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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9일 11시 40분 등록

2015.1.26, 이동희

 

1. 저자에 대하여 -

 

문지영 :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정희 : 건국대학교 과학기술학 강사

송충기 :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박진희 :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이은경 :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이내주 :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김덕호 :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이관수 :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초빙교수

 

2.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근대 엔지니어의 탄생 과정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으며 프랑스, 독일, 영구, 미국의 각 국가별로 그 과정을 정리한 책이다. 엔지니어는 사회의 기술적 수요를 담당하는 직업으로서 작게는 마을의 기계의 제작과 유지 보수에서 크게는 대규모 운하 건설, 광산 개발, 교량 건설, 도로 건설, 철도 건설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사업의 핵심 문제 해결을 소화해 내고 있다.

 

기술의 발달과 분화로 다양한 분야의 공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이러한 사회적/산업적 기술 수요를 담당하는 engineer는 학교를 통해 대량 배출되었다. 이들은 산업생산을 위한 제품의 주요한 설계를 담당하게 되었으나 대량 배출된 인력과 공개된 체계화된 지식은 물론 지속적으로 발전 변화되는 기술로 인해 그 존재는 늘 위협받고 있다.

 

특히, 전자 및 정보 산업 분야의 engineer는 이러한 면에서 더 큰 사회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기술의 습득이 날이 갈수록 용이해졌고 인력 수급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도 예전만 못해졌다. 또한, 전자 및 정보 산업은 대부분 대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동반한 산업이기 때문에 기업을 떠나 독립적인 사업을 수행할 수 없는 기업 의존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기업을 떠나서는 홀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해 기업에 종속되고 그 정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본 책은 현대 엔지니어들의 직업적 배경을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엔지니어들의 정체성을 찾아주는데 의미 있는 책으로 보인다.

 

책의 구성은 대체로 역사적 사실 중심으로 정리해 놓았고 이에 충실했기 때문에 다소 따분한 면은 있으나 사실들이 주는 의미를 다시 살펴 본다면 엔지니어가 국가를 위해 또는 사업의 기술 수요를 위해 시대적인 요구를 받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나를 무찔러온 글귀

 

머리말

 

P11

근대 엔지니어는 산업 사회 사회라는 인류사의 새로운 문명을 이끈 역사의 주역이었다. 그들은 생산 관계의 변혁을 가능케 한 기술 혁신을 이끌어 근대 산업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다.

 

P17

미국의 엔지니어가 설계를 어떤 방식으로 변경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알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실험을 적극 활용한 반면, 프랑스 엔지니어는 다양한 경험적 현상을 해명하는 준거 틀로서 이론을 만들고, 그 이론을 통해 그러한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 프랑스 공학이 이론-연역적이었다면, 미국의 공학은 실험-귀납적이었다.

 

P22

이성적 합리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계몽주의 시대의 엔지니어는 높은 교육적 성취와 과학 지식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고, 세간에는 '공학 교육 = 엘리트 교육' 또는 엔지니어를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인식하는 풍조가 조성되었다. 영국의 도제 제도와 대조를 이루며 주로 이론 교육에 집중했던 프랑스의 공학 교육과 국가 엔지니어의 단체정신은 엔지니어로 하여금 공익과 애국심에 바탕을 둔 자신들의 직업적 의무를 이행하는 데 충실함으로써 높은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고 지휘관 또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책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데 기여했다.

 

P27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정부는 과학과 기술의 융합을 지향하고 부르주아의 참여를 통한 '과학의 민주화'를 추구하면서 국가 이념을 공학 교육 체제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그 결과 1794년 설립한 '에콜 폴리테크닉'은 국가 엔지니어를 양성하는 엘리트 교육의 장으로서 수학을 중시하는 이론적 연역적 교육 방식을 통해 국가 엔지니어 양성 기관으로서 특권과 독점을 누리게 되었다.

 

P29

독일 엔지니어는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해 탄생했다. 국가가 근대화의 필요성 때문에 공식적인 교육 기관을 통해 엔지니어를 양성한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초창기 독일 엔지니어는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직업이었다.

 

P37

1870년대부터 만들어진 패턴화한 지속성이 존재했는데, 이는 다름 아닌 공학과 기업 사이의 연관성이었다. 요컨대 미국의 공학은 대기업화한 사기업에서 대량 생산 체제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심지어 많은 경우 엔지니어-경영자가 생산으로부터 노동자를 배제하고 생산 라인을 장악하기도 했다.

