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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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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5일 17시 21분 등록

<재혼 코칭>

1 저자에 대하여-김 번영

그는 트리니티웨스턴대학교 석사 과정에 무조건 입학했다. 캐나다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한국으로 돌아가느니 징글징글한 공부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마지막 학기, 쉽게 건너기 위해 가족 상담 과목을 듣게 되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의 페이퍼가 가장 잘된 것으로 뽑혔다. 게다가 공부에도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신앙도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

내친김에 박사학위까지 가보기로 했다.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순전히 박사 자식을 두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 드리기 위함이었다. 여러 대학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프레토리아 대학교 뮬러 교수의 답장에 홀려서 그 밑에서 상담학으로 박사학위를 하게 되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이야기 접근법은 단숨에 그를 사로잡았고, 공부를 할수록 희열이 느껴졌다.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다니던 시절부터 동료들은 그를 조금은 독특한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그런 그에게 이야기치료는 자신을 독특하다기보다는 '특별한 존재'로 인정하는 힘을 북돋아주었다. 그는 이혼을 경험했다. 이혼은 쓰라림이었지만 돌이켜보니 그 쓰라림은 또 다른... 인생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 그리고 시행착오로 얼룩졌던 재혼 생활은 또 다른 은혜와 사랑을 배우는 통로가 되었다. 4년 전,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오롯이 나누기 위해 이야기치료심리상담센터와 하늘못교회를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는 『이야기치료 상담』과 Stories of Adolescents in Remarried Families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여행길의 동반자-나레이티브 상담』 등이 있다.

<약력>

한신대 신학과 졸업

미국 트리니티 웨스넌 유니벌서티

프레토리아(Pretorea) Uinversity 박사(Ph.D)

이야기치료 심리상담센타 소장

현 본원 교수 [강의과목] 이야기 치료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책을 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일

005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탈레서에게 한 제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과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가장 쉬운 일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나를 아는 일. 예전에는 이것을 쉽다고 생각했었다.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이것은 커다란 함정이었고 오만이었다. 그리고 편견이었다. 내 안에 함몰되어 안으로 안으로 침체되는 것. 그것이 내 모습인지 알았다.

007 이 책의 목적은 가슴을 따듯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거친 파고를 헤쳐온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거칠고 딱딱하고 어렵더라도 읽고 또 읽어 삶에 적용하며 노력해주기를 소망해본다. 우리의 삶은 넘어가야 할 산이지, 피해가거나 돌아가야 할 계곡이 아니다.

이 책은 준비된 자에게만 필요한 책이다. 고정관념에 갇힌 자신의 몽환에서 깨어나기 위해 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고를 내려놓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추천글 재혼가족을 사랑하는 상담사

010 이혼이 문제가 아니고, 재혼도 문제가 아니며,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지나온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그리고 가족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느냐라는 것입니다.

Part1. 재혼 가족들로부터 온 지혜 보따리

나의 이야기 01 재혼한 목사가 어딜….

027 현대 한국사회에서 이혼과 재혼의 비율이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증가하였다는 것과 재혼 가정이 정서적. 문화적. 행정적. 법률적인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가정 형태로 자리매김하기에는 아직은 어렵다는 것을 나의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었다.

재혼 부부에 주어진 새로운 역할과 정체성 02 재혼, 실수는 있으나 실패는 없다

034 상담은 추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실타래를 풀어가려면 자매님이 먼저 여셔야 합니다.

035 더욱이 실제 우리에게 참고가 될 만한 재혼 가정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숨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숨기고 싶다 보니 닫아야 하고, 닫다 보니 우리 공동체와 거리를 두게 된다. 그 속에서 오는 정서적 소진감이 실로 크다.

036 갈등이 있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상담사를 찾거나, 같은 재혼 가정과 이야기를 나누라고 권한단. 재혼 가정에는 참고서가 부족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 배움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노력해야 한다. 너와 나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 가정 이야기의 신비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도 바라는 상황이다. 나의 글의 조금의 위안과 공감과 정보를 주었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서는 글이라는 매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나누었으면 좋겠다.

037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039~040 재혼 가정의 행복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누군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렸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누가라는 것이 조건이지요. ‘어떤 조건(누가)이 내 곁에 잇는가를 넘어서, 곁에 있는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는가? 어떤 형태의 관계하는 방법을 배우는가?’라는 것이죠.

041 사건들, 가정 내의 문제들, 행복의 조건들은 결국 해석의 문제이다. 그래서 기존의 상담학에서는 상담은 결국 해석의 문제라고 본다. (중략) 배워야 한다. 관점을 배우고 관계하는 방법을 배우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이야기를 나누는 삶과 자세를 배워야 한다.

>커뮤니케이션과 공감은 나의 강점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요즘은 종종 나의 한계를 느낀다. 그것은 상대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는 영역을 인정하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042 “목사님은 뭐하러 불필요하게 책에다 나 재혼이요!’하고 나팔을 불고 다니십니까! 자랑도 아닌데….” “, 저의 나팔 때문에 아주 작은 불필요한 잡음이 있었음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얻는 게 많습니다. 굳이 숨기려 하지 않으니 에너지를 소모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에 더욱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었답니다.” 자매님! 그것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합니다. 이야기가 밝은 햇살을 받으며 숨을 쉬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우리의 이야기는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043 그러나 자매님, 모든 아픔과 상처가 반드시 잊어야 하거나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님을, 상담하면서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의 상처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랍니다. 어쩌면 치유라는 단어가 무색한 경우도 있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아픔 속에 보물이 숨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043 우리의 과거 상처는 미래를 여는 보물창고이다. 거기서 우리는 배우고 지혜를 얻는다. 이런 지혜들이 모여 현재에서 미래를 건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이런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보물들을 마치 장롱 속에 감춰놓는 보석처럼 마음속 깊이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말하는 상처는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고, 해석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라고 규정짓고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그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어떻게 나의 삶에 도구화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결국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044 개개인의 이야기(story)는 이야기되는(telling) 그 순간부터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이야기가 된다. 우리의 재혼 가정 이야기가 사회 공동체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이야기는 내 가족의 이야기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재혼 가정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이야기되는 순간부터 다른 재혼 가정과 여타 다른 가족 형태(한 부모 가정, 동성 가정 등등)에 영향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재혼 가정의 이야기는 우리의 공동체가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가정과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하고, 실천적 지혜의 샘이 되기도 하고, 작은 안내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재혼 가정 이야기는 더 더욱 이야기되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046 풍랑 없는 바다에서는 수확이 없다. 뱃일을 그만두고 나중에 안 재미난 사실이 있다. 바다는 물을 받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아도 청정을 유지하는 자체 정화비결이 있다. 그것이 바로 풍랑이다. 밑바닥부터 자신을 뒤집어내는 고통의 순간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 천지가 뒤집히는 사건이 있은 후, 자기정화는 물론 만선의 풍요를 나누어준다.(중략)

풍랑이 없는 인생이 있을까? 풍랑 없는 가정사가 있을까? 풍랑은 있어야 할 자연현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선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바다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뱃사람에게 풍랑은 풍랑일 뿐이다. 그들은 파도치는 바다를 피하려하지 않는다. 풍랑 후에 바다는 풍요로운 어획고를 선사한다는 것을 뱃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안다. 문제는 만선의 풍요를 위해 익혀야 할 항해 기술이며, 선원으로서의 자세이다. 뱃사람에게 풍랑은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일깨워준다. 풍랑은 또 만선을 기대하는 사건일 뿐이다.

050 저희들은 아이들 교육이나 훈련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가정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필요에 의해,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구분되는 것뿐이었죠.

050 그런데 우리는 전통적인 역할에만 매여서 마치 그렇게 안 하고 살면 문제가 있는 가정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나의 역할이 무엇이냐라는 문제보다는 내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때 더 효과적이고 합리적인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데, 우리 문화가 그걸 쉽게 수용하기 힘들게 한다.

>우리 집에서 효과적, 합리적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집안의 모든 일은 어머님과 나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일도. 나는 이게 불합리하다는 것을 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는 서로가 역할 분담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집의 역할 분담은 조선시대. 그때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051 존재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역할에서 온다. 역할의 확신이 곧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연결된다. 사람은 역할로 살고 있다. ‘역할이란 사람들에 의해 부과된 어떤 구체적인 행위이며 그에 알맞은 생각, 정서, 개념 그리고 기준을 요구하는 것이다.(Kaplan, 1992:5) 즉 역할은 누군가에게 의해, 혹은 어떤 일에 대해서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주어지는 것이다. 역할이란 그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필요이고, 구성원들의 요구이다. 그 요구와 필요는 구성원 개개인의 생존과 결부되어 있다. 오늘날 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의 는 누구인가? 나는 역할로서 규정된다. 지금의 역할이 이다. 즉 사람은 역할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052 외롭다는 표현은, 이웃은 있으나 교류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외로움은 관계없는 사람, 가깝지 않은 사람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외로움은 비교에서 오는 느낌이다. 너와 나를, 저 부부와 우리 부부를 비교하면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보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원흉(?)가족 누군가가 아니라, 가족 안에서 느끼는 나의 존재감이다. 그 존재감은 가족 내의 나의 역할에서 온다.

