧붙여지고 어떤 특질은 그림자에 부가되는지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다. 문화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위적으로 구축된 구조라는 사실은 각 나라의 차이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24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감추려고 애쓰는 것 보다 그림자의 고상한 면을 발견했을 때 이에 저항하느라 더 큰 에너지를 쏟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벽장 속에서 해골을 끄집어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일이다. 그렇지만  그림자 속에 들어있는 금을 찾아내서 자기것으로 만들라고 하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보다, 심오하고 고결한 특질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혼란스러움은 훨씬 더 커진다.

우리 내면의 금은 숭고한 소명과 관련되어 있다. 일생을 살면서 어떤 시기에는 자신의 금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내면의 금을 무시하는 것은 내면의 어두움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자기 안에 있는 금을 캐 드러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심한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때론 중병을 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강하고 두려운 체험은 때때로 필요하다. 이는 우리 내면에 대단히 중요한 어떤 것이 오랜 시간 동면을 하여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점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25 종교religion란 단어는 다시 연결하고, 원천과 하나되는 상태로 돌아가며, 분리된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을 고양시키는 세계를 다시 하나로 연결하는 영적인 과제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문명을 이룩한 다음에는 문화가 표방하는 이상과 덕목 때문에 상실하게 된 전일성을 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분리된 상태로 살아가게 되며, 진화가 거듭될수록 분리로 인한 고통은 커질 것이다.

 

-25 일반적으로 삶의 전반부에는 기술을 익히고 가족을 돌보며 수백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문화적인 과정을 익히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반면 삶의 후반부에는 전일성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어린이와 같은 무의식의 상태이다.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도 어린이와 같은 상태인데 이때는 의식적이다.

어떻게 보면 삶이란 그저 무의미한 왕복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보상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생이란 진화의 과정은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기꺼이 견뎌낼 가치가 있다. 이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재앙은 도중에 길을 잃어 여정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삶의 여정위에서 길을 잃을 채 오도가도 못하고 잡혀 있는 현대인들이 너무 많다.

 

이제 더 이상 헤매이지 말고 해나가자. 스스로의 전일성을 회복해나가자

 

< 빛과 그림자의 균형 잡기 >

 

-27 시소게임에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신이 부여한 온전한 특질은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오직 시소의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기는 것만 가능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느 쪽이든간에 우리가 지닌 특질은 모두 진열되어야 한다. 한 하나라도 뒤로 숨겨서는 안된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한가지 법칙이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가 무시하고 있는 끔찍한 진리로서, 사람이 평상심을 유지하려면 시소가 균형을 이룽어야 한다는 것이다.

 

-29 우리는 파괴없는 창조를 바라지만 그것은 가능한 바람이 아니다.

 

-32 독일어의 도플갱어 dopperlganger란 단어는 자신의 거울이미지, 혹은 자신의 반대라는 뜻이다.

 

-33 잠에서 깨어마자 나는 이 검은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것은 짙은 안개 속을 걸으며 감싸안은, 불빛으로 생긴 내 그림자였다. 그 작은 불빛은 나의 의식, 즉 내가 가진 유일한 빛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비록 그것은 어두움에 비해 무한히 작고 미약하지만 여전히 빛을 발한다. 이것은 나의 유일한 빛이다.

- << Memories, Dreams and Reflections >>

 

-34 자아와 그림자는 같은 원천에서 만들어지고 서로 정확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빛을 밝히는 것은 곧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 없이 서로 존재하지 못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한다는 말은 신성한 자리인 내면의 중심에 도달하는 것인데, 이 방법 외에는 어떻게든 내면의 중심에 도달할 길이 없다. 이 과업을 성취하지 못하면 성숙해질 수 없고 또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

인도에는 성인의 특질을 규정하는 단어가 셋 있다. 사트 Sat, 치트 chit, 아난다 Ananda가 그것인데, 사트는 삶의 존재론적 측면을 의미한다. 대개 시소에서 좌측에 위치하는 부분이다. 치트는 이상적인 가능성으로 대개 오른편에 위치 한다. 아난다는 지복, 기쁨, 깨달음의 황홀경을 뜻하는데 바로 이것이 시소의 중심축이다. 사트와 치트가 서로 짝을 이루고 이를 충분히 의식할 때 아닌다라는 삶의 기쁨 또는 법열을 느낄 수 있다.

 

-35 작품의 생명력은 생기가 없는 일방적인 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성의 다양한 측면을 다 포괄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36 긍정적인 일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이 일에 수반되는 그림자적인 측면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융은 종종 친구들에게 최근에 끔찍한 성공을 거둔 적이 있어?”라고 묻곤 했는데, 이는 빛과 그림자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37 게다가 문명의 발달은 우리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기술 혁명을 이룬 우리는 세상을 편리하게 여행하고 일상의 힘든 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연구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오늘날 평범한 가족이 기계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일은 과거의 하인 28명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얼마나 경이로운 시대인가! 그러나 우리가 이룩한 효율적인 사회의 정반대편에는 권태와 외로움이란 그림자가 불가피하게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겪어야 할 큰 일중에 하나이다. 권태와 외로움. 문제는 더 커지고 있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하리라.

 

-38 현대사회의 뛰어난 창의력은 이와 함께 수반되는 그림자를 인식하고 이를 현명하게 다룰 때만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

 

 

<상징적 행위로 삶의 균형 이루기>

 

-39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시소의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아름다움과 선함을 가꿀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의례를 통해 이 파괴적인 면의 실체를 인정한다면 용기를 가지고 이상을 실현하고 자기 일을 해낼수 있다.

무의식은 진짜행위와 상징적인 행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 말은 아룸다움과 선함을 추구하면서 이에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어두움은 상징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다.

 

-41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창의적인 만큼 파괴적이어야 하고 밝은 만큼 어두워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든 이 어두움에 대한 값을 지불할 것인가는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한다. 창조적인 일을 한 다음에 곧바로 의례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42 융은 사람의 정신을 사고, 감정, 직관, 감각의 네가지  기능으로 분류한다.

 

-43 현대인을 위한 신학역시 새로운 강조점이 필요하다. 시대와 관계없는 기본법들은 여전히 적용되지만, 현대인이 전일성을 향해 나아가거나 균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남과 여, 성별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도 있다. 삶의 어느 시기, 어떤 환경에 놓여 있든 간에 그림자를 존중하고 우리가 잃어버리고 무시했던 특질을 되찾아야 한다.

 

-44 영국의 작가 겸 비평가 조지 버나드 쇼는 고문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예술이라 말했다.

 

-44 파열된 우리 세계를 치유하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일 용기와 통찰을 지닌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인류 내면에 있는 투사의 기제가 강하게 작용하면 외부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자신의 그림자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하리라. 그리고 모든것의 시작은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45 누구나 개인적으로는 전쟁을 비난하지만 집단이 되면 전쟁을 일으키는 쪽에 찬성한다. 이런 파괴와 혼란을 초래한 주체는 괴물 같은 이상한 존재들이 아니라 집단의 그림자였고, 우리 모두 예외없이 그림자 형성에 기여했다.

 

-46 서구에 전해 내려오는 경구 중에 만일 한두 사람만이라도 전일성을 회복한다면 전 세계가 구원될것이란 약속이 있다.

 

-48 우리 개개인은 순발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어두움을 회복해야만 그 어두움을 빛과 결합할 수 있다. 우리는 빛과 어두움, 전쟁과 평화 사이를 왔다갔다하지 않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다. 이것이 진정한 신성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발력이란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림자 투사하기>

 

-49 의식적으로 그림자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림자를 남에게 투사하게 된다. 이것은 자신이 책임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한다는 뜻이다.

 

-50 우리가 내면의 어두움을 바깥세계의 몫으로 돌릴 때, 인간의 심리는 전일적인 것이 아닌 부분적인 것으로 머문다. 본래 의식 속에 동화시키는 것 보다 투사를 하는 것이 쉬운 법이다.

 

 인간 역사의 어두운 장은 타인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전가할 때 펼쳐진다.

 

그 동안은 너무 쉬운 선택을 하며 살아오고,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맞부닥치고 살아가야 하리라

 

-51 구약성서에도 사람들의 죄(그림자)를 몰아내는 방책으로 제물을 바치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고대인과 중세인들도 그림자를 다루는 방편으로 우리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투사를 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대인은 더 이상 이런 위험한 과정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가 오길 꿈꾼다면 의식의 진화가 요청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해야 한다.

