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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일 20시 59분 등록

“개인들이여, 만물의 척도로 세상의 중심에 서라.”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원제: 현재와 미래 gegenwart und zukunft)

칼 구스타프 융

2015. 2. 1


1. 저자에 대하여


그의 자서전을 읽고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가 말하는 ‘원형’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나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융”에게서 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우선 그의 책들 가운데 좀 쉽겠다 싶은 책들을 샀다.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상징>,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따위의 책들이다. 읽어 가면서 “삶의 태도”를 공공히 할 수 있길 기대한다.


그에 대한 프로필은 이전 리뷰로 대신한다.


2.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글]


“개인들이여, 만물의 척도로 세상의 중심에 서라.”


과연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인가?


내면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인간들 사이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인간의 내면에는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인 또 다른 인격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대게 그것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 그림자를 반대편 사람의내면에서만 본다. 이런 투사가 인간 세상에 온갖 분열을 낳는다.


사람들이 이처럼 대립하게 되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중지향성이다. 한때 만물의 척도로 세상의 중심으로까지 칭송 되엇던 인간 개개인이 이런 식으로 사회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큰 숫자에 휘둘리는 인간 심리와 통계적 진리를 강조하는 과학적 합리주의 때문이다.


각 개인은 대중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1.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처한 곤경]


12p.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미래를 걱정과 희망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때는 주로 육체적, 정치적, 경제적 또는 정신적 고민에 처해있을 때였다. 


14p. 대체로 보면, 정치적인 집단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이성과 비판적 반성이라는 재능은 더 심하게 동요한다. 대중은 개인이라면 가능했을 수도 있는 통찰과 반성을 짓밟아 버린다.


16p. 그들의 심리상태는 감정에 치우친 판단과 터무니 없는 공상에 의해 집단적으로 훙분된 사람들의 심리상태와 비슷하다. 그 사람들은 “집단적 사로잡힘”의 상태에 나름대로 적응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그 상태에서 상당히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 요즘 세태와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집단적 사로잡힘”이라는 한마디에 설명이 된다. 


18p.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지식과 자신의 의식적인 에고의 성격에 관한 지식을 혼동하고 있다. 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당연히 자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고는 오직 의식 안의 내용물만을 알 뿐이다. 무의식과 그 무의식에 담긴 내용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같은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는 평균적인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지신의 자기 지식을 측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정신적 사실들까지 알려고 들지는 않는 것이다.


21p. 경험에 근거한 이론이면 어떤 것이든 반드시 통계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상적인 평균을 공식화한 이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이상적인 평균은 그 척도의 양쪽 끝에 있는 모든 예외들을 배제하고 그것들을 추상적인 평균으로 대체해 버린다. 그런데 이 추상적인 평균이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문제이다. 현실 속에서는 그 평균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런 사실에도 부구하고 추상적인 평균은 이론에서 공격 불가능한 근본적인 사실로 통한다. 반면 척도의 양쪽 끝에 있는 예외들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 통계적 방법은 이상적인 평균이라는 측면에선 사실들은 보여주지만, 경험적 현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그림도 제시하지 못한다. ... 그러나 진정한 사실들이 특별한 점은 그 사실들의 개별적 특성에 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현실의 진정한 그림은 그 규칙의 예외들만으로 이뤄져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인 현실은 불규칙성을 압도적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 말하자면 하나의 상대적인 예외이자 하나의 비규칙적인 현상인 한 사람의 개인이 자기지식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똑같은 하나의 단위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최종적인 분석에서도 끝내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 또한 다른 어떠한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존재로 말이다.


26p. 심리치료사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모순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자신이 과학적 훈련을 통해 얻는 통계적 진리로 무장해야 하는 한편으로, 특히 심리적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를 다루는 경우엔 ‘개인적 이해’를 필요로 하는 한 개인으로도 다룰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모든 전문가들이 뼈에 새겨야 할 말이다. 내 일과 행동과 말들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이 말은 언제나 해당된다.