053 가정 내에서의 역할은 불편하거나 고정되어 바뀔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상황적인 것이다. 우리 사회문화가 규정해놓은 엄마, 아빠, 양육자, 훈육자라는 역할에 우리가 규정될 필요는 없다. 내 가족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존감 있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역할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상황에 맞도록 재조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족 내의 역할이란 결국 가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각 가족의 효율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태초부터 신이 정해놓은 것은 아니다.

055~056 가족 내에서 구성원들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직도 도와주는 기능적 역할이다. 이것은 가정의 기초를 제공하고 유지해주는 것으로서 경제적. 물질적 필요의 제공, 가사, 자녀양육 등을 담당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가사 도우미(일당)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한 가지는, 간접적 역할로서 정서적인 것이나 느낌과 같은 것에 의해 구분되는 표현적 영역이다. 바로 여가, 성생활, 친밀감 등의 것이다.(Kaplan, 1992:6) 이 두 가지 역할이 가정을 이루는 최소한의 가초이며, 이 두 영역 속에서 가족은 기능을 한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결핍될 때 가족은 서로에게서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 그 기대치가 무너질 때 가족 구성원들은 실망하고, 그 실망이 쌓이면서 갈등이 생기게 된다. 갈등은 가족 구성원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하며, 그러다보면 가족 구성원 개개인은 점차 병들어가게 된다. (중략) 결론적으로 가정 내에서의 의 역할은 가족 구성원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기대치이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이다.

056 전통적으로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문화가 이미 지정해준 역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모두가 그 지정된 역할에 따라 행동하고, 사고하고, 상대에게 요구한다. 자신도 모르게 사회문화에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도,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기능적 역할과 표현적 역할에 충실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높인다.

057~058 현대 사회는 문화에서뿐 아니라 생활구조에서조차 전통적 가족 형태의 역할 분담이 가져다 주는(초혼 가족을 포함하여 어느 가족 형태에서도)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다. 또한 사회구조적으로 그런 역할을 고수하기에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역할 규정은 가정 안에서 갈등의 주범이 되기까지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재혼 가정에서 전통적 남성/여성의 역할을(선택적이든 강요적이든) 구분짓는다는 것은 마치 현대 농업 구조에 쟁기를 끄는 소를 투입하는 것과 같다.

>할 말은 많으나 침묵! 그래서 답답해.

061 실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따라다니며 힘을 발휘하는 유령이 있다. 가정 연구학자 모니카와 베티는 이것을 유령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아이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모니카와 베티에 따르면, 아이들은 이 유령’, 즉 심적 가족관계를 포기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1999:419) 이 유령은 재혼 가정 아이들과 양육과정과 가족간의 친밀도 형성에 매우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 유령이 아이들에게만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어른들에게도 이 유령이 있어서 심적인 기대치는 포기했을지라도 심리적인 불편함은 늘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유령이 유령의 역할을 잘할 때가 많다.

064 지금 자매님은 친정아버지로부터 학습된 부부의 삶과, 전남편에게 경험했던 것들을 지금의 남편에게 덧씌워서 정서적이며 간접적인 방법으로 지을 지워주고 있습니다. 지금의 남편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것을 단지 남편이기 때문에 전남편의 외도까지 덧쓰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 거죠.

066 부모님이나 그 윗대(원가족)가 맺어온 가족간의 관계, 습성, 관계하는 방식 등등이 지금의 의 정서 세계에 알게 모르게 강하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즉 지금 내 자신의 정서적 성격이나 내 가족과 관계하는 방법 등은 나의 개인적 정서성이 아니라, 최소한 3대에 이은 정서체계라는 것이다. (중략) 그러기에 건강한 부부일수록 과거’, 즉 윗대(원가족)의 방식과 사고 등에서 독립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보웬은 말한다.

067 그들은 이전의 관계(유령들)와 좋든 싫든 심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사람 그리고 새로운 공간과 시간 속에 살면서도 이전 관계에 목말랐던 것, 이전 관계에서 힘들었던 것, 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들을 현재 함께 새 가정을 이루어 사는 사람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요구하거나 해보고 싶어한다. 이것을 미해결된 과제(unfinished business)로부터 온 필요라고 한다.

068 미해결된 과제는 비현실적인 기대치를 가지게 하는 주범인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포장하는 주범이기도 하다.

068 재혼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을 실현해보는 장이 아니다. 과거에 못했던 것을 해보는 한풀이의 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혼으로 과거의 자신은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재혼은 필요에 의해 발생한 또 다른 삶의 구조이고 삶의 방법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적 고리는 실체 없는 유령일 뿐이다. 이제 심리적 가족을 흘려보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자유로울 수 있고, 현상적 가족이 실제적 가족이 될 수 있다.

069 지나간 그 사건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과거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도 . 즉 과거 그 사건의 의미가치를 내 스스로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내면세계에서는 변할 수 있는 것이 과거이다. 과거의 사건을 그 기억 그 상태로 계속 유지할 수도 있고, 그 기억을 새롭게 재해석해서 내 머리에 입력할 수도 있다.

070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과거가 나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내가 과거를 지배한다.

070 인간은 지금 내가 처한 현실 속에서 과거속의 사진(사건)을 볼 수밖에 없다. 과거는 해석될 뿐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과거, 말하는 과거의 그 사건은 해석된 과거이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다. 사진과 연관된 의미, 추억 등등이 지금 나의 얼굴에 웃음이나 슬픔을 나타나게 하는 것처럼, 해석된 과거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지, 과거 사건 그 자체(사진 그 자체)가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072 어떤 과거의 경험이나 상처도 현재 나의 해석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072 지금 나의 해석은 나의 선택이다. 나의 선택은 내 집안의 파랑새이다. 명심하자! 나의 과거가 지금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절대로 규정할 수는 없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그 사건을 규정한다.

074~075 네가 보는 나도 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도 나야!” 언제까지 난 뭐야?”라는 항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난 뭐야?”라고 항변하지 말고 나 자신이 나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 마치 왕의 선택을 받기를 기다리는 궁녀들처럼 주위에 의해 선택되고, 규정되며, 가족 일원으로부터 자신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받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선택하고 자신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075 분명한 자아존중감, 그것이 나의 가치이다. 자아존중감은 그냥 생기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힘쓰고 애써야 생기는 괴상한 것이다. 누가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아존중감이란 과거나 미래, 가족들이나 환경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동력이요, 노력이다. 우리가 흔히 심리적 병리라고 하는 편집증, 강박, 우울, 조울증, 경계성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문화적 틀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 네가 보는 나로 규정하기 때문에 겪는 문제이다.

>네가 보는 나도 무시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진짜 모습이다. 너무 많이 남의 눈을 의식하다 보니, 그리고 그것에 맞추려다 보니 진정으로 자기를 존중해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또 한번 피해자로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제 상처는 그만!

077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똑 같은 상황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은 정체성에서 온다.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나의 생각과 행동의 폭은 달라진다. 자아정체성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취할 행동이나 선택의 폭이 결정된다. 왜냐하면 주체적 삶은 자신의 주위에서 발생하는 것들에 대한 해석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주체적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을 찾는 것이다. 진정 자산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만이 자신의 삶과 가족 구성원의 삶을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과 해석이 후회 없도록 하며, 선택과 해석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그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자아가치이며 존중감이라 할 수 있는 자아상이다.

079 자신을 과감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은 자아존중감과 더불어 자신의 실수나 부족함, 약점 등도 과감하게 인정할 줄 안다. 자아가 약할수록, 자존감이 낮을수록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보다는 감추기에 급급하다. 덮을수록 어두워지고, 열수록 밝아진다. 때론 감추기에 급급한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는 행위나 말을 자기가 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그 속에서 살다 보니 무엇을 감춰야 하고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지 구별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감추려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상대를 공격하고 비난까지 한다는 것이다.

080 자아존중감이 높을수록, 자신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상담자)을 통해서라도 가정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적극성을 보이고, 또한 자신을 먼저 낮추고 자신에게는 배우자와 가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고백할 줄 안다.

재혼 후 겪는 자녀 문제 03 재혼 가정 갈등의 주범은 아이들이다?

