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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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는 출발을 이십 여분 앞둔 기차에 올라 선반에 가방을 올려 두고, 출입문 가까운 간이의자에 걸터앉았습니다. 두 사람은 다정히 연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윽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가 곧 출발할 것이라는 안내 방송이 시작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기차에서 내려섰습니다. 그가 그녀를 향해 아쉬운 듯 손을 흔들다 완전히 돌아서서 보이지 않게 됐음에도 그녀는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지정석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녀가 여전히 간이의자에서 울적해 있을 때 열차 칸을 잇는 통로의 출입문이 열리더니 그가 쌩하고 달려 왔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등장에 놀란 그녀에게 그는 다급하게 쇼핑백을 쥐어 주었습니다. 쇼핑백에는 빛깔고운 머플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색상이라서’ 그가 겸연쩍어 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녀는 활짝 웃었고 그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정차해 있던 기차는 그만 출입문이 닫히며 출발하고 말았습니다. 기차에서 채 내리지 못한 그. 덕분에 두 사람은 다음 정차 역에 도착하는 40분 동안 더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그가 다음 역에 하차하고 난후의 아쉬움은 더 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지방 발령을 받은 그의 사택에 가서 그가 불편하지 않도록 밑반찬 등을 살뜰히 돌봐주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기차에 내려서 홀로 사택으로 돌아가다가 아내가 좋아하는 빛깔의 머플러를 사들고 그 짧은 시간에 전속력으로 달려 다시 기차로 돌아온 그.
그에게 그녀는 ‘집’ 의 모든 의미를 대표하는 존재였겠지요. 퇴근 후 돌아오면 함께 나누던 저녁 식탁, 드라마를 싫어하던 그녀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그와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느라 함께 시청하던 공간.
서울 역에 기차가 도착할 즈음,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습니다.
‘ 언제든 힘들면 상경하라던 말. 어떤 결정을 해도 맞춰 살 준비가 되어 있다던 당신의 그말, 고마워. 아이에게 전화 했으니 역에 마중 나와 있을 거야. 추우니 머플러 꼭 하고’
그녀가 답신을 보냈습니다. ‘내 집은 당신이야. 그러니 우리는 늘 함께 있는 거야'
결혼한 지 30여년이 지난 두 부부는 처음으로 주말부부로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걱정했었으나 그가 머물 사택을 확인하고, 그가 하는 일 또한 활기차 보여 안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머플러를 받은 기쁨보다 되돌아올 만큼, 외로웠을 그 걸음이 읽혀져 마음 아팠다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있자니 마치 거실의 한켠이 무너진 곳에 혼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누군가의 집이 되어 본 적이 있던가’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내 떠오른 질문이었습니다. 서로의 기억이 아로새겨져 문을 열고 한공간에 있기만 하여도 안도가 되고 활기찬 집. 그대는 누군가를 기억해주고 품어줄 집이 되어 본적이 있는지, 또는 지금 그대가 누군가의 집에 깃들어 있다고 느끼는지, 오늘은 문득 그렇게 묻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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