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에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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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_자전거 포구기행
부제_자전거를 타고 2750Km 전국 포구들을 일주하며 발로 쓴 인생전환 출사표
서문
뚜뚜…, 뱃고동 소리를 들으면 소년의 가슴은 뛰었다. 여행가의 꿈을 간직한 소년은 뒷동산에 올라 부산항에 드나드는 배들과 먼 바다 끝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가 기웃해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소년은 자라서 마도로스가 되었다. 청춘의 세월은 하염없이 바다 위에 띄워졌고 청년이 된 소년은 외로웠다. 마도로스란 낭만일 뿐 하나의 직업전선의 첨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여행가의 꿈을 접고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뭇 사람들이 살아가듯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 사이에서 행복하기를 선택했다.
이제 중년이 된 나에게 소년의 꿈이 다시 찾아왔다. 가족을 먹여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꿈을 실천하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서로 싸웠지만 나는 쉬이 떠나지 못했다. 그 만큼 먹고 사는 문제는 숭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도 올 것이 왔다. 시한부 직장인이 된 나는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그 돌파구란 것이 어이없게도 ‘자전거 포구기행’이었다. 아직은 직장인이니 주말을 이용해 자전거로 전국 해안일주를 하면서 우리 포구들을 여행한다는 생각이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처지에 뭐가 그리 팔자가 좋아 여행을 다 하나?’ 라는 주위의 비아냥거림 속에서도 나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소년의 꿈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못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도로스 시절 내 집 같이 나를 포근하게 맞이하던 포구의 불빛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다. 포구란 항상 어머니의 자궁 같았다. 나의 시원이요 돌아갈 본향 같이 나를 감싸주었다. 선창가의 비릿한 내음이 내게는 마치 고향집 내음 같다. 그래서인지 적어도 달포에 한 번은 바닷바람을 쇠어야 살 것 같았다. 그런 내가 포구기행을 생각해 낸 것은 아마도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하필 자전거를 타고 떠나려 하는 걸까? 자전거를 타면 내 심장과 허벅지의 힘이 자전거의 페달과 체인을 거쳐 자전거 뒷바퀴를 돌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때 나는 자전거 바퀴가 땅을 만지는 촉감을 발과 다리를 거쳐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달릴 때 내 몸과 자전거는 일심동체가 된다.
자전거는 사람이 두 발로 갈 수 있는 곳은 다 갈 수 있다. 지극히 인간친화적이어서 논둑길, 밭둑길, 비포장 산길이건 자갈이 깔린 냇물이건 마다하지 않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자신의 속도와 힘으로 갈 수 있는 이 물건을 어떻게 오토바이나 자동차 따위의 매연덩어리 기계와 견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문명의 이름으로 왔으나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켰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이 오직 굉음과 속도로 우리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도로의 무법자일 뿐이다. 이에 반해 자전거는 양같이 순하며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어떤 소음이나 매연도 없다. 오로지 우리 몸을 태운 힘만으로 나아가며 자연을 우리 가슴으로 데려온다. 바퀴를 통해 대지의 고동을 직접 느끼게 한다. 나와 세계 사이의 간격이 일시에 사라진다. 그 사이의 어떤 모호함, 관념, 추상 같은 알 수 없는 기호의 흔적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오직 명징한 실체만이 가슴으로 와 닿는다. 몸이 먼저 알아챈다. 삶의 진실을, 온 땅에 넘친 이 생명의 약동과 환희를!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지 몇 년 지난 어느 봄날인가 보다. 남한강 강변을 달리는데 갑자기 자전거가 몸에 착 달라붙어 감겨 들더니 내 몸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봄바람은 부드럽게 내 몸을 애무하고 주홍빛 낙조가 제 그림자를 강물에 길게 늘이며 하늘과 강이 온통 노을 빛 속으로 잠겨 드는 때었다. 이 때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구름에 달 가듯이 자전거로 노을 속을 달리는 저 이가 사람인가 신선인가 했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자유롭고 자연스러웠다는 말이다. 그때 나는 벼락같이 깨우쳤다. 아, 나란 인간은 자전거를 타고 살아야 할 팔자인가 보다고.
오래 전부터 인생의 터닝포인트, 즉 인생전환이란 나의 화두였다. 태풍이 한 번씩 바다 밑을 뒤집어 엎어 주어야 벌교 꼬막이 씨알이 굵어지듯이 내 인생도 한 번은 갈아엎어야 할 필요성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랜 직장생활로 내 정신은 야성을 잃어버렸다. 우리를 나와 홀로 살아갈 것이 두려운 동물 같았다. 머지않아 우리를 나와야 하는 나로서 홀로서기를 위한 나만의 의식이 절박했다. 40년을 산 솔개가 제 손으로 무디어진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뽑고 새로운 몸으로 소생하듯이 나도 50년 묵은 고루한 생각과 길들여진 생활방식을 버리고 완전 새로워진 나로 거듭날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이 일은 실제로 자신을 한 번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신고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통과의례로 택한 것이‘자전거 포구기행’이라면 너무 사치스러운가? 나는 자전거 여행을 통해 나를 엄습하는 일련의 두려움과 맞짱뜨려 했다. 마약과도 같은 월급에 대한 미련, 월급 없이 먹고 살 일에 대한 걱정, 홀로 가는 길의 외로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등. 두 번째 인생은 다시는 매여 살지 않을 것이다. 더 자유롭고 자연스러우며 신명 나고 더욱 창조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은 생략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다.
일생에 한 번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을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2765km, 우리나라 해안 포구들을 자전거로 일주하며 인생전환의 출사표로 삼고자 했다. 몸이 말해 주었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으로 단련된 허벅지는 거선의 엔진과 같이 힘있고, 무얼 먹어도 그대로 녹여버리는 위는 마치 용광로와 같아졌다. 달라진 몸은 달라진 정신을 불러왔다. 이처럼 몸을 강화시키는 자전거 여행은 몸을 통한 구도의 길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대에게 자신 있게 외친다. 일단 자전거를 타고 여행길에 오르라, 그대의 삶은 신명으로 춤추게 될 것이다. 낯선 시각의 시인이 되어 시들한 일상을 전복하라. 위기는 기회가 되고 인생 최고의 반전을 맞이할 것이라고.
광활한 갯가에 갈대밭이 파도처럼 눈앞에 밀려왔다. 수로 둔덕 갈밭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아득한 길."아!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다니..." 저 길을 따라가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격에 싸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펼쳐진 풍경에 압도당했다. 인천 소래포구에서 물왕저수지를 잇는 자전거 길을 가다가 마주친 내 피를 멈추게 했던 유레카의 순간이었다. 나는 이 때 정말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맞아, 앞으로의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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