의식의 진화를 위한 그림자의 통합. 이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53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최고의 선물, 즉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다면 자녀들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덜어주라. 심리학적으로 말해 자녀에게 깨끗한 유산을 넘겨주는 것이 가장 위대한 상속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본인의 심리구조 안으로 되가져옴으로써 자신의 의식도 진일보하게 된다. 자기 내면의 심리구조 안에서 그림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그림자는 전일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동안 보여지는 것을 주려는데 신경썼더라면 이제는 나의 그림자를 덜어서 깨끗한 유산을 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

 

-55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대한다면 너는 눈멀고 이 빠진 세계로 떨어지게 될것이다.”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다룰 수 있다면 그림자 투사를 거부하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복수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다.

타인의 그림자가 노출된 곳에서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천재적인 능력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타인에게 자기 그림자를 내려놓을 권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 모두 자기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

 

-55 융은 원수에게 감사하라고 말하곤 했다. 이는 그들의 어두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어두움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56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개인이 지닌 상이한 두 가지 측면을 화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블레이크는 우리가 형상 form 을 원한다면 천국으로 가야 하고 에너지를 원한다면 지옥으로 가야 하는데 반드시 이 둘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면의 천국과 지옥을 직면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의력인것이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부활>

 

-57 파우스트는 자아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도 동시에 부활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림자든 자아든 서로를 돌보지 않고서는 변형을 이룰 수 없다.

 

-58 시간이 지나자 주민들은 후회했다. “왜 우리들은 그렇게 쉽게 여자아이의 말을 믿었을까? 왜 우리가 신부님을 공격하는 편에 섰지? 어떻게 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걱정과 불편함을 대면할 수 있을까?

남에 대해서 쉽게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결국 그것이 우리 내면에 있는 걱정과 불안함이었을까? 무엇이 나를 자극하게 하는지를 다시 돌아봐야 하리라.

 

-58 우리는 선물을 쉽게 주지만 선물 뒤에 숨어 있는 그림자로 모든걸 망쳐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59 우리가 내면에 있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바깥에 있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59 자아와 그림자가 만나는 문학작품의 백미로는 단연 괴테의 <<파우스트>>를 들 수 있다.

 

생명이 소진된 파우스트는 마침내 구원을 받아 열정을 지닌 붉은 피의 소유자로 변모한다. 비도덕적인 삶에서 구원되어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찾는다.

 

-60 <<파우스트>>는 자아가 부활하려면 그림자의 부활도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그림자는 의식으로 통합되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진다. 파우스트의 내면은 자신의 그림자인 메피스토를 받아들임으로써 채워진다. 파우스트는 메시프토를 만나서 온전해지고, 메피스토는 파우스트를 만나서 전일성을 획득한다. 그림자든 자아든 한쪽을 돌아보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쪽의 변형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림자와 자아는 충돌을 통해 본래의 전일성을 되찾는다. 이는 분리된 천당과 지옥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의 그림자를 회복하여 우리가 거부했던 특질을 부활시키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동안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림자도 나의 일부임을 알고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자

 


<그림자 안에 숨겨놓은 황금>

 

-61 우리가 영웅에게 빠져드는 것은 내 안에서 숭고한 특질을 발견하는 것보다 멀리서 남을 추앙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쉽게 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쉽게가 아니라 제대로 찾아보자

 

-61 우리가 영웅을 숭배하는 것은 순전히 그림자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가 지닌 최고의 특질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지 않고 타인에게서 그것을 보려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종종 우리들이 지닌 숭고한 특질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이것을 가진 다른 대리인이나 대용품을 찾는다.

 

멈추어서 나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늘 외부를 향해서 외부를 통한 지식을 습득하기에 바쁘고 자신의 스스로의 생각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몰랐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그것이 보이는 것 같다.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안의 낯선 나를 찾아보자

 

-62 일반적으로 우리는 투사를 통해 다음 단계의 성장과제를 인식하게 되고, 이런 방식으로 발달이 이루어진다. 오늘 영웅시한 것이 내일이면 자기 성격이 되는것이다.

 

이 관계성을 잘 몰랐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일부는 맞는 것 같다. 갑자기 큰 바위 얼굴소설이 생각이 난다. 결국 나중에는 본인이 큰 바위 얼굴이 되지 않았는가. 이런것과 같은 얘기인 것 같다.

 

-62 모든 영웅은 내면화되기를 요구한다. 물론 이럴 때 내 안의 유아적인 면들이 온 힘을 다해 발달에 저항한다.

 이 당시 내가 박사에게 감명을 받은 점은 어떻게 한 사람이 이런 다양한 면모를 가질 수 있었을까?”였다. 슈바이처 박사는 음악, 의학, 철학의 전문가였고 게다가 위대한 인류애의 소유자이기도 했다.그는 분명히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그는 나의 영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갖고 있던 나의 잠재력을 슈바이처 박사와 바꿀 수는 없다. 나의 관심영역인 음악과 심리학과 치유를 추구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몫이기에 나는 이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것들을 나의 능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내게 달린 일이었다.

 

남이 잘하는 것은 사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나의 재능을 얼마나 맘껏 쓰고 갈것인가, 이에 대해서 더 고려하고, 실천해야 한다.

 

-63 내가 가진 최상의 특질을 타인에게 투사한다는 사실을 연구하다 보면 마치 커다란 수수께끼를 다루는 것 같다. 자아의 관점으로 봤을 때 , 우리 내면의 숭고한 특질을 드러내는 작업은 심리의 구조를 전복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T.S 엘리엇은 희속 <<대성당의 살인>>에서 이 부분을 강하게 묘사했다.

 

신이여, 용서하소소!

우리는 스스로를 평범하게 생각하나이다.

문을 닫아걸고 불가에 앉아

신의 축복을 두려워하고

신의 밤의 고독을 두려워하고

신의 요구에 온전히 내맡기기를 두려워합니다.

 

인간은 불의를 두려워하지만

신의 정의를 더욱 두려워하고

창문으로 디미는 손

이엉에 붙는 불

술집에서의 주먹

도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신의 사랑을 더욱 두려워 합니다

인간이 쉽게 범하는 실수에 대해서 엘리엇은 시 몇구절로 표현을 잘 해주었다.

 

-65 “환자의 벽장 속에서 해골을 끄집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그림자로부터 황금을 끄집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면 못지 않게 자신의 고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군가의 내면에서 황금을 발견했다면 상대는 온 힘을 다해서 저항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웅의 존재에 빠져드는이유다. “ –

 

자신 스스로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오랫동안 잠자고 있어서 나에게 너무 낯설게 느느껴지는 것이. 하지만 자신의 황금을 잘 찾고 인정하고, 키워나가야 하리라

 

-66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면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될 수 있다. 첫째, 자기의 어두움을 타인에게 전가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의 밝은 면을 전가해서 자기 대신 상대방이 영웅이 되어 주기를 원한다. 이 경우도 상대에게 대단히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된다. 둘째, 자기 그림자를 내던져버림으로써 스스로 황폐해진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장과 변화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며, 황홀경을 경험할 지렛대의 중심을 놓치게 된다.

 

 

<그림자 속에서 찾는 중년의 에너지>

 

-69 중년에 이르면 문화화 과정은 거의 완결된다. 그런데 이 시기는 아주 메마르다. 마치 모든 에너지를 다 쥐어짜낸 듯한 느낌이다. 이 시점에 이르면 그림자의 에너지는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이때가 되면 우리가 그토록 애써 이룩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전복시킬 만한 폭발력이 생긴다. 이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에 빠지거나, 이혼을 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파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위험해지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림자에게 에너지를 얻어 그 에너지를 바르게 사용하게 된다면 이런 일들은 새 삶의 장을 열기 위한 무대설치 작업이 될 수 있다.

 

이래서 중년을 잘 보내야 하리라그렇지 않으면 방향이 엉뚱한 방향으로 터지게 되는 것같다. 나또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휴직기간동안 전복시킬 폭발력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의례로 그림자 표현하기>

 

-74 일반적인 생각은 충분히 창의적일 수 있다면 어두움의 힘을 압도하여 빛의 승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다. 진정한 창조적 행위는 온전한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지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빛을 선호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우리가 더 큰 실체를 보지 못하고 더 큰 비전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 실체는 삶에 관한 단순한 견해로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온전한 경험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온전한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내가 하고 있는 이런 많은 경험들속에서 스스로 부딪치는 면들속에서도 다 깨닫게 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76 다른 대극을 수용할 용기를 갖춘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소젖짜기는 그림자 안에 있는 황금이며 그림자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의례는 거의 대부분 심리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춘다. 절호의 기회 또한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황금의 기회를 받아들일 때 어두운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저항이 생기기도 한다.

