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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6일 10시 53분 등록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돌베게


2015. 1.  26.


1. 저자에 대하여


중복 생략


2.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9p.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정신의 영역에 대하여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1p. 겨울의 싸늘한 냉기 속에서 나는 나의 숨결로 나를 데우며 봄을 기다린다. 


22p.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한번도 보지 않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까닭도 바로 사랑은 생활을 통하여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또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랑도 그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처럼 쓸데없는 말은 없다.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문화는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여야 하며 문명은 이를 손상함이 없어야 한다. 


23p.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가장 불리하고 약한 입장에서 가장 필요불가결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수인들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다음어진 용기와 인내와 지구력...... 이것이 곧 수인의 재산인 것이다. 


일광욕 시간에 양지쪽에서 푸른 하늘을 넋을 놓고 보다가 붉은 벽돌담 밑에 피어 있는 흰 꽃잎의 코스모스 한 송이를 따왔다. 줄기에, 씹던 껌을 붕대처럼 감아서 벽에다 붙여놓았다.


24p.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퇴화한 집오리의 한유보다는 무익조의 비상하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훨씬 훌륭한 자세이다. 


투장은 그것을 멀리서 맴돌면서 볼 때에는 무척 두려운 것이지만 막상 맞붙어 씨름할 때에는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창조의 쾌감 같은 희열을 안겨주는 것이다. 


25p. 그야말로 장을 ‘보러’가는 것이다. (......) 새 옷들을 꺼내 입고 고무신까지 걸레로 잘 닦아서 아침 일직 길들을 나선다. 그래서는 고작 물이 진 생선 몇 마리를 들고 돌아오지만, 저마다 제법 푸짐한 견문들을 안고 돌아오는 것이다. 


26p. 농촌의 노인들이 도회지에 가면 전부 환자가 된다. 그것은 교통사고로 아스팔트 위에서 부상을 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골에서는 질병이 인내되는 데에 반하여 도회지에서는 치료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 사람들은 흡사 초목 같다. 어려서는 푸성귀를 솎아내듯 약한 놈들을 솎아버리고 늙어서는 수목처럼 모든 질환의 고통으로부터 감각의 문을 닫아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28p. 그러므로 고독의 문제는 바로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의 소외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 현대인들이 겪는 고독 역시 생산과 분배의 불균형에 비롯되는 것이다. 좋은 관점이다. 고독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느끼는) 것이다.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에서 기인한 유대감의 상실에서 고독은 비롯된다. 사람 ‘人’은 서로 기대고 산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현대인들의 지독한 고독은 결국 ‘유대감’의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에 기인한다. 생산은 없는데 소비는 많은 것이다. 사랑, 헌신, 배려, 공감, 예의, 정의 등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가치들을 동양철학에서는 ‘인의예지신’으로 수렴하였다.


47p.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49p. 슬픔이나 비극을 인내하고 위로해주는 기쁨, 작은 기쁨에 대한 확신을 갖는 까닭도, 진정한 기쁨은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약 물에서 오는 것이라면 작은 기쁨에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렵겠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믿어도 좋다. 수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이 글이 왜 이다지도 안타깝고 슬픈 것일까.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온다는 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


60p. 고독한 상태는 일종의 버려진 상태입니다. 스스로 나아간 상태와는 동일한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창조의 산실’로서 고독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고독은 무엇을 창조할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처하고 있는 이 어두운 옥방의 고독이 창조의 산실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찬란한 햇빛 아래 산과 들과 숲과, 건물과......모든 것이 저마다 생동하는 우람한 합창 속에서 내가 지키고 있는 이 고독한 자리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도대체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인가. 고독은 고독 그것만으로도 가까스로 한 짐일 뿐 무엇을 창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이 고독을 깨뜨리지 않고는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우렁찬 저 햇빛 찬란한 합창을 향하여 문 열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65p.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70p. 형님에 관한 기억 중에서 우선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를테면 저와 형님과의 관계도, 다른 대부분의 형제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대화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비록 애정과 이해의 기초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하나의 미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창의와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대화는 인간관계의 정체를 가져오며 인간관계의 정체는 관계 그 자체의 퇴화를 가져오며 필경은 양 당사자에게 오히려 부담과 질곡만을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73p. 그렇더라도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좀 다른 내용의 편지를 받고 싶습니다. 예하면 근간에 읽으신 서․문에 관한 소견이라든가 최근에 겪으신 생활 주변의 이야기라든가 하는 그런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염려의 편지’가 ‘대화의 편지’로 바뀌어 진다면 저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아버님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4p. 그러나 이러한 가난과 고생이 진정의 대상이 아니라 해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한국 고전시도 단지 음풍영월에만 멎지 않고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 자연에 대한 인간의 협동, 즉 인간관계(사회)를 올바르게 세워나가는 역사적 노력에 의당 한 팔 거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외면해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6p. 하기는 평소에도 독서보다는 사색에 더 맘을 두고 지식을 넓히는 공부보다는 생각을 높이는 노력에 더 힘쓰고 있습니다. 은하의 물결 속 드높은 별떨기처럼……. 