088 아이 문제와 관련해서 재혼 가정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부모들이 이혼할 때도, 재혼할 때도, 우스갯소리지만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현실은 강요된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요되는 현실의 폭력성을 나는 안다. 그래서 아들이 나를 엄마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결혼을 하기 전에 고모들과 할머니가 날 엄마로 불러야 한다고 아이한테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그때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알게 모르게 아이한테 가해진 많은 폭력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089 왜 아이의 성을 바꾸려 하는가? 성의 변화가 아이에게 중요한 그 무엇을 얻게 하는가? 성의 변화로 아이가 불이익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부모로서 내 자신이 거북한 것인가? 어떤 경우라도 좋다. 더 중요한 것은 재혼 가정이 언제까지 그런 외적인 문제로 자신의 삶을 움츠리며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갖고 모두가 재혼 가정임을 스스로 감사하고 서로 위로하며 당당히 서는 모습을 만들어가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091 모든 잘잘못을 논외로 하고 보면, 사실 이 가정의 갈등은 아이 때문이 아니라, 부부가 자신들은 재혼이라는 안경을 쓰고 아이를 바라봄으로 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렇지. 재혼가정에 대한 상식도 없고, 재혼 가정을 초혼 가정처럼 똑같이 여기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오류를 범하던 때가 있었고 지금도 그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094 엄밀하게 말하면 재혼 가정에서 갈등을 초래하게 만드는 원흉은 자녀가 새아빠/엄마를 따르고 안 따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고정된 역할에 빠져 있는 의 문제이다. 우리는 일정 정도 고정관념 즉 사회문화로부터 남자와 여자에게 이미 역할을 구분지어 놓은 것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과, 그렇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거나 비정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재혼 가정 연구가들이 공통되게 지적하는 것이 가정에서의 남녀간, 아빠 엄마의 역할 범위이다.

095 재혼 가정생활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내가 생각했던 아빠/엄마, 내가 이제껏 행하였던 남편/아내의 역할은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재조정되어야 한다.

095 그런 의미에서 재혼은 새로운 문화이다. 새로운 구족이고 새로운 사람이며 그들과 시작한 공동체이다. 그러기에 역할도 새로워야 한다. 가정에서는 새로운 자녀들에게 친구의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서로간의 충분한 교감이 형성되기 전까지만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096 갈등은 서로간의 충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대치에서 온다. 누가 기대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기대했을 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소한의 기대치도 없이 살까? 적어도 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치도 없이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아직 그 길은 찾지 못했다.

097~098 깊이 배려하지 못하면 재혼 가정의 유령은 내 배우자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재혼 가정의 유령은 재혼 가족의 안심을 즐겨 갉아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혼 부부에게 배려란 안심과 쌍둥이다. 배려란 상대에 대한 것이기에 아무리 내가 배려했을지라도 받은 상대가 배려받았다는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배려가 아니다. 그러기에 상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재혼 가정은 갖가지 상처로 얼룩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므로 안심시켜주는 배려가 참으로 중요하다. 안심은 확증이 있어야 한다. 무형적인 신뢰가 오랫동안 쌓여 있든가, 아니면 그 어떤 증표가 있을 때 사람은 안심한다.

>자기 만족의 배려에서 상대 만족의 배려로 턴!

099 이전의 부/모와 즐겁고 기쁜 경험이든, 나쁘고 불쾌한 경험이든 상관없이 아이들 심상에는 그 경험들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각인된 것들이 지금 함께 사는 부모들에 대해 여러 형태의 잣대로 작용한다. 게다가 그 추억을 회상할 때는 플러스알파가 덧붙는다. 바로 자신만의 해석과 의미를 부여해서 유령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100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새부/모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들의 이중성에서부터 친부/모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이나 기대치가 자신들에게 죄책감을 불어넣는다. 이것을 양가감정이라고 한다.

>양가감정. 잔인한 감정이다. 부모들의 행동과 선택으로 인해 아이들이 갖게 되는 죄책감. 나도 아버지와 사는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면서 한 켠에 많은 죄책감을 느끼곤 했었다.

102 생부/모를 향한 아이들의 충성심과 유령과 공존하는 현상에 대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양육하는 부모는 깊이 각인해야 한다. 아이들은 충분히 이해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새 가정에는 기다림의 미덕이 필요하며 아이들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기다림의 미덕은 모든 가정에 필요한 덕목이지만 재혼 가정에도 특히 필요하다. 난 준비된 stepmother인듯. 하기야 내 인생이 이쪽으로 흘러오기 위해서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고 아이와 나를 연결해주는 운명의 실타래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102 재혼 가정의 새부/모에게는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의 친부모가 되지 못한다. 극히 드문 사례를 빼고는 아이들 대부분이 새부/모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04 ‘기다려줌’, 이것은 비단 재혼 가정의 양육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기다려줌의 미덕이 필요하다. 기다려줌은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이요, 변명의 신간을 허락하는 것이요,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와 사물에 대해 재해석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지난날 나의 삶에 얼마나 기다려줌의 미덕이 있었는가? 기다리지 못해서 온 병폐가 얼마나 많았던가?

기다려줌을 통해 상대는 배려받음을 경험한다. 나의 기다려줌을 통해 상대나 아이들은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정한 배려는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배려! 이것이 아이들을 자유하게 한다.

>아이들이 자유로워야 새로운 부모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인격체로서의 존중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108 재혼과 초혼 사이에 판이하게 다른 한 가지는 가족 구성원 중의 하나인 자녀라는 자리가 재혼 가정에서는 결혼 전에 이미 결정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라는 자리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서 얻은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불린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로 불린 것. 40년을 기다린 불림이었지만, 내가 넘어야 할 산도 만만치는 않았다.

108 아니 대부분의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재혼 가정의 틀을 요구받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틀에서 사용하던 단어(언어는 정서를 포함한다) 중의 하나인 호칭과 역할을 또 다른 틀이 요구하는 대로 쉽게 바꿀 수 있을까? 아니면 도리어 정서적 혼란과 갈등을 초래할까?

110 잔소리가 아닌 거리 유지, 가르침이 아닌 정보 제공, 관점 넓혀주기, 되질문하기 등을 통해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자리를 세워간 것이다.

재혼 가정의 경제 문제 04 경제적 짐을 같이 져야 운명공동체이다

114 문제란 녀석은 자신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으로 치장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내놓은 카드를 달리하면서 우리들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그 드러나는 모습을 뭉뚱그려서 갈등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115 문제란 녀석은 우리의 관계 속에 들어와 사이사이에 균열을 만드는 것이 최대의 목표이다. 그리고 틈새마다 지뢰를 설치해두고, 우리가 밟기만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은 문제가 행하는 방식의 반대, 즉 역분리를 하는 것이다. 문제를 하나하나 해체시키고, 그 문제와 연관된 사람들을 문제들과 분리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특히 재혼 가정은 문제가 문제이지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들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아이들 문제는 아이들 문제대로, 전가족과의 심리적 문제는 그 문제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내공이 필요하다. 더불어 분명히 해야 할 한 가지는, 재혼 부부가 재혼을 결심하거나 시작할 시에, 그 동기는 어떤 필요에 의함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116~117 혈연집단, 즉 초혼 가정의 경우,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운명공동체 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대부분 자녀를 가진 뒤부터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가족을 성()과 혈연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 기초단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학자들은 생물학적 유대관계가 있다고 해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가족을 정의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보면 생물학적 유대보다는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 구성된 관계를 가족으로 여기는 사회가 많다. 입양을 통한 것이나, 공동주거 형태의 가족관이 그렇다.

재혼 가정은 혈연적 유대는 분명 아니다. 재혼 가정은 사회적 관계이다.

117 재혼 가정이 일반 다른 가정 형태에 비해 응집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부부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재혼 가정은 다른 가족 형태보다 깨질 수 있는 여지가 더 크다. (중략) 초혼에 비해 이혼에 이르는 기간이 짧고, 이혼율도 훨씬 높다.

119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심리적 자리가 문제였다. 즉 운명공동체로서의 동질성을 갖기 위해서는 남자의 명확하고 신뢰할 만한 자세가 필요한데 그 외피를 쓰고 나타난 것이 경제 문제라는 것이다.

121 초혼도 결혼신고서라는 법적 절차를 밟지 않는가? 그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이 경우에는 불편한 심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황혼 재혼은 황혼 재혼에 걸맞는 문화와 절차가 필요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124 그러나 재혼 동기의 많은 부분이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적인 문제가 부차적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그리 좋은 자세는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재혼은 실제이며,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치는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다. 가리거나, 에둘러 처리해서는 안 된다. 솔직하고 담백해야 한다.

124 재혼 가정을 이루는 커플이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가능한 한 재혼 전에 서로의 경제적 구조를 밝혀 두고, 확인하는 일이다. 특히 빚이나 재혼 후에도 고정적으로 지출되어야 할 비용 등은 서로의 확인 과정을 거쳐 합의와 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전가족의 지원 문제, 서로 같이 살 집의 명의 문제 등은 법적인 하자가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Part2.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여는 지혜

인식의 전환을 위해 05 오해와 편견을 벗고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서

129 모세 율법이라고 부르는 신명기 24:1-2를 보면 조건적인 이혼이 허락되어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5:32)에서도 동일하게 조건적으로 허락된다.(Bontrager, 1978:33) 조건적 허락이란 극히 제한적이라는 말로서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허가’(permission)의 의미이지, 해결책 처방이 아니다.(Atkinson, 1981:102) 아킨슨(Atkinson, 107)은 그 이유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용서의 차원으로 본다. 즉 이혼한 여인이 경제적으로, 사회공동체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33 그러나 재혼의 이혼율 통계에서 나타나듯 이혼이 습관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 아래 재혼을 해야 한다. 상대 탓이 아닌 나의 완악함과 타락한 본성에 대한 진지한 고백과 그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삶(재혼)과 새로운 가족을 얻음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임을 각인해야 한다. 합심하여 예수님의 몸을 이루어가는 방향으로 서로가 채워가야 한다. 이러한 성경적이고 목회실천적인 바탕 하에 재혼 가정 교우들에게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목회가 필요하다.