29p. 유일하게 ‘진짜’삶인 개인적 삶의 목표와 의미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발전에 있지 않고 국가의 정책에 있게 된다. ... 개인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도덕적 결정권을 점점 더 많이 박탈당하고, 그 대신에 하나의 사회적 단위로 통치를 받고 의식주를 제공받고 교육을 받으며 또한 대중에게 쾌락과 만족을 안겨주는 기준에 따라 즐거워하게 된다.

>> 여기서 국가는 ‘조직의 상징’으로 이해해도 좋겠다.


32p. 심리적으로 대중을 지향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하나가 바로 과학적 합리주의이다. 이 과학적 합리주의가 개인들로부터 그들의 토대와 존엄을 앗아버린다. 하나의 사회적 단위로서 개인은 자신의 개성을 상실하고 통계국의 추상적인 숫자로 전락하고 만다. 개인은 중요성이 거의 없는, 상호 교체 가능한 하나의 단위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다.


34p. 만일 개인이 무력감과 무능감에 압도당한 나머지 자신의 삶이 의미를 잃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국가에 예속되는 과정에 있으며 자신이 알지 못하거나 원하지 않은 가운데 국가를 신봉하는 사람이 되고 있는 중이다.


34p. 개인의 특성이 무가치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 어떤 대중 조직도 개인의 특성을 대표하거나 구체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35p. 이런 식으로 개인은 더욱더 사회의 한 부품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이 부품화가 각 개인에게서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빼앗아버린다.


[2. 대중 지향성에 대한 평형추로서의 종교]


38p. 종교는 경험의 비이성적인 사실들에 대한 의지와 복종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의 비이성적인 사실들은 사회적, 육체적 조건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개인의 심리적 태도와 훨씬 더 관계가 깊다.

>>삶의 어떤 준거점, 개인의 판단력과 결정권을 행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종교는 개인들이 각자 직면하고 있는 명백하고 불가피한 환경의 힘들에 맞서 싸우도록 돕는 말하자면 일종의 지원군이 되어 준다.


41p. 신념은 세속적인 현실과의 타협이다.


45p. 제아무리 고매한 도덕적 원칙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자유와 자율의 토대가 되어줄 수는 없으며, 제아무리 전통적인 신념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이다. 유일하게 개인의 자유와 자율에 필요한 토대를 쌓을 수 있는 것은 경험적 인식뿐이다. 즉 인간과 이 세상 밖의 어떤 권위 사이에 극히 개인적이고 호혜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만이 개인의 자유와 자율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 밖에 있는 이 권위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이성”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바로잡아주는 평형추의 역할을 맡는다.


55p. 0을 아무리 많이 더해도 절대로 하나의 단위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똑같이, 하나의 공동체의 가치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정신적 및 도덕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공동체로부터는 그 환경의 암시적인 영향을 능가하는 것은 어떤 것도 기대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개인들의 내면에서 진정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길ㄹ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한 변화들은 오직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개인적 접촉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3. 종교 문제에 대한 서구의 입장]


59p. 국가권력이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그대로 지켜지는 한, 말하자면 훈련이 잘 되고 배불리 먹는 경찰군인들이 출동 탯를 갖추고 잇는 한, 그 국가는 무한히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으며 또한 무한히 권력을 키워갈 수 있다.


65p. 교회의 추종자들 중 많은 이들에게 이 확신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의 내면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고 분별없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믿음은 내면적 경험을 절대로 대체할 수 없다.

>> 상징은 인간의 지식체계 밖에 있는 것이다. 지식체계로 이해될 수 없다.


68p.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교회는 공히 믿음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며 따라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 전자는 신 앞에서의 자유를 제한하고, 후자는 국가 앞에서의 자유를 제한한다. 그리하여 둘 다 개인들을 묻을 무덤을 파고 있다. 양쪽이 각각 물질적 낙원과 영적 낙원의 도래를 약속하고 잇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이라는 연약한 존재는, 말하자면 생명의 독특한 주인공은 양쪽 모두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


72p. 미국과 유럽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물질적이 집단적인 목표이며, 미국과 유럽에 공통적으로 없는 것은 온전한 인간을 표현하고 이해할 바로 그것, 즉 개별적인 인간 존재가 만물의 척도로서 세상의중심에 선다는 사상이다.