 

절호의 기회, 심리의 어두운 면 모두 같은 뿌리이고, 일희일비할 것들이 아님을 명심하고 그저 여여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자

 

 

<< 2장 낭만적 사랑과 그림자 >>

 

-81 사랑에 빠진다는 말은 자기안의 가장 고상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존재를 다른 누군가에게 투사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의미는 대부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의 이미지를 상대방에게서 발견할 때의 체험을 말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훨씬 고요하고 인간적인 경험인 데 반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질풍노도와 같다. 낭만적 사랑에는 우리 존재보다 더 큰 무엇이 존재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심리적 의미>

 

-82 결혼은 대부분 투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반드시 환상이 깨지는 시기를 겪는다. 이럴 때 배우자는 맨 처음 투사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강렬한 로맨티시즘의 체험>

 

-90 사랑에 빠지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겪었던 사랑의 고통을 답습하지만, 빛과 어두움을 다 끌어안으면 사랑의 경험을 환상이나 씁쓸함으로 끝내지 않아도 된다.

 

-91 현대인은 감당할 수 없는 이 거대한 힘을 되돌려줄 수도, 소유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93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떤 것이 나에게 속하고 속하지 않는지 항상 가려낼 수 있다. 이 결정의 시기에는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 순간을 놓치게 되면 사람은 그 힘에 중독되어 힘을 악용하게 될 것이다.

이는 낭만적 사랑의 힘을 다룰때도 다르지 않다. 결혼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인생에서 이 반지를 2~3초라는 짧은 순간만 손에 쥔다. 이토록 짧은 순간이 아니면 배우자에게서 신성을 보게 되어 1만 볼트의 충격을 받아 파괴될 것이다. 이런 강렬한 체험은 보통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에너지는 신에게든 땅으로든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에 중독되고 휘말릴 것 같다.

 

-95 고대세계에는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잠깐씩 일어나는 이런 감정은 신의 선물로 여겨졌다. 이들에게는 과대망상이 적다. 인간은 단지 신의 에너지를 매개하는 자에 불과했다. 오늘날 이 에너지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졌다. 우리가 이 에너지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의례가 필요하고 또 이 에너지를 바른 원천으로 되돌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순을 초월한 역설의 위대함>

 

-96 어두움 없는 빛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또한 여성성 없는 남성성이란 의미가 없다.

 

상대적인것이 존재해야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밝다 어둡다 여성성이니 남성성이니 얘기를 할 수 없는것이다.

 

-96 의식적으로 그림자에 접근할 때면 우리가 거의 보편적으로 멀리하고 회피해왔던 자아의 강력한 일면을 관찰하게 된다. 바로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역설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는것이다.

역설paradox이란 현대세계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의미를 길어내는 장인의 샘이다. 거의 대부분의 신화들이 이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신화들은 한결같이 알려지지 않는 장소나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여러분 내면의 그림자에서 어떤 좋은 것들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최상의 보물은 가장 무시되어왔던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 맞다. 내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던 것들이다. 그래서 깊은 잠속에 있던것들을 깨워야 하리라. 그리고 일어나야 하리라.

 

-97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떤 힘겨운 고통도 감내할 수 있지만 의미가 없다면 견뎌내기 어렵다. 모순은 메마르고 파괴적이지만 역설은 창조적이다. 그것은 현실을 강력하게 껴안는다. 역사상 존재하는 종교적인 체험은 모두 역설로 표현된다. 이러한 역설적인 언어로 조직화된 그리스도교의 신념을 관찰해보라. 모순은 고정되고 비생산적인데 반해, 역설은 은총과 신비를 위한 여지를 마련한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경험은 역설로 표현할 수 있다. 벽에 달려 있는 전기코드는 각각 양전하와 음전하가 서로 연결되도록 두 가닥으로 나뉘어 그 사이로 유용한 전류가 흐른다. 낮은 밤과의 대조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남성성은 여성성과 대비될 때 타당성을 지닌다. 활동은 휴식이 존재할 때 의미를 지닌다. 감식력은 대비의 문제다. 위는 아래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남쪽이 없다면 북쪽이 무슨 의미이겠으며 내가 없는 당신은 어디에 있겠는가? 또 절제없는 기쁨은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빈번히 실체의 역설적인 특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로 인해 의식을 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마치 우리가 역설을 벗어나서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역설을 혼동한다. 일과 휴식은 그 경계가 느슨해지면 둘 다 망치게 된다. 다른 두 대극 사이에 사로잡히면 개인적 고통이 시작된다. 하나를 수용하면서 다른것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역설이 모순으로 전락한다. 그 때문에 서로 다른 두 대극은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혼돈에 빠져 고통을 받는 것은 치유를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고통을 받는다는 영어단어 suffer는 라틴어 sub plus ferre에서 유래했는데 이것은 참거나 허용한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가장 단시간에 파괴하는 방법은 서로 모순된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워킹맘의 모순과 역설도 이곳에서 존재하게 된다. 바쁨속에서 시간을 내야 하는 상황들.  그속에서 내가 선택한 가치들은 무엇이었는가 ? 다시 돌이켜 보자.

 

-98 그것을 경험하는 시기가 대개 중년기인데, 이 둘 사이의 긴장감이 너무 커져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이 두 대극적인 관점을 다루도록 도전받는다. 이 때가 되면 더 이상 둘 사이에서 양갈래로 찢어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압박감이 너무 커져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

역설에 도달하기가 너무 어려워 역설을 싫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설은 대단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틀을 넘는 실체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역설은 현재의 우리 자신을 넘어서게 해주고 미성숙하고 부적절하게 순응해온 틀을 깨게 만든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서로 대립되는 두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둘 간의 직접적인 대응을 피한다. 이것은 대다수 현대인의 삶의 특질로 규정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영속적으로 분리된 이 견해들이 대립하는 사례와 마주치게 된다. 일하러 가야 하는데 가기 싫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어떤 음식을 너무 좋아해 절제하기 어렵다, 내 수입에 비해 과도한 세금을 내야 한다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모순 속에 산다. 그렇지만 이런 환상은 반드시 깨어져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야 한다. 편향된 균형을 단순히 못 본 체하고 살아갈수는 없지만,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이 대극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의식으로 온전하게 견뎌낼 수 있을 때 역설을 수용할 수 있다. 역설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정신적 강인함의 척도이자 성숙의 확실한 표식이 된다.

 모순은 항상 대립하지만 역설은 신성하다. 상호모순에서 역설로 성장하는 것은 의식의 도약을 뜻한다. 이 도약은 우리로 하여금 중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남은 생애 동안 밝은 빛을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껏 그냥 참아오던 것이 어느 순간 폭발을 하고, 양갈래가 찢어지기 직전에 멈추고 싶었던 것 같다. 상호모순과 역설사이에서 과연 어떻게 하고 있는것인지 다시 돌이켜보자. 역설의 의미를 다시 정의해보자.

 

-102 서구사회에서 이런 가치들은 우량주로 간주되며 논쟁거리조차 안되는 기본적인 것들이다. 서구 문화는 이런 가치를 토대로 이루어졌고 그 덕목으로 인해 최상의 일들을 성취해내었다.

그러나 다른 목록에 작성된 종교적인 가치는 어떠한가? 현대문화의 토대는 그리스도교인데 우리는 일요일마다 종교적 가치에 대해 듣는다. 설교 때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고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한다. 또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단식을 권한다. “누가 여러분의 뺨을 때리면 다른쪽 뺨도 내어주십시오.”, “복되어라, 가난한 이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러나 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신봉하든 안하든 우리는 모두 예외없이 이런 모순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우리의 언어, 문화, 신화 속에 내재되어 있다. 헌법은 자신의 방식을 택할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토대로 제정되어 있지만, 종교적 가르침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위해 공헌하라고 한다. 종교에서는 자유 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에 따라 지시를 내린다.

 

종교와 현실의 모순. 언어, 문화, 신화속에 되어 있는 모순. 이런 모순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보는것도 필요하다. 우리가 정말 얼마나 모순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 많은 것을 돌아보게 된다.