142 어떤 상황이 되어야만가정이 행복(파랑새)한 것도 아니고,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행복한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아내라는 새, 어떤 지위에 있는 남편이라는 새, 재혼 자녀라는 새,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새가 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방식과 노력의 문제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일 뿐이다. 그 존재가 존재다워지도록옷을 입혀야 한다. 그 옷 입히는 주체가 우리이다. 우리의 눈, 우리의 해석, 우리의 가치부여가 존재를 존재답게 한다.

143 파랑새는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해석) 것이다.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아내나 남편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과 대처하는 감정은 달라진다. 깨달음은 자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고, 깨달음은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 산물들이다. 파랑새 자체(고정된 존재)란 없다. 파랑새는 고정된 어떤 조건이나, 존재 혹은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기에, 가족 구성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곳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행복(파랑새)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다.

143 존재 자체로서 행복이 되는 것은 없다. 우리를 흥분케 하는 것은 존재 자체가 주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우리를 흥분케 한다.

144 오늘 나의 존재, 고정시킨 존재,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그 사건의 부정적인 것에 매여 있게 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인 오늘의 나는 그 사건을 여러 가지 색으로 입힐 수 있다. 때론 지혜의 보고로, 때론 상처 속에서도 보물을 찾게 된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때만의 과거의 사건으로 통해 미래를 여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정체성이 해석이다!

146 그 갈등의 시간, 폭풍우와 맞서고 있는 그 순간을 성실히 지나면서 겸손을 배우고, 감사를 배우는 계기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경험에 절망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을 원망하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투여하고, 원망의 방법을 익히고, 타인을 피곤하게 하는 말솜씨만 늘리는 사람도 있다.

146~147 경험에 의미가 부여될 때에만 좋고 나쁜, 즉 가치가 있는 경험이 된다. 경험에 대한 의미 부여는 단 한 번으로 끝나버리는 일회용이 아니다. 같은 사건일지라도 끊임없이 재해석해야 한다. 어느 한 사건이나 경험에 재해석되면 될수록 그 경험은 여러 가지 옷을 입고 현실의 삶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한다. 어떤 한 사건을 두고 그 사건을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해석에 다라 삶이 달라지고, 행동이 변화한다.

>마치 진국을 우려내는 곰탕처럼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다방면에서 오랫동안 관찰하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반듯이.

148 행복과 불행이란 개념 역시 사회문화가 만들어낸 개념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이러하면 행복하다고 하자, 저러저러하면 불행하다고 하자라는 생각의 틀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생각과 삶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우리 가족, 나의 삶을 사회문화가 규정해주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어딘가 모르게 나의 가정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간과되고, 사장될 수도 있다.

자신들만의 맞춤형 가정으로 탄생하기 06 파랑새 훈련하기: 상처를 이야기하라

154 재혼한 부부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들이 말하는 재혼 동기의 많은 부분이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재혼은 분명히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필요에 의한다고 해서 개인의 이익’, 즉 이기적인 발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기적 필요와 개인의 필요 추구는 다르며, 필요를 채운다는 것이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함만은 아니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의 유익된 것을 찾기 위해 재혼을 하였지, 이익된 것을 찾기 위해 재혼한 것이 아니다. 유익은 공동체 안에서 개개인의 성장과 성숙을 의미하며, 이익은 개인의 필요만을 좇는 개인주의적인 것이다.

>필요에 의해 재혼을 했다는 문구에 반발심이 생겼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나는 함께 할 사람이 필요했다. 죽을 때까지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눈을 감을 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 품에 안겨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외로움과 인생의 동반자라는 필요에 의해 지금의 남편을 선택한 것이 맞다.

155~156 어떤 문제나 상처, 갈등이나 고통도 반드시 수명이 있다. (중략) 당장은 죽을 것 같고 정말 못살 것 같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보면 방법이 생기고, 나도 모르는 나,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가족의 또 다른 면이 보이게 된다. 문제는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며, 우리의 재혼 가족이 아니다. 문제 때문에 우리가 지쳐 할 이유가 없다. 문제가 우리를 지치게 하도록 용납하지 말자! (중략) 상담소를 찾은 그 순간부터 이미 문제의 반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발전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156 기억하자.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나의 이야기 속에 있다. 상처나 갈등은 선택의 기회이지, 가정의 무덤이 아니다.

156 재혼 가정에는 과거의 상처라는 보물창고가 있다. 그것은 아픈 기억일 수는 있어도, 잊어버리거나 폐기처분해야 할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재혼 가정의 대부분은 나름의 상처를 품에 담아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상처, 상대가 건들면 폭발하는 뇌관이 아닌 재혼 가정을 좀 더 풍요하게 할 수 있는 유익한 보물창고임을 마음에 새기자. 그렇다! 과거의 상처는 보물이다.

>과거의 상처는 보물이다……나는 엄청난 양의 보물을 소지하고 있다. 어떤 상처는 아직 보물이 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보물창고…..이것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157 근심에 집착할수록 포박은 강력해지고, 근심에 무심할수록 포박은 허술해진다. 하지만 어떤 포박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1백 퍼센트 소멸해 버린다.

이 세상 시계들이 모조리 작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시간은 흐른다. 지금 아무리 크나큰 근심이 나를 포박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데 내가 왜 시간이 흐르면 1백 퍼센트 소멸해버리는 무기력의 표본 허수아비에 대해 근심하겠는가. –이 외수-

>어리석어 그러지.

158~159 역설적이게도 무덤과 같은 실패라고 여기던 과거가 있었기에 재혼은 희망을 품고 있다. 더 내려갈 곳이 없었기에 재혼은 올라갈 일만 남아 있다. 상처는 아픔임에 분명하지만 인생의 덫은 아니다. 인생의 무덤은 더 더욱 아니다. 도리어 유익이 될 수도 있고, 미래를 향한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단지 또 다른 인생의 단련기구일 뿐이다. 단 조건이 있다. 상처는 미래를 위해 재테크되어야 한다. 상처를 싸매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풀어헤쳐놓고,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 지금도 유용할 것 같은 자신의 노하우 등을 찾아내는 일이다. 어딘가에서 누수되고 있는 자신을 찾아나서야 한다.

159 그들이 보지 못했던, 그러나 봐야만 하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가정이 바로 섰으면 좋겠다. 내가 이런 바램을 갖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어렸을 때의 수 많은 나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어서 내 꿈도 목표도 갉아먹고 집안의 슬픔과 상처에 노출되어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다른 아이들은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나의 바램이기도 하지만 내 안의 어린 아이의 바램이기도 하다. 그것을 요즘 들어 알게 되었다.

161 재혼과 재결합의 차이는 마치 주식으로 재테크할 때처럼 투기와 투자의 차이와 같다. 재결합이 투자라면 재혼은 투기이다. 투기는 보통 모 아니면 도이다. 또한 투기세력들은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지체없이 빠져나간다. 그 결정의 속도가 빠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손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162 재혼을 할 때 과거에 가지고 온 기대치라고 하는 보따리 속에 미해결과제라고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형태의 만남이든 상관없이 나의 기대치와 미해결과제를 채울 때까지 그 보따리를 풀고, 쌓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162 반면 재결합은 투자이다. 투자란 투기보다는 이익이 적지만, 투기보다는 안전하다. 투자는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건을 고려하여 이루어진다. 투자의 대상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더욱 유리한 것은 그 투자 대상에 대해 투기 대상인 재혼 대상보다도 훨씬 습득되고 학습되어 있다는 것이다. 재결합은 마치 함께 연습경기를 많이 뛰어본 상대와 다시 게임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어떤 면에서 부부는 고쳐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며 사는 것이라고도 한다. 단 재결합에서 중요한 점은 예전의 풀지 못했던 그 무엇을 함께 풀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남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단지 나를 이해시키고 나의 요청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지. 그렇게 했을 때, 그가 손을 잡아주면 너무도 감사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것 또한 그의 선택인 것을.

163 그러기에 재혼을 통해 나타나는 갈등과 변화의 진통에 우리의 에너지를 쏟고 해석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성숙에 맞춰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재결합이 되었든, 재혼이 되었든-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 ‘함께라는 단어이다. ‘함께란 내가 상대에게 설득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함께란 나를 풀어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자세이다.