73p. 그의 모든 성취와 소유는 그를 더 크게 만들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그를 더 작아지게 만든다. 재화의 공정한 분배라는 원칙 하에서 공장 노동자가 직면하고 있는 운명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4. 개인의 자기이해]


77p. 사람은 해부학과 생리학의 측면에선 스스로를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언어의 재능을 타고났고 또 지각 능력이 있으며 성찰할 주 ㄹ아는 존재로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데 필요한 자질을 모두 결여하고 있다.


85p. 본능을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이런 원형들은 간혹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신비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원형들을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정신의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형들은 지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 원형드의 한 징후를 파괴했다 하더라도 그 원형들은 형태를 바꿔가며 다시 나타난다.


94p. 사회자체가 개성을 잃어버린 개인들로 이뤄져 있는 한, 그 사회는 결국엔 무례한 개인주의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 불행히도 0이 백만 개 모인다 해도 1이 되지 못한다. 종국적으로 모든 것은 개인의 자질에 달려 있다. ... 규범을 잘 따르는 군중이 단 한 사람의 광인의 손아귀에 휘둘리며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통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이 보아왔으면서도 말이다. 

>> 소름이 확 끼치는 통찰이다. 


110p. 당신은 어떤 사람의 신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결국엔 그에게 그 대신에 다른 신을 내놓아야 한다. 대중국가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신격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조잡한 조치가 아직 강제로 취해지지 않은 곳마다, 거기엔 그것 대신에 악마적 힘이 실린 강박적인 요소들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돈이나 일, 정치적 영향이 그런 것이다.

>> 현대 자본이라는 거대한 힘은 신이자 새로운 종교임에 분명하다.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이 힘에 부역한다. 이보다 강력한 신은 없었다.


[5.삶에 대한 철학적 및 심리학적 접근]


130p. 모든 사람의 정신적 기능은 본능적 바탕을 갖고 잇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33p. 인간의 본능 중에서 학습능력만큼 인간을 본래의 모습에서 멀리 벗어나도록 만드는 것은 없다. 이 학습능력이 인간의 행동 양식을 점진적으로 벼놔시킨 원동력인 것으로 드러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조건을 크게 바꿔놓은 것도 바로 이 학습능력이다.

... 그 결과 현대인은 자신을 아는 범위 한에서만 자기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134p. 이 일이 매우 힘들긴 하지만 그 성취에 따르는 이점이 매우 크기 때문에 현대인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망각해 버린다. 자신의 본능적 본성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 대신에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개념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데, 개념의 세계에선 그의 의식적인 활동의 산물들이 현실을 점진적으로 대체하게 된다.

>> ‘알아차림’, ‘깨어있다는 것’은 의식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 본능의 세계를 인정하고 느끼는 것이다. 오늘 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찾아 헤메는 것은 무의식을 희생시키면서 의식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말하자면 학습의 폐해인 것이다. 

>> 본능적인 본질로부터의 분리는 불가피하게 교양 있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의식과 무의식, 시대정신과 천성, 지식과 신앙 간의 충돌을 겪도록 만드는데, 그러다 그의 의식이 본능적인 측면을 더 이상 무시하거나 억누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순간 이 분열이 병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140p. 모든 사람들이 미래의 행복과 불행이 야생동물의 공격에 의해서도 아니고 자연재앙에 의해서도 아니고 세계적 전영병의 위험에 의해서도 아니고 바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의 변화에 의해서만 결정될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오늘날엔 인간의 정신에 관심을 특히 더 많이 쏟아야 한다.


141p. 우리의 세계에서 의식이 황폐해진 이유는 주로 본능의 상실 때문이다.


의식이 주관적인 것과는 밴대로, 무의식은 객관적이다. 무의식은 주로 상반되는 기분과 공상, 감정, 충동과 꿈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144p. ... 그러나 신앙의 자리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종교적 경험이다. 이 경험이 개인의 신앙을 신과의 즉시적인 관계로 승화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과연 종교적 경험을 한 적이 있으며 또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있고, 그리하여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나 자신을 군중 속으로 녹아들지 않도록 지켜줄 확신을 품은 적이 있느가?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개인이 엄격한 자기반성고 자기지식이 요구하는 것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가질 때에만 확실히 나올 수 있다.