 

P42

한국의 엔지니어는 학문의 성격상 혹은 한국적 상황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이해하는 데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엔지니어와 공학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결여된 탓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 국가, 혁명 그리고 산업화

 

P44

사실 '공학'은 그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다. 17~ 18세기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의 진보 개념과 맞물려 탄생한 근대 공학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중세 이래 과학기술 및 수공업의 발달 그리고 길드 전통이 남긴 여러 혁신을 계승한 시대적 부산물로 볼 수 있다.

 

P48

오늘날 엔지니어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공학 관련 일에 전문성을 갖고 있거나 훈련받은 사람으로서 공학 분야의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과학 수학 기술 지식을 사용해 실용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실제로 엔지니어는 국적을 불문하고 어디서나 동일한 작업을 수행한다. 그들이 응용하는 과학 지식은 어디서나 보편성을 가지며, 어디서건 전문가로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을 형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P49

근대 엔지니어의 개념은 산업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는 '촉진자'로서 역할과 이미지에 충실한 채로 남았다.

 

P59

혁명과 전쟁이라는 정치적 급변 속에서 과학과 기술의 융합을 지향하고 부르주아의 참여를 통한 '과학의 민주화'를 추구한 공화주의 국가 이념은 공학 교육 체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P72

프랑스는 이데올로기나 혁명적 선동보다 산업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생시몽은 "가장 수가 많고 가장 빈곤한 계급에 최상의 조건을 유일하게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을 생산의 발달로 보았다.

 

P74

생시몽주의 사상의 요람이랄 수 있는 <생산자> <르글로브>는 평등주의 대신 "각자의 능력만큼, 각자 일한 만큼 정당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꿈꿨으며, 자유주의 경쟁에 대한 노동-자본의 협력, 노동-자본의 중개자로서 엔지니어의 임무를 강조했다.

 

P77

생시몽주의자들의  망 조직화는 훗날 전신, 전화, 위성 그리고 인터넷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이들을 '근대 망 조직화의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수학 정신에 따라 생시몽주의자가 되었다."고 할 만큼 생시몽주의 제1세대는 인류의 진보와 산업의 발전을 증명하기 위해 수학적 계산을 통한 사회공학설계에 큰 매력을 느꼈다. 이들이 당시의 프랑스가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적 해결보다 노동-자본의 합리화를 통한 경제 재조직화를 주창했다는 점에서 프랑수아 갈리스는 생시몽주의와 엔지니어의 관계를 "유토피아" "이성"의 결합체로 규정한 바 있다. 이 같은 관련성 때문에 생시몽주의 운동에 가담한 엔지니어들은 이른바 "진보의 사도" 또는 "20세기 프랑스 테크노크라트의 선구자"로 일컫기도 한다.

 

P84

장인적 성격이 강한 18세기의 엔지니어는 1820년대 이후 수학화한 응용과학을 수용하고 전통적 장인에 비해 훨씬 과학자에 근접한 근대 엔지니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P97

이들은 과학과 수학이 기술과학 지식의 발전에 토대를 제공하리라는 신념 그리고 기술 현상을 과학 이론으로 정립한다는 믿음과 사명감을 엘리트 엔지니어와 공유하고 있었다. 이론적 지식을 실용적 기술에 적용하고 실용적 기술을 이론화한다는 생각은 기술을 과학에 종속시키지 않는 독립적 분과로서의 근대 공학을 탄생시켰다.

 

독일: 국가, 교육 그리고 수공업

 

P123

훔볼트는 비록 기존의 기술 특수학교가 중요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러한 학교는 보편적인 인간 교육의 원칙과 어긋나고 또한 '순수' 교양을 지향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직업 집단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이후 일반 대학과 상관없이 고등기술학교 - 이 고등기술학교는 1965년 제정한 법에 의해서야 비로소 공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할 수 있게끔 되었고 실제로 많은 고등기술학교가 이후 공과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가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P131

신인문주의적 교육 이념을 갖고 있던 교육부 관리의 소극적 태도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촌평했다. "기술 측면에서도 자연과학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아야 할 필요성이 있음에도, 그들은 이러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방향'을 기껏해야 '기본 욕구와 환경을 충족시키는 학문 나부랭이'쯤으로 부드럽게 포장하는 정도였다

 

P134

당시의 산업화 과정과 그에 걸맞는 기술교육을 고민한 결과, 레텐바허가 주목한 것은 이제는 더 이상 기술 수업을 개별 기업 수준에 맞추어서는 안 되고 과학적 원리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기계 제작에서 수학 역학 등 기초과학 이론의 중요성이 커진다고 해서, 그것이 순수하게 이론적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곧 이론이 실제로 얼마나 이용 가능한가와 같은 의문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P140