 

-103 인도에서는 신의 의지란 늘 한가지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만일 이 길 아니면 저길이란 식의 선택을 이야기한다면 아직 자기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추구하는 바가 명백할 때는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절대적인 식별이 가능하다. 신의 마음은 통합되어 있고 이분법을 모르기 때문에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103 동서양의 가르침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동서양의 간극. 이또한 큰 것인데 그냥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다.

 

-103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덕목은 그 반대되는 것으로 인해 타당성을 지닌다. 진실은 항상 다른 두 대극적인 쌍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든 실체와 조화를 이루려면 이 두 대극을 견뎌내야 한다.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는 허용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중성이란 신비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이것을 할 때마다 즉각 저것도 하게 된다. 이것이 실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이 명백한 모순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모든 신경증적인 해리와 심리학적 문제의 바탕이 되는 본질적 물음이다. 우리가 적절하지 못한 질문 속에 헤매게 된다면 아무것도 할수 없는 신경증적 마비 상태에 빠질것이다. 어떨때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못하게 될것이다. 행동으로 옮길 수도, 그렇다고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무수한 사람들이 당면해 있는 상태이며 이들이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이것을 시작하면 곧 저것이 등장해서 우리를 죄책감에 빠뜨린다. 우리는 도망갈 구멍이 없는 곳에 갇혀 끝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즐거운 일을 선택하면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 기분을 망친다. 해야하는 일을 하려고 들면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관해 몽상을 하게 되어 참고 일하려던 자세심이 엉망이 된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9번 교황곡의 스케르초로 표현했다.

 

워킹맘의 죄책감도 하나를 선택하면 곧바로 이어지는 이런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105 우리가 범한 오류는 종교적이란 단어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오류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오류가 없었더라면 삶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까? 종교religion란 단어는 라틴어로 다시라는 의미의 re연결되고 묶고 다리를 놓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ligare에서 유래되었다. ‘끈을 동여 묶다라는 뜻을 지닌 ligature도 같은 뿌리에서 파생되었다. 종교는 다시함께 묶는다라는 뜻이다 .

  이 단어를 결코 대극이 되는 쌍의 한 영여으로만 제한해서는 안된다. 에전에는 논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속적인 태도와 종교적인 태도를 대비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틀을 사용한 것이며 대다수 인류가 신경증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고통이다. 어떤 행동은 세속적이고 다른 행동은 신성하다는 생각은 언어를 아주 잘못 사용하는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행위, 혹은 특징들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류의 긍정적인 측면. 오류가 있기에 다시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주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것이다. 그 자체로는 정말 좋고 나쁨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106 종교는 큰 고통을 초래해온 분리는 넘어서게 하고 대극에 있는 둘을 다시 묶어주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서로 반대편에 있어 고통을 가중시키는 모순에서 벗어나, 반대되는 두 개념을 동시에 즐기면서 둘 다 존중하게 할 수 있는 역설의 영역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이럴 때 비로소 은총의 가능성이 주어지는데, 여기서 은총이란 모순을 영적으로 경험하여 서로 대극을 이루는 요소들보다 더 커지는, 전체가 응집되는 정신적 체험이다.

받는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2 3이 같다고 증명하는 식의 오류와 같다. 서로 반대되는 쌍의 한쪽을 종교적인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완전한 실수다. 종교란 단어는 합성의 영역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종교는 말 그대로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단어가 치유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치유하고, 연결하고, 결합하고, 교량이 되고, 다시 함께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닌 신성한 능력이다.

 

 

<역설이 삶에 가져다 주는 기적>

 

-108 우리는 역설을 통해서 대극적인 두 요소의 싸움이나 타협을 넘어선 단일한 눈을 발견할 수 있다.

 

-108 우리가 에너지를 대극에서 역설로 전환한다면 이는 인류 진화사에 있어 커다란 도약이 일어나는 순간일 거이다. 서로 대극이 되는 다른 두가지 사이에 끼어 고통받는 삶이란, 살면서 어떤 문제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답을 찾으려 분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들 대다수는 내면에 존재하는 이런 상반된 것들을 다루느나 삶의 에너지를 소모하며 일생을 보낸다.

 

-108 서로 대극이 되는 둘의 충돌은 마치 누전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 누전 상황은 엄청난 출혈이 일어날 때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반대에서 역설로의 변형은 양쪽의 이슈나 상반된 두가지를 모두 허용하는 것이고, 그 양자를 동등한 가치나 위엄으로써 수용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끝내야 할 일이 있지만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고 뭔가 다른걸 하고 싶다. 만일 내가 이 상반된 두가지 욕구를 그대로 놔둔다면 욕구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 서로가 서로를 포기하도록 만들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이 두가지 욕구를 함께 숙고해본다면 둘 다 충족시킬 수 있는 해결책이 떠오르게 될것이다. 이러한 해결책의 장점을 들라면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론 타협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보다 타협이 낫다고 해서 그것이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타협인지를 명확히 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둘다 망치게 되는 것이기에 제대로 된 타협을 해야 한다.

 

-109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역설이 아니다. 만일 다른 두가지 본능이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충분히 오래 견딜 수 있다면, 두 갈등이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어서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통찰이 떠오를 것이다. 이는 타협이 아닌 심오한 이해의 차원이다. 이 통찰은 우리에게 삶을 조망하게 해주며 확신을 가지고 해야할 일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값진 특질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확신이다.

지금 여러분에게 이러한 해결책의 사례를 기술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내가 그 경험을 제시하는것이 오히려 여러분을 오도할 위험이 있어 그만둔다. 각자의 해결책은 자신이 직면하고 잇는 독특한 상황속에서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이미 고안된 방식이나 공식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결책은 서로 대립하는 상반된 에너지의 동력안에서 탄생되어야 한다.

 

이러한 시간을 많이 가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빨리 상황이 마무리 되기만을 바랬던 마음이 크다두 가지 본능이 일으켰던 상황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돌이켜보자.

 

-110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쓴 덴마크의 작가 이자크 디네센은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세가지라고 했다. 첫 번째는 에너지가 넘치는 때이고, 두 번째는 고통이 중단될 때이며, 세번째는 자신이 신의 의지를 따른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때이다. 첫번째는 청년기에 해당되며, 두번째 것은 아주 단기간만 지속된다. 세번째는 내면작업이라는 지난한 작업을 통해 생긴다. 만일 우리가 삶의 이중성 문제를 이미 극복했다면 자신이 신의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는 절대적 확신에 도달한 것이다. 이 상태는 우리의 진정한 유산이고 우리 삶의 목표를 주며 우리에게 진정한 영감을 주는 순수한 기쁨의 단계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만든 목록의 가치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한 가치와 그것에 반하는 다른 가치가 신경증적 싸움을 하는 대신, 두 가치를 다 허용해서 역설이라는 숭고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기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지는것도 괜찮다. 가진 것도 좋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것도 좋다.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괜찮다. 우리 삶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일련의 온전하고 새로운 가능성들이 펼쳐진다. 대극적인 것을 서로 반대라고 말하지 말자. 이 대극적인 것들이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신이라는 실체와 만날 수 있도록 보완해준다. 두 상반된 목록에서 한쪽은 세속적이고 다른 쪽은 종교적이라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두 신의 진실을 나타내는 것이란 생각을 하도록 우리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숨겨진 통일성을 볼 능력이 없다는 데 이다. 당당하게 역설에 머무는 것이 통합unity의 권리를 얻는 것이다. 통합된 단일 비전unitive vision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신비롭고 고귀한 신학적 체험으로서, 이는 역설을 받아들임으로 얻을 수 있다. 중세시대에는 이런 체험을 이해했다. 이 체험은 대극적인 둘 사이의 충돌을 넘어서도록 하며, 신과 일치를 이루게 한다.

우리는 역설과 공존할 때 대극적인 둘의 싸움이나 타협을 넘어선 단일한 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아주 작은 초점에 집중시키는 통합된 자세를 얻게 될것이다. 이는 깨달음이란 단어만큼 값진 것이다.

 

삶의 진정한 행복? 한계상황에서 맞닥뜨리는 일들. 지난한 내면작업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들. 과연 알게 될까?

 


<
사랑과 힘의 딜레마>

 

-113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해답을 찾을 가능성을 앗아가버린다.

 

-113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런 해결책은 진짜 해답이라 말할 수 있는 합성의 가능성을 앗아버린다.

