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2663
- 댓글 수 1
- 추천 수 0
맹목
복효근
벼 베고 볏짚 거두어 간 자리 그루터기에 새순이 솟는다
다시 이 새싹에서 이삭이 나와 벼알이 맺힐까
찬 서리 내릴 날도 머지않아서
잎이건 풀이건 모두 시들어 주저앉는데
끝났다고 하여도
끝이 뻔하다 하여도
끝까지 가보겠다는
끝을 보겠다는
갈 데까지는 가보고 말겠다는 오기 창창
저것을 버티는 힘은,
지난날의 밑동부터 잘라 떠나보냈고 눈서리 칠 내일은 믿지 않으니
그 무엇이 과거도 미래도 아닌
다만 지금 여기
가던 길 그냥 갈 뿐인 쥐뿔같은 현실주의
상록의 소나무나 대나무의
고상하고 관념적인 고훈이 아니다
모름지기 한 번 참수당해본 것의 목에서 솟구치는
서늘한 삿대질,
맥없이 주저앉는 것들에 대한 욕설이다
맹목의 뿌리가 빚어낸 것이 벼가 되고 쌀이 되고
밥이 되었을 것인즉
독한 것일러라 쌀이여 밥이여
나 오늘 그냥 밥 먹고 내 길 간다
빈 논에 철새 한 무리도 볍씨 주어 먹고 간다
제 갈 길 간다
-----
내심 비장하였다. 마지막 시도 골라 두었다. 마지막 날에 토요일, 날짜도 딱 떨어진다. 며칠 동안 잎사귀를 고이 접고서 잠드는 사랑초처럼 생각을 접고 또 접었다.
그럼에도 오늘 이 시가 눈에 들어온 것은 무슨 조화인가. 한번 죽었다 태어났음에도 이 모양인 것에 대한 질책인가, 신의 다독임인가? 나는 무엇에 걸려 넘어져 더 가보겠노라던 각오를 던져버렸나? 아무나 고독과 침묵, 고요에 자신을 담글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그래, 지금은 아무나든 아니든 이것이든 저것이든 맹목적으로 해 보아야 할 때.
영혼은 또 그대에게로 떠나고, 나는 별을 좌표 삼아 지금 여기 오늘 독한 밥 먹고 제 갈 길 간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109 | 노력하는 자체가 성공이다 | 빈잔 | 2024.11.14 | 623 |
4108 | 인생을 조각하다. | 빈잔 | 2024.10.26 | 643 |
4107 | 얻는것과 잃어가는 것. | 빈잔 | 2024.11.09 | 658 |
4106 | 눈을 감으면 편하다. [1] | 빈잔 | 2024.10.21 | 685 |
4105 | 돈 없이 오래 사는 것. 병가지고 오래 사는것. 외롭게 오래 사는 것. | 빈잔 | 2024.10.22 | 717 |
4104 | 늙음은 처음 경험하는거다. | 빈잔 | 2024.11.18 | 727 |
4103 | 상선벌악(賞善罰惡) | 빈잔 | 2024.10.21 | 732 |
4102 | 길어진 우리의 삶. | 빈잔 | 2024.08.13 | 738 |
4101 | 문화생활의 기본. [1] | 빈잔 | 2024.06.14 | 933 |
4100 | 선배 노인. (선배 시민) | 빈잔 | 2024.07.17 | 934 |
4099 | 꿈을 향해 간다. [2] | 빈잔 | 2024.06.25 | 1072 |
4098 | 신(新) 노년과 구(舊) 노년의 다름. | 빈잔 | 2023.03.30 | 1509 |
4097 | 가장 자유로운 시간. | 빈잔 | 2023.03.30 | 1511 |
4096 | 나이는 잘못이 없다. | 빈잔 | 2023.01.08 | 1542 |
4095 | 편안함의 유혹은 게으름. | 빈잔 | 2023.04.28 | 1542 |
4094 | 원하는 것(Wants) 과 필요한 것(Needs) | 빈잔 | 2023.04.19 | 1589 |
4093 | 내 삶을 지키기 위한 배움. | 빈잔 | 2022.12.27 | 1644 |
4092 | 변화는 불편하다. | 빈잔 | 2022.10.30 | 1667 |
4091 | 1 % [2] | 백산 | 2007.08.01 | 1700 |
4090 | 정서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 빈잔 | 2023.03.08 | 1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