사회적 분위기도 수공업의 미적 측면을 강조했다. 영국에서 기계로 생산한 신상품이 들어왔지만, 일부에서는 기계 작업을 통해 대량 생산한 제품보다는 수작업을 통해 만든 제품이 우수하다는 인식도 있었다. 당대의 유명한 작가 괴테도 예술은 수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식했고, 수작업이야말로 창조적인 모든 활동의 근간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기계 생산을 통해 미적 요소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바우 아카데미 출신인 프리드리히 쉰켈이나 보이트가 근대적 생산 체제 속에서도 수공업의 미적 요소를 유지하려 한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

 

P143

보이트 같은 관료는 높은 학력으로 무장한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것보다 실무에 밝은 기술자를 양성하는 것이 국가에 더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더 많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대학으로 가라. 기술학교에서 그 이상을 가르치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그것은 기본적으로 경제의 발전과 번영에 영향을 주기보다 장식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료 입장에서는 폴리테크닉 학교의 학문화가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업가들이 이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일을 주도했을까? 바로 엔지니어 자신들이었다.

 

P144

그러다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기술교육의 '학문화' 추세에 힘입어 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 이후부터는 '기술자'라는 용어와 엔지니어라는 용어가 더 명확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전자는 기술을 다루는 숙련 노동자, 후자는 대학과 대등한 고등 교육을 받은 전문 직종의 기술자를 일컫게 되었다.

 

P153

이들이 19세기 말에 이르러 최상위 계층의 한 집단으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전문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 기반은 물론 사회적 기술의 중요성이었고, 그 수단은 기술교육의 학문화였다.

 

P154

엔지니어 협회가 내세운 목표는 대략 세 가지였다. 회원 간의 친목과 정보 교류 자기 구제와 평생 교육 그리고 기술과 산업의 증진이 그것이었다.

 

P156

기술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기술이 국가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자부심을 느꼈고, 사회적으로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그들은 대학의 고전 교육을 바탕으로 등장한 전통적 전문 인력인 법률가나 의사에 비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불만을 품었고, 그들과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영국: 전문 단체와 신사 - 엔지니어의 이상

 

P170

성공한 주역급 토목 기술자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대접받던 전문직, 예를 들면 의사나 변호사 같은 위상을 얻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엔지니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도 이들은 행동 양식, 사교, 교육, 사회 활동 등에서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신사의 모습을 지향했다. 영국 근대 엔지니어의 기원은 바로 이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이들이 생각한 영국 근대 엔지니어의 모습은 한마디로 신사 - 엔지니어 라고 할 수 있다.

 

P172

산업이 발전하고 기술 전문 인력이 증가하면서 엔지니어 사회에도 분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엔지니어라고 일컫는 이들 중 소득 수준, 기술 전문성, 기술 현장의 지위 등에서 신사의 풍모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제 엔지니어 사회의 균질성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신사-엔지니어의 이상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P172

산업혁명 이전에 영국의 기술 종사자 중 공병을 제외하면 엔지니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군대에서는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성을 짓고 참호를 파고 도로를 건설하는 공병단을 체계적으로 키웠다.

 

P176

영국에서 '엔지니어'는 오랫동안 공병, 즉 군대 엔지니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나 1770년 무렵 민간에서 군대 엔지니어와 비슷한 일을 하는 전문 기술자가 등장했고, 이들은 공병과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민간 엔지니어'라고 불렀다.

 

P181

토목 엔지니어가 기술 현장에서 기획하고 자문하고 관리 감독하던 것과 달리, 기계 분야에서는 대부분의 기술자가 경험과 숙련에 바탕을 두고 개인 작업장에서 주문받은 것을 제작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P182

기계 분야에서는 와트를 제외하면 근대 엔니지어의 조상에 해당하는 집단이 18세기 말까지도 성장하지 못했다.

 

P188

토목 엔지니어 협회를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팔머는 당시 23세의 문하생 신분이었고, 다른 창립자들의 평균 나이 역시 25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은 엔지니어가 "철학자와 현장 기계공을 매개하는" 존재이므로 "현장 지식과 이론 지식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토목 엔지니어 협회는 이러한 "필수 지식의 상호 교육"을 촉진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P191

청원서는 토목공학을 "인간의 편의와 사용을 위해 자연에 대한 거대한 힘의 원천을 지배하는 기예"로 폭넓게 정의해 기술 일반을 모두 포하했다.