 

-113 진정한 역설은 강한 헌신과 신비적인 결속을 가져오는데, 이런 헌신과 결속이 둘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인내할 힘을 부여한다.

 

-114 과거의 방정식이 붕괴되고 자신의 관점을 포기한다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은 분명하다.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아가 어떤 작용을 하는가! 이 경우 초월적인 것에 대한 신념이 필요하며, 관계를 위해 자신의 관점을 희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종교 체험의 핵심인 ligare가 묶고, 수선하고, 함께 연결하고 온전하게 만들고 분리 이전의 것들을 발견하는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  관점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이루어지리라.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고 새롭게 정의를 해보리라.



<그림자 감싸안기>

 

-115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다음 단계의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것, 피하고 싶은 것, 원하지 않는것에 대해서 더 구체화 시켜보자

-115 역설과 그림자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역설은 모든 면에서 그림자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고, 그것을 가치 있고 위엄있는 자리로 끌어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고귀한 화합의 장인 역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는 것은 곧 영성을 체험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서와 세계 신화는 공통적으로 가장 평범한 장소나 사건에서 신성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신화적으로 표현하면 가장 값비싼 진주는 일상의 갈등과 긴장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어느 집이든 지붕만 걷어내면 신들의 드라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누구의 생애이든 지붕을 벗겨내보라. 그리하면 역설을 발견할 것이다. 역설은 종교적인 삶, 즉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위대한 비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값비싼 진주는 일상의 갈등과 긴장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늘 어딘가 멀리에 있다고 했다. 지금과는 다른 그 어떤 곳, 어떤 시간, 그 모든 것이 해결된 어는 시점……. 진짜 어리석다. 왜 이렇게 현실을 바로 보고 인정하는게 힘들었을까. 이제 스스로의 지붕을 다 벗겨내자. 전부 다. 하나도 남김 없이  

 

-116 주어진 임무를 당장 수행할 것인지 좀 더 오래 빈둥거리며 몽상을 계속 즐길지 갈등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이쪽과 저쪽 어느 한쪽도 신성하지 않다. 신성한 자리는 정확히 이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역설이 존재한다.

 상담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단히 무안해하고 괴로워하면서 충돌하는 가치들을 꺼내놓는다. 이들은 대개 해결책을 원한다. 그러나 해결책 대신 역설을 감당할 만한 의식을 부를 수 있다면 더 커다란 것을 얻게 될것이다.

 

그 상황을 버티는 것이 너무 힘이 들때가 있다. 그러나 해보면 된다. 그러면 그 역설을 감당할 힘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117 입에 쓴 약이지만 상황을 참아낼 정도로 충분히 강한 사람에게는 옳은 답이다.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자아ego는 용기는 있되 윤리와 도덕성이 취약한 사람의 특징이다. 현재 우리 시대에 걸맞게 영웅주의를 재정의하자면, 영웅이란 역설을 감당하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을 자기중심에서 멀어지도록 만드는데, 그 이유는 행위 doing와 존재 being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이콜로지 투데이>의 초기 표지에는 대단히 도발적인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저 뭔가 하려 들지만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라.” 이 표현이 농담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불교적 표현은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것에 대한 주의를 환기 시킨다. 의식적인 기다림을 통해 역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때 자아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아보다 더 큰 뭔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하기 위해 멈추고 지켜보고 돌아봐야 한다. 왜 이러는지? 무엇을 위해서 이러는지? 미칠것 같은 이 답답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던가?

 

-118 융은 도망칠 구멍이라고는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거나, 갈등에 처해 해결책이라곤 없어 보이는 순간이 전통적인 개별화 individuation가 시작되는 때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사면초가의 순간을 말한다. 무의식은 자아가 한계에 부딪치도록 하기 위해 희망이라곤 없어보이는 갈등을 바란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결정을 하든 잘못될 것이고 어느 길을 선택해도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윤리적인 사람이 자기 존재의 핵심에 도달하는 고통을 겪어내려 할 때 이때 자기 the Self가 등장한다. 종교적인 표현을 빌자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신의 행위에 의존한다. 심리학 언어로 이를 설명하면 전혀 해결책이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아니마anima(남성이 지니는 여성성)가 남성의 삶에 커다란 힘을 부여한다. 이런 순간 남성은 자기 the Self를 경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아니마를 영혼의 안내자로 생각할 때 우리는 <<신곡>>에서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낙원으로 안내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점은 단테가 지옥을 거친 다음에야 낙워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상적으로는 아니마가 남자의 손을 맞잡고 바로 낙원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아니마는  먼저 남자를 뜨거운 냄비 속에 집어넣고는 한동안 두어 적당히 익도록 내버려 둔다.

-       폰 프란츠 << Interpretation of Fairy Tales>>

 

역설에 동의한다는 것은 곧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는 자아보다 훨씬 큰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더 이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지점, 해결책이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정확하게 일어난다. 이 순간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큰곳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순간이다.

 

진짜 해보기는 한건가? 그동안 머리속에 있던 것을 이제는 구체화해보자. 보이지도 있지도 않은 실체와 왜 이렇게 의미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것인가? 이제는 그런것에서 벗어나서 해보자.

 

 

 

<< 3장 만돌라 >>

 

 

<분열된 세계를 치유하는 힘>

 

-124 위대한 시는 도약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통합한다. 정반대라 생각했던 것 사이에 연결점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놀라움이자 충격이다.

 

-127 T.S 엘리엇은 <네 개의 4중주>에서 불과 장미는 하나라고 썼다. 꽃과 불이라는 두 요소를 중첩시킴으로써 시인은 만돌라는 그린다.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불의 변형과 꽃의 탄생은 하나며 결국 가은 것이라고 표현하는 시인의 천재적 영감을 만날 수 있어 나는 무척 행복하다.

 이미지가 겹쳐질 때 우리는 통합이란 신비적 진술을 듣게 된다. 시를 통해 파편화된 세계에서 안전과 확신이 존재함을 느끼는것이다. 시인이 우리에게 주는 화합의 선물이다.

위대한 시는 이러한 도약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통합한다. 우리가 항상 정반대라고 생각했던 것들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놀라움이자 충격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연결해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지만, 그런것들을 스스로도 찾아보자

 

 

<만돌라, 치유의 예술>

 

-131 좋은 이야기들은 모두 만돌라이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것을 말하고 또 저것을 말한다. 그러다가 점차 이야기의 기적적인 힘으로 두 대극이 서로 겹쳐지고, 마침내 똑같아진다. 이야기는 선이 악에 대대항해 승리하는 것을 토대로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심오한 진리는 선과 악이 하나로 되는 것이다.

 

-137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태복음 6:22)라는 말이다. 오른쪽 눈은 이것을 보고, 왼쪽 눈은 저것을 본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하나의 눈이라고 말하는 제 3의 눈을 얻는다면 모든 것이 빛으로 채워질 것이다. 인도인들은 깨달음을 얻었거나 혹은 최소한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중이라는 표식으로 이마 중앙에 점을 찍는다. 이는 차크라chakra시스템에서 인간의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다.

 

-138 죄책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식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만돌라가 만들어지고 치유가 일어난다. 만돌라에는 자책을 위한 여지가 없다. 방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의식적인 작업을 요구하라는 것이다.

  또 죄책감은 역설의 값싼 대용품이다. 우리는 죄책감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서로 다른 진실을 들여다 보는 용기 있는 행위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낫다. 죄책감은 교만에서 온다. 어떤 이슈 중 한쪽을 택해서 그 쪽이 항상 옳다는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편향성은 문화화되는 과정이지만, 종교적 삶에서는 심각한 장애가 된다. 직면할 힘을 잃으면 통합의 기회를 놓치며 만돌라의 치유력도 상실하게 된다.

 

죄책감에서 빠져있지말고 직면하고 직시해보자. 어떤일이 이루어지는지? 내가 답을 줄 수 없다. 답은 스스로에게 이미 있는것이다.

 


<창조의 싹을 틔우는 신의 그릇>

 

-140 만돌라는 중립지역이나 타협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색채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우리는 색채의 향연인 파바니스에 도달할 때까지 여정을 멈춰서는 안된다.