164 정보 수집이 행위라는 에너지 차원이라면, 인내력과 배짱은 심력 차원이다. 재혼 가정 역시 주식투자와 비슷하다.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노력적 행위만 가지고는 재혼이 성공할 수 없다. 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재혼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아무리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인내배짱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갈등의 밤을 지새울 때,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인내심과 그에 맞서는 두둑한 배짱이다. 풍랑과 폭풍이 몰아친다고 바다 갈매기가 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도 없다. 멈추는 그 순간 추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164~165 당장에 손에 쥐어지는 이윤을 남기려는 조급함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투자가가 되어야 한다. 인내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 내려갈 때, 즉 부부간의 갈등이 첨예할 때도 배짱이 있어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추운 겨울은 반드시 지나간다는 믿음의 배짱, 인내와 배짱 말이다.

166 여기서 재혼 가족 구성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만약 전통 가족 형태의 안경을 끼고 우리 재혼 가정을 해석한다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갖고 형태의 기준과 삶의 방식과 질은 그 시대, 그 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에 가족 형태와 그 구성원들의 삶이나 가족 안에서의 역할 등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167 이제 특수가 보편을 가르쳐줘야 한다. 예를 들자면, 재혼 가정 중에서도 A라는 가정이 이런 삶도 있소!’라고 소개해줘야 한다. 즉 그런 특수가 보편이란 문화를 만들고 다양화시켜야 한다. 개별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방향이어야 한다.

>감동적인 문구이다. 그리고 내가 재혼에 대해 써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167~168 물론 사람의 삶에는 보편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문화를 무시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재혼 가족의 특수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문화에 의해 짜인 틀에 맞추어 산다는 것은 마치 옷에 사람의 체형을 맞추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다 보면 그 가정에는 정체성의 혼란이 오고 마침내 가정 내에 갈등 증폭, 패배주의에 사로잡힐 여지가 높다.

168 재혼 가정이란 범주 안에 재혼 가정만이 갖는 보편적 형태나 행동양식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 사회문화에 팽배해 있는 관점, 해석, 의미, 가치 등은 참고사항은 될 수 있지만, 결코 맞춤형 옷은 아니다. 우리 가정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틀에서 우리의 가정을 보아야 한다. 우리 가정 내에는 우리만의 맞춤형 역할이 있고, 우리만의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비단 재혼 가정만이 아니라, 어떤 가족 형태도 이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169 행복이 찾아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장소 어디엔가, 혹은 유기체적 측면에서 어떤 실체가 있다는 의미이다. 어딘가 있기에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이 논리가 맞다면 행복은 누군가 어디에서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이거나, 제조법을 가르쳐줄 수 있는, 즉 누군가로부터 배울 수도 있는 방법이다.

170 행복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되어간다. 웃음과 운명공동체 속에서 만들어진다. 또 우리만의 해석 속에서 되어간다. 가정 내에서 우리만의 역할분담을 만들어가는 가정과, 우리만의 가족사를 써나가는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행복은 과정 속에서 꽃을 피운다. 이제까지 찾아다녔던 파랑새는 없다. 이제는 파랑새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찾을 수 있는 파랑새는 없다. 배울 수 있는 파랑새도, 가르칠 수 있는 파랑새도 없다. 그러나 맞춤형 가족, 그 속에서 파랑새는 숨을 쉬고, 과정과정을 발판 삼으며 날아다닐 수 있다.

>’행복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되어간다.’ 이 표현이 너무 좋다. 그래 행복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백마탄 왕자가 갔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행복에는 나의 역할과 책임과 노력이 필요했다. 행복은 그렇게 끊임없이 만들어 가고 되어가는 것이었다.

171 과정을 즐기면 도파민이 생성된다. 행복은 결과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즐기는 것이다.

172~173 재혼을 생각하는 커플이 드디어 결혼에 골인했다면, 골인한 결과가 행복한 것일까? 혹은 결혼 전의 설렘과 결혼 후의 기대감, 그리고 그 결혼을 꾸려나가는 과정이 행복한 것일까? 아이를 가진 것, 그 결과만이 기쁜 것일까? 아니면 아이를 가지기 위해 서로 노력하고 사랑한 것과, 아이와 함께하는 그 과정이 행복한 것일까? 가족은 과정을 살아야 한다. 결과를 산다는 것은 마치 투기와도 같다. 불확실한 내일을 사는 것이거나, 이미 지나간 과거를 사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 어제 있었던 남편/아내, 자녀와 불편한 충돌, 예전의 그 어떤 행동에 대한 속상함 등이 지금의 나를 흔들어놓는 것 자체가 과거를 사는 것이다. 그런 과거의 사건들로 오늘을 또 규정하고 해석하는 것이 결과를 사는 것이다.

174 즉 현재는 누려야 하는 나의 권리이고, 과거는 현재를 위한 지혜의 보따리이며, 미래는 현재를 끌어주는 동력이다.

174 재혼 가정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시간 개념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재혼 가정을 꾸리면서 과거의 가정과 그 구성원에 매여 있다는 것은 과거를 산다는 것이다. 사람이 오늘을 살기에도 바쁘거늘 뭐하려고 과거까지 질질 끌고다니며 살 것인가?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 가정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함께 사는 것이나 진배없다.

176 내가 묻지도 않고 관심을 두지 않아도, 굳이 자신의 지난 과거의 상처를 설명하려 애쓴다는것이다. (중략)자신에 대해 왜 이렇게 자존감이 없는지, 잘해보려는데 왜 이렇게 못된 성격인지, 왜 이리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왜 이리 내 마음에 분진이 많은지에 대한 성찰과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이런 몸부림은 올바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성찰과 자신 들여다보기를 통해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심하게 말하면 조상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178 즉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는 것이 상처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178 사람이 무언가를 선택할 때 과거의 경험, 기억하기의 두 가지 측면을 설명했다. (사회행동학 박사 슈워츠)에 따르면, 한 개인은 자신의 경험을 두 가지 측면에서 기억한다. 즉 어떤 경험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의 느낌과 그 경험이 끝날 때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이렇게 기억에 내장된 경험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야할 때, 그 경험된 기억을 법칙으로 삼는다.

179~180 그러므로 우리의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할 것은 상처 들여다보기가 아니다. 그 주위에서 아직 선명한 기억으로 남지 못하고 내 것 같지 않은 승리의 경험 조각들을 모아야 한다. 기억이란 것은 얼마나 자주, 많이 생각하느냐에 따라 더 수비게, 더 강하게 각인되는 법. (중략) 상처를 자주 보느니 승리를 더 친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상처의 음모와 우리 뇌의 기억 메커니즘이 승리의 나로 돌아가려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래, 나의 인생에서 성취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의 인생은 그 자체가 우울 모드였을 것이다. 감사한 시간들이다.

181 상처도 결국 이미지화한 기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처를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그 상처 주위의 것들도(상처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서 도리어 상처와 맞서는 요소들, 즉 내가 상처를 이겨내려고 했던 흔적들조차) 상처의 기억 속에 덤으로 넘어가 있는 셈이다. (중략) 그러므로 그 상처 속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하는 작은 승리의 요소들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가 승리요, 성장인데, 우리는 그런 자신에게는 너무도 쉽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상처 들여다보기를 통해 카타르시스에만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181~182 유독 눈에 거슬리는 아이가 있다. 왜 그럴까? 동일시하는 기억 때문이다. 동일시란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일시이기도 하며, 사회문화적 동일시를 말하기도 한다. 전자의 동일시는 과거에 나와 관계했던 그 누구에 대해 경험한 것을 이미지화해서 뇌의 기억장치 속에 저장해두었다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그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이러한 동일시기억이 사람을 잡는다. 근거 없이 미워하기도 하고, 이유 없이 좋아하기도 한다. (중략) 문제는 여기에 있다. 동일시한 기억에 우리는 똑같다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이 수식어가 붙는 순간, 그 똑 같은 것에 대한 나의 감정이 들어간다. 절대로 똑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감정은 나에게 같은 영향을 미친다. 이 세상에 객관화된 기억은 없다. 단지 우리가 어느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가정될 뿐이고, 착각하는 것이다. (중략)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이라고 해서 그것이 철저히 주관적인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사실 그렇지도 않다. 사회문화적으로 영향을 받은 우리의 사고는 그 테두리 안에서 해석하고, 표현하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시….무서운 것이군. 그리고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185 누구와 함께함이, 즉 어느 공동체에 있느냐에 따라 기억력은 배가되기도, 감소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결코 기억력을 개인의 능력으로만 말할 수 없다. 승리의 나! 승리의 우리로 돌아가려 한다면 우리의 기억을 찾아야 한다. 개인의 기억에 매여서는 안 된다.

185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상처란 것이 과연 배우자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선택인가? 상처를 나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참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처란 나의 선택이다.

187 문제가 문제이지,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은 삼가야 한다. 거기에 도 다른 어떤 것을 붙이게 되면 우리가 결국 문제의 전술에 말려드는 것이다. 문제란 놈은 반드시 다른 문제인 것처럼 변장하기를 즐긴다. 단어에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우리가 어떤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 단어의 의미가 나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내면화 과정이라고 하는데, 이 내면화 과정을 거쳐 또 다른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7~188 다시 말하면, 감정은 결국 자신의 최종적인 선택이다. 최종적 선택이란 말은 자신의 최종적 해석이란 말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상처 역시 나의 선택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나는 억울한대. 그 동안 나의 선택으로 인해 수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이론과 현실. 그 괴리. 이 말에 얼른 수긍이 가질 않는다. 직접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189~190 상황 그 자체가 상처를 주는 것아 아니라, 그 상황을 다른 상황과 비교할 때 상처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발생한다.