[6. 자기지식]


159p. 그러나 만일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악이란 것이 인간의 본성 안에 들어 있다는 깨달음을 더 이상 피하지 않게 된다면, 그러면 악이 선과 반대되는 동격의 파트너로서 심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162p. 그렇기 때문에 그 결실을 낳은 것은 의식적인 노력만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무의식이 사람들에게 거의 감지되지 않을 목표와 의도를 갖고 그 일에 간섭하는 것이다. 만일 무의식이 당신의 손에 무기를 쥐어준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폭력을 목표로 잡고 있다.


171p. 원래 이상주의는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7. 자기지식의 의미]


174p. 우리 시대가 “그림자”이자 정신의 열등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것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지식을 통해, 즉 자신의 영혼의 탐구를 통해 본능과 그 본능의 이미지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정신 안에 어떤 힘들이 잠자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176p. 그러나 각 개인들이 저마다 내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 능력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 변화가 각 개인이 알고 지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향을 미친다는 표현은 설교를 하거나 설득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행위의 본질을 잘 파악하는 가운데 자신의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 환경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180p.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게 분명한 우리 시대의 특성은 우리의 내면에서 변화하고 있는 무의식적인 존재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181p. 행복과 만족, 영혼의 평안, 삶의 의미, 이런 것들은 오직 개인에 의해서만 경험된다.


182p. 나는 지나친 낙관론에도 흥분하지 않고 또한 고매한 이상도 사랑하지 않으며 단지 개인적인 인간 존재의 운명에 관심이 있다. 개인이라는 아주 작은 단위가 이 세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또 이 세상은 바로 그런 개인에 의존하고 있다. 기독교의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읽는다면, 신조차도 개인의 내면 안에서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3. 내가 저자라면


[키워드]


개인과 집단, 유인한 개인, 자기지식, 자기이해, 집단적 사로잡힘, 삶에 대한 접근


[내용요약]


과연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인가? 내면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인간들 사이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인간의 내면에는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인 또 다른 인격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대게 그것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 그림자를 반대편 사람의내면에서만 본다. 이런 투사가 인간 세상에 온갖 분열을 낳는다. 사람들이 이처럼 대립하게 되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중지향성이다. 한때 만물의 척도로 세상의 중심으로까지 칭송 되엇던 인간 개개인이 이런 식으로 사회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큰 숫자에 휘둘리는 인간 심리와 통계적 진리를 강조하는 과학적 합리주의 때문이다. 각 개인은 대중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행복과 만족, 영혼의 평안, 삶의 의미, 이런 것들은 오직 개인에 의해서만 경험된다.


이 책은 <현재와 미래>란 제목으로 1957년 발표되었다. 융은 당시 82세 였다.


[차별성]


짧은 내용이지만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노 학자의 육성 강의를 듣는 듯하다. 책의 구성 역시 강의노트를 보는 것 같다. 어렵고 난해한 이야기들과 요즘 사례로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1957년 발표된 것임을 상기하더라도)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냉전 등에 관한 이야기는 접근을 조금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맥은 현대를 사는 개인과 조직(또는 국가)를 인식하는데 매우 인상적인 통찰을 부여한다.


[감동적인 장과 절]

나머지는 본문에 굵은 글씨체로 표시하였다. 


21p. 경험에 근거한 이론이면 어떤 것이든 반드시 통계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상적인 평균을 공식화한 이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이상적인 평균은 그 척도의 양쪽 끝에 있는 모든 예외들을 배제하고 그것들을 추상적인 평균으로 대체해 버린다. 그런데 이 추상적인 평균이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문제이다. 현실 속에서는 그 평균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런 사실에도 부구하고 추상적인 평균은 이론에서 공격 불가능한 근본적인 사실로 통한다. 반면 척도의 양쪽 끝에 있는 예외들은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 통계적 방법은 이상적인 평균이라는 측면에선 사실들은 보여주지만, 경험적 현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그림도 제시하지 못한다. ... 그러나 진정한 사실들이 특별한 점은 그 사실들의 개별적 특성에 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현실의 진정한 그림은 그 규칙의 예외들만으로 이뤄져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인 현실은 불규칙성을 압도적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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