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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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
복효근
벼 베고 볏짚 거두어 간 자리 그루터기에 새순이 솟는다
다시 이 새싹에서 이삭이 나와 벼알이 맺힐까
찬 서리 내릴 날도 머지않아서
잎이건 풀이건 모두 시들어 주저앉는데
끝났다고 하여도
끝이 뻔하다 하여도
끝까지 가보겠다는
끝을 보겠다는
갈 데까지는 가보고 말겠다는 오기 창창
저것을 버티는 힘은,
지난날의 밑동부터 잘라 떠나보냈고 눈서리 칠 내일은 믿지 않으니
그 무엇이 과거도 미래도 아닌
다만 지금 여기
가던 길 그냥 갈 뿐인 쥐뿔같은 현실주의
상록의 소나무나 대나무의
고상하고 관념적인 고훈이 아니다
모름지기 한 번 참수당해본 것의 목에서 솟구치는
서늘한 삿대질,
맥없이 주저앉는 것들에 대한 욕설이다
맹목의 뿌리가 빚어낸 것이 벼가 되고 쌀이 되고
밥이 되었을 것인즉
독한 것일러라 쌀이여 밥이여
나 오늘 그냥 밥 먹고 내 길 간다
빈 논에 철새 한 무리도 볍씨 주어 먹고 간다
제 갈 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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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비장하였다. 마지막 시도 골라 두었다. 마지막 날에 토요일, 날짜도 딱 떨어진다. 며칠 동안 잎사귀를 고이 접고서 잠드는 사랑초처럼 생각을 접고 또 접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시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슨 조화인가. 한번 죽었다 태어났음에도 이 모양인 것에 대한 질책인가, 신의 다독임인가? 나는 무엇에 걸려 넘어져 더 가보겠노라던 각오를 던져버렸나? 아무나 고독과 침묵, 고요에 자신을 담글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그래, 지금은 아무나든 아니든 이것이든 저것이든 맹목적으로 해 보아야 할 때.
영혼은 또 그대에게로 떠나고, 나는 별을 좌표 삼아 지금 여기 오늘 독한 밥 먹고 제 갈 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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