 

-141 인간의 상황은 거듭해 우리를 자아-그림자의 대극으로 나눈다. 이것이 바로 성 아우구스투스가 행동하는 것은 곧 죄를 짓는것이다.”라고 말했던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그림자를 짊어지는 대가를 치러야 할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전쟁, 폭력, 인종차별 같은 집단현상으로 그 값을 지불할것이다. 종교적인 삶이 하늘과 지복천년 같은 다른 영역을 내적 삶의 절정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문화와 종교는 목표가 서로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문화적 영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림자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을 하면 얻는 첫 번째 은혜는 우리가 타인에게 전가하는 그림자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 은혜는 만돌라 탄생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만돌라란 아룸다음과 전일성을 나타내는 숭고한 비전인데 이는 인간 의식이 주는 커다란 선물이다.

 고대 연금술사들은 이 과정을 이해했다. 연금술에는 4단계의 발전을 거쳐가야 한다. 먼저 니그레도 nigredo단계(사랑, 공격성 등이 외부로 투사되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삶의 어두움과 우울을 경험한다. 알베도 albedo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고, 루베도 rubedo단계에서 열정을 발견한다. 마침내 도달한 시트론citrino은 삶의 황금을 감하는 곳이다. 결국 다채로운 만돌라가 만들어진다.

 

충분히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음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피하고 싶었고, 내가 원하는대로 만 하려고 했었고,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서 계속 힘들었던것이다.

 

-143 만돌라는 중립지역이다 타협의 장소가 아니라 공작의 꼬리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무지개가 뜨는 곳이다.

 

 

 

4. 내가 저자라면

 

 

1) 요약 - 핵심 메시지와 키워드 중심

  ‘빛과 어두움, 어둠과 밝음, 양과 음, 내면의 지옥과 천국 등 대극을 통한 통찰의 힘으로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아 갈수 있도록 가이드해주는 책.  

 

 문명속에서 수용되는 것은 많이 발전되어 왔지만, 그렇지 않은 어두움, 그림자등에 대해서는 존재자체도 모르고 있었는데 온전한 삶을 위해서는 그림자까지도 다 수용해야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얘기한다. 심리학의 한계를 종교적인 영역까지 끌어들여서 삶의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서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대립적인 상황에 피하려 하지 말고 직면 할것을 강조한다. 중년이라는 나이가 모순상황의 최고 절정을 이루다가 파경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모순을 초월해서 역설의 위대함을 낳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림자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하고, 자신의 한계상황, 대극상황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이 해결책을 주지는 않지만 그 대극상황을 맞닦뜨리면서 각자 더 큰 통찰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 만돌라를 제시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해보인다.

 

-워킹맘의 죄책감을 일으킬 수 있는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대극상황들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모순과 역설에 대해서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들어 준 책이다. 책이 얇은데도 생각할것과 정리할 것이 많은 책이다.

 

 

2) 특징 및 차별화 포인트

- 책이 얇은데도 심리학과 영성의 춤사위를 충분히 보여주고, 많은 생각을 해주게 한다.

-목차를 봤을 때는 언뜻 이해가 안되었는데, 내용을 보면 볼수록 빠져들었다.

 

 

 

3) 이 책의 구성 (구성이 탄탄한가? 일관성이 있는가? 신선한가?)

-3장 만돌라 부분이 1 2장 구성과는 연결성이 약하게 갑자기 나온 느낌이어서 연결고리 이어주면 좋을 것 같음

 

-목차

1장 그림자
그림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빛과 그림자의 균형 잡기
상징적 행위로 삶의 균형 이루기
그림자 투사하기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부활
그림자 안에 숨겨놓은 황금
그림자 속에서 찾는 중년의 에너지
의례로 그림자 표현하기

2장 낭만적 사랑과 그림자
사랑에 빠진다는 심리적 의미
강렬한 로맨티시즘의 체험
모순을 초월한 역설의 위대함
역설이 삶에 가져다주는 기적
사랑과 힘의 딜레마
그림자 감싸안기

3장 만돌라
분열된 세계를 치유하는 힘
만돌라, 치유의 예술
창조의 싹을 틔우는 신의 그릇

 

5) 내 책을 쓸 때 참고사항 (떠오른 아이디어 등)

- 그동안 워킹맘의 죄책감으로만 생각했느데, 많은 상황의 모순과 역설로 인해 빚어진것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죄책감 관련된 사항들이 잘 기술되어서 인용해야 겠다.

 

 

6) 이 책의 키워드

그림자, 심리학과 영성의 춤사위, 온전한 삶, 통합의 장, 역설, 만돌라, 집단문화, 내면의 금, 소명, 시소게임, 전일성 회복, 나의 유일한 빛 , 내면의 천국과 지옥의 결함, 그림자의 회복, 숭고한 특질, 온전한 경험 , 대극 상황, 한계 상황, 통합, 도약, 만돌라, 대가

 

 

7) 보완점

-3장 만돌라 부분이 1 2장 구성과는 연결성이 약하게 갑자기 나온 느낌이어서 연결고리 이어주면 좋을 것 같음

-만돌라 사진은 컬러로 보여주면 더 감동이 많이 왔을 것 같고, 만돌라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부록으로 하나 해주면 참조하는데 좋았을 것 같다.

 

 

8) 추천책

-

 

 

9) 감동적인 장절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 칼 구스타프 융

 

-7 이야기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대목은 샘물이 항상 어디에선가 솟아 흐른다는 사실이다. 또 생명의 물을 찾으려는 용기 있는 지성인들에게는 저마다 시대에 맞는 맞는 모습으로 이 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삶의 용기를 내면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 내어 찾아보자. 그러면 나에 맞는 형태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10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밝히면 밝힐수록 어두움 또한 확대된다는 것이다. 융이 말하는 전일적이란 표현도 빛과 어두움 둘 다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성장한다는 말은 집단문화가 수용하는 것과 수용하지 않는 것을 가려내어 전자를 습관화하도록 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가 수용하는 것은 자아가, 수용하지 않는 것은 그림자가 되는데 성장은 그림자 형성과 함께 필연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림자란 한마디로 심리의 어두운 측면이다. 그것은 자아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 내면의 유쾌하지 않고, 수치스럽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이다.

워킹맘의 죄책감도 사회에서 수용하는 것과 맞물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2 현재 우리는 그림자와 자아라는 두 대극적인 축으로 양분되어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고 있다. 저자는 이 둘 사이의 모순으로 인한 갈등과 회의로 자신을 고갈시키지 말고 창조적인 통합의 장인 역설을 찾을 것을 주장한다. 역설은 의식의 진화에 있어 가장 커다란 도약의 순간이다. 그러면서 역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하지만 심오한 이미지를 제공하는데,그것이 만돌라이다.

 

-44 파열된 우리 세계를 치유하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일 용기와 통찰을 지닌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인류 내면에 있는 투사의 기제가 강하게 작용하면 외부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자신의 그림자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하리라. 그리고 모든것의 시작은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50 우리가 내면의 어두움을 바깥세계의 몫으로 돌릴 때, 인간의 심리는 전일적인 것이 아닌 부분적인 것으로 머문다. 본래 의식 속에 동화시키는 것 보다 투사를 하는 것이 쉬운 법이다.

 

 인간 역사의 어두운 장은 타인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전가할 때 펼쳐진다.

 

그 동안은 너무 쉬운 선택을 하며 살아오고,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맞부닥치고 살아가야 하리라

 

-53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최고의 선물, 즉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다면 자녀들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덜어주라. 심리학적으로 말해 자녀에게 깨끗한 유산을 넘겨주는 것이 가장 위대한 상속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본인의 심리구조 안으로 되가져옴으로써 자신의 의식도 진일보하게 된다. 자기 내면의 심리구조 안에서 그림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그림자는 전일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그동안 보여지는 것을 주려는데 신경썼더라면 이제는 나의 그림자를 덜어서 깨끗한 유산을 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

 

-60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의 그림자를 회복하여 우리가 거부했던 특질을 부활시키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동안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림자도 나의 일부임을 알고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자

 

-62 일반적으로 우리는 투사를 통해 다음 단계의 성장과제를 인식하게 되고, 이런 방식으로 발달이 이루어진다. 오늘 영웅시한 것이 내일이면 자기 성격이 되는것이다.

 

이 관계성을 잘 몰랐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일부는 맞는 것 같다. 갑자기 큰 바위 얼굴소설이 생각이 난다. 결국 나중에는 본인이 큰 바위 얼굴이 되지 않았는가. 이런것과 같은 얘기인 것 같다.