190 갈등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중략) 비록 갈등이 피곤한 비용을 지불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 속에는 순기능도 포함되어 있으니 굳이 피하려 할 이유도 없다. 갈등이 문제라기보다는 갈등을 풀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후폭풍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이다.

>나는 요즘 갈등의 순기능을 경험했다. 갈등은 나에게도 두려운 대상이었다. 마치 갈등이 시작되면 우리의 관계에 대한 불안함이 스멀스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 갈등을 두려움 때문에 묻어 두었다면 후에 더 많은 상처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된다는 말이다. 갈등….때로는 피가 터지도록 싸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서로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이려면 말이다.

191 만약 상처가 나의 선택이고, 비교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면, 상처란 타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작물이 된다. 자신의 선택적 판단에 따라 자신이 생산해내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나는 그것을 나의 내면의 그릇에 부어서 이전의 경험, 사건, 기대치, 바람, 지식 같은 화학물을 넣고 흔들어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상처라는 이름으로 탄생시켰다.

194 우리가 아주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원인과 결과라는 등식이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 학자들, 상담사들이 단편적으로 과거가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여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옳다고 할 수도 없다. 과거의 그 무엇인가가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의 행동, 성격, 조건, 정서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규정이란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과거 때문에지금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내가 왔다고 해서, 과거가 지금의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오늘의 내가 규정한다.

197 아무리 외적으로 문제 없어 보여도 살짝 건들기만 하여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한다. 그것이 자기 해석이고 자기 선택이든 무엇이든, 그것은 나중 문제이다. 상처는 현상이고 증상이다. 왜 이런 증상이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걸까? 무엇이 나를 재해석하지 못하도록 나를 붙잡는 걸까? 과거를 살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령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상처란 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과거의 것을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처가 되는 것이다.

200 만약 오늘 강민이가 더욱 단단하게 뭔가 이루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자신이 자랑스럽거나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한다면, 아마도 어렸을 때 헤어진 아픔, 새아빠와의 갈등, 엄마의 헌신 등이 마치 강철을 담금질하듯 자신을 더욱 강하게 연마시켰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금처럼 오늘의 자신과 환경에 불만스러울 때면, 자신의 과거가 불행해서 지금의 내 처지가 이렇게 되었다고 한탄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불을 지나면서 순도를 높이고, 어떤 사람은 불을 지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말해줬다. 과거는 지금 이 순간에 없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람이 지금의 나를 어쩌지 못하며, 단지 내가 과거의 사람을 현재에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01 과거 이야기가 가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이야기의 사회화과정이라고 한다. 그럴 때, 신기하게도 우리를 그렇게 괴롭히던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기에 밖으로 드러내는(사회화) 것은 비단 우리의 새 가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처럼 상처를 받은(혹은 입은) 가정들에게 또 다른 지혜를 소개해줄 것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야기가 이야기될 때, 그 이야기는 또 다른 관점을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발전할 수 있다.

>나는 내 이야기의 사회화를 무지 잘 한 사람이군. 혼자 있을 때도 이것 때문에 건강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다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쏟아내고 또 쏟아내면서 나는 조금씩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상처는 미래를 위한 보물창고 07 과거는 미래로 가는 징검다리이다

205~206 과거를 산다는 것은 과거의 상처와 관계에 매여 사는 것이고, 과거에서 찾는다는 것은 과거 상처를 해석, 재해석하면서 과거 속에 있는 나만의 노하우와 장점, 그리고 놓쳤던 점들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재발견된 것을 가지고 오늘의 나를 꾸리는 자양분으로 삼는 것이다. (중략)

즉 과거는 미래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로 사용도리 수 있는 것이다.

>변경연을 하는 1년 동안 가장 잘 한 것은 나를 뒤돌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전에도 나의 강점, 약점 등을 많이 파악하였기 때문에 더 필요할까? 생각했었는데, 내 삶 곳곳을 두루두루 훑어보니 내가 관심갖지 않은 내가 너무 많았다. 일부러 외면한 것도 있었고, 모르던 나의 모습도 있었다. 그것 또한 나였기에 나의 모습을 확인함으로써 나에 대한 이상화를 깰 수 있었다.

208 다름은 양면성을 자지고 있다. 갈등은 다름에서 촉발한다. 반면에 서로에 대한 호감 역시 다름에서 온다. 그 다름 때문에 친밀도가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다름의 미학에 익숙해져야 한다. 다름은 불편한 시발점이 아니라 채움의 시발점이다. 부부들의 한담을 듣다 보면, 부부가 같은 취미, 비슷한 성격이면 좋을 것 같다는 오해를 종종한다. 정말로 오해다.

209 우리는 다름의 아름다움을 누려야 한다. 세상은 다름으로 구성되었다. 다름이 없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없다. 또한 다름이 없이는 표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이야기가 아닌가. 다름이 공존하는 세상, 다름이 위축되지 않는 세상. 다름이 일반적인 세상. 다름이 그냥 다를뿐인 세상 말이다.

212~213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름이 인정되지 않음은 곧 힘의 논리가 그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213 초혼 생활에서 자신에게 유리했던 것은 같기를 요구하고, 고통스럽고 불리했던 것은 다르기를 요구하는 것이 재혼 가정의 구조이다. 한 술 더 떠서 누가 이 집의 경제권을 쥐고 있느냐, 누가 이 가정의 정서적 주도권을 쥐고 있느냐에 따라 다름이 부정되기도 하고, 옹호되기도 한다. 사실 초혼이든, 재혼이든 관계없이 결혼 자체, 사람이 서로 만난다는 것 자체가 다름의 만남이다.

218 다름의 차이는 의외로 부부의 삶에 침체를 경험하게 한다. 그 침체의 꼭짓점에 다다르게 되면 동시에 변환점을 맞게 된다. 그 침체된 꼭짓점에서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극복이냐, 과거회귀냐? 전자는 발전적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후자는 파괴적 변화를 가져온다.

218 아마 가장 많이 듣는 처방책이 부부간에 진지한 대화를 하라는 조언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가족들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질적은 대화를 해보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오히려 갈등만 증폭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219 대화가 논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보니 어느 한 명은 승복해야 한다. 한쪽의 항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정해야 한다.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고 승복하나 공감이 가지 않으며, 공감은 될지라도 인정하기 싫은 경우도 있다. 그런데 논리적 대화는 심하게 말하면 항복을 강요한다. 문제는 자신의 대화가 논리적이어서논리적 대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힘의 논리가 앞서 있다는 말이다.

220 따라서 부부간, 가족 구성원 간에는 논리적 대화보다는 서로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이 필요하다. 행복은 훈련된다. 나의 가슴을 훈련시키고, 입을 훈련시켜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말보다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우리의 노력을 더 기울이고, 사건들을 해석, 재해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 어떤 사건도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없다. 모든 사건은 긍/부가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 눈에 아무리 더 이상 나쁠 수 없을 듯한 사건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 긍정적인 면이 내포되어 있다.

221~222 추운 겨울이 왔다고 해서 바로 강의 얼음이 얼지 않는다. 겨울이 오기 전부터 온몸을 오싹거리게 하는 찬바람의 가을이 있고, 또 겨울이 가슴 깊숙이 들어앉을 때, 서서히 밑바닥 깊숙한 곳에서부터 얼음이 언다. 그 얼음이 녹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 겨울이 지났다고 얼음이 녹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늦봄이 되어도 가슴 깊이 시려온 얼음은 여전할 때가 있다. 그것을 논리로 풀려고 한다면 냉장고에서 꽁꽁 언 그릇을 전자레인지에서 갑자기 녹이려는 것과 같다. 결국 그릇은 깨지고 말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허구! 08 사랑이 필요를 낳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사랑을 낳는다

225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부부의 연을 위해 사랑이 절대적인 필요조건으로 부상한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낭만적 사랑을 전제로 한 현대적 결혼관은 서구 산업사회의 산물로 부르주아계급 문화가 급부상하던 19세기에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기류가 문학적 시류를 타면서 열병처럼 번진 것이 낭만적 사랑에 의한 결혼 관이다.

238 상대에 대해 어떤 감정이 있어야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생겨서 사랑이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의지의 문제이다. 표현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도 사랑의 감정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가질 때 가능하다. 의지란 인위적이다. 감정적으로 푹 나타났다가 푹 꺼져버리는 그런 가벼운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의지는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의지란 목적의식적인 것이다. 그 인위적이고 목적의식적인 것이 상대의 필요를 채움과 나의 표현에 구체적으로 집중하게 될 때,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한다. 사랑하겠다는 의지, 표현하겠다는 의지!