77p. 당시의 사회구조가 가지는 필연적 한계를 늘 그것의 인식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 아버지의 집필에 관하여 저자가 당부하는 말인데 아버지께 다소 도전적이고 직설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속 내용을 좀 더 알아봐야 할 듯 하다. 그러나 이 편지 전문은 집필이나 다른 글을 쓸 때도 참고할 만 하다.


85p.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 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 하여야 사무사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86p. ‘아름답다’는 것은 ‘알 만하다’는 숙지, 가지의 뜻이다.


95p. 하늘의 비행기가 속력에 의하여 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생활에 지향과 속력이 없으면 생활의 제측면이 일관되게 정돈될 수가 없음은 물론, 자신의 역량마저 금방 풍화되어 무력해지는 법입니다.

-> 자건거의 두 바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끊이 없이 저어야 한다. 잠시라도 패달을 굴리지 않으면 이내 넘어지고 만다. 


97p. 겨울이 또 다가오고 있지만 이곳의 저희들은 여전히 건강합니다. 다만 여전한 생활속에 여전한 내용이 담기면 담긴 채 굳을까 걱정입니다. 고인 물, 정돈된 물, 그러나 썩기 쉬운 물, 명경같이 맑은 물, 얼굴이 보이는 물, 그러나 작은 돌에도 깨어지는 물입니다.


102p.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대상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人과 人 間의 그 뜨거운 ‘연계’위에 서고자 합니다.


105p. 10년. 저는 맣은 것을 잃고, 또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버린다는 것은 상추를 솎아내는, 더 큰 것을 키우는 손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111p. 종이 위를 지날 때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 - 기계와 기계의 틈새에 끼인 문명의 비명 같은 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달려들 듯 다가오는 그 자극성의 냄새가 좋지 않습니다.


116p. 가을이라 옥창에 걸리는 달도 밤마다 둥글게 자랍니다. 가을은 ‘글 읽던 밤에 달이 떠 있는 우물물을 깨뜨리고 정갈하고 시원한 냉수를 뜨며’ 잠시 시름을 쉬고 싶은 계절입니다.


128p. 우리 방 창문 턱에 개미가 물어다 놓았는지 풀씨 한 알 싹이 나더니 어느새 한 뼘도 넘는 키를 흔들며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30p. 그래도 저는 겨울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울의 추위가 아니라 그 추위가 수행해내는 그 ‘역할’입니다. 최후의 한 잎마저 떨어버린 겨울의 수목이 그 근간만으로 뚜렷이 바람 속에 서고, 모든 형태의 소유와 의상을 벗어버린 징역살이는 마치 물신성이 척결된 논리처럼 우리의 사고를 간단명료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겨울에는 자칫하면 주변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제 한 몸의 문제에 문 닫고 들어앉아 침거해버릴 위험도 없지 않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소유욕이며 추락입니다. 그러므로 겨울이 돌아오면 스스로 문을 열고 북풍 속에 섬으로써만이 ‘동굴의 우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33p.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고 우리의 것은 항상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고의 식민성’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직도 자국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 지금은 ‘노인’마저 급속히 없어져가고 있는 풍토입니다.


135p. 목적과 수단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로 파악하고, 목적에 이르는 첩경이나 능률적인 방편을 찾기에 연연하지 않고, 비록 높은 벼랑일지라도 마주 대하고 서는 그 대결의 의지는 그 막힌 듯한 우직함이 벌써 하나의 훌륭한 건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붙들고 일어날 수는 없고 어차피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듯” 지족과 평정을 얻기 위하여 다름아닌 지족과 평정을 닦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굵고 큼직한 사고야말로 그 속에 가장 견고한 건강이 자리잡고 있을 알 듯합니다. 


138p. 기쁨과 마친가지로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 쉬운 이치를 생활으리 골목골목마다에서 확인하면서 여름 나무처럼 언제나 크는 사람을 배우려 합니다.


139p. 대개의 책은 샐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무나 흰 손에 의하여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객관적 관조와 지적 여과를 거쳐 현장인들의 체험에 붙어다니기 쉬운 경험의 일면성, 특수성, 우연성 등의 주관적 측면을 지양하여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체계적 지식으로 정리되기는커녕, 집필자 개인의 관심이나 이해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리거나, 전문분야라는 이름 아래 지엽말단을 번다하게 과장하여 근본을 흐려놓기 일쑤입니다.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 믿습니다.