 

P192

토목 엔지니어 협회 회원 자격이 곧 토목 엔지니어로서 전문성을 인증받는 것처럼 되자, 전문성과 경력에 따라 회원의 등급을 나누는 제도를 도입했다. 1834년 토목 엔지니어 협회는 경력에 따라 회원 자격을 세분화해 기존 정회원과 부회원 외에 갓 도제를 마친 경력 초기의 엔지니어를 위해 준회원 자격을 새로 만들었다.

 

P201

철도 사업에 참여한 증기 기관 기술자는 증기 기관차의 생산과 이용 증가에 따라 균일한 증기 기관차 제작을 위한 설비를 개발하고 표준화하는 작업을 했다. 제작과 설치 이후에는 운전 과정에 필요한 유지 및 보수를 맡았다. 이들은 철도 건설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대규모 기술 사업의 체계적 기획, 관리, 시공 경험을 얻었다.

 

P204

기계 엔지니어 협회 설립을 주도한 철도 엔지니어는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기계 엔지니어 협회 발기문에서 기계 엔지니어를 '기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규정했다. 정회원 자격은 "증기 기관이나 기계를 제작하는 조직, 어떤 종류의 기계라도 이용하는 조직의 관리자급이나 명망있는 기계 엔지니어가 자격을 인정하는 21세 이상의 사람"이었다.

 

P210

공학에서 현장 전통은 19세기에 걸쳐 계속되었고 1870년 이후에야 비로소 대학에서 공학 교육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공학 교육에서 실험 실습은 이론 중심의 교육에 현장 교육을 접목하려 한 절충 방안의 일종이었다.

 

P212

엔지니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식은 현장과 결합한 '실용 지식' 이었다. 경험을 통해 대부분의 엔지니어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이론 중심의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자신들이 현장에서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엔지니어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P215

산업 현장의 기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과학기술 지식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야 했다. 이런 일은 경험 전통이 강하고 성공적이었던 토목이나 기계 분야가 아니라 19세기 후반이 새로운 산업 분야, 즉 전신 전기 화학 등에서 일어났다.

 

P222

결국 이론과 실기에 모두 능통하고 현장을 이해하는 엔지니어 경력을 갖춘 과학자 또는 과학을 깊이 공부한 엔지니어 출신 교수가 등장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학에서 공학 교육을 시도한 많은 선구자들은 비록 공학 교육을 정착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무엇이 과제인지는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P224

특히 1855, 1867년 두 번에 걸친 파리 세계박람회가 영국 산업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독일이나 미국 같은 경쟁 산업국에서 생산한 우수한 공업 제품은 이들 국가의 선진화한 교육 제도 및 시설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영국의 공학 교육은 대륙 국가에 비해 매우 뒤떨어진 것으로 보고 되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기술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각종 제안 및 교육 시스템 변화에 대한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미국: 유럽 따라잡기와 엔지니어의 팽창

 

P247

공공 토목 사업을 총괄하는 사람은 '엔지니어'또는 '수석 엔지니어'라는 직함을 가졌다. 다라서 토목 분야에서 '엔지니어'는 현장 경력을 쌓아 치고의 지위에 올라선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이리 운하 건설 사업에 참가한 사람 또는 그런 사람의 도제 출신이었다. 즉 이리 운하 공사를 통해 장래의 미국 토목 엔지니어가 탄생한 것이다.

 

P252

미국의 엔지니어 형성은 영국 및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 결과는 절충적이었다. 우선, 영국과 달리 초기 미국 엔지니어는 노동 계급의 숙련 장인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 적어도 신분 피라미드의 중간층으로 인식되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와 달리 이들은 국가가 아니라 기업과 연결되어 있었다.

 

P261

프랑스 방식처럼 수학과 이론에 기초한 공학의 접근을 수용하고, 상당히 많은 프랑스 교재를 사용했다. 그 결과 웨스트포인트는 미국 최초로 공학 교육을 시행한 고등 교육 기관이 될 수 있었다.

 

P264

스티븐 반 렌셀러는 이 학교를 '과학을 인생의 공동 목적에 응용"하기 위해 개교했다.