238 정신역동이란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사람에게서 에너지와 사랑에너지는 사람을 추동하는 데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에너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화가 났거나 사랑의 감정이 생길 때, 그것들은 누군가에게 나타내야 한다. 사실 화가 났을 때, 혹은 사랑의 감정이 일렁일 때, 그 에너지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력이 크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화 에너지나 사랑 에너지는 피해서도 안 되고 피해갈 수도 없다.

238~239 화와 사랑 에너지는 목적의식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다. 목적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239 필요한 것, 채워야 할 것, 좋아하는 리스트를 만들기보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주요한 것을 정리하는 것이 더 성숙한 선택이다. 즉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정리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정리하라! 그래야 선택의 공간이 넓어지고 집중할 수 있다.

239 선택을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 정보는 다른 사람이나 전문가들(상담가나 인간관계 훈련을 하는 분야의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의 과거에서 얻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정보이다.

240~241 그렇다면 채워지기 위해 무엇부터 선택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어디부터 집중해야 할까? 바로 나 자신이다. 모든 것의 터닝포인트는 나 자신이다. 내가 내 자신에게 먼저 표현해줘야 한다. 내가 필요하여 느끼는 것, 내가 표현받고자 하는 것을 내 자신이 먼저 나에게 채워줘야 한다.

241 그리고 과거를 해석, 재해석해가면서 오늘이 내일로 옮겨질 수 있는 징검다리를 만들어보자. 어제의 상처에서 나를 분석하려 하지 말자. 어제 상처가 나를 흔들게 놔두지 말자. 적극적으로 어제의 그 상처를 이겨온 나를 찾아서 내일로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로 사용하자.

244 우리 인생에서 앞으로 후회할 시간은 많다. 돌아서서 후회하느니 차라리 표현하고 돌아서서 후회하자. 오늘 이 시간이라도 후회하지 말자! 이 순간에 충실해 보자.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현하자. 그것도 오늘!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한다. 오늘을 사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재혼할 때, 내가 결심한 것이다. 오늘을 최대한 행복하게 살자. ‘내일 죽더라도 사랑에 대해 후회나 아쉬움이 없도록 하자였다. 후회하는 삶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알고 있으며,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후회일 때는 평생을 쫓아다닐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은 많이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 자체가 우습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많이 사랑하고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 상처로부터 자유롭고 후회가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하려고 나는 노력한다. 가끔 잘 안될 때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Part3. 재혼 가정을 더 풍부하게 하는 지혜

전문가들의 의견 09 재혼 가정의 유형과 통과의례

249~254 재혼 가정의 네 가지 유형

재혼 가정 연구가 페이퍼나우는 관찰 결과, 재혼 가정을 꾸려가는 당사자들에게서 크게 네 가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알아가는 가정(Aware Family)

특징: 현실적 기대치, 배우기, 재혼 전부터의 작업

현실과 현상에 귀를 기울이는 가족 형태를 의미한다.

피하는 가정(Immersed Family)

영어 단어 ‘immersed’는 직역하면 묻히다, 침수되다는 뜻이나, 독자의 이해를 위해 피하는 가정으로 번역하였다.

특징: 비현실적인 기대치, 역설의 고정관념, 갈등 회피

이러한 가정이 기억해야 할 것은, ‘갈등이란 나쁜 것이 아니라 필요악과 같이 순기능도 있다는 사실이다. 갈등이 없으면 서로에 대한 이해나 조정, 화합도 어렵다.

동원 체제 가정(Mobilized Family)

특징: 함께 해야 하느니라, 개인은 없다.

행동 가정(action Family)

특징: 일부의 정서를 모두에게 강요, 만약이라는 오해

이 재혼의 가정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서로를 기다려 주는 것이다.

254 그렇다면 재혼 가정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을까?

선남선녀가 결혼(초혼)을 하면 만남의 단계, 결혼 단계, 자녀 출산의 단계, 양육 단계, 빈 둥지 즉 자녀가 떠나는 단계, 황혼 단계 등등을 거치듯이 재혼 가정에도 그 특성에 기인한 일반적인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알아가기과정이다.

알아가기: 필연성보다는 필요성

257~258 인간 세계가 유지 발전될 수 있는 것은 혈연의 끈이 아니라, 상호간의 약속과 계약이다. 재혼 가정은 혈연관계보다도 심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이 더 강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성격이 강하다는 의미는 상황과 환경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사회적 역할에 더 중점이 있다는 의미이다.

258~259 보통 이혼자들이 사별자보다 더 빨리 상대를 만난다. 이혼의 상처로 힘들어할 때, 누군가 조금만 신경을 써주거나 도와주면 정서적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알아가기과정이 종종 무시된다. 아니면 알아가기가 미래의 가족 구성원이 될 개개인 전체로 확장되지 못하고, 당사자들 둘만의 일로 제한되어 자신들은 서로를 충분히 알았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진정한 알아가기는 진심으로 받아들임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나의 기대와 이상을 덧붙이지 말고.

이야기를 통해 알아가자

260 내가 어떤 이야기를 소유하고 있느냐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느냐를 말해주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중략) 즉 이야기는 나의 인생의 표현이고, 철학이고, 생활 패턴이다. 그러기에 새 가족을 알아가기위해서는 그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받아들임은 나눔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는 나눠야 한다.

>그래야 이야기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의 가장 장점 중에 하나라고 하면 어느 정도 파악할 때까지, 그 존재가 어느 정도 인정이 될 때까지는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만나면 그 사람을 알기 위해, 인정하기 위한 노력이 선행된다. 그것이 내가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길이다. 이 방법은 별로 무리가 없다. 나의 인내심만 요구될 뿐이다.

묘사적 말하기와 판단적 말하기

264~265 문자적 메시지와 정서적 메시지를 다른 말로 하면 명시적 언어의미적 언어라고 한다. 전자는 말 그대로 기호로서의 역할, 어떤 것을 표시하는 데 그치는 극히 외형적인 것을 말하며, 후자는 그 언어에 내포된 뜻을 말한다. 우리의 일성적인 대화에는 이 두 형태의 언어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화, 특히 비생산적이고 갈등적인 대화의 유형을 보면 자기가 원하는 것만, 혹은 자기에게 유리한 언어만 듣고 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한다.

265 우리는 말을 하고 들으면서도 단어와 문법, 즉 내용에만 치중해서 반응하고 듣는 경우가 많다.

반사적 듣기와 반응(감정)적 듣기

266 상대의 말을 들을 때는 두 가지 자세가 있다. 첫째, 듣기는 들어도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것이다. 표면적인 것만을 듣는 반사적 듣기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들은 뒤에는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둘째, 책임적인 자세를 가지고 반응적으로 듣는 것이다. 반등적 듣기란 감흥적 듣기라고도 할 수 있다. 상대가 말을 할 때, 언어에 맺힌 의미를 들으려 하고, 느낌을 감지하려는 자세이다. (중략) 반응적 듣기를 하는 사람은 단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단어 주위와 그 분위기에 반응한다. 그리고 말하는 상대의 정서적인 면에 더 비중을 둔다. 바로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269~271 재혼 가정이 거쳐야 할 두 번째 단계: 발달과업

269 많은 재혼 가정이 덫에 걸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발달과업을 충실히 행하지 못했거나, 피하기 때문이다. 재혼 가정의 발달과업에는 크게 두 가지 범주가 있다. 그 가정 자체가 이루어가야 할 과제와 가족 개개인이 성장해야 할 과제이다.

가족의 과제

과제의 첫 단추는 자신들의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정체성 강화이다.

페이퍼나우가 말한 동원 체제 가족에서처럼 서로의 차이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한 쪽이 다른 쪽을 누르거나, 희생을 강요하는 형태로 가정의 발달과업을 무리하게 이루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충분히 개인을 배려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줘야 한다. 인내심 있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개인의 과제

흔히 아는 유아기가 있고, 아동기, 청소년기, 장년기 등등이다. 이 각 단계마다 넘어야 할 위기와 개인이 이루어야 할 과업이 있다.

재혼 가정은 개인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모인 무리가 아니다. 개개인의 성장을 돕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업 역시 가족 전체의 과제와 동떨어져서 진행될 수는 없다.

이러한 부분을 서로가 채워주고 채움 받기 위해 계획적으로, 그리고 세심하게 배려해주고 챙겨줘야 한다. 그것이 개개인의 필요를 채우는 밑거름이며, 성장을 돕는 가정의 역할이다.

재혼 가정을 위한 활동 제안 10 사랑을 품어야 사랑이 자란다

뱅크(Bank)

275 가트맨에 따르면 가정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건강한 가정에는 4:1의 법칙이 있었다. 부부들은 그 상대에게 네 가지를 받았을 때 하나 정도는 관대하게, 기꺼이 기분 좋게 베풀었다. 이는 자신이 뭔가 꼭 필요한 것 하나를 요구하려면 평소에 배우자에게 필요한 네 가지 정도는 채워줘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평상시에 네 가지 이상을 사랑은행에 예치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하나를 찾아 쓰는 것이 바로 뱅크제이다. 나는 이것이 상호성의 법칙과 같다고 생각한다.