 

-65 “환자의 벽장 속에서 해골을 끄집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그림자로부터 황금을 끄집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운면 못지 않게 자신의 고귀한 가능성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군가의 내면에서 황금을 발견했다면 상대는 온 힘을 다해서 저항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웅의 존재에 빠져드는이유다. “ –

 

자신 스스로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오랫동안 잠자고 있어서 나에게 너무 낯설게 느느껴지는 것이. 하지만 자신의 황금을 잘 찾고 인정하고, 키워나가야 하리라

 

-69 중년에 이르면 문화화 과정은 거의 완결된다. 그런데 이 시기는 아주 메마르다. 마치 모든 에너지를 다 쥐어짜낸 듯한 느낌이다. 이 시점에 이르면 그림자의 에너지는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이때가 되면 우리가 그토록 애써 이룩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전복시킬 만한 폭발력이 생긴다. 이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에 빠지거나, 이혼을 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는 파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위험해지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림자에게 에너지를 얻어 그 에너지를 바르게 사용하게 된다면 이런 일들은 새 삶의 장을 열기 위한 무대설치 작업이 될 수 있다.

 

이래서 중년을 잘 보내야 하리라그렇지 않으면 방향이 엉뚱한 방향으로 터지게 되는 것같다. 나또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휴직기간동안 전복시킬 폭발력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 같다.

 

-74 일반적인 생각은 충분히 창의적일 수 있다면 어두움의 힘을 압도하여 빛의 승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다. 진정한 창조적 행위는 온전한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지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빛을 선호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우리가 더 큰 실체를 보지 못하고 더 큰 비전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 실체는 삶에 관한 단순한 견해로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온전한 경험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온전한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내가 하고 있는 이런 많은 경험들속에서 스스로 부딪치는 면들속에서도 다 깨닫게 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76 다른 대극을 수용할 용기를 갖춘다면 우리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소젖짜기는 그림자 안에 있는 황금이며 그림자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의례는 거의 대부분 심리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춘다. 절호의 기회 또한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황금의 기회를 받아들일 때 어두운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저항이 생기기도 한다.

 

절호의 기회, 심리의 어두운 면 모두 같은 뿌리이고, 일희일비할 것들이 아님을 명심하고 그저 여여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자

 

-96 어두움 없는 빛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또한 여성성 없는 남성성이란 의미가 없다.

 

상대적인것이 존재해야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밝다 어둡다 여성성이니 남성성이니 얘기를 할 수 없는것이다.

 

-96 의식적으로 그림자에 접근할 때면 우리가 거의 보편적으로 멀리하고 회피해왔던 자아의 강력한 일면을 관찰하게 된다. 바로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역설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는것이다.

역설paradox이란 현대세계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의미를 길어내는 장인의 샘이다. 거의 대부분의 신화들이 이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신화들은 한결같이 알려지지 않는 장소나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여러분 내면의 그림자에서 어떤 좋은 것들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최상의 보물은 가장 무시되어왔던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 맞다. 내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던 것들이다. 그래서 깊은 잠속에 있던것들을 깨워야 하리라. 그리고 일어나야 하리라.

 

-97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빈번히 실체의 역설적인 특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로 인해 의식을 하지 못하는 순간마다 마치 우리가 역설을 벗어나서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때마다 역설을 혼동한다. 일과 휴식은 그 경계가 느슨해지면 둘 다 망치게 된다. 다른 두 대극 사이에 사로잡히면 개인적 고통이 시작된다. 하나를 수용하면서 다른것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역설이 모순으로 전락한다. 그 때문에 서로 다른 두 대극은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혼돈에 빠져 고통을 받는 것은 치유를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고통을 받는다는 영어단어 suffer는 라틴어 sub plus ferre에서 유래했는데 이것은 참거나 허용한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가장 단시간에 파괴하는 방법은 서로 모순된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워킹맘의 모순과 역설도 이곳에서 존재하게 된다. 바쁨속에서 시간을 내야 하는 상황들.  그속에서 내가 선택한 가치들은 무엇이었는가 ? 다시 돌이켜 보자.

 

-98 그것을 경험하는 시기가 대개 중년기인데, 이 둘 사이의 긴장감이 너무 커져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이 두 대극적인 관점을 다루도록 도전받는다. 이 때가 되면 더 이상 둘 사이에서 양갈래로 찢어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압박감이 너무 커져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

역설에 도달하기가 너무 어려워 역설을 싫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설은 대단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틀을 넘는 실체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역설은 현재의 우리 자신을 넘어서게 해주고 미성숙하고 부적절하게 순응해온 틀을 깨게 만든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서로 대립되는 두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둘 간의 직접적인 대응을 피한다. 이것은 대다수 현대인의 삶의 특질로 규정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영속적으로 분리된 이 견해들이 대립하는 사례와 마주치게 된다. 일하러 가야 하는데 가기 싫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어떤 음식을 너무 좋아해 절제하기 어렵다, 내 수입에 비해 과도한 세금을 내야 한다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모순 속에 산다. 그렇지만 이런 환상은 반드시 깨어져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야 한다. 편향된 균형을 단순히 못 본 체하고 살아갈수는 없지만,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이 대극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의식으로 온전하게 견뎌낼 수 있을 때 역설을 수용할 수 있다. 역설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정신적 강인함의 척도이자 성숙의 확실한 표식이 된다.

 모순은 항상 대립하지만 역설은 신성하다. 상호모순에서 역설로 성장하는 것은 의식의 도약을 뜻한다. 이 도약은 우리로 하여금 중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남은 생애 동안 밝은 빛을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껏 그냥 참아오던 것이 어느 순간 폭발을 하고, 양갈래가 찢어지기 직전에 멈추고 싶었던 것 같다. 상호모순과 역설사이에서 과연 어떻게 하고 있는것인지 다시 돌이켜보자. 역설의 의미를 다시 정의해보자.

 

-103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덕목은 그 반대되는 것으로 인해 타당성을 지닌다. 진실은 항상 다른 두 대극적인 쌍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든 실체와 조화를 이루려면 이 두 대극을 견뎌내야 한다.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는 허용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중성이란 신비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이것을 할 때마다 즉각 저것도 하게 된다. 이것이 실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이 명백한 모순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모든 신경증적인 해리와 심리학적 문제의 바탕이 되는 본질적 물음이다. 우리가 적절하지 못한 질문 속에 헤매게 된다면 아무것도 할수 없는 신경증적 마비 상태에 빠질것이다. 어떨때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못하게 될것이다. 행동으로 옮길 수도, 그렇다고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무수한 사람들이 당면해 있는 상태이며 이들이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이것을 시작하면 곧 저것이 등장해서 우리를 죄책감에 빠뜨린다. 우리는 도망갈 구멍이 없는 곳에 갇혀 끝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즐거운 일을 선택하면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 기분을 망친다. 해야하는 일을 하려고 들면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관해 몽상을 하게 되어 참고 일하려던 자세심이 엉망이 된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9번 교황곡의 스케르초로 표현했다.

 

워킹맘의 죄책감도 하나를 선택하면 곧바로 이어지는 이런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105 우리가 범한 오류는 종교적이란 단어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오류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오류가 없었더라면 삶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울까?

오류의 긍정적인 측면. 오류가 있기에 다시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주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것이다. 그 자체로는 정말 좋고 나쁨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106 종교는 말 그대로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단어가 치유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치유하고, 연결하고, 결합하고, 교량이 되고, 다시 함께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닌 신성한 능력이다.

 

-109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역설이 아니다. 만일 다른 두가지 본능이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을 충분히 오래 견딜 수 있다면, 두 갈등이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어서 둘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통찰이 떠오를 것이다. 이는 타협이 아닌 심오한 이해의 차원이다. 이 통찰은 우리에게 삶을 조망하게 해주며 확신을 가지고 해야할 일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값진 특질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확신이다.

 

이러한 시간을 많이 가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빨리 상황이 마무리 되기만을 바랬던 마음이 크다두 가지 본능이 일으켰던 상황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돌이켜보자.

 

-110 우리 삶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일련의 온전하고 새로운 가능성들이 펼쳐진다. 대극적인 것을 서로 반대라고 말하지 말자. 이 대극적인 것들이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신이라는 실체와 만날 수 있도록 보완해준다. 두 상반된 목록에서 한쪽은 세속적이고 다른 쪽은 종교적이라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두 신의 진실을 나타내는 것이란 생각을 하도록 우리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숨겨진 통일성을 볼 능력이 없다는 데 이다. 당당하게 역설에 머무는 것이 통합unity의 권리를 얻는 것이다. 통합된 단일 비전unitive vision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신비롭고 고귀한 신학적 체험으로서, 이는 역설을 받아들임으로 얻을 수 있다. 중세시대에는 이런 체험을 이해했다. 이 체험은 대극적인 둘 사이의 충돌을 넘어서도록 하며, 신과 일치를 이루게 한다.