153p. 주전자의 물을 앉아서 받아마시는 이 작은 꽃나무는 역시 땅을 읽은 연약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저는 이 작은 일로 하여 실로 귀중한 뜻을 깨달았습니다. 창문턱에서 내려와 쓰레기통 옆의 잊혀진 자리에서 꽃나무는 저 혼자의 힘으로 힘차게 팔을 뻗고 일어서 있었습니다. 단단히 주먹쥔 봉오리가 그 속에 빛나는 꽃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58p. 망치가 가벼워 못이 튈까 조심하고, 여름이 시원하여 겨울이 추울까 염려하다가도 계란을 보고 새벽을 묻는 조급함에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어쨌든 달력의 가을 풍경을 보고 이내 겨울옷을 꺼내는 것을 지혜라 일컫기에는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161p. 가까이 국화 한 송이 없어도 가을은 다만 높은 하늘 하나만으로도 일상의 비좁은 생각의 궤적을 일탈하여 창공 높은 곳에서 자신의 조소를 조감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사과장수는 사과나무가 아니면서 사과를 팔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정직한 말을 파는 세로에서, 발파멱월, 강물을 헤쳐서 달을 찾고, 우산을 먼조 보고 비를 나중에 보는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지는 계절-남들의 세상에 세들어 살 듯 낮게 살아돈 사람들 틈자구니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가을이면 먼저 어리석은 지혜의 껍질들은 낙엽처럼 떨고 싶습니다. 군자여향, 종소리처럼 묻는 말에 대답하며 빈 몸으로 서고 싶습니다.


162p. 사람들은 누구나 거미줄같이 수많은 관계 속에 서지 않을 수 없고 보면 ‘관계는 존재’라는 명제의 적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라는 느낌은 관념적으로만 가능한 정신의 일시적 함정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65p. 저는 궁정인들의 고급한 아취보다는, 천자문의 절반인 ‘지게 호’ ‘봉할 봉’ 까지만 외우시는 어머님께서 목청 가다듬고 두루마리 제문을 읽으실 때, 옆에 둘러앉아서 공감하시던 숙모님들, 먼 친척 아주머니들처럼 순박한 농부와 누항의 체취가 배인,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나도 쓰면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수수한 글씨를 쓰고 싶습니다.


166p. 도시가 문명의 중심임은 사실이지만 문명 가운데에는 그 필요는 사라지고 전통만 남아 도리어 적응과 굴종을 요구하는, 사람이 그것을 위해 복무하는 그런 문명도 없지 않습니다.


169p. 겪은 일, 읽은 글, 만난 인정, 들은 사정...밤의 긴 터널 속에서 여과된 어제의 역사들이 내 상각의 서가에 가지런히 정돈되는 시간입니다.


174p.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으로써 “쓰임”으로 삼는 지혜, 그 여백 있는 생각, 그 유원한 경지가 부럽습니다. ... 전형적인 인간을 찾는 것은, 없는 것을 찾는 것이 됩니다.


187p. 글씨도 그 속에 인생이 들어 있는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어떤 때는 글씨의 어려움을 알기 위해서 글씨를 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188p.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191p.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교로 흘러 아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고가 되어 답보하기 쉽다고 생각됩니다. 


우차가 나아가지 않으면 소를 때리겠느냐 바퀴를 때리겠느냐? 는 우문이 때로는 우리를 깨우치는 귀중한 물음이 되듯이, 본말을 전도하고 선후를 그르치는 것은 거개가 졸속한 욕심에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97p. 어느 목공의 귀재가 나무로 새를 깎아 하늘에 날렸는데 사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교한 극한 솜씨가 우리의 생활에 보태는 도움에 있어서는 수레의 바퀴를 짜는 한 평범한 목수를 따르지 못함을 물론입니다. 

-> 사진은 무위한 내게 생산의 기쁨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생산을 멈추지 않으신다. 나는 여직 소비만 했지 뭐하나 생산하지 못하였다. 머릿속에 집어넣어 놓은 것들은 어디다 쓰는 것인가?


200p. 우리와 우리 이웃들의 헝클어진 생활 속 깊숙이 찾아와서 다듬고 여미고 북돋우는 그런 봄이 아니면 ‘4월도 껍데기’일 뿐 진정한 봄은 못되는 것입니다.


215p. 몇 장의 깨끗하게 쓰지 못한 공책장을 찢어내면, 그만큼의 새 공책장도 따라 떨어져 나갑니다.


217p. 생활 주변의 일상적인 사례와 서민적인 언어로 나타나는 소위 예술적 형상확 ㅏ이루어진 상태를 가히 최고의 형태로 치고 싶습니다.


219p. 화폐가 중간에 들면, 쌀이 남고 소금이 부족한 사람과, 소금이 남고 쌀이 부족한 사람이 서로 만나지 않더라도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천 갈래 만 갈래 분업과 거대한 조직,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물신성은 사람들의 만남을 멀리 떼어놓기 때문에 ‘함께’ 살아간다는 뜻을 깨닫기 어렵게 합니다.