단어 맵핑(mapping)

276 특히 재혼 가정에서는 그 다름이 더욱 차이가 난다. 그러기에 재혼 가정에서는 알아가기 과정에서 상대의 사랑의 언어를 습득하고 학습해야 한다. 또한 상대의 특성에 맞게 자신의 사랑 언어에 변화를 주고, 상대의 사랑 언어를 학습해야 한다.

지금 당장 자신의 사랑 언어 리스트를 만들어보라!

278 재혼 가정의 파랑새는 보편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특수를 먹고 산다. 보편적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특수한 개성의 언어를 먹고 산다는 뜻이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특수하고 개성적인 언어를 확인하고, 학습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정에 파랑새를 키우는 방법임을 잊지 말자.

278~281 부부 갈등의 결정적인 세 가지 원인

첫째, 성격차이가 문제다?

둘째, (sex)적인 문제다?

279 성의 문제는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서로간의 정서적. 인격적. 영적인 문제이다. 정서적 교감이 없이는 만족한 성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

셋째, 재혼 가족의 특수성이 문제다?

281 우리의 재혼 가정은 사회문화적인 것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만의 문화를 만들고 지켜가는 것이 더 우선되어야 함을!

281 채워진 기대치를 늘 돌아보고 감사하자. 상대를 채움은 곧 나를 채움이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채움 받고 싶은 것을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282 하지만 갈등은 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문제이다. 피하거나 줄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갈등 안에는 자기 입장이라는 것이 있고 그 입장 속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와 욕구가 숨어 있다. 갈등에는 이것들이 빛을 보고, 건강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순기능의 역할도 있음을 기억하자.

284 우리 재혼 가정은 종종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고 가족 구조나 사회 문화적 담론 안에서 갈등의 근원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의 관점 역시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것은 사회문화적으로 퍼져 있는 관념들을 자신도 모르게 진리처럼 받아들이고 살기 때문이다.

부록 또 다른 오해: 재혼 가정을 바라보는 시각

292 현대인의 급변하는 물질문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전통적 가치관이나 형식은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있고, 때론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삶의 배경이 되는 사회문화적 토대는 급변하고 새로운 가치 추구는 범람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적 삶의 행동양식은 팽팽한 활시위같이 우리를 붙잡아두고 있다. 사회문화에 동의하고 그와 같이 사고하려고 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적인 삶의 행동양식은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활시위를 연상케 한다. (중략) 예를 들면, 사회 문화 속에서는 성 구분으로 인한 전통적 역할이 무너진 후기 조선 시대의 유교문화 때문이다. 문헌에 따르면 고려 시대나 조선초기에는 재혼이 일상적이었으며, 지배계급 사회에서도 성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 초기만 해도 양반 계층의 재혼이 사회문화적으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놈의 유교! 내가 이래서 유교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293~294 재혼 가정의 문제는 이미 한 나라의 문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현실은 재혼 가정에 대해 냉담하기까지 하다.

294 게다가 이혼 남녀의 75% 가까이가 다시 재혼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 그 중 60%가 다시 이혼을 한다고 한다. 그것도 2년 사이에 말이다. 이것은 북미의 재혼 가정리서치 결과물이지만 나는 이러한 통계가 북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94 초혼을 위한 가정 학교나 이론은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재혼을 위한 사회의 지원은 너무도 미약할 뿐 아니라, 재혼 가정 구성원 자체가 심리적. 사회적 위축과 공동체의 편견에 둘러싸인 신음하고 있는 것이 재혼 가정의 현주소이다.

296~297 이는 결국 재혼 가정이라는 사회문화적 편견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어버린 정체성의 문제이다. 정체성이란 자신의 행동양식의 테두리를 만들어준다. 정체성은 때론 나를 보호하는 방어벽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때론 감옥이 되기도 한다.

297 재혼 가정 구성원들의 위축된 정체성의 원인은 단지 그들의 정서적인 측면이나, 공동체의 편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생활을 좌우하는 이라는 테두리조차 재혼 가정에게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새아빠/엄마는 새자녀들과 함께 살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실제적인 도움과 지원을 함에도 불구하고 법적 보호자로서의 권한은 전혀 갖지 못한다.

>빌어먹을 제도이다. 얼마 전에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지금도 이 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누구에 의해, 왜 만들어졌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298 왜 재혼 가정의 새아빠/엄마는 새아이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꾸려가면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데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법적 권리가 없을까? 법적 권리의 목적과 취지는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은 재혼 가정의 정체성에 위축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든다.

301~302 재혼 가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대표적 오해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아이들 문제가 재혼 가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제일 큰 원인이라는 것이다.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의견 충돌이다. 충돌 없이 어떻게 의견을 개진하며, 어떻게 화합하느냐가 문제이다. 두 번째로 큰 오해는 가정에서의 갈등이 남성보다는 여성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종교인들 사이에서 금기 단어와 마찬가지인 재혼이라는 것을 주제로 김번영목사님에 의해 쓰여졌다. 그의 재혼부부에 대한 300쌍의 상담사례와 통찰이 빛나는 책이라 하겠다. 쉬운 단어로 이야기하였지만, 내용 자체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빛나는 샛별처럼 그의 통찰의 정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재혼한 부부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내용에 충실했기에 모든 재혼 부부가 1독을 했으면 좋겠다.

<목차와 차례에 대하여>

탄탄한가? 목차보다는 내용이 훨씬 좋다. 목차를 보고 있으면 재혼가족에게서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을 다 열거하고 있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신선한가? 목사님의 재혼이야기라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그리고 철학과 심리학을 기반으로 풀어낸 것 자체가 깊이가 있어 좋았다.

일관성이 있는가? 그가 전달해주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되어야 하며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그것은 개인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고,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끊임없는 이야기가 좋았다.

<좋았던 장과 절>

043 우리의 과거 상처는 미래를 여는 보물창고이다. 거기서 우리는 배우고 지혜를 얻는다. 이런 지혜들이 모여 현재에서 미래를 건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이런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보물들을 마치 장롱 속에 감춰놓는 보석처럼 마음속 깊이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말하는 상처는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고, 해석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라고 규정짓고 그것을 피하기보다는 그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어떻게 나의 삶에 도구화하느냐가 중요하다.

143 파랑새는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해석) 것이다.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아내나 남편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과 대처하는 감정은 달라진다. 깨달음은 자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고, 깨달음은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 산물들이다. 파랑새 자체(고정된 존재)란 없다. 파랑새는 고정된 어떤 조건이나, 존재 혹은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기에, 가족 구성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곳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행복(파랑새)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다.

158~159 역설적이게도 무덤과 같은 실패라고 여기던 과거가 있었기에 재혼은 희망을 품고 있다. 더 내려갈 곳이 없었기에 재혼은 올라갈 일만 남아 있다. 상처는 아픔임에 분명하지만 인생의 덫은 아니다. 인생의 무덤은 더 더욱 아니다. 도리어 유익이 될 수도 있고, 미래를 향한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단지 또 다른 인생의 단련기구일 뿐이다. 단 조건이 있다. 상처는 미래를 위해 재테크되어야 한다. 상처를 싸매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풀어헤쳐놓고,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 지금도 유용할 것 같은 자신의 노하우 등을 찾아내는 일이다. 어딘가에서 누수되고 있는 자신을 찾아나서야 한다.

167 이제 특수가 보편을 가르쳐줘야 한다. 예를 들자면, 재혼 가정 중에서도 A라는 가정이이런 삶도 있소!’라고 소개해줘야 한다. 즉 그런 특수가 보편이란 문화를 만들고 다양화시켜야 한다. 개별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방향이어야 한다.

174 재혼 가정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시간 개념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재혼 가정을 꾸리면서 과거의 가정과 그 구성원에 매여 있다는 것은 과거를 산다는 것이다. 사람이 오늘을 살기에도 바쁘거늘 뭐하려고 과거까지 질질 끌고다니며 살 것인가?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 가정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함께 사는 것이나 진배없다.

194 과거로부터 내가 왔다고 해서, 과거가 지금의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오늘의 내가규정한다.

209 우리는 다름의 아름다움을 누려야 한다. 세상은 다름으로 구성되었다. 다름이 없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없다. 또한 다름이 없이는표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배울점 및 보완점>

*철학책과 윤리책을 같이 엮은 것 같은 이 책은 구구절절이 옳은 말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식상하게 들릴 때가 있다.

*성공한 재혼사례에 대한 소개가 간간이 있어 좋았다.

*비종교인으로서 이 책에서 쓰는 호칭이나 종교적인 단어등이 심적으로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직업이 목사님이라 이렇게 쓸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거부감이 드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본문을 예화를 들어가며 아주 쉬운 언어로 잘 풀어가고 있다. 최대한 쉽게 이야기하고 설명하려고 한 그의 노력이 돋보인다.

*재혼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썼다. 목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재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이 뜻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하나 찾고 싶다. 아니면 만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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