 

P269

웨스트포인트 졸업자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이 집단은 주로 공공 영역에서 활동했고, 개인 사업을 하더라도 공공사업의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공익에 복무한다고 여겼다. 반면 공작 기계 제작자는 지역 사회가 아니라 개별 기업에, 공익이 아니라 사익에 복무하므로 자신들에 비하면 시민적이지도 신사답지도 못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P272

결과적으로 모릴 법은 주들 간의 자부심 대결과 치열한 경쟁을 유도해 변방의 농업 및 공업 대학을 한 세대 만에 엄청난 규모의 종합대학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P276

엔지니어는 추상적 원리보다 귀납적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친 그이 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P279

로버트 서스턴은 이 학교가 일급 직업학교일지는 몰라도 전문적인 공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코넬 대학의 덱스터 S. 킬벌은 엔지니어가 작업장의 모든 공정을 알 필요는 없다면서 오히려 설계에 필요한 지식 습득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P280

20세기 초 미국의 전형적 엔지니어는 작업장이 아닌 공과대학에서 이학사 또는 공학사 학위를 취득한 백인 남자였다. 그 결과 1920년이 되면 학위 소지 여부가 기업의 엔지니어 고용에 필수조건이었다.

 

P281

미국 엔지니어는 초기부터 기업과 연관을 맺거나 기업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나아가 공학 분야는 19세기 말 들어 사뭇 대중적인 직업이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너무 많아 미국에서는 엔지니어를 전문직 엘리트로 분류하기 곤란할 정도가 되었다.

 

P282

전문 직업은 여타 직업에 비해 우월적 지위와 배타적 특권을 누리는 것이 전형적이다.

 

P286

프랑스의 국가 엔지니어는 자신들이 국가와 사회를 이끈다고 자부했으며, 정당 정치인의 정치적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비용-편익 분석법을 개발하는 등 객관적인 공익 수호자로서 자신들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반면, 미국의 토목 엔지니어는 지역 사회, 주 그리고 연방의 공익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지녔지만, 자신들이 엔지니어로서 공익을 수호하거나 사회를 이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P287

식민지 시대 이래 미국의 임금 수준가 노동 강도는 계속해서 유럽보다 높았다. 그래서 자본가뿐만 아니라 직공들도 기계화를 환영했다. 유럽의 숙련 기술자가 대체로 기계화를 불신한 데 반해 계속 팽창하는 시장 속에서 높은 노동 강도를 경험한 미국의 직공은 기계가 자신들을 돕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P288

FI는 영국과 달리 숙련 자인의 권익을 신장하려는 조직이 아니라 노동 계급에서 지식의 보급을 통한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기계공 협회와 달랐다.

 

P289

다만 이들이 '과학'이라고 여긴 것은 수리적 이론 체계가 아니라 '유용한 지식'이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미국에서는 일부 예외적인 경우 말고는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에서 발달한 수리적 과학 체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다. FI 저널에 기고한 기사는 상당수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체계화된 경험에 바탕을 둔 해결책을 지향하는 것이었고, 그 문제들 또한 작업장 도는 산업에서 발생한 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P292

서스틴이 저술한 교과서 또한 추상적 원리보다는 귀납적 경헙을 중시했다. 다만 그는 증기 기관 교육에 열역학을 체계적으로 도입했다. 그가 소개한 증기 기관의 열역학 이론은 당시 유럽의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던 추상적 열역학이 아니라, 엔지니어를 위해 변형한 것이었다.

 

P307

장벽 중 하나로 진정한 전문가 집단 혹은 기관을 만들려는 미국 엔지니어의 노력에 대한 기업 혹은 고용주의 지속적인 반대와 방해를 들 수 있다. 기업주는 엔지니어를 쉽게 이용하기 위해, 또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엔지니어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제대로 된 협회나 단체를 만들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효과적으로 차단해왔다. 아울러 공학 단체 내에 '엔지니어-관리자' 역할을 하는 사라들을 키워 강력한 이익 단체를 표방하는 공학 협회 등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았다.

 

P308

한편,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부 엔지니어는 때때로 자신들을 노동자로 인식해 노동조합 같은 조직을 결성하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기업 혹은 고용주 집단과 상층 엔지니어 집단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엔지니어는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집단으로서 오늘날까지 존속해오고 있다. 전문직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리된 상태가 아니며, 따라서 대학이 제공하는 기술교육의 사회적 결과에 대해서도 아직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P310

현실은 19세기 후반기로 갈수록 대규모 프로젝트나 조직에 묶이는 엔지니어가 주류를 형성했다. 고용주나 독립적 엔지니어가 되기보다 대기업의 피고용인으로 활동하는 엔지니어가 한층 더 증가한 것이다. 그리하여 1890년대에 이르면 소유주-엔지니어보다 대규모 조지게 고용된 월급쟁이가 훨씬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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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6 05:23:02 *.222.10.47

북리뷰가 일주일 늦었습니다. 한주일 걸러 진행해야 할 것같습니다.

북리뷰를 위한 책 리스트가 업데이트 되고 있습니다.

정리되면 별도로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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