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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6일 10시 33분 등록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보며

 

2015.1.25

10 찰나 연구원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남자 동료가 인천 어린이집 동영상 봤냐고 물었다. 무슨 동영상 했는데 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가 김치를 먹었다고 아이를 때렸는데 아이는 맞아서 날아가고, 주변의 아이들은 갑자기 조용히 앉아 있는 CCTV장면이었다. 그것을 뉴스에서는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뉴스들을 하나씩 접할 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가 나의 아이라면? 그래서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얘기한것이었는데 나는 아이의 말에 얼마나 귀기울였던가? 그저 달래서 어린이집에 보내거나 안되면 야단쳐서라도 보내야 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 CCTV 있는데도 이랬는데 CCTV 없는 세상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해보니 왠지 더 깊이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냥 상상하기가 싫었다

어렸을 어린이집을 유난히 가기 싫어했던 아이.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이집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때는 어린이집 문제보다는 아이가 적응하는데는 어려워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어린이집 갈 나이때는 엄마와 아이의 유착관계로 떨어지기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다. 그리고 4살까지 어린이집을 안가다 5 되어서 가니 많은 아이들과 지내는 것을 낯설어했고, 그동안 어린이집을 다녔던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는 행동이 조금 느렸다. 남자아이다 보니 말의 표현을 세세하게 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5 아이가 상황을 설명 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문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고, 선생님과도 상의를 해보았지만 다른 문제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이런 일을 선생님이 했다면 과연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속이 답답해온다.

하지만 아이들도 기억 못하고 이미 커버린 아이들에게 무엇을 얘기할 있고, 돌이킬 있는게 있겠는가? 어렸을 어떤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을지 모르지만 그저 지금 이대로 건강하게 자란것에 면으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요즘에도 뉴스를 볼때마다 아이가 유괴되었거나 성폭행 당했거나, 외국에서 유모가 아이를 보다가 아이를 집어 던지는 CCTV 장면등 아이와 관련된 끔찍한 기사를 볼때마다 가슴이 철컥 내려앉는다. 그러면서 가끔 생각을 해본다. 만약 이런 일이 우리 아이들에게 생긴다면 어떡하지? 일하고 있어서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어떡하지? 아이에게 부모로서 무엇을 얘기를 있을까? 아직은 아이한테는 엄마가 필요한데 이러고 있어도 괜찮을까? 답도 없는 질문의 늪속에 계속 빠져들게 되면서 자책하게 된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도 마음 한편 쌓아둔 아이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은 계속 나를 억누르게 된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아이들이 크면서 문제 상황에 대해서 얘기를 있고, 아이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볼 있으니 그나마 아이를 이해하고 문제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어린이집, 유치원.

의무교육이 아니지만 이미 아이들은 의무교육처럼 다니고, 사교육화 되어 버린 세상에서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어린아이들을 돌 봐줄 수 있는 곳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른 대안이 없다. 교육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라에 살고, 내가 집에서 홈스쿨링을 하지 않는 다른 대안이 없기에 아이들을 보내야 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는지, 하루 종일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돌아와서는 어떤지 아이들의 상황을 제대로 있는 시간이 없었다. 퇴근하면 아이들과 잠시 놀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간다. 그러기에 그저 마음으로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적응해서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선생님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지내요. 아무 문제없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마치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이냥 바로 생각하는 나쁜 버릇 때문에 아이가 없이 크기를 기대했다. 아이와 문제를 분리해야 하는데 아이가 어릴때는 그것이 쉽게 되지 않았다. 아이문제는 아이 문제고 엄마문제는 엄마 문제인데, 덩어리로 뭉쳐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진짜 문제인가? 아이는 아직 세상을 접하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어쩌면 더 당연한 일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집단속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아주 이상한 잣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보려고 하기보다는 집단이 정해진 규율을 보고, 그 속에 아이가 제대로 맞는가를 보고 있었다. 아이가 어릴때는 아이에 보다 집중해야 하는데 아이가 어릴때고 자랄때고 같은 기준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엄마도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해진것이다.

한면으로는 아이가 아빠한테 야단을 맞고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내가 혼나는 같았다. 아이가 잘못해서 아빠가 야단치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중간에서 중재를 얼른 하려고 하거나 아이를 두둔하는 일들이 생겼다. 누군가 혼나거나 맞고 있거나 옆에서 도와주지 못하면 괜히 마음에 걸렸다. 특히 아이들 문제에 관련되어서는 더 그렇다. 아이를 괴롭히거나 힘들게하면 모성 본능이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것 같았다. 아빠는 아이가 잘못했다고 혼내고 엄마는 괜찮다고 하면서 상황을 조기 마무리 하려고 하니 아이는 아이대로 어느 장단에 맞추는 것이 맞는것인지 혼선이 오고 아빠는 나의 중재를 별로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일들이 생겼다.

왜 내가 이런 상황들을 싫어할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유를 잘 찾지 못했다. 그러다 John Bradshow의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라는 책을 보면서 나의 내면아이와 만났다. 그리고 나의 감정을 계속 지켜보았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구나, 좋으면 좋아하는 구나 하면서 내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들을 지켜보았다. 내면아이를 통해서 어린시절의 나와 만났다.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있었는데 어린 나는 엄마를 도와 줄수가 없었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면 엄마의 얼굴에는 멍이 들었다. 그래서 힘이 센 강자가 힘이 약한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보면 참기가 어려웠다. 멍든 엄마의 모습을 보면 늘 마음에 걸렸고 학교에 가는 날은 우울했다. 그래서 슬픈 나의 감정을 표현하기가 싫어서 괜히 더 기쁜 척을 했다. 나의 표정은 나의 감정과는 반대로 표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슬프거나 우울해서 울면 오히려 어른들한테 더 혼나거나 아이들의 놀림이 되었다. “울면 안돼 ~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신데노래처럼 우는것은 인정받지 못했다. 입사해서도 여자들은 울음이 많다고 일하는데 우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고 책이든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감정과 표현은 분리되고 있는지도 모르채 서로 멀어져 가고, 힘들고 불편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것은 늘 표현하기 어렵고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아이의 문제와 나의 문제를 조금씩 분리해보기 시작했다. 아이가 잘못해서 아빠한테 야단을 맞고 있을 때 마음속에서는 가서 말리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듣고 참고 있는 것이 힘들었지만 견뎌보았다. 불편한 상황들을 여러 번 넘겨보다 보니 조금씩 문제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친정 엄마의 관점에서 친정아빠를 보았는데 친정아빠의 관점에서 친정엄마를 다시 돌아보았다. 친정 엄마도 친정아빠를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그 때 그 상황이 어쩌면 엄마가 아빠를 화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평소에 폭력을 쓰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런 것을 보면 아빠도 참다가 그렇게 폭발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들었다. 아빠에 대해서도 복잡한 감정이 많지만 엄마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빠의 문제를 분리해보니 한면으로는 상황들이 이해가 갔다.    

무조건 싸우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 살다보면 싸우는 일도 있는것인데, 무조건 싸우면 나쁘다고 생각해서 얼른 어떻게든 긴장 상황을 마무리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으로 생각하는 획일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문제속에서 다시 한번 멈춰보고 다른 관점으로도 바라보는 노력들을 해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세상에 나갈 준비가 안되어 있기에 세상을 살다보면서 겪는 문제들에 대해서 아이를 나무랄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늘 어른인 나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고 아이를 뭐라했는데, 이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다시 한번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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