우리는 역설과 공존할 때 대극적인 둘의 싸움이나 타협을 넘어선 단일한 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아주 작은 초점에 집중시키는 통합된 자세를 얻게 될것이다. 이는 깨달음이란 단어만큼 값진 것이다.

 

삶의 진정한 행복? 한계상황에서 맞닥뜨리는 일들. 지난한 내면작업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들. 과연 알게 될까?

 

-114 과거의 방정식이 붕괴되고 자신의 관점을 포기한다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은 분명하다.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아가 어떤 작용을 하는가! 이 경우 초월적인 것에 대한 신념이 필요하며, 관계를 위해 자신의 관점을 희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종교 체험의 핵심인 ligare가 묶고, 수선하고, 함께 연결하고 온전하게 만들고 분리 이전의 것들을 발견하는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  관점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이루어지리라.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고 새롭게 정의를 해보리라.


-115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다음 단계의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것, 피하고 싶은 것, 원하지 않는것에 대해서 더 구체화 시켜보자

-115 역설과 그림자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역설은 모든 면에서 그림자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고, 그것을 가치 있고 위엄있는 자리로 끌어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고귀한 화합의 장인 역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하는 것은 곧 영성을 체험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서와 세계 신화는 공통적으로 가장 평범한 장소나 사건에서 신성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신화적으로 표현하면 가장 값비싼 진주는 일상의 갈등과 긴장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어느 집이든 지붕만 걷어내면 신들의 드라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누구의 생애이든 지붕을 벗겨내보라. 그리하면 역설을 발견할 것이다. 역설은 종교적인 삶, 즉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위대한 비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값비싼 진주는 일상의 갈등과 긴장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늘 어딘가 멀리에 있다고 했다. 지금과는 다른 그 어떤 곳, 어떤 시간, 그 모든 것이 해결된 어는 시점……. 진짜 어리석다. 왜 이렇게 현실을 바로 보고 인정하는게 힘들었을까. 이제 스스로의 지붕을 다 벗겨내자. 전부 다. 하나도 남김 없이  

 

-116 주어진 임무를 당장 수행할 것인지 좀 더 오래 빈둥거리며 몽상을 계속 즐길지 갈등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이쪽과 저쪽 어느 한쪽도 신성하지 않다. 신성한 자리는 정확히 이 둘 사이에서 발생하는 역설이 존재한다.

 상담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단히 무안해하고 괴로워하면서 충돌하는 가치들을 꺼내놓는다. 이들은 대개 해결책을 원한다. 그러나 해결책 대신 역설을 감당할 만한 의식을 부를 수 있다면 더 커다란 것을 얻게 될것이다.

 

그 상황을 버티는 것이 너무 힘이 들때가 있다. 그러나 해보면 된다. 그러면 그 역설을 감당할 힘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117 입에 쓴 약이지만 상황을 참아낼 정도로 충분히 강한 사람에게는 옳은 답이다.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자아ego는 용기는 있되 윤리와 도덕성이 취약한 사람의 특징이다. 현재 우리 시대에 걸맞게 영웅주의를 재정의하자면, 영웅이란 역설을 감당하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을 자기중심에서 멀어지도록 만드는데, 그 이유는 행위 doing와 존재 being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이콜로지 투데이>의 초기 표지에는 대단히 도발적인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저 뭔가 하려 들지만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라.” 이 표현이 농담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불교적 표현은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것에 대한 주의를 환기 시킨다. 의식적인 기다림을 통해 역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이때 자아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아보다 더 큰 뭔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하기 위해 멈추고 지켜보고 돌아봐야 한다. 왜 이러는지? 무엇을 위해서 이러는지? 미칠것 같은 이 답답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던가?

 

-118 융은 도망칠 구멍이라고는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거나, 갈등에 처해 해결책이라곤 없어 보이는 순간이 전통적인 개별화 individuation가 시작되는 때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사면초가의 순간을 말한다. 무의식은 자아가 한계에 부딪치도록 하기 위해 희망이라곤 없어보이는 갈등을 바란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결정을 하든 잘못될 것이고 어느 길을 선택해도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윤리적인 사람이 자기 존재의 핵심에 도달하는 고통을 겪어내려 할 때 이때 자기 the Self가 등장한다. 종교적인 표현을 빌자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신의 행위에 의존한다. 심리학 언어로 이를 설명하면 전혀 해결책이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아니마anima(남성이 지니는 여성성)가 남성의 삶에 커다란 힘을 부여한다. 이런 순간 남성은 자기 the Self를 경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아니마를 영혼의 안내자로 생각할 때 우리는 <<신곡>>에서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낙원으로 안내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점은 단테가 지옥을 거친 다음에야 낙워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상적으로는 아니마가 남자의 손을 맞잡고 바로 낙원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아니마는  먼저 남자를 뜨거운 냄비 속에 집어넣고는 한동안 두어 적당히 익도록 내버려 둔다.

-       폰 프란츠 << Interpretation of Fairy Tales>>

 

역설에 동의한다는 것은 곧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는 자아보다 훨씬 큰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더 이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지점, 해결책이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정확하게 일어난다. 이 순간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큰곳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순간이다.

 

진짜 해보기는 한건가? 그동안 머리속에 있던 것을 이제는 구체화해보자. 보이지도 있지도 않은 실체와 왜 이렇게 의미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것인가? 이제는 그런것에서 벗어나서 해보자.

 

-124 위대한 시는 도약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통합한다. 정반대라 생각했던 것 사이에 연결점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놀라움이자 충격이다.

 

-127 위대한 시는 이러한 도약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통합한다. 우리가 항상 정반대라고 생각했던 것들 사이에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놀라움이자 충격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연결해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지만, 그런것들을 스스로도 찾아보자

 

-138 죄책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식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만돌라가 만들어지고 치유가 일어난다. 만돌라에는 자책을 위한 여지가 없다. 방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의식적인 작업을 요구하라는 것이다.

  또 죄책감은 역설의 값싼 대용품이다. 우리는 죄책감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서로 다른 진실을 들여다 보는 용기 있는 행위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낫다. 죄책감은 교만에서 온다. 어떤 이슈 중 한쪽을 택해서 그 쪽이 항상 옳다는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편향성은 문화화되는 과정이지만, 종교적 삶에서는 심각한 장애가 된다. 직면할 힘을 잃으면 통합의 기회를 놓치며 만돌라의 치유력도 상실하게 된다.

 

죄책감에서 빠져있지말고 직면하고 직시해보자. 어떤일이 이루어지는지? 내가 답을 줄 수 없다. 답은 스스로에게 이미 있는것이다.

 

-141 인간의 상황은 거듭해 우리를 자아-그림자의 대극으로 나눈다. 이것이 바로 성 아우구스투스가 행동하는 것은 곧 죄를 짓는것이다.”라고 말했던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그림자를 짊어지는 대가를 치러야 할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전쟁, 폭력, 인종차별 같은 집단현상으로 그 값을 지불할것이다. 종교적인 삶이 하늘과 지복천년 같은 다른 영역을 내적 삶의 절정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문화와 종교는 목표가 서로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문화적 영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림자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작업을 하면 얻는 첫 번째 은혜는 우리가 타인에게 전가하는 그림자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 은혜는 만돌라 탄생을 위한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만돌라란 아룸다음과 전일성을 나타내는 숭고한 비전인데 이는 인간 의식이 주는 커다란 선물이다.

 고대 연금술사들은 이 과정을 이해했다. 연금술에는 4단계의 발전을 거쳐가야 한다. 먼저 니그레도 nigredo단계(사랑, 공격성 등이 외부로 투사되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삶의 어두움과 우울을 경험한다. 알베도 albedo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고, 루베도 rubedo단계에서 열정을 발견한다. 마침내 도달한 시트론citrino은 삶의 황금을 감하는 곳이다. 결국 다채로운 만돌라가 만들어진다.

 

충분히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음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피하고 싶었고, 내가 원하는대로 만 하려고 했었고,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서 계속 힘들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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