227p. 그 처지가 먼저이고 그 마음이 나중이고 보면 마음은 크게는 그 처지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입니다.


244p.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255p. 불편부당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데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 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88p. 타인의 결함이 자기의 결함을 구제해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그 결함에서 먼저 인식하여 비슷한 것이라도 발견되면 서둘러 안도의 심정이 되는 것은 남은 고사하고 자기자신의 성장을 가로막는 고약한 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296p.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으려 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으려 하는 마음의 가난 ...


297p.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313p.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321p. 농사일은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노동입니다. 일의 선후가 있고,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생명인 이를테면 볍씨의 일생이면서 그 우주입니다. 부품을 분업 생산하여 조립 완성하는 공업노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 요컨대 젊은이들은 노동을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라고 새악하고 있습니다. 이 점 노동을 생산으로 인식하는 노인들의 사고와 정면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공업노동, 분업노동의 경험은, 더욱이 상품생산, 피고용노동인 경우 노동이 이룩해내는 생산물에 대한 총합적인 가치 인식을 가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준다는 인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하등의신뢰나 실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젊은이들이 도회지에 나가서 잃는 것.


324p. 남을 도울 힘이 없으면서 남의 고충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 아픔에 그치지 않고 무슨 경우에 어긋난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도운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빈손으로 앉아 다만 귀를 크게 갖는다는 것이 과연 비를 함께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도울 능력은 있되 만남이 없는 관계와 만남이 있되 도울 힘이 없는 관계에 대하여 그날 밤 늦도록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의 의미에 관하여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만 그때의 아픈 기억만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326p.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중의 형벌입니다.


392p. 싸움은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게 나누어서 미리미리 작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 파국을 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키워드]


성찰, 단련, 교도소, 삶, 편지


[내용요약]


선생의 20년 감옥생활동안 쓰신 편지글을 모아 엮었다. 차분하지만 견고한 선생의 성품을 그대로 빼닮은 글들이다.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매번 처음 읽는 듯 뜻이 새롭게 새겨진다. 글에 맺힌 깊은 사고의 힘 때문일 것이다. 고전에서 읽어내는 되새김의 깊은 맛을 선생의 글에서 느낄 수 있다. 다시 읽기로 리뷰의 밀도를 더할 것이다.


[차별성]


단락이 짧아 읽기 쉽다. 서간문이 가지는 특징이다.

한 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쓰기 위해 저자는 한달을 고심하고 머릿속에서 정리에 정리를 거듭했다고 한다. 


알알이 베어있는 깊은 성찰의 기록. 잠언을 엮어놓은 듯 하다.


20년 사색과 성찰의 기록이다. 그것도 세상 가장 밑바닥 ‘감옥’에서 단련된 것임에야 ...


1969년 선생과 1988년 선생은 편지에서도 많이 달라져 있다.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그의 정신이 부드러움과 따뜻함까지 더해간다. 무겁고 딱딱한 글들이 숙지고 부드럽고 따뜻해진다. 은유는 깊고, 단어는 쉽다. 시선도 자신의 내면에서 주변으로 따뜻하게 전이되었다. 뒤로 갈수록 우람한 글이 드물다. 배껴 쓸 글이 줄어들어 좋다.


형수님과 계수님께 이토록 많은 편지를 쓰신 까닭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철저히 격리된 제소자들의 삶을 기웃거려 볼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편지의 상대방(부모님, 형수님, 계수님)의 편지가 간간히 섞여있어도 좋았을까?


어떤 글들은 단락 전체에 별표를 했지만 한문장도 옮겨 적지 못했다. 예를 들면 ‘세들어 사는 인생_317p.’


[감동적인 장과 절]


135p. 목적과 수단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로 파악하고, 목적에 이르는 첩경이나 능률적인 방편을 찾기에 연연하지 않고, 비록 높은 벼랑일지라도 마주 대하고 서는 그 대결의 의지는 그 막힌 듯한 우직함이 벌써 하나의 훌륭한 건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붙들고 일어날 수는 없고 어차피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듯” 지족과 평정을 얻기 위하여 다름아닌 지족과 평정을 닦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굵고 큼직한 사고야말로 그 속에 가장 견고한 건강이 자리잡고 있을 알 듯합니다. 


139p. 대개의 책은 샐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무나 흰 손에 의하여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객관적 관조와 지적 여과를 거쳐 현장인들의 체험에 붙어다니기 쉬운 경험의 일면성, 특수성, 우연성 등의 주관적 측면을 지양하여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체계적 지식으로 정리되기는커녕, 집필자 개인의 관심이나 이해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리거나, 전문분야라는 이름 아래 지엽말단을 번다하게 과장하여 근본을 흐려놓기 일쑤입니다.


188p.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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